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기억의 저편, 아련한 영상
신대식
철원DMZ(비무장지대) 안보문학기행 버스 안은, 과거와 달리 젊은 회원들의 들뜬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코로나 방역 시기를 거치는 동안 연로한 회원들은 이미 기력을 상실했는지 몇 사람만 참석했고, 그마저도 얼마 달리지 않아서 조는 듯 마는 듯 말들이 없다.
유월 초, 신록이 출렁이는 광활한 철원평야는 드넓은 바다를 닮았다. 수평선처럼 아득히 펼쳐진 연초록 평원과 그 너머 해무 같은 옅은 안개에 가린 웅장한 산맥, 폐 속까지 스며드는 싱그러운 냄새, 꿈에서 본 듯한 신천지에 온 것 같았다.
평화전망대를 거쳐 동부 산악지대로 가는 길은 험한 계곡과 비탈길, 버스도 비틀거리며 달린다. 나도 흔들리며 졸다가 ‘신수리’ 도로표지판이 보이는 순간, 가슴속에서 한줄기 샘물 같은 아련한 그리움이 솟아오르며 지친 마음에 생기가 솟는다.
무엇엔가 이끌려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직업군인으로 전국을 떠돌면서도 언젠가는 찾고 싶었던 36년 군 시절 마음의 고향, 비무장지대의 초원과 GP(감시초소) 그리고 신수리, 와수리 마을이었다.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으로 처음 부임한 부대가 철원에서도 동부 산악지대의 백골사단, 그중에서도 최전방 철책을 맡고 있던 백골연대였다.
연대장 신고를 하기 전, 보직을 확인하니 보병대대 소대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무슨 객기였던지, 난 “보병 소대장은 안 한다. 철책 너머 비무장지대에서 활동하는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가겠다.”고 우겼다.
신임 소위가 이미 내린 명령에 불복하고, 모두가 꺼려 하는 비무장지대 GP로 가겠다니 인사주임이 말리다 못해 인사 명령을 다시 결재 받아야 하고, 지금은 GP 소대장 공석이 없어 한 달 후에나 보직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간 동기생들보다 한 달여 지나서야 소대장 견장을 달게 되었다.
그렇게 소대장으로 부임한 곳이 안암산(587m) 아래 위치한 GP 였다. 그곳은 전방에 횡으로 뻗은 평야지대를 가운데 두고서 북측엔 우람하게 솟은 오성산(1,062m), 바로 마주한 적 GP는 불과 1km 정도로서 양측의 확성기를 통한 선전 소리가 온종일 골짜기를 울렸다.
그 당시 대북 확성기 방송은 심리전 면에서 효과가 탁월했다. 북한군의 사기 저하는 물론, 철책을 넘어 귀순하는 북한군이 가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의 효과적인 수단들이 모두 잠자고 있다.
GP는 한번 들어가면 다음 소대와 교대할 때까지 몇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보급품을 운반하는 차량 외에는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단절된 망망대해의 고도와도 같은 육지 속의 외딴 섬이다.
야간이면 철책선을 따라 구축된 잠복호에서 전 소대원이 경계 근무를 하다가 주간에는 관측 요원을 제외하고는 벙커 내무반에서 취침을 하는,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 지루한 일상을 깨트리는 일들이 가끔 일어났다. 북한 GP 측에서 고함치며 말을 걸어오곤 했다. “야아~ 만득이 나와라~.” 그럴 때면 소대원 중 한 명이 호기를 부리며 잠복호 위로 올라가 대꾸를 하곤 했다. 처음엔 농담 투로 이어지다가 결국엔 말싸움으로 끝났다. 그런데 말싸움은 항상 우리 측 참패로 끝났다.
북측 놈은 사상 교육을 받은 정치군관인지 항상 동일인에, 말꼬리를 잘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가 찾는 ‘만득이’는 일 년 전에 전역한 소대원이었다. 우리 병사들은 그놈의 상대가 안 되어 응대 금지 지시를 내려 한동안 대꾸를 못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만득이를 찾는 소리가 계속 들려와 이번에는 내가 소대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직접 잠복호 위로 올라갔다.
“야아~ 넌 만득이가 아닌 것 같은데, 넌 누구냐?”
“만득이는 벌써 제대했다, 이놈아.”
“뭐 제대?”
“우리 병사들은 삼 년 복무하는데 너희들은 십 년 이상 한다며? 차라리 탈영해서 남으로 내려와라. 이 불쌍한 녀석아.”
“이 자식 말조심하라우. 너 남조선 장교냐?”
“그렇다. 장교다.”
“장교가 왜 그렇게 덩치가 작나?”
날 한 방 먹일 모양이었다.
“장교는 머리로 지휘하지 덩치로 하냐? 너희 군관 놈들은 미련하게 덩치만 크냐?”
놈이 한 방 먹었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다 싶어 연타를 날렸다.
“야~ 니들은 아버지가 둘이라며?”
“썅 간나 새끼, 뭔 소리야?”
“너를 낳아준 아버지, 또 어버이 수령. 누가 진짜 아버지냐?”
“이 썅 간나 새끼.”
하더니 갑자기 교통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KO 펀치를 날리고서 씩 웃으며 내려오려는데, “파- 박” 흙먼지가 발 끝 한 뼘 앞에서 튀며 뒤따라 총성이 두 발 울렸다. 정조준 연발 사격이었다.
놈들은 어버이 수령을 들먹이면 인사불성이 된다. 신성불가침이다. 조준점을 조금만 올렸더라면 지금쯤 난 국립묘지에서 코골며 자고 있을 뻔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그날도 놈과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우리 측으로 가까운 상공에서 솔개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있었다.
“야 이놈아, 저번에 네놈 사격 솜씨가 형편없던데 저 솔개 한번 쏴 봐라.”
“야 이 미친놈아, 저걸 어떻게 맞추나.”
“그러니까 네놈이 형편없는 놈이지.”
“그러면 장교 네놈이 자신 있으면 쏴 봐라.”
“그걸 못해? 이 장교님께서 쏠 테니 네놈은 똑똑히 봐 둬라.”
그러고선 바로 아차! 하고 후회가 되었다. 공중에 매단 물체도 아니고, 선회하고 있는 작은 솔개를 어떻게? 놈을 몰아붙이다가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렸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소대원들 앞에서 꽁무니를 뺄 수도 없어 소총을 들고 솔개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솔개는 조준 자체가 불가능했다. 평시 일등 사수 측에도 끼지 못하는 내 실력으로, 더구나 카빈 소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목덜미에 진땀이 솟았다. 맞혀야지, 맞혀야지 하면서도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멈칫거리는 사이 시간은 가는데 솔개가 멀리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나, 눈앞이 침침해졌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다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러곤 정적. 이윽고 터지는 소대원들의 함성 소리!
하늘엔 솔개 한 마리가 양 날개를 편 채 사선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참호 위로 소대원들이 뛰어올라 소대장을 목말 태우고 춤을 추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들아, 봤제? 봤제? 네놈은 우리 소대장님께 걸리면 한방에 뒈져.”
그것은 실력이 아니라 반드시 맞혀야지, 맞혀야지 하는 간절한 염원이 불러온 기적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북측에서 말을 걸어오던 놈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서 십 년쯤 지나 어느 부대 정보부서에 근무하며 전선의 북한군 동향보고서를 보니, 옛날의 그 GP에선 아직도 ‘만득이’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남한 병사는 복무기간 삼 년이란 말을 아직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즘도 북한군 복무 기간은 최소 7~8년, 길게는 10년 이상인데 우리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얼마일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복무 기간이 줄고 또 줄어 직업군인 출신인 나도 이젠 헷갈려 모를 지경이다. 숙련은 고사하고, 과연 총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훈련이라도 받고 배치되는지?
삭막한 GP 생활이지만 병사들에겐 일주일에 한 번씩 호사스런 일도 있었다.
평시 대북방송은 녹음된 내용을 고성능 확성기를 통해서 내보냈다. 체제 선전이나 귀순을 유도하는 내용도 있지만 당시에 유행하는 대중가요도 방송했다. 이연실의 <새색시 시집가네>, 은희의 <꽃반지 끼고> 등의 맑고 애잔한 노래가 바람을 타고 갈대숲 들녘을 건너 살벌한 북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매주 한 번씩 금녀의 지역에 여군 방송원들이 육성 방송을 위해 GP를 방문했다. 그럴 때면 평시 꾀죄죄하던 소대원들은 들떠서 전날부터 비누 세수를 하고, 바가지처럼 생긴 다리미에 나무를 태운 숯불을 만들어 바지를 다리곤 했다.
여군들은 차례로 육성 방송을 하고 나면 어두컴컴한 벙커에서 소대원들과 어울려 춤과 노래자랑을 했다. 그중에서 여군 하사 한 명은 늘 슬며시 빠져나와 좁은 소대장실로 찾아오곤 했다.
조용하고 심성이 따뜻하며, 얼굴이 창백하리만치 하얬다. 어울리지 않는 군복을 입은 그가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그는 무인도에 유배된 신참 소위가 쓸쓸해 보였던지 매번 소소한 선물을 가져왔고, 어떤 날은 내가 좋아하는 곡이 담긴 레코드를 사 오기도 했다.
비무장지대 소대장 십 개월쯤 되었을 때 새로 부임한 연대장이 시찰을 다녀간 후, 연대장님 면담이 있으니 연대 본부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유야 모르지만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와수리’ 막걸리를 맛보게 되었다며 신나게 철책선 후방으로 내려갔다.
연대장실에 들어가니 다짜고짜 앉아서 차 한 잔 하라시더니 오늘부로 보병대대 작전참모로 가라고 하셨다. 때문에 소대원에게 하직 인사도 못하고 소대장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새파란 소위가 대대 작전장교가 되었고 GP에서의 인연들은 단절되었다.
몇 해 전, 두 번째 수필집을 내고서 얼마 안 되어 모르는 사람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선생님, 혹시 옛날 ○○GP장 하셨던 신 소위님 아니신지요?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전 그때 방송하려 올라갔던 ○○○ 하사입니다.”
이럴 수가! 무려 47년, 아득한 세월이 흘렀는데. 그 후로 연락할 길이 없어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알았더라면 분명….
다시금 비무장지대 풍경과 소대장 시절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곳은 남북이 다투는 인간사와는 아랑곳없이, 눈 아래로 펼쳐진 평원에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야생화, 갈대숲, 물고기 떼가 무리지어 헤엄치는 맑은 시냇물이 굽이져 흐르고, 울창한 숲 사이로 방치된 논자리가 물웅덩이를 이루어 계절 따라 몰려드는 온갖 철새들, 여름날 더위를 식히려는 노루 떼가 웅덩이에서 텀벙대며 물장난치는 곳. 가끔씩 비무장지대로 진입해 수색이나 야간 매복을 하다가 부스럭거리는 고라니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곳이었다.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면 산과 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버리고 잠자리를 잃은 고라니의 목쉰 울음소리만 밤하늘을 헤맸다. 희뿌옇게 내려 덮인 눈구름 속에 설원은 백야처럼 밤낮의 경계도 사라지는 곳이었다.
그곳의 대자연은 나의 첫 근무지일 뿐 아니라 내 가슴에 아늑함과 막막함, 충만함과 공허함, 그 모두를 안겨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리움이 솟아오를 때면 그 시절이 한 편의 영상처럼 아련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