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내온 많은 시간들을 생각하며...
오늘은 비가 오고 있다. 하늘이 슬퍼서 우는지 행복해서 우는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훌리고
있다. 나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슬픔과 아픔이 있다.
그것은 신장이 이상이 생겨 한 쪽은 제거를 하고 한 쪽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다.
살아 있는 한 쪽도 지금 현재로는 불가피 하다. 언제 한 쪽도 기능이 중단이 될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한 조금 더 글과 시를 창작을 해보고 얼마 남지 아니한 삶을 속에서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생각을 하며 적어 볼려고 한다,
지금 나이 44세로 자생원에 몸을 담고 28년이라는 시간을 간직 한 채 이 순간에 이르기 까지
살아왔다. 그 동안 나는 여기서 동생들과 같이 지내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형님 누나들을 알아
가면서 친하기도 하고 같이 놀기도 하며 그리고 초등학교를 여기서 다시 한번을 입학과 졸업을
했다. 또한 휠체어 댄싱과 수화차양으로 공연을 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생원을 알리고 멋진 활약을 했다. 참 휠체어 댄싱과 수화찬양팀은 내가 이끌러 갔다.
다들 공연을 하게 되면 곁눈짓으로 나를 보고 하니까.
지금 안 계시지만 이사장인 아버지계서도 같이 다니시면서 함께 하셨는데.....
나의 어릴 적에는 나를 났기 위해 할머니께서 등에 업으시고 좋은 데는 다 가보았지만 그래도
효능은 찾지는 못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할머니가 아니였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막내인지 모르고 그만 낳을려고 약을 먹었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아시고
낳을 때 까지 낳을려고 말리셨기에 내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고 하셨다.
나는 백일 사진도 못 찍었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쭉 뻗어기 때문에 사진도...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 이름을 지으셨고, 내 이름은 배정대인데
할머니께서 발음이 잘못되어서 배청대로 등록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집에서는 가족들이 주원이라고 부렸다. 정대보다 주원이가 부르기 쉬워서 불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얌전하셨다고 하신다. 할머니께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아무 말도 없으시고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셨도 아무 대꾸도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큰형, 작은형, 누나, 그리고 나지만 그래도 난 너무 .....
농촌에서 살면서 친구들과 동생들과 재미있게 지냈다.
내가 차츰 조금 자라니까 아버지께서 목발을 사 오셔서 목발로 걷기를 시작했다.
그 때는 아버지께서는 직장을 다니시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없이 살았다.
한 겨울에 강에 얼음이 얼었을 때 그 때 작은 형은 썰매를 만들어서 타고 나도 타보라고
썰매를 미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서틀지만 썰매를 타 보았다.
내가 다리에 힘을 얻어 걸어 다니는 데는 할머니께서 나를 업고 100동안 절에 가 침을 맞기
때문에 생각을 해본다. 그 때는 온전히 일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부산에 가 고모집에서 차를 타고 20분 되는 절에 가서 100일 동안 침을 맞았다.
머리에서 손가락, 발가락까지 침을 맞았다.
그 때는 아팠지만 꼭 참았다. 여름철이니까 한참 더울 때다.
여스님이 나를 귀여워하시고 침을 맞고 나면 아이스크림도 주시고도 하셨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무릎으로 일어서니까 너무 좋아하셔서 그때부터 빨래 줄을 잡고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고모집에서...
주말인 경우에는 가까운 친족집에서 가서 놀고 며칠간 잠을 자곤 했다.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하니까 방안에서 만화도 보고 동생들과 놀기도 했다.
100동안 왕래를 했지만 집에 가고 싶고 엄마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원낙 완고 하셔서 계속 다녀다. 그 때 한참 인기 있는 만화는 독수리 오형제
였다. 나보다 1살 어린 사촌동생은 바퀴벌레를 잡아서 놀기도 하였는데 그 때 마다 고모한데
꾸중을 듣기도 했다.
절에서 침을 막고 돌아오는 길에 놀이터에서 조금 놀기도 하고 철봉이 사다리로 된 것에
혼자 올라보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게에 가서 과자를 사곤했다. 할머니와 함께
가게 주인 아저씨도 나를 무척 좋아 하셨다. 따로 걸으면 과자도 주시고 아이스크림도 주셨다.
여름에 길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서 할머니께 사줘라고 했지만 안 된다고
배 아프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래도 난 먹고 싶었다
100일동안 침을 다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나는 좋았다. 엄마를 만날 수 있어서
난 그래도 할머니와 어머니를 무척 좋아한다. 또한 아버지와 큰형과 작은 형, 누나도...
집에 와 보니까 엄마가 어디 가고 안 계시니까 울음이 터져 버려다.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누나가 엄마는 나 때문에 어디에 가셨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난 엄마를 기다렸다.
할머니는 나에겐 좋다는 것은 다 먹었다. 작은 개구리도 잡아서 목구멍에 넣어 삼키기도 하고
탱자의 즙을 짜서 먹이기도 하셨다. 물론 오리도 잡아 먹이기도 하고 이름은 모르지만
생선을 다려 먹이기도 하셨는데 그것은 냄새가 나서 잘 먹지는 못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다 먹어야 한다고 하시기에 나는 참고 받아 먹었다.
오리고기는 무척 많이 먹었다.
마을 아저씨들께서 나를 아시고는 돈을 모아서 보행기를 제작을 해 주셔서 그것을 밀고 연습을
했다. 다리에서 왔다 갔다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엄마는 잘 모르지만 수기를 잘 쓰셨다. 적어 보내기만 하면 라디오에서 엄마가 쓴 수기가 들려온다. 또한 우리 가족들도 라디오에 나오기도 하고 방송에서 와서 나를 사진을 많이 찍고 갔다.
그 때는 방송국에서 동요를 몇 시간 마다 들려 주곤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내동생 코슬머리
개구쟁이 내동생이 나오면서 나의 사진도 함께 나와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좋아했다.
누나는 무척 질투을 해야 하나 모르겠지만 나를 좀 싫어했다. 그래도 난 그것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 두시고 오이 농사를 하셨다. 경운기를 배워 운전을 하시면서 아침이면
밥을 먹으시고 일 하려 나가시고 하셨다.
나는 그때 너무 오이를 먹고 배가 아파 설사를 하기도 했다.
추석이나 설이면 먼 친족들이 오면 상민이와 함께 놀았다. 재미있게 엄마와 아빠, 그리고
고모님과 고모부는 방에서 화덕에 오징어를 구어 드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셨고
우리는 놀면서 구어 놓은 오징어를 먹으며 신나게 놀았다.
참 추석이나 설이면 엄마는 준비를 하신다고 빠쁘셨다. 그런대도 엄마는 준비를 하는 중에서도 나를 걸리는 연습을 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ㄱ에서 ㅎ까지, 가에사 하까지 가르치셨고 그 때부터
나는 받침이 없는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엄마는 누나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라고 하셔서 수학을 배워는데 어려워서 누나한데 혼나고
그러면서 나는 숫자와 받침이 있는 글자를 배웠다.
지금도 그 말이 그 문장이 생각이 난다. “가만히 귀를 기울려 들어 보세요.먼 산골짜기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누나가 시키는 대로 큰소리로 읽으며 공부를 누나와 함께 공부를 하였던
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도 난 1에서 10까지와 21에서 30까지만 알고 그 뒤에 수는 몰랐다.
그런데 나도 몰랐는데 어느 날 종이와 펜이 있어서 수를 적었는데 1에서 100까지 적었다.
나도 모르게 적었는데 저녁에 아버지께서 보시고 너무 좋아하셨다. 내가 스스로 수를 깨우쳤다고...
여기서는 미용실에서 와서 이발을 하는데 집에서는 엄마가 나를 업고 시내로 가서 이발을 하고
목욕은 부엌에서 큰 대야에서 시켜주셨다.
가끔은 시내로 가서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엄마와 함께.
그렇지만 그곳에서 간호원이 있으면 엄마는 모르는 체 하며 나를 빨리 안고 밖으로 나오셨는데... 나는 왜 간호원에 보이면 안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큰 형은 군대 제대를 하고 오토바이를 운전을 배웠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운전을 배워 나를 태워 한 바퀴를 돌고 했는데... 누나도 마찬가지로 참 그리고 작은 형도 오토바이를 배웠다.
이제 이발은 형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왕래를 하니까 엄마는 수울해 하셨다...
큰형도 농사꾼이 되어 아버지를 도운다고 경우기를 배웠다. 서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형은
경운기 운전하는 것을 배웠다. 한번은 형이 나를 태워서 우리 밭에 가보았다.
내가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니까 엄마도 허락을 하고 밭에 가 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동네 이장님으로 열심히 동네 일을 도우며 농사일을 하셨다.
참 나의 집은 ㄷ형자로 된 집이고 개를 10말리를 키우고 닭도 키웠다.
그래서 그럴는지 몰라도 난 개만 보면 스다머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혼자 집에 있을 때는 개하고 놀고 때론 이웃집에 사는 동생들이 와 놀곤 했다.
주말이면 집에서 형과 누나와 TV도 보고 누나와 종이로 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소꿉놀이도
했다. 명절이면 삼촌이 오셔서 용돈을 주시면 엄마에게 맡겼고 그것로 장난감을 사 놀았다.
그때 나에게 인기 있던 영화는 타잔, 만화영화는 마징가, 그로이저 엑스, 아이젠버그였다.
그리고 꼬마 자동차 붕붕, 호호아주마를 보곤 했다.
형이 학생일 때 형에게 몇 번 꾸중을 들었다. 그것은 샤프를 망가 드려서 였다.
하도 심심해서 샤프를 분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에게 잔돈이 생기면 형 차비하라고 주곤 했다. 엄마가 보고 좋아하셨다.
그래도 작은 형이 내가 좋아하는 그로이저 엑스를 사가지고 와서 조립을 해 주웠다.
나는 형에게 변신을 할 수 있는 것을 사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난 그것 가지고 놀았다. 가지고 다니면서... 큰형도 사오정 비행기를 조림해 주고 또한
작은 만한 탱크도 주었다.
큰형도 나를 업고 밖으로 나갈 때도 있었다. 나가서 바람도 씌어주고 국경도 해 주었다
농사를 하면서 가게를 했다. 엄마가 맡아서 과자와 음료수, 장난감도 그리고 저녁이면 곰국도
파시곤 했는데 그 때가 참 좋았다. 저녂 때면 가게에 가서 곰국으로 저녁을 먹곤 했다.
길 건너편에도 작은 만한 가계가 있었다.
가게 뒤에는 친족집이었다. 나는 친족집이라는 것도 모르고 동네 아이들과 놀고
한번은 꾸중을 들었다. 몰래 감나무에 있는 감을 아이들과 따먹고 들켜기 때문이였다.
우리 집 뒤에도 감나무 두 그릇을 키웠다. 감도 먹고 밤도 많이 먹었다.
밤나무도 있었는데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 후 나는 알았다. 친족의 집이라고...
친족은 이사를 가고 그 집은 다른 사람이 와서 살았다. 나는 그 집 아이를 알게 되어 허물없이 사이좋게 놀았다. 나 때문에 다쳤지만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놀았다. 이름은 서병환이라는 아이였다. 그 아이에 집도 몇 년 있다가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집을 허물고 오이, 가지를 파는 간파장이 되어 버렸다.
그 후에 나는 어떤 할머니 손에 이끌리어 거기서 몰래 오이나 가지를 먹곤 했다.
좋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집에도 전화가 생기다는 것이다.
전화도 걸어보고 받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전화비가 올라가는 바람에 열쇠를 잠가버렸다.
아빠, 엄마가 없을 때는 잠겨 있고 있을 때는 열쇠는 풀어 놓은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와서 행패를 부릴시 때는 엄마와 누나 내가 가계 방으로 피신을 하기도
하였다.
내가 가게 방에 있으면 아저씨들이 내가 귀엽다고 하시면서 과자를 사주시고 어떤 아저씨는
나만 보면 코를 맥주를 주곤 하는데 나는 그 아저씨 보고 아야 아저씨라고 불렸다.
가끔씩 오시면 나만 그렇니까 울기도 하고 그랬다.
여기는 아프거나 찢어지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거나 궤몄는데 내가 살았던 동네는 병원은
없었다. 내가 가게 옆 국기가 있는 데서 놀다가 크게 다쳤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데도
엄마의 말을 무시하다가 자갈밭에 넘어 졌어 머리에 구멍이 났다.
병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수근으로 들려 치료를 받아 다 났었다. 그 때는 꼼짝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일회를 앓았다. 갑자기 기침이 시작을 하자마자 멈추지 않고 계속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옆집에 사시는 아저씨께서 오셔서 진찰을 하시고는 탄약을 주셨고 난 탄약을 먹었는데
쓰서 목지 못했다. 그래서 먹고 난 뒤에 사탕을 먹고 그랬다.
기침은 다 완쾌되고 그 후로 우리 가족은 믿던 절은 그만 두고 옆집 아저씨가 전도를 한 그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에게 411장(563장을) 책 뒤편에 적어 주시면서 저녁에 잘 때
부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563장을 부르면 엄마가 부르시면서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난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엄마를 생각하며 저녁마다 그 가사를 읽곤 했다.
난 집에서 동화책을 읽지 못했다. 위인전, 옛날 이야기로 된 책을... 아주머니가 동화책을 가지고 오셔서 사라고 하셨고, 나는 엄마한데 사 줄라고 했는데 엄마는 형편이 안 된다고 하며 돌려
보내셨다. 난 동화책을 읽고 싶었는데... 가지고 싶었고...
어느 날 나는 딸기 밭에 가보고 싶어서 이웃 동생들과 다리를 건너 보행기를 밀고 간다.
엄마도 있었다. 거기서 나는 동생들과 놀았다. 그리고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고 누나가 나를 업고 집으로 가면서 나를 좀 싫어했다. 나는 그 때 생각하면 누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 때만 해도 조금은 말성을 피우는 아이였고, 아버지께 몇 번 꾸중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하루는 가계 방안에 있을 때 어떤 아무머니께서 아기를 데리고 와서 잠깐 맡기셨는데 나는 아기 봐 주었다. 아기가 올지 않게 해서 아주머니께서 보시고 좋아하셨다.
방안에서 큰 곰인형을 안고 자고 베고 자고 그랬다. 난 엄마에게 동생을 가지고 싶다고 했는데... 엄마는...?
참 나는 소변을 가리는데 가계에서 밤에 잠을 자다가 소변을 조금은 쏴버려다. 나도 모르게...
엄마는 계속 하니까 밤에 나를 업고 먼데 어두운 곳에 가서 버릴라고 가서 버릴라고 하셨는데
나는 울면서 버티면서 고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엄마는 다시 와서 함께 잠을 잤다.
여름 때 어느 날 누나와 내가 전쟁을 했다. 밤에 엄마와 함께 자려고 타투고 울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등이나 다리를 뜨들이거나 주물어 줄 때도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시원하신다고 좋아하셨는데...
내가 조금 자라서는 장난감으로 놀지 않았다. 대나무 가지고 놀고 활을 만들어 놀곤 했다.
할머니께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대나무를 짚고 밖으로 나가서 놀기도 했다.
아이들과 같이 영화에 나오는 검객처럼...
참 내가 다리에 힘을 얻어 대나무를 짚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나를 계속 걸리는 연습
뿐만 아니라 이모님이 다리 보조개를 맞추어 주셔서 그것을 차고 운동을 했다.
그래서 걸을 수 있었던 이유다. 대나무 없이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지만...
보조개를 차고 마당에서 놀고 밖에 나가 놀고 엄마가 형이 있을 때는 다리를 고정을 시켜
방에서 2시간을 서서 있었는데 그때는 다리가 아팠고 넘어질까 무서웠는데 누나가 옆에 있어서
겁을 내지 않고 참았다...
그래도 이모님이 해주셨는데 ... 이젠 가족이 보조개를 차주고 그랬는데 차츰 요령이 생겨
내가 차보았다. 가족이 보고 좋아했다. 내가 할 줄 안다고...
가끔씩은 이모집에 가면 이모님이 공책과 연필을 가지고 오셔서 내 이름을 쓰는 연습과 수를 적는 연습을 시켜주셨고 이모님이 하시는 미용실에 가면 이발도 해 주셨다...
집에서 나오면 먼저 앞에 본다. 산이 가로질러있고 차가 오고 가는 도로와 기차가 오고 가는
기찻길도 있다. 놀다 보면 기차가 지나가게 되면 기차를 세어 본다.
차가 지나가면 차를 타고 먼데 가보고 싶고... 가끔씩은 엄마가 같이 갈 때도 많았다.
겨울이면 딸기를 많이 먹었다. 오이농사를 하다가 딸기 농사를 했기 때문에 많이 먹었고,
염소도 키웠다. 나는 아기염소를 보고 좋아했고 염소를 밖에 매워 두면 나는 지켰 볼 때 도
있었다.
또한 돼지를 키웠다. 팔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였다. 잡으면 저녁에 가족들과 이웃집 어른들이
모여 돼지 축제를 열기도 하고 그것으로 밥찬으로 해먹었다.
그래도 엄마 요리솜씨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여름인가 몰라도 한 번은 십것 했다. 집에서 형하고 나하고 있을 때 형은 어디 간다고 그릇에 달걀을 넣고 간장도 조금 넣어 비벼 같이 먹었는데 뒤에 탈이 나서 질색을 해서 안 먹었다.
생각에는 김밥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몇 년 뒤에 생각이 나고 먹고 싶어서 지금까지 먹고 있다. 잡채도 마찬가지...
더운 여름이면 우리 집 뒤에 있는 도랑에 가서 물놀이하고 놀았다. 나는 도랑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큰 다라이를 누나가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물을 넣어 나는 거기에서 놀기로 하고 누나와 친구는 도랑에서 놀았다.
난 처음에는 물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누나가 바가지에 물을 떠서 위에서 부은 것이 싫어서
싫어했다. 적응을 하니까 여름이면 수도갓에 있는 큰 물통에 들어간다.
형은 도랑에 가면 금붕어, 물방개를 잡아 와서 작은 물통에 물을 담아 그기에 넣어 나보고 구경도 하고 학습도 하라고 했는지 몰라도 나는 좋아했다.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몇 칠간 우리 마을에 머물었고, 사람들은 강에서 조개를 잡았다. 조개가 너무 많이 잡아서 가지고 갔다. 가시면서 조개를 조금 나누어 주고 갔다.
그 것으로 국도 해먹고 반찬으로 해먹었다.
한편으로는 아빠와 엄마 나 잘 모르겠지만 낚시하려 간 본적 있다. 바닷가에 가서.
호레기도 많이 먹었다.
가끔은 작은 형이 친구들을 데리고 와 라면을 끊여 먹을 때도 있었다. 나도 빠짐없이 라면을 먹었다. 그래도 형 친구들을 나를 아무 이상 없이 대해 주었다.
또한 작은 형은 피리도 잘 불렸다. 만화에 나오는 마루치 아라치의 곡을 불렸다.
형은 그림도 잘 그렸다. 아젠버그의 나오는 주인공을 그렸고 가끔씩은 총싸움 놀이도 해주었다.
그 때는 재밌게 놀았는데...
그리고 형은 찰흙을 사서 군함을 잘 만들다가 그냥 그만 두었다.
어느 날 작은 형 여자친구가 왔다. 장남감 부록을 사가지고 나에게 선물으로 주었는데 나는 부록을 가지고 놀았다. 그 누나는 참 예뻤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시면 나는 작은 방에 들어가 꼼짝없이 갇혀 버린다. 손님이 가실 때까지
나는 그 누나가 사준 장난감 부록으로 가지고 놀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방에 있으니까 갑갑했다. 작은 방 창문으로 내다보면 보지 말라고 하셨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실 때면 나는 이웃집에 맡겨졌다. 이웃집 누나는 잘해 주었고, TV도 보게
해 주었다. 준화라는 형이 있는데 그 형도 나에게 잘해 주었다.
우리 집에 오면 나하고 놀아주고도 했다.
내가 아주 재밌게 본 인형극이 있었다. 그것은 삼국지라는 인형극이다.
TV에서 6시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을 보면서 나도 유비처럼 되겠다는 생각도 있고 동생들하고
놀 때도 나는 유비를 하며 놀았다.
그 때 성일이라는 아이의 할아버지께서는 나하고 노는 것을 보고는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나하고는 놀지 말라고 하셨다. 아마도 내가 장애인 병신이라고 놀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아무 말도 기가 쭉 죽어버렸다.
우리 동네에는 나 밖에 장애인이 없었다.
가장 슬픈 일이 있었다. 그것은 큰형의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말이다. 그 형은 나에게 참 잘해 주었는데...
나도 한번은 입을 옷이 없어서 스타킹하고 치마를 입은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좀 수줍움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형이 엄마 몰래 여자 옷을 입는 적도 있었다. 다 비밀로 하고
보행기로 밖으로 나가 강을 보니 한 아이가 나루터에서 돌을 던지는 바람에 오른쪽 귀를 맞아
아파서 고생을 했다. 귀에 고름이 생겨 고약으로 치료를 했다. 손닿기만 해도 너무 아팠다.
그 아이에게 사과를 받았다.
집에서 아무도 없을 때는 미싱에 밑에 있는 것을 손으로 누르며 차로 생각을 하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동네 아이들과 같이 누나도 놀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차 놀이를 하면서 차표도 만들고 그렇면서 놀았다....
눈이 만이 오는 바람에 딸기 농사를 망쳐버렸다. 그래서 토끼도 기르고 새도 키워봤지만 갚을 것이 없어서 아빠와 엄마, 큰형은 부산으로 떠나 버리고 할머니 작은 형, 누나, 나가 남았는데
이웃집 어른들이 와서 겁을 주고 그 때 나는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때는 작은 형은 군대를 다니고 누나는 미싱을 하는 회사에 치직을 해서 다니고 나는 밖에서 놀았다. 작은 강아지를 키웠다. 이름은 쫑쫑이 누나가 지은 이름이다.
쫑쫑이는 풀어 놓으면 어느 곳이든 다니면서 집에는 있지 않는다. 내가 크게 쫑쫑이라 부르면
이름을 듣고 달려와 좋아서 꼬리를 흔든다. 내가 과자가 있으면 주고 같이 놀 때도 있었다.
작은 형은 오면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바람도 씌어 주고 했다.
나는 좋았다. 그래도 작은 형이라도 있어서...
참 그 때는 건빵을 많이 먹었다. 큰형과 작은 형이 휴가로 오면 건빵을 가지고 왔는데
간식으로 먹고 기름에 튀겨 먹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또한 후라이 판에 대어 먹기도 했다.
참 우리 쫑쫑이가 바람을 피우다가 임신을 했다. 그런데 집을 따뜻하게 해주었지만 쫑쫑이는
추운 마루 밑에서 강아지를 8마리나 낳았다. 그런데 2마리는 죽었다.
고모집에서 와서 한 마리를 데리고 가서 키우고 섬에 사시는 친족들도 와서 한 마리를 데리고 갔다. 다 나눠어 주고...
그 마을에서 살다가 할머니 친구집에서 살기로 하고 동네 이웃집 아주머니들과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이사를 했다. 참 쫑쫑이는 할머니께서 이사를 한다고 해서 시장에 가서 팔고
경운기에 짐을 실고 가서 인사를 하고 작은 방에서 할머니와 형들과 누나, 나 생할을 했다.
누나는 직장에서 하다가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큰형도 작은 형은 형도 부산으로 가버렸다. 그래도 큰형은 내가 자고 있는 고양이를 근들이면 고양이가 싫어하고 오지 앟는다고 하면서
자게 했다. 그래서 고야이도 좋아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누나만 데리고 가서 TV를 시청을 했다. 누나는 모르는 것 잘 가르쳐 준다고
나도 보고 싶었는데. 그 때 인기였던 영화는 에어올프였는데...
내가 형처럼 얌전하게 있었으면 TV도 볼 수 있을 텐테...
그곳에서 적응을 하며 아침에 나와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하며 마당에서 놀았다.
그 곳에도 잔디가 있어서 그 잔디에서만 놀았다.
어느 때면 밖으로 나가 큰 나무 밑에서 놀고 어느 때는 어느 할머니 집에서 가서 집을 봐주며 놀고 그랬다...
옆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오이를 수확하면 가서 얻어먹기도 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비행기를 접는 법를 가르쳐 줄라도 했는데 그 아이는 바로 가르쳐 주웠다. 그 비행기는 독수리비행기...
가끔씩은 누나가 찾아온다. 오면 신발을 사가지고 왔다. 누나는 다음에는 데려 간다고 해가지고
날 안 데리고 갔다. 엄마 곁에 간다고 좋아했는데... 그 후로 엄마는 지금까지 뵌 적이 없다.
내가 크면 헬리콥터를 태워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교회에서 와서 예배를 드리고 이단 교회에서 와서 설명을 듣고 했다.
난 그래도 거기에 빠지지는 않았다.
목사님께서 홍익재할원 원장님을 아신다고 거기로 보내기로 했다. 가니까 원장님이 바뀌었다고 하시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3번 정도 갔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보를 알아 자생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어 거기서 바로 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왔다. 충무시로...
내 나이 15세 때 자생원이라는 곳으로 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들어와 몇 년이 흘어 휠체어 댄싱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합창, 수화,등
공연을 많이 했다. 함창을 하며 수화도 많이 배우며 노래도 배웠다. 참 좋았다
부르면 부르는 곳에 가서 합창도 하고 수화찬양 공연도 하고 재미있게 보냈다
참 난 초등학교를 두 번 이상이나 나왔다. 교향에서 처음으로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입학을 했다. 하자만 난 장애인이라서 학교에 가지는 못했다. 부모님은 농사하신다고 바쁘셨고 형들은 학교에 다니니까 나는 못 가고 책만 받아서 누나랑 공부를 했다.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바뀌면 집에 오셔서 이야기도 하시며 학교에 가시곤 했는데...
자생원에서 형들이 검정고시를 한다고 하니까 그 뒤에 나도 중학교 검정고시를 열심히 해서 몇 년 뒤 합격을 했고 고등학교는 장애인시설 잠포학교에 가서 고등학교를 공부하고 마쳤다.
학교생활이 재미가 있었는데 내가 좀 방항을 해서 좀 그렇다.
잠포학교에 간다고 합창단, 수화노래와 휠체어 댄싱을 빠졌다. 3년 동안 학교에 가니까 참가하지는 못했다. 동생들에게 맡기고 나는 학교에 다녔다.
그 후 친구들이 자립을 한다고 해가지고 자생원에서 나갔다. 그 후 친구가 나아야 해서 용기있게 말을 하고 나왔다. 하지만 안 보낼려고 3번이나 사무실로 갔다. 그래도 나는 나왔다.
지금은 복지관에 다니며 보치아도 하고 탁구도 배우며 행사에도 가고 축제에도 가고 여행도 가고 내가 가지 못한 해외여행도 가고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
병원은 큰 병원으로 옮겼고 4년이나 쉬었으니까 이제라도 시와 동화나 글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