불의한 시대를 살았던 한 의인의 이야기.
1. 아합은 수도 사마리아 외에 이스르엘에도 왕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값을 주고 팔라고 하는 아합의 요구에 대하여, 나봇은 포도원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기에 팔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2. 아합의 탐욕은 모든 이들의 탐욕이 그렇듯이 채워질 줄 몰랐습니다. 나봇은 이런 아합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나봇은 불신앙의 시대, 우상숭배와 배교의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신실한 남은 의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어두워져 가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남겨두십니다(19:18).
3. 나봇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과 자기에게 주신 ‘기업’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도 물론 왕의 호의를 얻을 기회를 알았을 것이고, 두둑이 땅값을 챙길 수 있는 기회도 알았을 것이고 왕에게 미움을 사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하나님께서 금하신다’고 거절합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타협할 문제이거나 경제적인 유익을 얻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타협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봇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나오자, 유약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왕 아합은 몸져 눕게 됩니다.
4. 상황을 알게 된 이세벨은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도 없이’ 극악한 음모를 꾸미고 이것을 실행에 옮깁니다. 나봇의 성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왕의 도장을 찍어 편지를 보내고, 나봇에 대하여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 증언을 할 사람 둘을 세워, 그 죄목으로 돌로 쳐 죽이라는 지시였습니다.
5. 이세벨의 이 악독한 음모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율법 조항들에 맞추어서 진행시켰다는 것은 놀랍습니다(민35:30; 신17:5~6; 19:15). 하나님의 율법을 빙자하여 악독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왕과 왕의 부인을 더 두려워했던 장로와 귀족들은(나봇과는 다르게), 이세벨의 분부를 수행하여 의인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야 맙니다.
6. 하나님은 엘리야를 명하여 아합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여로보암이나 바아사의 집과 같이 멸하실 것이며, 개들이 시체를 먹음으로 이세벨이 땅에 묻히지도 못할 것을 전합니다. 성경기자는 덧붙이기를,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25)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이세벨의 죄이며, 아합의 죄는 가볍다고 핑계 댈 수는 없습니다. 그는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기’ 때문입니다(26). 누구 때문에 죄를 행했다는 핑계가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 때문에 지은 죄는, 결과적으로 내가 스스로 지은 죄입니다.
7. 이 말을 들은 아합은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였습니다(27). 이것은 분명히 회개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태도를 보시고 재앙을 그의 시대에는 내리지 않고 다음 세대에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9). 먼지만한 회개에도 은혜를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8. 그러나 정말로 진심으로, 아합이 회개했을까요? 그의 이후의 모든 행적을 보건대 그의 회개는 진정한 것이었다고 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인 그의 “겸비함”을 인정해주셔서 심판을 연기해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을 길게 기술하면서, 성경기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무궁하심을 더욱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악한 왕에게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선지자를 보내셨고, 게다가 구약 역사 최고의 선지자라 할 엘리야를 보내주셨고, 참고 참으시면서 기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하나님은 그의 회개와 돌이키심을 기뻐하시지, 그의 멸망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라도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합니다. “가식적인 회개가 그의 집에 심판의 일시 유예를 가져왔다면, 신실한 회개는 그의 집에 의롭다함을 가져왔을 것이다.”
9. 탐욕과 권력(재력)의 위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의 탐욕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 위험합니다. 그 정체를 모른 채, 권력이나 재력을 가지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탐욕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대상입니다(갈5:24). 또한 죄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죄의 유혹들과 타협하고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언지하에 ‘하나님이 금하신다’고 말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나봇이 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나봇은 아합과 앉아서 차를 마시며 오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언지하에 끊어버렸습니다.
10. 나봇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려고 감당한 희생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는 복된 믿음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기업,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손해를 무릅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배로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타협을 시대의 탓으로, 다른 사람의 유혹으로 핑계하고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나봇은 물질적인 이익을 희생하고 통치자의 진노를 감수할 정도로 하나님의 법을 깊이 경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과 같은 불신앙의 시대에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믿음을 지키고자 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믿음을 지켜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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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를 거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아람의 왕 벤하닷을 죽이고, 진멸해야 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조약을 맺고 벤하닷을 살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선지자에게 저주의 말을 듣고 난 후의 일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선지자에게 저주의 말을 듣고 나서 아합 왕의 마음은 근심하고 답답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아합 왕은 어느날 자신의 왕궁 곁에 있었던 포도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포도원은 이스르엘에 사는 나봇이 소유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르엘은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지만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아합은 자신의 왕궁 가까이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을 사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그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아합은 자신의 왕궁 곁에 있는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역으로 보자면 사마리아와 이스르엘은 약 38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아합이 말하는 왕궁은 ‘본궁’이 아니라 ‘별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구입하여 채소 밭을 삼고자 하였는데 여기서 채소 밭은 정원이라는 뜻도 있기에 아합 왕이 별궁 옆에 정원을 꾸미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요구하며 나봇의 포도원 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고 하였고, 나봇이 원한다면 그 값을 돈으로 줄 수 있다고 말하며 제법 합리적인 제안을 합니다. 아합 왕의 요청에 대해 나봇은 답변합니다.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나봇의 답변에서 포도원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아합 왕은 현재 나봇의 포도원을 거래가 가능한 부동산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나봇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포도원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유산으로 정의합니다. 나봇도 자신의 포도원을 부동산으로 간주했다면 이 거래는 수월하게 성사가 되었겠지만 나봇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호와의 유산을 다른 사람에게 판매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이라도 여호와 하나님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은 자신의 요청이 거절당하자 곧바로 반응합니다.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자신의 제안을 거절 당하자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함을 느끼며 침상에 누워 식사까지 거절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합 왕이 얼마나 미숙한 지도자였는지 보여줍니다. 한 나라의 왕이 고작 포도원 하나 얻지 못했다고 식음을 전폐하는 모습은 믿음직한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만을 성취하기 위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였다는 표현은 앞서 열왕기상 20장 43절에서 아합이 여호와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상심했던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 아합 왕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했고, 나봇 역시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땅이기에 포도원을 판매하지 않았기에 아합 왕은 근심하고 답답함을 느낀 것입니다.
아합 왕이 근심하여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소식은 왕궁 일대에 퍼지게 되어 아내 이세벨이 찾아와 자초지종을 물었고, 아합 왕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합니다.
(6)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아합은 아내 이세벨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데 사실과 다르게 전달을 합니다. 분명 나봇은 포도원이 조상의 유산이며, 여호와께서 금하시기 때문에 거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나봇이 단지 자신의 포도원을 판매하지 않은 것처럼만 설명합니다. 이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을 바꾸어 말을 합니다. 마치 선악과 앞에서 여자와 뱀이 대화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여자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으나 여자가 뱀에게 말할 때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말을 바꾸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기가 죽어 있는 남편을 위해 이세벨은 자신이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겠다고 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아합 왕에게 다시 즐겁게 식사를 하라고 말합니다. 이세벨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합니다.
(8-10)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이세벨은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작성하여 이스르엘 성읍에 장로들과 귀족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이름으로 인을 치고 봉했다는 것은 이 편지는 왕명으로 권위가 있는 공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계획은 아주 치밀하여 나봇을 죽이기 위해 불량자까지 섭외하였는데 당시에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하기 위해서는 2-3명은 반드시 있어야 했기에 누가 보아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운 것입니다. 거짓으로 가득찬 이세벨의 계획은 곧바로 실행 됩니다.
(11)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이스르엘 성읍에 살고 있던 장로들과 귀족들은 편지에 써져 있던 내용 그대로 실행하여 나봇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분명 그들은 나봇을 죽이라는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봇은 아합 왕의 제안도 거절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지킬 정도로 신실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당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장로들과 귀족들도 결국 이세벨의 권력에 굴복을 하여 나봇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봇이 이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지만 어떠한 변론을 하였다는 내용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너무 중대한 범죄라고 생각하여 바로 돌로 쳐죽였거나 나봇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따로 변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 모습은 십자가 형을 선고 받고도 아무런 변론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본문에서는 나봇의 죽음만 나오지만 열왕기하 9장 26절에 보면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나봇이 죽으면 그의 아들이 유산을 상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이세벨은 치밀하게 나봇과 더불어 그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아들들까지 살해한 것입니다. 이처럼 욕망에 눈이 멀게 되면 도덕성은 사라지고, 목적을 향해서만 달려가게 됩니다.
나봇이 죽은 후 장로들과 귀족들은 아합 왕이 아니라 이세벨에게 이 소식을 통보했습니다.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받았지만 결국 이 모든 일을 꾸미고 진행한 것이 이세벨인 것을 모두가 알고 있던 것입니다. 소식을 듣게된 이세벨은 기쁜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였고, 아합 왕의 반응이 나타나며 오늘 본문은 마무리 됩니다.
(15-16)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이세벨은 아합 왕이 원하는 것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얻어다 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들은 아합 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주를 받아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나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합 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그 포도원을 차지하러 내려갔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전쟁을 해서 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고작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 땅을 기쁘게 취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 봅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은 아람 군대를 물리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욕망에 눈이 멀어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목숨을 빼앗으면서 차지하였습니다. 우리도 혹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속적 욕망에 눈이 멀어 더 많은 물질을 가지기 위해, 더 높은 자리를 위해 타인을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이세벨의 거짓말을 알고도 눈을 감았던 이스르엘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은 마치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으로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도 혹시 세상의 권력에 굴복하여 나의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에 동화되어 그들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봇이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포도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단지 포도원의 부동산 가치가 높아서 지킨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주었고, 그것을 목숨과 같이 지키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다가 그와 그의 아들들까지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가 나봇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하였겠습니까? 포도원이야 나중에라도 다시 되찾을 수라도 있으니 목숨부터 부지하기 위해서 바로 아합 왕에게 판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나봇은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통로로 살아갔습니다.
나봇이 하나님이 주신 유산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 치고, 말씀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 이기신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합왕을 향한 심판 경고(17-26절)
(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어제 살폈듯이,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는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이스르엘(뜻:하나님이 심으신다)’은 갈릴리 호수 서남쪽에 위치한 산악지대지만, 비옥한 평야였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은 아합의 왕궁(별궁)과 가까웠습니다. 아합왕은 거기에다 채소밭(또는 정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을 팔면 후한 값을 쳐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더 좋은 곳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팔거나 다른 좋은 땅과 바꾸는 것이 이익입니다. 그러나 나봇은 하나님께서 땅을 팔지 말라고 했다며, 왕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아합왕에게는 포도원이 그저 팔고 살 수 있는 토지(부동산)였다면, 나봇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 가문에게 주신 유산이었고, 하나님께서 팔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팔 수 없는 유산이었습니다. 마치 고향에 있는 가문의 땅 선산(先山)을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팔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했던 아합왕은 음식을 먹지 않을 정도로 상심했습니다.
이세벨 왕비는 아합왕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 혀를 찼습니다. 자신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게 해 주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정을 갖고 있었지만, 왕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돈에서 왕은 신의 아들과 같았기에 신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 왕비는 온 이스라엘이 왕의 것으로 여겼기에, 나봇의 포도원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으려는 아합왕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빼앗아도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세벨 왕비는 이스르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거짓 증인을 내세우는 방법으로 나봇을 투석형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아합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르엘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18-19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아합왕과 이세벨왕비가 관여한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는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등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결코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왕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몹시 두려웠을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이세벨 왕비의 살해 위협으로 두려움을 느끼고서 이스라엘 최남단까지 도망을 갔고, 거기서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사람인지라 엘리야 선지자는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나봇을 모함하여 투석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후,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은 이세벨왕비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아합왕에게 보내어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아합왕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처음 따서 먹었던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명령을 처음 들은 사람이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개들이 그 피를 핥게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그가 행한 그대로 갚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자기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른다”라는 단순한 속담이나 격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마침내 엘리야 선지자와 아합왕이 만났습니다. 아합왕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아합왕을 만나러 갔는지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곧바로 만난 사실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아합왕에게 급하게 전달되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내 대적자여!”라고 호칭합니다. 이전에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 450명이 갈멜산에서 벌였던 대결, ‘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지를 확인하는 대결’을 벌이며, 불로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할 때, 아합왕은 엘리야 선지자를 향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18:17)?”라고 불렀습니다. 아합왕이 엘리야 선지자를 향해서 이렇게 불렀던 것은 당시 계속된 오랜 가뭄이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왕상 17:1)”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 선지자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했기 때문이었고, 그 우상숭배를 주도했던 사람이 아합왕과 이세벨왕비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는 엘리야 선지자가 아니라, 아합왕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_도둑이 매를 드는 꼴’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 대적자여’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대적자가 아니라, 아합왕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21-22)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합왕의 집안에 내린 말씀은 사뭇 충격적입니다. ‘네게 속한 남자’는 ‘아합왕 집안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합왕 한 사람의 우상숭배와 범죄가 온 집안사람들에게 영향력이 미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아합왕의 우상숭배와 범죄가 집안 전체의 멸망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가정에서 가장(家長)이 갑자기 실직하게 되거나 명예퇴직을 하게 되면, 집안 경제 전체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가족 중 한 사람이 암과 같은 중한 질병에 걸리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해 수개월에서 1년 이상 병원 생활을 하게 되면, 가족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평소와는 다른 생활 사이클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아합왕의 가문이 여로보암의 집과 바아사의 집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로보암왕은 솔로몬의 죄로 인해서 통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질 때,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다윗의 집안과 같이 왕조를 견고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왕은 하나님을 향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진 삶으로 일관했고, 온갖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등진 삶의 길을 걸을 때, 악한 삶의 모델,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라는 반면교사의 샘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아사왕은 북이스라엘의 3번째 왕인데, 여로보암왕의 아들, 나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패역하기 짝이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아들 엘라왕은 불과 2년 만에 시므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의 집안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심지어 친구들까지 전부 죽임을 당해서 그의 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왕에게 ‘당신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범죄하게 했기’ 때문에, 당신의 가문이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가문과 같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왕비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23-24)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왕비에게도 심판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는 죽어서 그 시신이 버려질 것인데, 성안에 버려지면 개들이 그 시신을 먹을 것이고, 성 밖에 버려지면 공중의 새가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세벨왕비의 시신이 들개를 비롯한 야생동물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합왕과 이세벨왕비는 왕족이었고, 이스라엘 전역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어서 좋아 보이는 것들을 누리며,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무가치하기 짝이 없고, 그저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평가할 때도 사람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시선이 훨씬 중요합니다.
아합왕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던 이유 2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아합왕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된 첫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팔아 악을 행했기 때문이었고, 둘째 이유는 이세벨이 충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팔다’와 ‘충동하다’가 모두 ‘능동태’입니다. 즉 아합왕과 이세벨왕비의 악한 삶은 모두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기에, 자기 삶의 행동의 결과는 고스란히 자기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Life is C between B and D)”라는 말이 있습니다. B는 ‘출생(birth)’이고, D는 ‘죽음(death)’을 의미하며, 그 사이 C는 ‘선택(choice)’를 의미합니다. 즉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물론 그 선택의 결과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습니다.
아합왕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고, 우상숭배를 한 것이 누구를 본받았기 때문인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아합왕은 ‘아모리 사람’을 본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모리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던 사람들을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아모리 사람들이 오랜 세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셨는데, 아합왕이 그 사람들을 본받았으니, 아합도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합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그 약속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면, 그 약속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합왕의 회개와 심판 유보(27-29절)
27-29절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들린 하나님의 말씀에 아합왕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옷을) 찢다’, ‘(몸을) 동이다’, ‘금식하다’, ‘(굵은 베에) 눕다’, ‘(풀이 죽어) 다니다’ 등 5개의 동사는 아합왕의 실제로 회개했음을 보여줍니다. 아합왕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삶을 살았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일이 악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럼에도 행합니다. 아합왕이 그러했습니다. 아합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제로 회개했지만, 아쉬운 것은 그 순간에만, 아주 짧은 기간만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바른 회개의 삶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믿음의 삶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일시적이지만 아합왕이 회개의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29)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왕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중심으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아마 아합왕의 아들인 아하시야왕과 여호람왕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았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합왕의 가문, 오므리 왕가는 예후왕 때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왕비가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할 때, 엘리야 선지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아합왕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께는 감추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와 세속적 가치관에 자신을 기꺼이 드려, 아합왕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드려 엘리야 선지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도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엘리야의 길과 같음으로,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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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 왕이 자신의 왕궁 근처에 있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이야기입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밭을 주거나 돈으로 사겠다고 했지만 나봇은 거절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배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잘 지키며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봇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봇의 대답을 들은 아합은 4절을 보면 “근심하고 답답하여”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 식사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주기 위해 아주 사악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8절부터 10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이세벨의 계략은 마치 아합 왕이 편지를 쓴 것처럼 합법적인 절차로 위장을 합니다. 그리고 금식을 선포하여 경건함으로 위장을 합니다. 그리고 불량배 두 명으로 거짓 증언을 하게 함으로써 나봇을 돌에 맞아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세벨의 단독범행이 아니었습니다. 11절을 보면 나봇과 같은 성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나봇의 무죄함을 알고도 아합 왕과 이세벨의 미움을 받을까봐 나봇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무죄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매장시키는 일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악한 것임을 알고서도 자기에게 피해가 올 까봐 협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이 갖지 못해 안달이 났던 나봇의 포도원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근심하고 답답하여 자리에 누워있던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일어났다”고 16절은 말씀합니다. 아합처럼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해 놓고서 얻은 재물을 놓고 매우 기뻐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 세상은 아합과 같은 악인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는 것처럼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우리가 무엇을 뿌리며 살아가는 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뿌리든지 하나님께서는 다 보시고 우리를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고 1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왕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댓가로 아합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재앙은 21절부터 26절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뿐만 아니라 그 집안 전체를 멸하시고 그 아내 이세벨도 개들이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재앙의 말씀을 들은 아합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7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하나님의 재앙의 말씀을 들은 아합 왕은 금방 사람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엘리야와 아합은 서로 원수지간처럼 한 번도 좋은 말이 오고 간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보기에 아합이 근신하는 행동은 어쩌면 가식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다시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을 너무 가식적인 사람으로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우리 인간이 죄인을 보는 눈과 하나님이 죄인을 보시는 눈과 다른 점입니다. 사람들은 악독한 죄를 지은 죄인에게 너그럽지 못합니다. 비록 그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도 어서 빨리 그 죗값을 치루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당장이라도 아합왕에게 갚아주시는 것처럼 엘리야를 통해 재앙을 선포했지만, 아합의 뜻밖의 겸비한 모습으로 보시고는 그 재앙을 아합의 시대에 내리지 않고 그 아들의 시대에 내리시기로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아합의 형벌을 잠시 집행유예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99가지를 잘하고 한 가지 잘못한 것으로 인해 그 잘한 것 99가지를 덮어버리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99가지를 잘못하였다 할지라도 한 가지 잘한 것이 있다면 그 한 가지 잘한 것으로 인해 그 잘못한 99가지를 덮으시며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커다란 폭풍과 소나기속에 잠시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죄악의 폭풍과 소나기속에 잠시 회개의 햇살이 비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희미하게 비추는 회개의 햇살도 바라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며 풀이 죽어 다니는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악독한 아합 왕일지라도 겸비의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재기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러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의 시간을 주님안에서 영원한 의미로 건져 올리며 살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