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 언약
아브라함이 86세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 완전하라.(1절)” 아브라함이 13년간 약속의 씨를 기다려 온 끝에 믿음이 약하여진 것을 염두에 두고 경계하신 말씀으로 볼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이후에 언약에 대해서 언급하심을 볼 때 짐작할 수 있듯이, 오히려 언약의 본질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순간의 태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근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가져야 하는 경건의 성숙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벨 대신 주신 셋 계통에 속한 자들, 곧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함으로써 오랫동안 끊어졌던 경건한 신앙 전통과 영적 혈통을 이어간 에노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취함을 받은 에녹,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의롭게 하나님과 동행하여 산 노아 등, 이러한 경건한 사람들의 삶의 성격과 본질을 요약하여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믿음의 선배들이 가지던 특별한 혈통의 영적인 전통을 이을 것을 요구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하신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가짐이여, 삶의 거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을 바꾸심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십니다. 이름의 변화는 그의 본질과 신분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하며, 아브라함은 이제 전혀 새로운 존재로의 요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말씀은 새로운 존재로서 합당하게 살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름이 변화되었듯, 그의 삶과 존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인으로의 길을 걸어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9-10). 살을 베어서 몸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김으로, 이 언약의 확실성과 불변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평생토록 새겨진 언약을 몸에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창세기 34:14, 여호수아 5:9절은 이 할례를 가리켜 “수치”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마음의 양피를 제거하라는 표현은 육적인 것만이 아닌, 영적인 수치, 영적인 부정함을 제거하는 것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수치를 제거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가 언약에 속하였음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1-13)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로새서에서 말씀하듯이,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 육의 몸을 벗는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 죽고 다시 살아 부활하는 할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육적인 삶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신자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육의 할례를 받은 것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의 할례를 통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함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의 할례는 그림자일 뿐이며, 마음의 할례는 실체입니다. 구약(옛 언약)은 신약(새 언약)을 더욱 소망하게 합니다.
아브라함 집의 모든 남자가 난 지 팔일에 할례를 받았습니다(12절). 모든 남자, 종, 외국인 종, 아브라함의 씨가 아닌 자도 포함합니다. 이렇게 할례의 대상이 많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닌 자도 언약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아브라함과 오직 그에게서 난 자에게만 언약을 맺겠다는 말씀과 대치가 되는 듯합니다. 이스마엘이 언약에서 제외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외국인 종까지도 포함하는 것은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단순히 육적인 혈통만을 따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언약과 은혜는 참으로 독특한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입니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면서 또한 하나님의 선택한 자만 들어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라(여러 민족의 어머니)의 이름도 바꾸어주셨음이 매우 중요합니다(16절). 여자도 결코 언약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성경에서 기록되지 않은 것은 남자보다 열등하여서가 아닙니다. 여자는 남자와 한 몸을 이루는 대상입니다. 곧 남자를 기록하는 것은 여자를 포함하여 말함과 같습니다(베드로전서 3:7). 사라 역시도 아브라함과 동일한 언약을 받았고, 동일한 축복과 약속을 받은 공동 상속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웃은 이유가 무엇일까요(17절)? 오랜 약속의 실현에 대한 환희의 웃음일까요? 18:12절에 사라 역시도 의심의 웃음을 짓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웃음은 분명 불신과 의심의 웃음이 맞을 것입니다. 구십 구세에 받은 말씀, 무려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이나 지난 지금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많이 약하여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나 믿음이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람의 뜻이나 지혜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이 흔들리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인간적인 모든 노력이 벽에 부딪히게 될 때에 완전한 신뢰를 하나님께 보이기가 힘든 것입니다. 지금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제 전적인 신뢰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100% 신뢰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만, 이들은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의 초월입니다. 자신도 늙었고, 아내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모두 끊어질 때,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을 아브라함은 이제 배워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그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매워 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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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고 있었던 75세 아브라함에게 집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롯과 분가한 이후에 거처할 땅을 찾아야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차지할 영원한 땅과 후손의 번성함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때 아브라함은 아무리 많은 상급을 주셔도 그것이 자식이 없는 자신에게는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종 엘리에셀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번째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공수표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 번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앞서 두 번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단지 말씀으로 약속하지 않으시고, 암소와 양과 비둘기를 쪼개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를 ‘횃불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쪼개어진 짐승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갔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언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횃불 언약식이 있은 후, 아브라함은 있었던 일을 아내 사라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를 달리 해석하였습니다. 늙은 자신은 임신할 수 없으니, 자신의 여종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5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온 지 10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을 통해 임신을 하게 되었고, 아이를 낳았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창세기에는 이 13년 동안 있었던 일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13년이 흘러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며 언약을 맺은 사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1-2절)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을 강조하신 이유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이 여종의 몸에서 난 씨가 아닌 아내 사라의 몸에서 날 씨로 성취될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인데, 아브라함이 이를 목격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 언약을 사람이 스스로 완전히 행하여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완전히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때 그 언약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언약은, 쌍방언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언약, 즉 은혜 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성취되도록,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3-8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왜 엎드렸겠습니까?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데, 아브라함이 엎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린 이유를 유추해 본다면, 첫째는 아내 사라의 요구대로 여종 하갈을 취한 것에 대한 회개 때문입니다. 둘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겠다는 복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엎드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내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시는 은혜 언약입니다.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도록 해 주시겠다는 의미로 아브라함의 이름을 개명해 주셨습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두 이름의 공통점은 ‘아브’인데 이는 ‘동일 혈통의 창설자 또는 서열이 높은 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이름의 차이점은 ‘람’과 ‘라함’입니다. ‘람’은 ‘높고 힘있는’을 뜻합니다. ‘라함’은 ‘군중’ 또는 ‘열국’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과거 제한적 범위의 ‘높고 힘있는 존재’에서 앞으로 광범위한 차원의 ‘열국의 아버지’, 즉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개명한다는 것은 생애 큰 전환을 뜻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개명할 때, 시몬이 베드로로 개명할 때, 사울이 바울로 개명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약속과 동시에 사명을 주셨기에 그들이 생애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생애 큰 전환점을 맞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외적 이름이 바뀌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심으로 새로운 본질을 의미하는 새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2절에 이어서 6절에서 재차 번성을 약속하셨습니다. ‘심히’라는 부사를 사용하시어 번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들과도 영원한 언약을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합니다. 백성이 아닌 사람을 백성으로 삼아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들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은 종국적으로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우리 스스로 성취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이 성취되도록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으로 주신 그 말씀을 지키는 일입니다.
언약의 표징이니라(9-14절)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요구에 할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례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포피는 남성 생식기를 덮고 있는 피부입니다. ‘이를 베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표징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언약의 백성임을 알리는 신체의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왜 포피를 베어서 그 표시를 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사람이 신체에 무언가를 표시할 때 귀나 코를 뚫을 수 있고 낙인을 찍거나 문신을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의 표징으로 포피를 베어라고 하셨습니다. 남자가 할례를 받게 되면, 그 표시를 매일 보게 됩니다. 귀나 코에 구멍을 뚫으면 거울을 보아야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할례는 거울이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할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늘 인지하도록 합니다. 사실은 육신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함을 신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할례의 대상과 시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上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할례의 대상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남자 외에 이방 사람까지 가능했습니다. 이방 사람의 경우에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할례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 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할례의 시기입니다. 태어난 지 8일에 할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훗날 제정된 율법을 보면 산모의 부정한 기간 7일이 지난 다음 날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그리고) 한 주간이 지나고 새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날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할례가 구원의 표징이듯이 신약 시대 세례가 구원의 표징입니다. 세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후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 새 삶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13下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구원받은 백성의 표징이 몸에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표징이 몸에 있어야 합니다. 과거처럼 할례를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는 할례처럼 몸에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목적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은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언약을 구체화하십니다. 그리고 언약 앞에 영원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시며 그 언약이 세상 끝까지 이를 언약이 될 것이라고 세 차례에 걸쳐 밝히십니다(7,13,19절). 그 내용은 여러 민족들과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과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될 것,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와 더불어 할례를 행하도록 명하시는데, 할례 역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지킬 언약이 됩니다. 할례는 언약인 동시에 언약의 표징으로서,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언약을 배반한 자로서 끊어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사래의 이름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15-22)
(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래라는 이름은 본래 공주 또는 왕비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름을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인 사라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도 복을 주어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며, 민족의 여러 왕이 나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했지, 사라가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명시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열세 살이 된 시점이 되어서야 사라에게서 아들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여종 하갈에게서 자녀를 얻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물론 잘못된 것이었지만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꾀를 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하란을 떠난지 10년이 되었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출산을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섭섭한 마음과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어그러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부담이 컸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순되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스마엘이 나름대로 장자로 자리 잡은 지 13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하나님은 사라에게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사라는 결혼의 근본 원칙을 어기고 하갈을 들이게 하였고, 비윤리적으로 내쫓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앞서 하는 일들이 이러합니다. 마치 마스크를 써서 미세먼지를 막지만, 그 마스크를 태워 처분하는 과정에서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공기 청정기를 돌려 미세먼지를 막지만 그 공기 청정기를 만드는 공장과 전기 발전으로 인해 더 많은 미세먼지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아무리 지혜롭게 여겨지는 방안도 하나님께는 어리석기만 합니다.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일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라의 경솔한 행동에 잘못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사라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뀐 여자는 사라가 유일합니다. 이후 사라는 127세에 죽었다고 기록하는데 여인이 죽은 나이가 성경에 나오는 경우도 유일합니다. 편견 없이 보자면 사라는 위대한 여인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사라는 그저 남편만 믿고 군말 없이 남편이 하는 일에 순종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을 누이라고 속이고 가장의 신의를 버리는 일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도 남편 옆을 계속해서 지켰습니다. 얼마나 큰 믿음과 사랑입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사라는 분명히 믿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19)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웃고 맙니다. 이 웃음은 이삭의 이름, 18장에 나오는 사라의 웃음, 그리고 결국 21장에 나오는 사라의 고백 즉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로 이어집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고, 기가 막혀 실소하고, 믿지 못해 조소한 것이 결국에는 참된 웃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 그러합니다. 너무나 터무니없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당하기나 한가! 놀라움에 웃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절망한 자리에서 희망을 주시고, 넘어진 곳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자녀를 주셨다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아이가 자신들의 아이이며, 자신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육체와 능력에 대해 절대적으로 좌절하고 포기하고 도저히 희망을 볼 수 없을 때 생명을 주셔서 그 약속이 온전히 하나님이 이뤄주시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만드셨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약속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그 후손에게 해당하는 것이기에 이스마엘과 이후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아들에게도 이어질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혼란을 막으시고 사라에게서 난 적자인 이삭에게만 그 언약이 적용됨을 알리시기 위해 이삭과 내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에게도 역시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그대로 복을 주십니다.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라는 말씀은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이스마엘에게도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 때문에 복이 주어지고 하나님은 그가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복은 영원한 언약에 근거한 이삭이 누릴 복에는 비할 것이 못되었습니다. 웃음이라는 이삭의 이름이 그렇듯이 이스마엘도 그 이름처럼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이스마엘 모두 이름대로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사실 태어나지 않아야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견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충돌하는 것 같은 장면을 봅니다. 하나님은 왜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후에 10년이나 가만히 계시다가, 또 기껏 이스마엘을 낳게 하시고는 13년이나 지나도록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이삭을 주신다고 하셔서 오히려 갈등을 초래하시는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크게 보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 그때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왜 그때 그 일을, 또는 나를 막지 않으셨습니까 묻기도 합니다.
이러한 난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유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소설을 쓰시는 작가로, 우리는 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소설 작가들은 이야기 밖에서 여러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그 핵심 메시지는 다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집필을 하다보면 등장인물들은 희한하게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구성해 나간다고 합니다. 작가가 쓸 내용을 그 등장인물이 직접 기술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그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을 일순간에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맥락이 끊기고 삼류 소설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소설가가 자신을 줄거리 속에 넣으면 이제 이야기의 저자일 뿐 아니라, 이야기 속의 한 인물이 되어 두 차원을 함께 경험합니다. 즉 이야기 전체를 파악하며 통제하는 동시에 그 구성의 일부가 되어 이야기 전개에 따라 직접 그 소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사람과 피조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구원하신다는 큰 줄거리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우리 제각각이 자신만의 성격대로, 믿음대로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사라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은 확실한 줄거리지만, 그 세부사항은 얼마든지 그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의 뜻대로 이스마엘을 낳았고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이야기를 이뤄 드리는 기특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이 완성되고 기대가 다 끝난 시점에 나타나셔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21-22)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하나님은 내 언약이 이삭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고, 이삭은 약속으로부터 난 자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그래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보겠다고 하여서 낳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약속으로만 난 자인 이삭만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시내 산의 언약과 같은지 예루살렘의 언약과 같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마치시고 이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바로 할례의식을 집행합니다.
할례의식(23-27)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로 그날에 이스마엘과 그 집에 속한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포피를 베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날 포피를 베었고, 이후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럼 어찌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습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따지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밝히신 대로 즉시 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때로 어떠한 일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고 하나님의 뜻도 망쳐버렸다고 개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꺾이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수나 연약함을 통해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잘못은 잘못대로 인정하고 회개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당장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택해야 할 삶의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의 실수와 죄 때문에 오지 말았어야 했던 어렵고 황량하고 목마른 자리에 있는 것 같다는 무거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자리임을 고백하고 매일 우리에게 들리는 대로, 깨닫는 대로 즉시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어제 말씀대로 할례를 통해 남자는 피할 수 없이 매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됩니다.
(24-27)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이스마엘도 포피를 벱니다. 그리고 그 집에 속한 모든 자가 할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종족이나 출신 신분 때문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구십구 세가 된 아브라함과 팔십 구세가 된 사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늘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건으로 우리의 믿음은 전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원합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지하여 나왔지만 아무 기척도 없고, 이런저런 몸부림을 쳐보고 애를 써봐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시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더 기다리고, 더 인내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내가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믿도록 인도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나님이 죽은 것과 같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를 살리시는 이유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삶에는 푸른 풀밭도 있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습니다. 무겁고도 어두운 자리를 지나실 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더 깊이 인식하고 삶이 우리 바람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끝까지 참고 사랑하며 예배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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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장과 오늘 본문인 17장 사이에는 절로 따지면 불가 한 절의 차이 밖에는 없지만, 실상 그 속에는 1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간격, 차이가 있습니다. 그 13년의 세월은 많은 것들을 변하게 했습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외적인 변화는 아브라함이 이제 곧 100세를 눈앞에 두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아이를 갖기에는 불가능한 나이가 되었음을 나타내줍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당시 86세 때, 여종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 우리로 따지면, 어느덧 중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청소년으로 성장 한 것입니다. 어딘가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이스마엘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부는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이 13년 전에 비해 안정화 되었고, 복의 근원답게 아브라함이 하는 일들은 미루어 짐작하기에 큰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내적인 변화 역시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13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선 13년간 공식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고, 과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해 주신 언약의 말씀이 과연 잘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불안이 문득문득 그를 감쌌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는 어떻게 보면 조금은 황당하게 받아드릴 수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드렸던 자신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현실에 안주한 채 무뎌질 때로, 무뎌진 자신의 모습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문득, 그것도 13년 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던지신 일성이 바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13년 만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을 건네시는데, 왜 하필 하나님을 나타내는 수많은 표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지 당신의 전능성을 강조해야만 하셨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크게 둘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지난 13년간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들 중에, 특별히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기억과 믿음이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다 볼 수 있고, 더불어 앞으로 하나님께서 전개해 나가실 계획 가운데 이 부분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으로도 보아집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에서 ‘행하여’로 사용된 ‘히트할레크’는 ‘걷다’의 의미가 있는 ‘할라크’의 재귀형으로 ‘자기 스스로 걷는 것’을 의미입니다. 또한 ‘완전하다’는 의미의 ‘타밈’은 레위기 22장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물에 관해 말씀하실 때, 흠이 없는 제물을 표현하시면서 사용된 단어이고 새로운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노아에 대해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창 6:9)라고 묘사를 하는데 이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흠이 없이 너 스스로 걸으라’고 하시는데, 과연 누구 앞에서 걸으라는 말씀일까요?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레파네이’, 나의 얼굴을 향하여, 즉 하나님을 향해서 걸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선택을 다른 말로 하면 길을 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길을 걸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앞에 13년 만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던지신 메시지이자 그분의 마음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 충분한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내 얼굴 앞에서 흠이 없는 제물과 같이 성결하게 너희들의 의지를 다해서 스스로 걸어라. 내가 너의 백그라운드가 되어주마, 그러니 당당하게 걸어다오.’ 오늘 하루, 그런 복된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2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과 몸소 언약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한 그 언약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히 대대로 이어지는 언약임을 말씀해 주시면서 가나안 땅의 영원한 소유까지도 인정을 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아내인 사래를 사라로 이름까지 바꾸어 주시면서 독려를 하시고 결국에는 언약을 잘 지켜나갈 것을, 자손 대대로 지켜나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본 계획을 표명하시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예고해 주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지내 온 13년간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들어내 주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본문 17-18절입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었지만 ‘나이 100살 된 남자와 90세 된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겠느냐’고 혼잣말을 하며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자 본문 19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단호히 아브라함의 생각이 틀렸음을 밝혀주시고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드디어 놀라운 하나님의 계보가 수면위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 계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쳐 수많은 구약의 언약의 백성들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계보는 지금도 살아 숨 쉬며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세계를 누비며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믿음이 있던 사람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는 명령을 하시자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창 12:4) 라고 할 만큼 바로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조물인 인간이 어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들었건 잘못 알아들었건 상관없이, 주께서 지금 현재형으로 하신 말씀에 현재형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삶의 통해 실수는 분명히 있었지만 믿음의 조상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실 말씀을 다 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자, 아브라함은 바로 그날에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자면,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13년 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인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아무리 영성이 좋은 분들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현재형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13년을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살아온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충격 역시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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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바꾸셨습니다. ‘아버지가 높임을 받다’는 뜻의 아브람이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정체성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열국의 아비가 되기에는 구십 구세라는 나이가 뜬금없어 보였습니다. 더욱이 사래의 이름까지 사라라 바꾸시면서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니 아브라함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청난 약속을 믿을 수 없어 웃었으니, 그 웃음은 분명 헛웃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헛웃음을 짓는 인간,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불신앙의 인간 앞에서 영원한 언약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헛웃음을 넘어 영원한 언약이 되어 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엘 샷다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신앙은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샷다이)뿐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엘 샷다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의 자리를 펴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의미에서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역시 옛 자아(아브람)를 벗어버리고 새 자아(아브라함)를 덧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절) 언약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조건 불변사 ‘루’를 넣어서 “이스마엘이나”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가당치도 않은 일에 신경 쓰시느니 될 법한 일에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투였습니다. 본디 언약은 현재를 관통하여 미래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언약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육이 영보다 앞서는 인간으로서는 미래적 언약보다 현재적 유익이 더 구미가 당기는 법입니다.
비유하자면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였습니다. 로마서 9장 7-8절의 말씀은 본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풀었습니다.“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17장에서 이삭은 없었고 이스마엘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신 자는, 있었던 이스마엘이 아닌 없었던 이삭이었습니다. 언약의 시야 속에 존재하는 자는 약속의 자녀이지 육신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현재의 유익보다 미래의 소망에 닻을 내려야 함은 언약의 빛에서만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약의 빛 앞에서 약속의 자녀로, 모든 시간 속에서 현존하는 자입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약속들로 진술되었습니다. 언약의 수혜자였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였습니다. 또한 이는 가나안 민족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하는 의무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할례에는 ‘선택의 은혜’와 ‘택함 받은 자의 순종’이 동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민족들도 성년식의 통과의례로서 할례를 행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라는 의식만으로는 이스라엘과 가나안을 구별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참 할례는 외적 의식 속에 담긴 내적 의미, 즉 은혜와 순종의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언약의 자손으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삶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9)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없다면 할례는 무할례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우리의 살로 살아낸 삶, 즉 작은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영원한 언약이라는 모자이크가 완성됩니다. 비록 아브라함은 언약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웃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믿음의 순종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바로 자신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의 할례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오늘은 ‘이 날’이어야 합니다. 돌이켜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날, 그리하여 영에 할례 받은 자로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날, 이 날이 곧 언약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