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새로운 존재됨의 증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을 명하시는 전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2). 이들을 죄와 사망과 억압에서 구원하여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을 주었으니, 이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에 합당한 삶을 살아낼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열 가지 계명은 우리 삶의 원칙입니다. 다만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지침으로 준 것이지,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닙니다.
2. 1계명은 애굽의 신들(우상)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니, 다른 어떤 신들도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계명입니다.
3. 2계명은 “나는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설명되지 않는 무한하고 영원하고 너희 이성과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서 나를 제한하려고 하지 마라.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처럼 취급하려고 하지 마라. 나는 너희와 사귀며 교제하며 영원한 안식으로 이끌기를 원한다. 영원히 나를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4.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존중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5. 4계명은 “6일 동안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 안식일에는 나를 기억하고, 나의 안식에 참여하여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선한 분인지를 기념하고 예배하여라. 쉬어라. 하지만 너희가 일하지 않고 하루를 쉬는 동안에도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충분하게 공급하여 주리라”는 약속입니다.
6. 5계명은 부모는 육적인 차원에서 존재의 근원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의 대리자요 상징입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질서이니 온전히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7. 6계명은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람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할 대상입니다.
8. 7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김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를 부족하게 여겨 간음을 행하면 그것이 얼마나 큰 비참함인 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신뢰하면서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9. 8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충분하고 또 넉넉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급하시는 것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것에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10. 9계명은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거짓 증거를 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십니다. 마지막 날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11. 마지막 10계명은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만족하도록 채워주실 텐데 우리가 남의 소유를 탐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만족이십니다.
1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도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를 들었고 산의 연기를 보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18). 하나님의 강림하신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백성은 없었습니다(신 4:33).
13. 이들은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들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18~19).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는 ‘죄인됨의 인식’이 분명하게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강림하신 의도는 그들을 시험하고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범죄하지 않게 하심이었습니다(20).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우리의 영적 가벼움은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4.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지시하십니다. 그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23~26). 먼저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23). 하나님은 누구와 비길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신상으로 제한되어서도 안 되는 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을 떠나기도 전에 벌써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둘째로 토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24).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복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5. 셋째로, 제단은 정으로 쪼지 않고 다듬지 않은 돌로 하라고 하셨습니다(25). 사람의 손으로 다듬은 것은 부정하기 때문이며,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아름답게 하거나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지시는 하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26). 이방 신을 제사하는 관습에서 언제나 관련이 되었던 성적인 축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이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예는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16.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복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이들은 애굽의 옛 습관, 세상나라의 방식과 원리들은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기준에 맞추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내산 이전과 시내산 이후가 달라야 합니다. 구원받기 이전과 구원받기 이후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이전과 같다면 구원의 은혜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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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장막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율법의 심장으로 불리우는 십계명을 하나님께로부터 수여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질 때의 상황은 상당히 극적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6-19절을 보면 그 상황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십계명은 이렇게 아주 특별하고 극적인 상황에서 주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두렵고 떨렸을 것이며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며 언약을 맺는 이 광경은 그냥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순종하면 복을 받는 정도의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주시고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예레미야 31장 32절에서 등장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후, 언약을 맺으실 때에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정말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약서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의무를 다할 것을 맹세하고, 서로 다른 남자 다른 여자 보지 않고 평생 사랑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도 하나의 서약서가 필요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십계명이라 부릅니다. 십계명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10가지가 적혀있습니다.
십계명은 다른 율법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셨는데 출애굽기 31장 18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에 새겨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며 우리에게도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십계명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을 통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고 십계명의 근본정신을 언급한 뒤, 로마서 13장 9절을 통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라고 십계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를 범하면 나머지 모두를 범하는 것이라고 오히려 바울보다 더 강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십계명의 일부가 언급되고 있지만 신약에서도 여전히 깊어진 의미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돌판의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계명이고, 두 번째 돌판의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사람 사랑을 위한 계명입니다. 오늘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살펴보려 합니다.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1-2)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구절은 십계명의 시작입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 이 부분을 빼버리고 읽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만큼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없다면 십계명이 지닌 특별한 의미가 절반은 감소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작 부분을 잘 이해해야 십계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절 초두에서는 말씀하시는 주체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지닌 ‘엘로힘’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호와가 아닌 조금 더 보편적 이름인 ‘엘로힘’을 사용한 것은 지금 선포되는 계명들이 이스라엘만을 위함이 아니라 온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려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단순히 민족적인 범위를 넘어 모든 영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있는 ‘이 모든 말씀’이란 본절에서부터 24장까지 계시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지금 하나님은 거룩한 법을 선포하시는 분이 누구이신가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인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심을 믿고 그 말씀이 주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기준이 아닌 말씀의 기준을 따르게 됩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계명을 말씀하시기 전,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며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먼저 계시해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뒤,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3)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계명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도덕 윤리적인 계명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1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부모를 제대로 섬길 수 없고, 이웃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간음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거짓 증거하지 않을 수 없고, 탐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이고, 그것이 전제 조건이 되어서 비로소 사람에 대한 규칙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절에서 ‘나 외에’라고 하는 말을 ‘하나님과 대적해서’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성경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나란히 우상숭배 할 수 있습니다. ‘나 외에’라는 말을 원어로 직역하면 ‘하나님과 나란히’ 또는 ‘하나님 곁에’라는 뜻이 될 수 있고, ‘하나님 면전에서’라는 뜻도 됩니다. 이 점이 그리스도인이 늘 깨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믿거나 재산을 믿거나 다른 누군가를 하나님과 나란히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만일 한 집안에 함께 사는 배우자 외에 또 다른 이성을 데려와 나란히 살게 된다면 그날로 부부관계는 끝이 날 것이고 그 가정은 풍지박산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매번 지음으로 1계명을 어기며 살아갑니다. 1계명을 어기면서도 어긴줄도 모른채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버림 받아 마땅한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품어주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회개할 때마다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저 은혜이고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금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 간단한 이유인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위한 신을 만들어 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지만 사람들은 거짓된 신을 만들어 섬기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돌이나 나무를 깎아 신을 만들었고 그 앞에 제물을 받치고 절하며 축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형상이 있는 거짓 신들에 마음이 빼앗겨 풍요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눈에 보이는 다른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는 않지만, 만일 말씀의 기준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우선된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이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간다면 스스로가 우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교묘히 들어온 우상은 무엇인지,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대상은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십시다.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4-6)
(4-6)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4절에서 ‘우상’ 그리고 ‘형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셀’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나무나 돌, 후대에는 금속으로 깎거나 조형해서 만든 신적 형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다른 신들의 우상’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1계명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으므로 제2계명을 ‘다른 신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것은 좀 이상합니다. 또한 문맥에서 ‘페셀’이란 히브리 단어의 원래 의미가 ‘이방의 우상’이라기보다는 ‘신의 형상’을 의미하며, 이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 대한 숭배 금지 조항이 제1계명에 나오므로 제2계명에서 금지하는 것은 바로 금송아지 사건 같이 하나님을 피조 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표현하는 행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형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주된 동기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인데, 시공의 제한이 있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자신의 방식대로 섬기기 위해 유한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행위를 철저히 금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형상이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피조 세계의 형상으로 표현할 때 ‘편의’는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우리의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문제가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대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조정할 만한 존재로 전락시켜서는 안 되며 우리가 상상하는 모양이나 좋아하는 모습으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만들어 놓아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1차원적인 죄를 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기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자신이 그려놓은 이미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2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열렬히 시기하다’, ‘시기로 불태우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표현된 질투는 사람들의 감정적인 질투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이기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 백성이 떠나간다든지, 그 백성의 마음이 다른 곳에 쏠려 있다든지 혹은 그 삶이 부패해 간다든지 하는 것을 결코 바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어기는 자에 대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갚아주시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오해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고 믿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그릇된 신앙관이 자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은 결코 아버지의 죄가 후대에게 전가되는 숙명론을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에스겔 18장 2절을 보면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리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죄를 지었으니까 아들이 마땅히 벌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 18장 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에스겔서를 통하여 숙명론과 같은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은 개념은 절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삼사 대까지 죄를 갚는다는 구절은 6절과 함께 해석할 때 오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삼사 대까지 죄를 갚는다는 구절과 대조되는 말씀인데, 하나님은 그 정도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를 묻기보다 은혜 베푸시기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1계명과 2계명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그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섬길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왕 되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배반이요, 남편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은 간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1계명과 2계명을 잘 지킨다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잘 유지할 것이고, 나아가 선민으로서 생명을 살리는 역할까지 감당하는 복된 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제1계명과 2계명을 늘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돌 판에 계명을 새겨주셨던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판에도 직접 새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즐거이 계명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통로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율법을 통해 인간이 죄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 싫어하고 그걸 완벽하게 지켜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것이 아니라 세리와 창녀들을 책망하셔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사랑하고 완벽에 가깝게 지키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시며 조금만 더 힘내자고 하시는 것이 율법의 목적과 더 부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율법은 최대한 열심히 지켜서 누구라도 존경할 만한 종교인으로 우리가 변해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마저 이용해 자아를 구축하며 나의 의를 높이는 인간의 죄성을 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 딸이 예절법을 지킴으로 사회에 합당한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율법이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낸다는 말은 바로 내가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이 죄 된 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십계명 또한 이해하셔야 합니다. 십계명은 단순히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십계명과 율법에 적혀있는 명령들은 구약보다도 훨씬 전에 쓰여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나 동시대 다른 법전들과도 유사합니다. 만일, 단순히 십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바빌로니아 사람들 역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있던 것이 됩니다. 물론 십계명이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지침서인 것은 맞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 된 본성을 끄집어내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이름(7절)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 딸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법적 이름이 두개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의 한국 이름과 밤이라는 뜻의 영어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빛이시고 우리는 어둠임을 깨닫는 삶을 살라고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제 딸은 이 이름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고 얘기한 적도 없습니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그렇게 이름을 짓는 존재가 강제적으로 자신의 뜻과 원함을 이름 지음 받는 대상의 삶에 투영하는 행위입니다. 이름 짓는 사람이 주체가 되고 그 대상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고 그 새로운 이름의 내용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강제적 은혜에 의해 이끌려가게 됩니다.
본문 7절에 나온 ‘망령되게’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shawv’ 라는 단어로 비어있는, 거짓된 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헛되다는 뜻의 ‘in vain’ 으로 번역돼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거짓되고 헛된, 즉 인간이 마음대로 만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건 단순히 하나님을 부를 때 야훼나 여호와, 혹은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기에 이름대신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랬던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름을 모독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까? 거짓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의 뜻과 바람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새벽기도에 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지만 우리는 사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내가 지은 이름의 하나님, 즉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만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내 뜻을 이루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새 이름을 받아 주의 뜻이 내 삶에서 관철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도의 삶을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성도가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을 하나님께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8-11절)
(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는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한 명 한 명 개인에게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집안 단위로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가축이나 방문한 손님도 그 집에 소속돼 있으면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이건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 단위로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가정 단위, 민족 단위, 그리고 신약에선 교회 단위로 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자격이 아닌 단체의 소속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 속에선 개인성이 묵살됩니다. 내가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주님을 전파하는 선교사여도, 집에서 놀고 있는 백수여도 모두 예수의 피로 산 교회에 소속되어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지 나의 공로는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안식에 참여하는 자격입니다.
본문에서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를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6일동안 일하시고 7일째 쉬셨으니 하나님의 백성들도 쉬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일도 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6일동안 일을 하셨고 7일째는 쉬었다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구원의 원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주 5일제고 이제 주4일제 얘기도 나오고 있지만 2-3일을 쉬게 해주는 이유도 더 능률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것이지 쉼을 위해 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일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노동이 그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에게 6일동안 일하라고 명하시지만, 7일째 되는 날, 즉 안식일을 복되고 거룩하다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노동이 아니라 안식이 그 중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은 인간의 노동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의 원리가 신약에서 예수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이 뜻을 마태복음 12장에서 설명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다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그걸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함으로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님께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의외의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5절과 6절입니다.
(5-6)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제자들이 이삭을 먹은 것이 뭐가 대수라고 그것 가지고 안식일을 어겼다고 하냐고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사장들도 안식일을 범했지만 성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가 없었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면서, 성전보다 더 큰 이가 본인이라고 하십니다. 그 뜻은 성전 안에 있던 제사장들처럼, 성전보다 더 큰 예수와 함께 하는 제자들 또한 안식일을 범했을 지라도 죄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 여겨 봐야 할 점은 제자들의 행동이 율법에 어긋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 지를 말하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제가 앞에서 말한 소속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지 내가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거나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풀어 설명하면, 내가 예수 안에 거하여 나는 온전히 지워지고 오직 예수가 하신 일, 즉 십자가를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상태입니다. 더이상 나의 생명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던 일들을 내려놓고 예수가 한 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식입니다. 그러니깐 오히려, 내가 주체가 되어 안식일을 열심히 지켜보겠다며 개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고 나의 능력으로는 절대 안식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진짜 안식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이 사건 후에, 예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시는데 이는 바리새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안식일을 고의적으로 범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수 있을지 의논합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는 그 습성 자체가 참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내가 율법을 열심히 지켜 안식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 어떠한 노동도 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키겠다는 그 노력 자체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하면 할 수록, 십자가에서 안식일을 완성하신 예수가 아닌, 안식일을 잘 지킨 나, 열심히 일하지 않은 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바리새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합니다. 매주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하며 이렇게 새벽기도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결국 다 나의 자격이 되고 존재 확장에 사용됩니다. 그래도 나는 주일성수는 지키니깐, 새벽기도 안빠지니깐, 구역모임 인도도 하고 설교도 하니깐. 이런 마음들이 우리가 예수 안에 소속되는 것을 막습니다.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문제는 이 설교를 듣고 다음 주부터 예배 드리던 것도 중단하고 헌금을 안한다 할지어도, 결국 그것들도 또다시 나의 의가 돼서 돌아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집요하게 나만을 목적삼는 우리의 악마성을 바라보며 나의 불가능함을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생명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더이상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며 식량도 비축하면서 자기 손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비록 그들이 씨를 뿌리고 물은 주었어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40년동안 하나님께서 먹여 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직접 살기 위해 애써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록 이렇게 살기 위해 노동을 하고 있을 지라도, 내가 하는 이것들은 사실 내 생명을 유지하는데 아무 쓸모가 없으며 오직 생명은 하늘에서 은혜로 거저 주어진다는 것을, 광야 생활 때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보며 배웠던 그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아침부터 새벽기도 나오고, 직장에서는 싫은 소리 들어가며 돈도 벌고, 집에서는 고된 육아에 치이며 많은 노동을 합니다. 1주일동안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쉬지도 못하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예배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런 고된 노동 덕분에, 내가 이런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은 이미 완성된 예수의 십자가에서 온 다는 사실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전하신 말씀입니다.
(출 20:1-2)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열 개의 계명들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계명에서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서 지켜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 다섯 번째 계명에서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서 지켜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에서 다섯 번째 계명에서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를 소개합니다.
먼저 제5계명입니다.
십계명 후반부-여섯 계명(12-17)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나님은 수평적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으로 가장 먼저 부모님을 공경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공경하다’로 번역된 원어 כבד(카베드)는 여러 가지 뜻(무겁다, 존귀하다, 많다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해 ‘영화롭게 하다’, ‘경외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장 먼저 말씀하신 이유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서 그의 자녀들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 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자녀들에게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도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의 시각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은 강력한 가부장 중심사회였습니다. 여인은 계수의 대상에도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공경하라는 계명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에 특별히 약속(장수)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께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는 의미로 ‘고르반’이라고 말하며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막 7:10-13)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바울은 역시 이 계명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엡 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예수님과 바울을 통해 이 계명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있는지, 어떻게 공경하고 있는지, 이것이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임을 분명 기억하고 있는지를 함께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더욱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부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기간에만 제한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 사후에 남겨진 것이 후회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계명을 살펴보기에 앞서 13절에서부터 17절까지 이어지는 제6계명에서부터 제8계명까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대상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선 제5계명에서 공경의 대상은 부모였습니다. 이어질 제9계명과 제10계명의 대상은 이웃이었습니다. 이처럼 대상을 밝힌 계명이 있음에도 제6, 7, 8계명에서는 그 대상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원어 성경에는 각 절이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부정어 לא(로)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공통점을 종합해 보면 제6, 7, 8계명이 그 대상을 밝히지 않고, ‘~하지 말라’는 강한 금지를 명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유는, 그 명령의 대상이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제6계명입니다.
(13)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다’로 번역된 원어 רצח(라차흐)는 증오, 분노, 속임수 등과 같은 악한 동기로 생명을 해하는 경우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육체적인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뿐만 아니라 인격, 거룩한 하나님 형상의 손실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살인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은 이 개념을 확장하셨습니다.
(마 5:21-22, 새번역)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미워하고 욕하는 것도 살인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물리적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마음으로 살인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7계명입니다.
(14)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다’로 번역된 원어 נאף(나아프)는 모든 종류의 불법적인 성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결혼한 사람이 부부 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성적인 관계를 맺는 일을 가리킵니다. 결혼한 이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배우자를 포함한 성적 관계를 맺는 이까지 더럽히는 매우 부정적 행위입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과 신부가 찾아오면 꼭 상기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창조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성적 관계에 대한 부분입니다.
(창 2:23-25)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허락하신 거룩한 성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의의 아내와’ 즉 부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은 이 계명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마 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육체적인 간음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간음으로 규정하고 금하셨습니다. 앞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우리는 육체적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간음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8계명입니다.
(15)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질하다’로 번역된 원어 תגנב(티그노브, 원형: גנב)는 폭력이 수반된 강도 행위가 아닌, 몰래 훔치는 절도 행위에 가깝습니다. 나아가 정신적으로 형제를 속이고 기만하는 행위, 형제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분깃이나 노임을 지급하지 않는 부도덕한 행위도 이에 포함됩니다.
끝으로 제9계명과 제10계명은 처음 살펴본 제6계명과 같이 그 대상을 명확히 합니다.
(16-17)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웃’으로 번역된 원어 רעה(라아)는 친구나 동료, 이웃, 동포 등과 같이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의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이웃이 된 이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짓 증거와 이웃의 집(가족, 재산 등)을 탐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거짓 증거는 재판 과정에서 법적 효력을 갖는 진술, 즉 증언을 의미합니다. 당시 재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증언이었습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사실관계를 밝혀 줄 증거가 될만한 요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판결은 두세 사람의 일치된 증언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때때로 두세 사람이 입을 맞춘 거짓 증거는 재판에 있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이것을 찾았었습니다.
(마 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또 스데반 집사의 죽음의 방아쇠가 된 것도 거짓 증거였습니다.
(행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후에 예수님은 이웃 향해 취해야 할 보다 적극적인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 우리는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않았고, 이웃의 집을 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분명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결핍을 넘어 죽음 땅 광야에 선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친히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명령을 보다 적극적이고 함축적으로 재해석하여 교훈하셨습니다. 그 목적 역시 결국에 있을 죽음을 외면한 채, 하루하루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목적 삼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그 명령(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은, 올해 우리 교회에 표어로 주신 ‘눈을 들리라’(시 121:1)라는 말씀의 시작점이 되는 동시에 방점이 됩니다.
허락된 말씀이 타인을 향한 정죄의 도구가 아닌, 자신(개인)의 신앙적 정진을 위한 도구임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의 예배의 삶으로 가꾸어져 갈 것이며, 우리의 오늘은 틀림없이 사람을 취하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로써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백성이 두려워 떨다(18-21절)
오늘 본문은 십계명의 뒷부분입니다.
(18-19)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해서 극한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듣는 것보다 모세를 통해서 듣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삶을 성숙시켜가기보다 주일예배 때 주어지는 말씀으로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래야 깊고 넓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역자의 역할은 그 세계로 들어가게 해 주는 ‘가이드’와 같습니다. 가이드에 집중하다가 대자연의 장관을 보지 못하고, 예술작품 보는 것을 놓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자연의 장관보다도 더 황홀한 장관이고, 영원한 생명의 작품입니다. 대장관이나 좋은 예술작품을 보면 마음이 기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생명이 소생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라며 아우성을 치는데, 이것은 오히려 참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음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 자신들의 잘못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그들을 찾아가 주셔서 말씀해 주셨고,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된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겠다고 살기등등해 다메섹으로 가면서 주님께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당신의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심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 모습까지라도 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0-21)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할(공포의) 대상은 아니시지만 경외해야 할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는 것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경외심은 순결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과거에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에 대해서 많이 강조했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은 벌레와 같고, 지렁이와 같으며, 마른 나무 작대기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자기 존중, 자기 위로가 많습니다. 노래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분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훨씬 더 많이 표현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한결같이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을 입은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깊은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래 우리말 표현으로, 자기 아버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엄친(嚴親)’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를 소개할 때는 ‘자친(慈親)’이라고 합니다. 어버이를 뜻하는 한자, 친할 친(親)자는 ‘나무 목(木)’자 위에 ‘설 립(立)’자가 있고, 오른쪽에 ‘볼 견(見)’자가 있습니다. ‘나무 위에 서서 누군가를 멀리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한자를 모아 만든 합성어입니다.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 집을 나간 둘째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사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엄하심’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거룩하신 주님 만군의 여호와>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이 2절 가사가 이러합니다.
존귀하신 주님 만군의 여호와 그 인자하심이 아침마다 새로워 늘 의로우시지만 또 자비로우신 주님 저 하늘도 주께 찬양하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움 앞에서 한없는 따뜻함을 누리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서 우리의 삶을 고쳐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신실하게 가꾸어가고,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삶을 삽니다.
제단에 관한 법(22-26절)
22-26절은 제단에 관한 법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대표해서 나아온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20:22-23:33까지를 ‘언약서’라고도 합니다. 여기에는 우상숭배와 제단법, 종에 관한 법, 사형에 해당하는 죄와 상해죄, 도둑질과 같은 사회법, 안식일법, 절기법 등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만큼이나 중요했고, 성막을 짓는 일보다 앞서서 주어졌습니다. 즉 이 법들이 성막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더욱 하나님의 백성다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너희 스스로 들었으니”라고 하지 않고 ‘보았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일예배에서는 물론 수요성경공부와 구역성경공부,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들음이 보는 것이 되는 것, 즉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고, 예배당에 나아오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거기에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이 주님과의 만남의 장, 회막(會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또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아무리 크게 만들고, 아무리 잘 만들어도 하나님은 거기를 훨씬 뛰어넘으시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 그 무엇에 갇힐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신상(神像)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결코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내가 만든 것에 갇히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 뉴욕의 리디머 장로 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창립하고 사역하셨던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님의 책 중에 <내가 만든 신>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내가 만든 것은 그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우상_신상(神像)’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가 만든 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만든 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우리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너희를 위하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神)’이라는 ‘신(神)’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신상(神像)’을 만들곤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제1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나 외에는’의 문자적인 의미는 ‘내 앞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은 전부 우상(신상)입니다. 즉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모두 우상(신상)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리에 재물, 성공, 권력, 쾌락, 세속적인 가치관 등을 둡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녀나 배우자, 연인 등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예배는 제쳐두고 전력으로 질주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둔 그것을 성취하고 난 후에,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 살수록 ‘자기를 위하여’라고 하나님의 자리에 두었던 것이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해(害)하여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를 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다른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24-25)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이왕 제단을 만들 것이면 흙보다는 돌이 좋고, 돌 중에서는 거친 자연석보다는 다듬은 돌이 좋을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예배당을 지을 때 절대로 돌로 짓지 말고, 짓더라도 매끈한 대리석으로는 짓지 말고, 반드시 흙으로만 지으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제단은 제단 자체보다도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이 더 중요합니다. 제단을 아무리 좋은 재질로 만들었을지라도, 제물에 흠이 있다면, 그 제단은 제단으로서의 목적을 상실합니다.
강대상이 크다고 말씀의 권위가 크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듬지 않는 돌로 만든 것 같은 이 작은 강대상일지라도, 우리의 삶을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워서 드리는 제사,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면 자신인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뚜렷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자신이 속한 곳, 자신을 영원히 붙잡아 주신 분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화목제는 제물의 기름을 태우고 일정한 부분은 제사장에게, 나머지는 이웃과 나누어 먹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와 교제해야 하는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번제와 화목제, 이 두 제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주는 연결고리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모든 곳에 임하셔서 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의 표면적인 곳은 ‘성막(성전)’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성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당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에서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때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 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26).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고대에는 지금처럼 옷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천 같은 것으로 몸을 두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층계를 올라갈 때, 아래에서 보면 속살이 다 보이곤 했습니다. 후에 제사장들은 ‘속바지’를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의복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 신전에는 남녀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전 안에서 소위 ‘거룩한 매음’을 했습니다. 인간이 성행위를 하는 것을 신들이 보고서, 그들도 성행위를 할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이교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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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절은 ‘ 말하다 ’ 라는 동사와, 그것의 명사형 ‘ 모든 말씀 ’ 과, ‘ 이야기하다 ’ 는 동사를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모두 성경을 통해 이야기 됩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알지도 따르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며 설악산을 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행선지를 잘못 정했든지, 찾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지, 혹은 누군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열심보다 더 힘을 내어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 음성을 들으려 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시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불꽃이 튀는 초월적 순간입니다. 특별하고, 강렬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묵상해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과 특별하고 초월적인 만남의 자리가 주어지면 거리를 두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절부터 21절까지 ‘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 ’ 를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임하신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 떨며 멀리 서 ’ 있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운 밤 우리는 태양 빛을 바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태양이 가까이 오면 지구는 열기에 녹아버릴 것이기에, ‘ 적당히 ’ 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생존본능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절대자가 오셔서 무언가 해주길 원하지만, 그 만남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주관적인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하나님 임재의 강렬함과 두려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이 사이에서 적정거리를 찾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기 일쑤입니다. 마약을 찾듯 하나님을 찾느라 일상을 포기하거나, 반대로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포기하고 경건해 보이는 어떤 사람 뒤에 숨어서 말씀과 기도를 구걸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사 해결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원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방법은 ‘ 누군가를 가운데 두는 것 ’ 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자격은 20절부터 21절에 나옵니다. 그는 백성에게 ‘ 두려워하지 말라 ’ 고 다독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여러 번 하나님과 만나 동행하고 있음이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애굽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함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임하시는지 ‘ 본의 ’ 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백성들이 넘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 흑암으로 가까이 가야 ’ 합니다. 우리 또한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22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과 같이, 예배자로 살아가는 법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누가 필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은 ‘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찾고, 누구를 보고 계시는지 바라보며,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들어야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경직되어 있습니다. 내가 시간 낼 수 있는 찰나의 순간에 딱 한번만 말씀하셔야 한다 생각합니다. 너무 짧으면 뜻을 다 이해 못할 것 같고, 반대로 너무 길면 스케줄이 엉킬 것 같습니다. 또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공식화된 집회나, 믿음 있는 것 같은 누군가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지 내면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 예수님을 찾고 시선을 함께하며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라고 불리는 2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이 있는 곳에 함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는 것을, 듣는 것을, 원하는 것을 함께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모세가 20절에서 ‘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고 말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계명은 범죄 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주신 ‘ 바른 삶의 가이드라인 ’ 입니다. 표지판은 가라고 만든 것입니다. 이 길을 걷는다면 도착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 계명들을 지킬 수 없다고 무시하며 포기합니다. 또는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다고 자기 의로움을 포장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에 불과하거나 개인적으로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모세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고통스럽고 번거로운 여행을 시작합니다. 말씀은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좋기는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며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개인적으로만 적용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건을 위해 애쓰는 만큼, 속한 사회 이스라엘도 계명을 지키길 원했고 그렇게 하기를 당부했습니다. ‘ 홀로 하나님과 함께 만나는 시간 ’ 은 개인의 이득이나 평안을 위해서 주어진 것 아닙니다. 이를 통해 더 부담되고 괴로운 여정의 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는 뜻, 지키길 원하는 법을, 배우고 따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 삼아 새로운 공동체 안에 들어온 우리는, 이제 우리 또한 작은 예수가 되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법을 입으로 삶으로 외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절부터 11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옆에 거하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삶을 하나님께서 세상에 유일한 신임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과정으로 여겨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 자리에 올려두면 우상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귀히 여겨 남발하지 말고 그 이름을 높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일을 지키는 것을 넘어, 참된 안식을 그리워하고 소망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12절부터 17절은 사람을 진심으로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자식이 될 뿐 아니라,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삶에 피해가 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생명력을 더해주어야 합니다. 성적 행위가 주는 기쁨을 타인이 아닌 나에게 준 바른 대상과 함께 누림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열망해야 합니다. 돈을 우상이 아닌 은사로 여기는 바른 물질관을 가져야 하고, 타인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가 우리 존재를 말해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탐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모세보다 나은 예수님이 우리를 다독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 말씀의 본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흑암으로 가까이 가는 모세를 이스라엘이 바라보고 의지하듯, ‘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고(히2:9) ’, ‘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때(히4:16) ’ 참된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주님 손을 의지하며, 계명을 지킴으로 예수를 닮아가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계명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논의하고 협력하는 하루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