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생애를 돌아보면 중요한 동역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인생과 사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나바, 디모데, 실라, 누가, 에바브라, 에바브라디도 등등입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울의 인생의 고비마다 등장하는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는 두 번씩 바울의 후견인을 자처합니다. 먼저 9장 27절에서 회심한 바울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예루살렘 제자들에게 바울을 데리고 간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의 체험과 담대히 예수를 증거함을 소개합니다. 바울을 예루살렘교회로 인도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11장 25절에 안디옥교회에서 목회하던 바나바가 다소에 머물던 바울을 찾아가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공동 목회를 합니다. 바울을 안디옥교회로 인도한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과 사역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바나바가 바울의 후견인 역할을 했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나바의 이름이 사도행전에 24회(4장, 9장, 11장, 12장, 13장, 14장, 15장)등장합니다. 또 바나바는 바울 서신서에 5회(갈2:1,9,13, 고전9:6, 골4:10)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 그리고 초대교회 선교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입니다.
바나바의 성경에 첫 등장은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맡기는 장면입니다. 유무상통하는 초대교회에 아름다운 미담을 남깁니다. 본명은 요셉이고 별명이 바나바인데 권위자(위로자: man of encouragement)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격려하고 섬기는 바나바를 소개합니다. 바나바를 연구한 사람들은 바나바에 대한 새로운 조명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바나바의 삶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밖의 자료에서 풍성합니다. 콜맨(Kollman)과 밴던(Van Deun)은 교회의 전승을 언급하면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던 바나바는 젊은 학생 바울을 이미 알았다고 주장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나바가 생전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고, 유세비우스는 바나바는 예수님께서 파송했던 70문도 중의 하나였다고 전합니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의 후견인 자처, 공동목회 제안
리더십과 격려자 품성이 바울 통해 더욱 빛나
교부 터툴리안은 바나바가 히브리서의 저자라고 주장했고, 코니베어와 하우슨 등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나바라고 주장합니다. 바나바는 유대주의 복음전도자로, 바울과 함께 일한 것들을 고려하면 이 주장은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바나바를 히브리서 저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순교했습니다. 밴던은 55년경 구브로 살라미스에서 돌아 맞아 순교했다고 주장합니다. 바나바 고향 구브로의 살라미스에는 바나바를 기념하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이 수도원에는 바나바의 마지막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구브로 태생의 바나바는 처음에는 주님의 제자인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 바나바는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나라로 선교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구브로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살해당했다. 마가는 아무도 모르게 그의 시신을 살라미 교외에 있는 바위 절벽으로 박혀 있는 빈 무덤에 안장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바나바는 고향에서 순교하고 고향에 묻혀 있습니다.
바나바 이름이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우선 마가가 썼다는 바나바행전(Acts of Barnabas), 바나바서신(Epistle of Barnabas), 바나바복음서 등등입니다. 바나바의 명성과 권위를 이용한 문서들입니다. 몇 문서는 상당한 권위를 갖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문서들입니다.
우선 마가가 썼다는 바나바 행전(Acts of Barnabas)은 바나바와 동역자 바울의 삶을 소개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소와 구브로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록하면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했음을 소개합니다. 5세기와 6세기에 회람문서로 많은 성도들이 읽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국인 목사님이 쓴 동명이서(同名異書)가 있는데 전혀 다른 책입니다.
다음 바나바서신(Epistle of Barnabas)은 AD 70-130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입니다. 소위 앤티레고메나(Antilegomena, 신약성경이 될 것이냐? 아니냐? 논란이 되었던 문서)입니다. 바나바서신은 거의 성경으로 인정받을 뻔 했던 문서입니다. 그만큼 권위를 인정받은 문서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복음서(Gospel of Barnabas)입니다. 이슬람문서로 보이는 책입니다. 조잡한 언어와 황당한 주장이 담긴 바나바복음서는 바나바 이름을 도용한 발칙한 문서입니다. 바나바복음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주장하고 예수님 신성을 부인합니다. 또, 오시기로 예언된 그리스도가 이슬람 선지자 함무드라는 황당한 주장을 합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이 소개하는 바나바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행11:24)한 지도자로 격려자였습니다. 그의 리더십과 격려자의 품성이 바울을 통해 더욱 빛났습니다. 바나바는 중요한 순간마다 바울을 찾아가 돕는 바나바를 보며 그가 얼마나 섬김의 사람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친화력, 섬김의 마음을 가진 바나바는 사도 바울의 조력자와 후견인으로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바나바 까닭에 바울의 사역과 삶은 교회사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합니다. 바울은 왜 다메섹으로 갔을까요? 바울 시대에 다메섹은 어떤 도시였을까요? 바울 인생의 전환점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을 향하여 갑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바울 개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나아가 세계 교회사에 큰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 순교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는 죽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스데반과 예수 추종자들이 성전과 율법을 훼파하는 악한 세력들로 보였습니다. 율법과 성전은 바울에게 목숨처럼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돌에 맞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가면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예수님에 의해 파송된 사람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즉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을 자신의 사도성 근거로 삼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을 강조하는 사도행전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세 번씩 설명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회심은 교회사에 큰 의미 사건
이방의 대표, 국제적 도로망이 교차하는 교통 요충지
그러면 바울은 왜 다메섹으로 갔을까요? 다메섹은 시리아 즉 아람의 수도이자 이 지역 중심도시였습니다. 오래된 도시입니다. 노아의 아들 셈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넷 중에 하나가 ‘아람’입니다. 그가 거주한 지역이 아람 즉 시리아입니다. 다메섹은 시리아 대표도시입니다. 다메섹도 창세기부터 등장합니다.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창15:2)라고 주장합니다.
가나안 7족속 가운데 대표 족속이 아람입니다. 알려진 아람들은 이렇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창25:20), 야곱의 아내들이 아람출신입니다. 군대장관 나아만도 아람, 특히 다메섹 사람(왕하5:12)입니다. 아람은 이스라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이 소바왕 하닷과 전쟁을 벌일 때 아람은 소바왕 하닷을 도우려 하다가 다윗에게 크게 패하고(삼하8), 아합은 아람과 전쟁(왕상22)중에 죽음을 맞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다메섹을 이방의 대표로 간주합니다. 이사야는 다메섹 멸망을 경고(사17:1-3)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메섹의 심판을 예언(렘49장)했고, 아모스는 다메섹의 죄를 지적(암1:3-5)했습니다. 스가랴는 하나님 말씀이 이방 땅에도 있음(슥9:1)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은혜를 선포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3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바울 시대에 걸어서 엿새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다메섹은 국제적인 도로망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또 다메섹에는 안티레바논 산맥에서 흘러 내려오는 나아르 바라다(Nahr Barada,아미나)강과 도시 남쪽에 나아르 엘 아와이(바르발)강이 있었습니다. 이 강들이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보다 더 맑다며 분노했던 강들(왕하5:12)입니다. 이 두 강도 다메섹에 중요한 교통의 맥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메섹은 정치와 경제 중심도시였고, 나아가 종교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주전 9세기에 다메섹에는 하닷 신을 숭배하는 아람신전이 있었습니다. 하닷은 폭풍과 다산의 신으로 다메섹 수호신이었습니다. 로마정부는 주후 1세기에 아람신전에 주피터신전을 혼합하여 더 큰 신전을 만들어 다메섹을 로마정부 종교중심지로 삼았습니다.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주후 4세기에 하닷과 주피터 신전은 성요한 성당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8세기 초에는 그 자리에 이슬람 모스크가 들어섰습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고 새로운 사역의 비전을 전달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세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23장에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한 제사장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9장에 다메섹에 거주했던 제자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바울을 만난 아나니아를 기념하는 아나니아 기념교회가 다메섹에 있습니다. 다메섹 성벽에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피한 것을 기념하는 바울 기념교회도 있습니다. 다메섹은 바울이 핍박하러 갈 때부터 신앙인들이 많았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적극적 전도로 다메섹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한동안 다메섹은 기독교 도시였다가 이슬람에 정복당합니다.
AD 7세기 후반 ‘다메섹의 요한’이라는 걸출한 교회 지도자가 다메섹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전통신앙론”이란 책을 남겼습니다. 동방교회 신학을 집대성한 책인데 서방교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견줄 만한 작품입니다. 요한은 다메섹이 강력한 이슬람 영향권 아래 있을 때 다메섹에서 성장하여 건실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메섹교회는 동방교회 신학과 신앙을 지켰던 기독교 변증가 요한을 배출했습니다.
열성 유대인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청년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이 자신이 신봉하던 유대교를 훼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청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도 핍박을 했고, 다메섹에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러 갔습니다. 청년 바울은 예수 믿는 무리를 훼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새 삶을 삽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잠시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한 후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십수 년을 아라비아 사막과 다소에서 보냅니다.
갈라디아서 1:17-18에서 바울은 회심 후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라고 설명합니다. 더글라스 레드포드는 바울의 회심은 AD 34년이고 그가 아라비아로부터 예루살렘에 방문한 때는 AD 37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그리고 예루살렘 방문 후 약 10년 다소에 머뭅니다. 성경은 이 시간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없습니다. 이 세월을 바울의 숨겨진 세월(Hidden Time) 혹은 잃은 시간(Missing Time)이라고 합니다.
회심 후 바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사도행전 9:26-30에서 설명합니다. 바울이 복음 전도자가 되었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의심받고 살해위협까지 받고 급히 피신합니다. 사도행전 9:30은 “형제들이…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설명합니다. 이후 AD 46년,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교회 동사 목사로 갈 때까지(행11:25) 아라비아 사막과 다소(행22:3)에 머물렀다는 데 대부분의 신약 신학자들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13년 동안 바울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이 기간에 대한 입장도 약간 다릅니다. F. F. 브루스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메섹과 아라비아에서 약3년을 보내고(갈1:17), 예루살렘을 거쳐 고향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보냈던 기간을 11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반면에 폴 태너(Paul Tanner) 박사는 바울의 “길리기아와 수리아”에서 6년을 보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3년과 10년, 13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바울은 “담대하게(παρρησία)”(행9:27, 29) 간증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한 복음전파 장면을 설명할 때 “담대히”(4:19, 4:29, 4:31, 13:46, 14:3, 18:26, 19:8)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담대하게 증거 했습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13:46), 이고니온(14:3), 고린도(18:26), 그리고 에베소(19:8)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직후처럼 바울은 사역 내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바울이 보낸 13년은 그를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바울에게서 감추어진 세월(Hidden Times)은 그의 다메섹도상 체험만큼 중요합니다.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보낸 세월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신학과 소명을 다듬었습니다. 그 후 안디옥교회 사역과 선교 현장에서 바울의 모습은 확신에 차 있었고, 바울의 신학은 더 세련되고 성숙해졌습니다.
바울이 머물렀던 ‘아라비아사막’은 당시 나바테아 왕국이 지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2에서 다메섹에서 ‘아레다(Aretas)' 왕의 고관이 자신을 잡으려 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아레다 왕’이 나바테아 왕국 ‘아레타스 4세’입니다. 나바테아 왕국은 아라비아 반도 북동부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시리아의 다메섹 지역을 포함하는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주후 105년 로마의 트라야누스황제가 나바테아 왕국을 로마제국에 편입시키기까지 나바테아는 로마의 인접왕국으로 건재했습니다.
회심 후 아라비아사막에서 3년 다소에서 10년 행적 없어
선교활동 준비하며 신학을 정교화 하는 축복된 세월 추정
바울의 숨은 시간(hidden time)에 바울의 행적에 대해 합치된 견해는 없습니다. 이 시간 바울의 행적에 대해 대략 4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며 계시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입장은 바울은 이곳에서 갈라디아서 등에서 드러난 ‘이신칭의’ 교리를 정교화 했을 것으로 봅니다. 둘째 입장은 바울이 이 기간 중에 아라비아에 교회를 개척했고, 다소에서 사역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셋째 입장은 바울이 장래 선교활동을 준비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넷째는 바울이 이 기간 대부분을 실제로는 다메섹 전도에 매진했고 아라비아와 다소에는 단지 잠시 내려갔었다는 견해입니다.
바울의 숨은 기간에 대한 성경 본문들과 또 이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바울이 다소와 아라비아에서 선교활동을 준비하며 자기 신학을 정교화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단순히 중세수도사들처럼 기도와 묵상에 매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회심 직후 다메섹에서 즉시 전파했습니다(행9:20). 3년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 전파한 모습(행9:29)도 매우 활발하여 수도원적 태도와는 다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며 사역과 삶의 현장에서 자기를 다듬고 신학적 성숙을 꾀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부터 바나바로부터 안디옥교회 동사목사로 부름을 받기까지 그는 자신을 다듬었습니다. 바울은 회심과 더불어 부여받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아울러 장차 자신의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소중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바울의 숨겨진 세월은 그의 사역과 삶의 성숙을 주고, 구약과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정립하는 숙성을 허락하는 축복된 세월이었음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