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분별하고 따른다는 것.
1. 본문에는 아합의 마지막 이야기와 함께, 아합과 동맹을 맺었던 남 유다의 왕 여호사밧, 그리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합은 어느 왕보다도 많은 선지자들을 만났던 왕이었습니다.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된 하나님의 말씀과 거짓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함으로써, 엘리야의 예언대로(21:19) 멸망의 길을 가고 맙니다.
2. 아합 왕의 시대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기가 있었습니다(1,44). 벤하닷과의 전쟁 이후 아람과 평화가 잠시 찾아왔고, 왕국의 분열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던 전쟁이,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즉위하고 나서 평화로운 관계로 돌아서게 되고, 아합과 여호사밧은 결혼동맹까지 맺게 됩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좋은 것보다, 거룩한 것을 택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계산에 좋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늘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3. 아람과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여호사밧의 방문에 맞추어, 자신의 길르앗 라못 탈환 계획을 말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갓 지파에 할당되어 도피성으로 지정된 성읍이었습니다(신4:43; 수20:8). 그러나 아람에게 빼앗겼고, 아합은 아람 왕 벤하닷과의 약속에서(20:34) 그 땅을 돌려받으리라고 예상하였으나, 그 일은 실행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4. 하지만 경건한 왕이었던 여호사밧은, 그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주신 땅이었으니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여호사밧은 경건한 왕답게 아합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자고 제안하고,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렀습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보장해주었습니다.
5. 여호사밧은 이들이 아합에게 고용된 거짓 선지자들인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여호사밧이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는 없는지 묻자, 아합은 사실 미가야가 있는데(왜 미가야만 있겠습니까? 엘리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아마도 거처를 확인할 수 없는 선지자였던 듯합니다), 그는 자기가 듣기를 원하는 예언은 하지 않고, 싫은 것만 예언해서 미워하노라고 하면서도, 여호사밧의 강권에 못 이겨 그를 부릅니다. 이 와중에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철로 뿔을 만들어(이 거짓 선지자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탁월한 커뮤니케이션을 하였다), 이 뿔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습니다.
6.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들은 미가야에게 할 말을 요청합니다(12). 다른 선지자들이 다 그렇게 말하니 너도 그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왕의 기분에 맞추어 말하라는 것입니다.
7. 미가야는 처음에 왕에게 전쟁에 나가 승리를 얻으라고 말하지만, 아합은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압니다. 자기가 진리를 듣기를 거부하므로, 미가야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거짓된 이야기를 하는 줄 분별한 것입니다. 결국 미가야는 이 전쟁에서 왕이 죽을 것을 예언하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거짓 선지자들이 어떻게 사단의 메시지를 들어 전달하고 있는지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는 선지자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고난입니다. 그는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아야 했고, 아합은 전쟁에서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물과 고생의 떡을 먹이라고 명하고 그를 옥에 가둡니다.
8.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것이 아합이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가야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던 아합은 여호사밧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변장하게 하고, 자기는 일반 군인들 속에 들어가서 전쟁을 하는 꾀를 부려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지만, 사람은 속아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를 겨냥하여 쏜 화살이 아니었지만, “무심코” 쏜 화살에 그는 맞았고, 그것도 갑옷 이음새 부분의 가슴을 맞아서 치명상을 입고 결국은 피를 쏟고 죽고 맙니다. 그가 병거에 흘린 피는 예언대로 개들이 핥았습니다. 이어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9. 여호사밧은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부친 아사의 길로 행했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놓치지 않고 그의 실패도 지적합니다. 그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역대하 기자는 그가 산당을 제거했다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대하17:6). 그는 아마도 우상을 섬기는 산당들을 제거하였지만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산당들은 제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산당들은 성전이 세워진 후로는 제거되었어야 했습니다. 이런 산당들이 백성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었기에 여호사밧은 제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더욱 강한 개혁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10. 여호사밧의 두 번째 실패는 불결한 동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악한 왕 아합과 동맹을 맺어, 자기 아들을 위해서 아합과 이세벨의 딸을 며느리로 맞음으로써, 유다 역사 가운데 최대의 위기를 초래합니다(왕하8:16~18; 대하18:1). 또한 그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와도 동맹관계를 지속하여, 배를 제조해서 오빌에서 금을 얻어오는 무역을 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배를 폭풍으로 파선케 하심으로 이 동맹무역을 막으셨습니다. 아하시야가 재차 여호사밧에게 동업을 요청했을 때 여호사밧은 거절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 동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11.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세 가지 길로 행하였는데 이것 모두가 악한 것이었습니다. 아합의 길, 이세벨의 길, 그리고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성경 기자는 그의 삶을 정리합니다. 게다가 그는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를 섬겼으며, 바알을 섬김으로써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12. 진리를 따르는 길은 외롭고 고독하고, 고생이 따르는 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400명의 선지자가 이구동성으로 승리를 외쳤어도, 진리는 한 사람 미가야의 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르는 것은 때로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미가야가 진리를 따르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순종했을 때, 그에게 따라온 것은 뺨을 맞고 감옥에 갇혀서 고생의 떡과 물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2000년의 교회 역사가 한결같이 보여주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진리의 편에 선다는 것은 고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을 원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교회가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사는 길이며, 약속이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이 열왕기상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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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동맹(1-4)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
우리는 열왕기상 21장에서 ‘나봇의 포도원’에 관해서 나누었습니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으로 채소밭(또는 정원)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나봇은 아합왕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럼에도 아합왕과 이세벨왕비가 어떻게 나봇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서, 그 포도밭을 빼앗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분은 그 앞에 있는 20장과 연결이 됩니다.
아람의 벤하닷왕은 두 번에 걸쳐서 북이스라엘을 침략해 왔습니다. 벤하닷은 북이스라엘의 은이나 금과 같은 재산은 물론 여인들과 자녀들까지 모두 자기 것이니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람(시리아)은 지방 분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세가 컸던 벤하닷왕 중심으로 32명의 왕이 연합해서 북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파죽지세로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 벤하닷왕은 온 사마리아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장담했지만, 그는 32명의 왕과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정도는 가소롭다는 의미였습니다. 게다가 아람의 연합군은 10만 명이 넘었고, 북이스라엘 군대는 7,232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전쟁은 북이스라엘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임에도 승리했습니다. 그것도 대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고, 하나님께서 신비한 섭리의 손길을 내미셨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1차 전쟁이었습니다.
1차 전쟁이 끝나고 한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힘을 기르고 미리 할 일을 하고 있으라”라고 조언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람이 또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람왕의 신하들도 벤하닷왕에게 조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기 때문에 평지에서 싸우면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그 조언이 그들에게는 최선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몰랐습니다. 또한 1차 전쟁 때 출전했던 왕들(지방 영주들) 대신에 총독(군 지휘관)을 세울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2차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군대는 ‘두 무리의 적은 염소들’과 같았고, 아람 군대는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전쟁에서도 북이스라엘은 결코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또 이겼습니다. 이번에도 크게 이겼습니다. 전쟁에서 아람 군대 10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27,000명은 성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서 죽었습니다. 아합왕은 이처럼 2번에 걸쳐서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와 섭리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전쟁 후에 아합왕은 진멸해야 할 아람왕 벤하닷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심판의 선고가 있었습니다.
(20:42)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래서 지금 아합왕은 근신 기간을 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합왕이 하나님을 등진 삶을 사는 일에는 한결같았습니다. 그 후에 북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3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아합왕은 아람과의 2번의 전쟁,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긴 것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섭리였음에도 그는 그것이 자신의 능력과 지략이 뛰어나서 이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적은 병력으로도 엄청난 대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또다시 전쟁해도 이길 수 있고, 빼앗긴 땅이나 점령당한 땅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년째 되는 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 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남유다의 여호사밧왕이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을 방문했습니다.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보다 남쪽에 있음에도 ‘올라갔다’라고 하지 않고, ‘내려갔다’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루살렘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최고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지방을 갈 때는 모두 ‘내려간다’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설악산이나 지리산, 한라산과 같은 곳에 있는 산간 지방이 서울보다 훨씬 해발고도가 높아도 내려간다고 합니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 최고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사밧왕이 아합왕을 방문했다고 하는 것은 지금 두 나라의 관계가 우호적임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여호사밧왕의 아들 여호람(요람)이 아합왕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쪽 왕가와 북쪽 왕가가 결혼하여 서로 싸우지 않게 된 것은 긍정적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남쪽도 북쪽을 닮아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기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에는 모두 19명의 왕이 있었는지만, 그중에서 단 한 명도 하나님을 향하여 산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기 때문에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에 남쪽에는 선한 왕과 악한 왕이 공존합니다. 그중에서도 여호사밧왕은 히스기야왕과 요시야왕과 더불어 3대 선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합왕을 찾아간 것은 바르지 못한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맞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 맞는지 늘 확인하는 것은 믿음생활의 지혜이자, 성숙으로 가는 디딤돌과 같습니다.
(3-4) 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여호사밧왕이 아합왕을 방문했을 때, 아합왕은 자기 신하들에게 길르앗 라못은 우리 땅인데도 다시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했습니다. 그 땅은 빼앗긴 것도 사실이었고,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2차에 걸친 전쟁에서 패전한 아람이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3년이 지나도록 시행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합왕의 자기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그 땅을 되찾을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2차에 걸친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북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것이었음에도, 아합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략과 전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으로 약 40km, 갈릴리 호수 남쪽으로 약 22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요단강 동쪽에 있었던 도피성 3곳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곳은 군사적인 요충지였고, 올리브와 포도 수확이 풍성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또한 여호사밧왕도 아합왕이 자신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러가지 않겠느냐는 말에 “내 생각이 바로 임금님의 생각이며, 내가 통솔하는 군대가 곧 임금님의 군대이고, 내가 부리는 말이 곧 임금님의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전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의기투합은 바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은 아합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통로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이 단순히 사람과만의 의기투합, 세속적 가치관만으로의 일치는 오히려 자신을 사지(死地)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아합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분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승리 예언(5-12)
여호사밧왕의 합류 승인을 얻은 아합왕은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얻은 듯하여 당장이라도 길르앗 라못을 찾아오기 위해서 출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왕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5-6)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여호사밧왕은 출정하기 전에 ‘먼저(문자적 의미: 오늘, 지금, 당장)’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여호사밧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보자고 하는 것은, 아합왕이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보고 그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왕의 제안에 아합왕이 부른 사람이 선지자 400명이었습니다. 이 선지자들이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섬기던 선지자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언제나 왕이 원하는 답만을 주는 ‘관변(官邊) 선지자’ 또는 ‘어용(御用)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아합왕은 사람들의 반대하는 일을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일 때, 이런 선지자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다고 밀어붙였을 것입니다. 관변 또는 어용 선지자 400명은 한목소리로 길르앗 라못을 임금님의 손에 넘겨주셨으니,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왕은 선지자 400명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외에 밖에 우리가 물어볼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는 또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아합왕의 대답은 사뭇 충격적입니다.
(8)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미가야(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선지자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했다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등진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 400명과는 다른 길을 길었던 것입니다.
바른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나 상대가 원하는 것만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9-11) 이스라엘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왕좌에 앉아 있고 모든 선지자가 그들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아합왕은 한 내시를 보내어 미가야 선지자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두 왕 모두 왕복을 입고 광장에 있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고서 이 일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일이 공식 행사임을 알려줍니다. 선지자 400명이 말하는 집단 예언을 듣는 것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공식 행사였던 것입니다. 즉 아합왕은 아람과의 전쟁의 정당성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지지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특히 선지자 400명 중의 하나인 ‘시드기야(여호와는 나의 의로움이시다)’는 그의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자기가 만든 철 뿔들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으로 아람 사람을 진멸할 때까지 찌를 것입니다”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철 뿔’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아합왕이 막강한 힘과 능력으로 길르앗 라못을 충분히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12)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다른 선지자들도 시드기야와 동일하게 예언했습니다. 특히 “승리를 얻으소서”가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아합왕에게 전쟁을 수행하도록 권장하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를 비롯한 선지자 400명이 전하는 예언은 마치 ‘아무말 대잔치’와 같습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선지자 400명의 예언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을 아람왕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답만을 주는 영적 지도자를 따르려고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포장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삶과 믿음을 무너지게 합니다. 목회자가 누리는 최고의 복 가운데 하나는 창세기 1:1∼요한계시록 22:21까지 모든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최고의 복 가운데 하나도 창세기 1:1∼요한계시록 22:21까지 모든 말씀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말씀이 우리를 세우고 새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세우고 새롭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걸어가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분열왕국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이 우상 숭배로 몰락했던 그 길을, 오므리 왕조의 아합이 따라갔습니다. 아합은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하나님을 노엽게 한 왕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로 불순종의 길을 걷고 있었던 아합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의 죽음을 보았을 때, 모든 우상과 지역신들은 헛것임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아합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준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던 ‘그의 아내 이세벨’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람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값없이 받은 승리에도 아람 왕을 살려주었고 심지어 아람 왕과 조약을 맺음으로 ‘불순종 연쇄범’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시어 사형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왕상20:42中)
그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합이 아람 왕을 놓아준 후 3년이 될 즈음에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합은 당시 아람에 속해 있던 길르앗 라못에 대한 지배권 회복을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아합은 남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과의 전쟁을 하고자 했습니다. 열왕기상 22장은 그 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길르앗 라못에 대한 지배권 회복 시도이지만, 하나님 섭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합에 대한 사형 집행 과정입니다.
주목할 점은 아합이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사형 집행될 때까지 회개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로보암 때에도 그랬지만, 아합 때에도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사람들에게 단번에 벌을 내리시어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수 있으셨지만, 선지자를 통해 회개할 기회를 많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전달함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긍휼하심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에 이어서, 아합이 남 유다 왕과 연합하여 아람과의 전쟁에 나서기 전 신탁을 위해 미가야를 호출한 것, 그리고 아합의 사신이 미가야에게 강압적 요구를 한 것, 그리고 이에 대한 미가야의 담대한 사역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합의 사신이 미가야 선지자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다(13-14)
13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일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아합의 사신은 미가야 선지자에게 거짓 예언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이 중요하지 않고 왕의 생각이 중요하니, 왕이 듣기 좋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합의 사신은 선지자라는 직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미가야는 외압에 의해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14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미가야 선지자는 외압에 굴하지 않고 단호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말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어떤 외압이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일은 비단 과거 선지자들에게만 있지 않고 오늘날 생명의 복음을 받은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아합의 사신과 말을 주고받은 미가야 선지자는 이제 아합 왕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아합에게 진실을 말하다(15-18)
15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또는 말랴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아합의 질문에 미가야 선지자의 답변은,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미가야 선지자의 이 답변은 이후 그의 언행을 보면 본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이렇게 답변했던 이유는 아합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16절의 아합의 반박과 요구를 예상하였기에 아합에게 17절의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키고자 한, 의도적 화술(話術)이었던 것입니다.
16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
아합 왕은 미가야의 어조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감지한 듯,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아합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가 전쟁의 승리를 확신했기에 미가야가 전쟁의 패배를 예언하였을 때 미가야를 거짓 선지자로 몰아 그에게 벌을 내리려고 한 것입니다. 26,27절에 나오는 아합의 행동을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맹세를 강요한 아합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17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없다는 것과 무리에게 주인이 없다는 것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이스라엘은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은, 백성은 아합과 달리 무사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18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아합은 미가야의 말을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남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자기주장이 맞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상 적중이 결코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의 패배와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허황된 신념에 차 있었기에 자신이 승리하고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집을 피우고 있는 아합에게 미가야 선지자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자신이 보았던 환상을 알려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또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미가야가 환상을 전하다(19-23)
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미가야 선지자는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에게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도록 조언할 때, 가장 강한 조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이지 않겠습니까?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아합의 사형선고는 이미, 열왕기상 20장 42절에서 내렸습니다. 3년이 되도록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아합에게 이제 사형 집행의 때가 된 것입니다. 한 영이 하나님 앞에서 한 제안을 합니다.
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우리는 어제 본문을 통해, 아합을 위한 어용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을 알고 있습니다. 어용 선지자들이 아합에게 거짓 예언한 이유는 아합의 야욕에 맞는 만족감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합의 야욕은 결국 자신을 죽음의 길로 가게 했습니다. 사람이 거짓말에 속는 이유 중 하나는 욕심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합은 길르앗 라못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혔기에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 미가야의 빰을 때리다(24-28)
24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시드기야가 거짓 선지자임을 스스로 입증한 행동입니다. 만약에 누가 참 선지자라면 비록 거짓 모함을 받을지라도 거짓 모함을 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서로 자신이 옳다고 논쟁할 때, 자기주장을 펼치면서 폭언이나 폭행을 한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미가야 선지자는 비록 뺨을 맞았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으며 평정심을 유지하며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에게 닥칠 일을 말합니다.
25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골방에 숨는다는 것은 피난처에 숨는다는 뜻인데, 이는 시드기야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미가야 선지자와 시드기야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아합이 명령을 내립니다.
26 이스라엘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생명을 겨우 유지할 정도의 음식을 주라고 말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 미가야를 거짓 선지자로 몰아 죽이려고 한 의도였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어리석게 회개하지 않았고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미가야 선지자의 반응입니다.
28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미가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패배와 아합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렸는데, 아합에게만 아니라 전쟁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중대한 모임에 있었던 백성들에게도 알렸습니다. 이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명될 것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섭리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섭리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 눈은 세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아합과 같은 사람과 시드기야와 같은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와 시간을 많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 섭리의 통로로 살아가십시다.
영적인 기민함이 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를 붙잡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이며 돌이키라는 뜻임을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기민함이 없는 사람은 도수장에 끌려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지 못하며 따라가는 가축처럼 패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아합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없이 많은 기회와 경고를 주셨건만 그 모든 것을 짓밟고 끝끝내 멸망의 길을 자초하며 아람과의 전투를 일으키고야 말았습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합의 교란작전(22:29-33절)
(29-30)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본문에 이스라엘 왕은 ‘아합’을 의미합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의기투합하여 요단 동편지역의 중심지인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한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이들이 전투에 나갔다는 사실은 다수의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임을 증명하지 못함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했다는 것에 현혹되어 책을 고르는 것처럼 우리는 숫자에 자주 현혹됩니다. 특히 통계, 다수의 목소리에 의해 진실과 진리가 외면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의 소리에 파묻혀 돌아가셨고, 오늘 본문의 미가야 선지자의 목소리도 거짓 선지자 400명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습니다. 우리는 다수의 목소리에 귀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수의 소리는 언제라도 크게 들리지만 진실된 소수의 목소리는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잘 듣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합과 여호사밧은 미가야 선지자의 목소리에 마음을 담지 못했습니다. 어찌보면 두 왕이 미가야 선지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것은 400명의 선지자들의 소리가 귀를 막았던 것이 아니라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려는 자신의 욕망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듣고 싶은 목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듣고 싶은 것을 이미 결정하고 하나님께 묻고, 목회자에게 상담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성경에 나온 기준들을 나누어도 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냐며 못마땅해하고 돌아가는 분도 계십니다. 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기도하고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망에 빠진 아합이라도 미가야의 경고가 찜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들은 이상 대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꾀를 냅니다.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도록 하고 자신은 일반 군사들처럼 입고 변장을 하여 전쟁에 나가려는 것입니다. 이는 교란술로 아람 병사들을 혼란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31-33)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아람의 왕은 이스라엘과 전투를 빠르게 속전속결하려는 심산으로 지휘관들을 불러서 병사들과 장군들을 제외하고 오직 아합 왕만 찾아 그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휘관들은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을 보고 아합인 줄 알고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사밧은 그 와중에 소리를 지르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본 아람의 지휘관들은 그가 여호사밧인줄은 모른 채 아합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추격을 멈추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아합의 교란작전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아합의 죽음(22:34-40절)
(34-35)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여기서 활 시위를 당긴 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합이 변장을 하였기에 자신이 맞춘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인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병사 한 명을 맞혔겠거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무심코 활을 당겨’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합을 죽이려고 의도한 화살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화살은 왕의 갑옷 솔기 곧 갑옷의 이음새 사이를 정확히 맞혀버렸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무심코’라고 표현하지만 세상의 ‘우연’이 하나님 앞에서는 ‘필연’인 법입니다. 화살에 맞은 아합 왕은 그 자리를 벗어나 도망하기를 원했지만 전쟁은 너무나 맹렬하고 치열해서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과다출혈로 인해 그의 피는 병거 바닥에 고이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날라온 화살 하나, 그리고 그 화살이 우연히 갑옷의 솔기를 파고 들어왔고, 도망하려는 아합의 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면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을 피하려고 의도한 사람 중에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숨으려 했지만 숨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싫어 도망쳤던 요나는 바다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범죄하며 불순종하며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 그만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 권력과 힘을 가진 이들은 대중의 눈을 속이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내 욕망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순간 무심코 날라온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화살이 내 삶의 폐부를 뚫고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살로 날아온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아닌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먼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36-38) 해가 질 녘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저녁 즈음에 진중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가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병사들은 평안히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열왕기상 22장 17절에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아합은 죽고 그의 시체를 사마리아에 장사하였고 그의 피가 고인 병거는 사마리아 못에서 씻었는데 그 핏물을 개들이 핥아 먹었습니다. 이는 열왕기상 21장 19절 하반절에 엘리야를 통해 경고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그곳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창기들은 아합이 이세벨의 요청에 따라 만든 우상숭배의 신전에서 여사제들이 혼음을 한 뒤 씻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자신의 욕망으로 죽게 한 나봇의 피가 흐른 곳에 자신의 피도 동일하게 흘려졌고, 우상숭배로 만들어진 음란한 욕망의 장소에 자신의 최후가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뿌린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봇은 더욱 그러했으며, 미가야 선지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두려워보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군사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면 이리저리 움직이고 400명의 선지자들이 죽는 시늉까지 하고 비위를 맞추니 오히려 엘리야와 나봇과 미가야가 적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이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결과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아합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여나 가진 것이 많고 힘이 많아 두려울 것이 없다 느껴지는 삶의 자리에 있으십니까? 아무도 나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의 화살’을 당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화살이 활시위를 벗어나기 전에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39-40)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합의 죽음 이후 왕으로서 그의 치적을 기록한 것이 ‘상아궁’을 건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상아’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상아궁을 건축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위해 다른 나라의 사치품들을 들여 자신의 눈에 보기 좋은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상아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에는 마음을 쏟지 않고 나의 부귀와 영화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아합의 삶의 기록처럼 ‘상아궁’을 건축한 기록만 남지 않겠습니까?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화려한 ‘상아궁’을 건축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아합처럼 화려한 상아궁을 짓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약자의 것을 빼앗고, 욕망의 목소리에 취해 말씀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 시간 무심코 날라온 화살이 내 인생의 심장과 폐부에 관통하기 전에, 내 인생의 병거의 말을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손을 돌려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 키십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의 통치 (41-50)
(41-42)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이미 여호사밧은 22장 초반에 등장하여 아합과 연합군을 이루어 전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왕기는 일반적인 역사 서술과 다른 방식을 택하기에 이제 여호사밧 왕을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성군으로서 그의 자세한 통치 기록은 역대하 17장부터 20장을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인 아사가 41년을 재위했고 여호사밧도 25년이라는 상당한 기간을 왕위에 있습니다. 이 사실만 봐도 남유다는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안정화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3-44)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했다고 증거합니다.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눈에 곧게 행했다고 표현합니다.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 더 나아가 다윗의 길을 걷고 돌이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을 보시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라는 뜻의 코람과 하나님을 뜻하는 ‘데우스’를 합쳐 만든 라틴어로서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로서 경건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달리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즉 인간 앞에서의 태도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볼 때는 경건한 척을 하다가 사람이 없으면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외식의 형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겉은 깨끗하되 안은 더러운 잔과 같고,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무언가 불편하고 거리끼십니까? 아니면 가슴이 따뜻하고 든든하십니까? 만약 전자라면, 그리고 하나님도 이런 건 눈 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로마서 2장 6-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CCTV 앞에서도 태도를 바르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호사밧에게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당을 없애지 못한 일과 이스라엘과 화평한 일이었습니다. 유다의 역사 중에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왕이 여럿 있었으나 산당을 제거하고자 한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뿐입니다. 그 점에서 여호사밧도 하나님께 온전하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합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 산당은 원래 우상을 숭배하는 곳이었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는 많은 경우 여호와를 섬기는 지방성전 역할을 하며 토착화해 갔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완공한 후에도 민간신앙에 뿌리 깊이 내린 산당 중심의 이스라엘의 토착신앙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으며, 지방 산당에서 일하던 엄청나게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처리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지방산당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지방 유지들과 토착민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굴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오래된 습관과 얽매이기 쉬운 죄 때문에 굴복하고 만 불신앙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 이기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또 믿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또 이스라엘과 화평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지만,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증거합니다. 즉 가능한 모든 이와 화평을 지켜야 하지만 거룩함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사밧은 아마도 엄청난 민족주의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이스라엘을 회복하자는 원대한 꿈을 꾸었을 수도 있고 아합을 돌이키고자 하는 좋은 뜻을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명민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연합하였다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화평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주님을 볼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45-47)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역대하 17장 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 하지만 이에 비해 열왕기 기자는 마치 여호사밧이 부린 권세나 전쟁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는 듯이 잠시 언급하고 맙니다. 다만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냈음을 의미 있게 다룹니다. 그들은 우상의 신전에 있는 남자 창기로서 여호사밧은 담대하게 그들을 축출하여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게 했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중요한 것과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다름을 보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에돔에 대한 지배력을 잃지 않고 섭정 왕을 두어 다스리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이는 모압이 바로 이스라엘을 배반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어 여호사밧의 통치가 하나님께 인정받음을 나타냅니다.
(48-5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하지만 곧이어 성경은 여호사밧의 약점을 다룹니다. 즉 예전에 솔로몬이 했듯이 무역을 통해 더욱 큰 부를 이루려고 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가 파선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악을 향하는 그의 마음을 막아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증거합니다. 돈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돈을 사랑해서 부를 이룬 사람은 자신이 똑똑해서 이 사회에서 승리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돈이 없는 사람은 이 사회가 움직이는 방식을 모르는 패배자라고 생각합니다. 즉 돈을 사랑함이란 궁극적으로 돈을 버는 능력을 지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무분별한 욕구를 막아주심으로 여호사밧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때로는 돈 버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입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아하시야가 함께 다시 무역을 하자는 제의에 거절을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에 깨달음을 얻고 회개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돈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사밧은 죽어 장사됩니다. 한 사람의 삶을 외부에서 재단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삶의 순간마다 어떠한 마음으로 결정을 내렸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이 정직했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여 삶의 갈래길에서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이스라엘로 넘어갑니다.
아하시야의 통치 (51-53)
(51-53)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아합이 전쟁터에서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을 다스립니다. 여러 모로 여호사밧과 아하시야는 극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했다면, 아하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여호사밧이 다윗의 길을 걸었다면, 아하시야는 궁극적으로는 여로보암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은 것입니다.
여호사밧과 아하시야 두 인물은 모두 왕으로서 출발합니다. 어떤 왕이 되어야 할지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준비했겠습니까? 훌륭한 왕이 되어야겠다고 얼마나 다짐했겠습니까? 하지만 둘은 다른 길을 택하고 정반대로 걸어갑니다. 어떻게 보면 처음에 그 차이는 미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점점 더 멀어져 전혀 다른 삶으로 안내합니다. 오늘 아주 사소한 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느냐,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는 바알을 예배하느냐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 굴복하면 내일도 굴복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준이 중요합니다. 사소한 한 가지 삶의 선택을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입니다. 오늘 말 한 마디를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느냐, 사람 앞에서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느냐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느냐, 아니면 내 의지를 신뢰하느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닮아질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선택을 내리고 거기에 만족하여 진정한 의미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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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지자 미가야
열왕기상의 마지막 부분인 22장은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하고 그 결과로 아합이 죽고 유다에는 여호사밧 이스라엘에는 아하시야가 왕이 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또 한 명의 왕이 내려오고, 다른 왕이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의 이어짐을 통해 어떤 의미를 남기고 싶으신지 본문을 되새김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합왕은 아람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서 별세합니다. 이 전쟁은 20장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장에서 아람의 벤하닷 왕이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넘기라’(21:5)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며 모욕합니다. 이스라엘은 도망갈 곳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준비합니다. 첫 번째 전쟁을 승리합니다. 해가 지나 다시 공격한 벤하닷과 아람 군대는 아벡에 진을 칩니다. 두 번째 전쟁을 합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본문에서 세 번째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번에는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 아합 왕에게 왔고, 아합이 먼저 공격하자고 제안하며 시작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강함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습니다. 승리가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승리의 원인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기 전, ‘한 선지자’가 아합 왕을 찾아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 관점으로 현실을 해석해주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야 할 길을 상세히 알려줍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통하여 승리할 것이며, 시작은 아합왕이 용기를 내어야 한다고 말했고, 다급했던 아합은 말씀을 붙잡습니다. 승리 이후에도 ‘그 선지자’가 아합 왕에가 나아와 다음 해에 다시 아람 군대가 올 것을 예언합니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누가 이기게 했는지 알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승리 이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감사의 예배도 없고, 회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갑니다. 그들은 승리가 운이 좋았거나 자기 능력이 뛰어나서 얻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전쟁도 매한가지입니다. 아람 왕에게 여호와는 ‘산의 신’이라고 이야기하며 평지와 골짜기에서 싸우면 이길 것이라 충동질한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시작하자 한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번 전쟁은 하나님이 ‘산의 신’만이 아님을 증거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첨언합니다. 이 일을 통해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였습니다(11:28). 전쟁이 시작하고 일곱 째 날에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자, 항복과 함께 조약을 맺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 하는 자리이고 진멸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전쟁에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굴하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찾아온’ 아람 왕을 보며 아합 왕은 조약을 맺고 보내줍니다. 아합 왕과 이스라엘은 ‘말씀하시는 분이 여호와인 줄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 한 명이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11:42)’고 예언하며 20장은 마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어떤 회개의 움직임이 없습니다. 근심하고 답답할 뿐입니다(11:43). 그리고 21장에서 행한 일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입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감사해야 했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갑니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회개해야 했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전투는, 자신들을 침략하려고 했던 ‘아람 왕’의 방식을 따릅니다. 힘이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침략합니다. 세력을 모아 힘을 키우고, 승리를 당연히 여깁니다. 첫 번째 전쟁 후 주어진 4년이라는 기회는 오히려 아합 왕을 더 악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역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본문을 통해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아합에게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에 있던 선지자 사백 명이 모두 아합 왕 비위를 맞추고 있을 때, 그는 여전히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 그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한 대가는 상당했습니다. 선지자 사회에서 소외당해야 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뺨을 맞습니다. 투옥되어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습니다. 꼭 이런 방식으로 일하셔야 하는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로 본문이 우리를 바라보며 너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이 시대 가운데 반복되는 불순종과 심판의 유예를 보며, 사백 명의 선지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미가야로 살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미가야는 무조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미가야로 여기며 불평과 비난만 하는 것 아닌지 항시 점검해야 합니다. 미가야는 19절에서 여호와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짓된 선지지가 되지 않으려 매순간 노력했던 그가 ‘보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 한 마디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것입니다. 우리는 ‘멋진 말’이 아닌, ‘진실’을 전해야 합니다. 진실에 힘이 있기 위해서는 직접 그 진실을 목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미가야’로 살기를 결심하며 구해야 할 것은, 삶이 ‘여호와를 보았다’는 한 마디를 위한 의미의 집합체와 연속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 생각되는 왕은 다시 다른 왕으로 바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지나도 뜻을 이루어 갑니다. 심판의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미가야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자리를 서로 양보하며 사백 명 중에 하나로 살고 있지 않나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선지자 미가야 한 명이 있기에, 아직 이스라엘은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익히 알려진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작가는 이와는 반대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열왕기상의 이야기를 톺아볼 때 정녕 이 작가의 말은 맞는 듯 여겨집니다. 많은 사람이 ‘왕’이라는 자리에 섰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자리가 한 사람을 ‘왕’답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왕’이라는 자리에서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본연의 욕망과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던 것이 열왕기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그 자리를 허락하신 “여호와 앞”에서 통치해야 함이 마땅했지만, 많은 이들이 ‘왕’이라는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따라 통치하여 자기와 이스라엘 온 민족을 고통에 빠트렸습니다. 정녕 자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두렵고 떨리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왕’이라는 자리에서 악을 일삼던 아합의 죽음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리에 의해 빚어지지 못했고, 아합이 앉았던 왕이라는 자리는 그의 사리사욕과 탐심이 어떠했는지를 오롯이 증언할 뿐 입니다. 다른 왕들보다도 상세하게 그의 악행이 기록된 열왕기상의 끝에 맞이한 그의 죽음은 그러므로 심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을 맞아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는데 함께 올라가는 유다왕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으라하고 정작 자신은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갑니다(30절). 그것은 치열한 전쟁에서 적군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한 아합의 꾀였고, 이제까지 그가 위험한 상황 속에서 늘상 보여온 오래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덕분에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 왕이 대신하여 죽임을 당할뻔 하였으나, 적군의 병거 지휘관들은 왕복을 입은 이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알고 쫓기를 그칩니다(33절).
아합이 자신의 꾀대로 변장하여 목숨을 지킨듯한 그 때, 34절이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겼습니다. 여러병사들과 다를 것 없이 변장한 아합왕을 알아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적을 향한 공격이었기에 성경은 “무심코”라고 말합니다. 그 무심코 쏘아진 활이 정확히 아합의 갑옷 솔기에 맞습니다. 솔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데베크’는 ‘이음매’라는 의미입니다. 아합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변장하며 입은 그 보호 갑옷의 이음매에 화살이 정확하게 꽂힌 것입니다. 마치 다윗의 물매돌이 골리앗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꽂혔듯 말입니다. 열왕기상은 “무심코” 쏘아진 화살이 아합 갑옷의 ‘이음매’에 정확히 꽂혔다고 기술함으로 아합의 죽음이 정확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왕’이라는 자리를 통해, 그 자리에 서게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던 삶에는 이처럼 화살이 솔기에 꽂히듯 분명한 심판이 예비되어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으로 인해 고통 받은 나봇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을 기억하시고 갚아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문 앞에 우리도 두려운 마음으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왕’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가정과 일터와 공동체에서 자리를 부여받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기에, 저희의 삶 또한 하나님 앞에 훤히 드러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내가 있기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은 없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내가 품은 뜻이 여전히 하나님 안에 있는지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눈길 안에서 우리 삶의 자리를 날마다 일구어갈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깨어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를 저마다의 삶의 자리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 하루를 영원한 의미로 건져올리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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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1)
20장과 2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과 아람은 두 번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람의 병력의 규모나 전투력은 감히 이스라엘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으나, 아람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대패했습니다. 산지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쟁에서 패하자, 평지에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아벡으로 올라가서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철병거로 무장한 아람이 이처럼 철저하게 두 번에 걸쳐 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두 번의 전쟁에 직접 개입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아람의 침공 때에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통해 아합에게 아람의 군대를 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침공 때에도 선지자가 나와서 이스라엘 왕과 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람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어서 저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20:28).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 왕은 승리에 도취되어 아람 왕 벤 하닷을 너그럽게 대해주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이 잘못된 점을 한 선지자가 지적하자, 그는 매우 기분이 상해서 다시 사마리아 돌아갔고, 이로 부터 삼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합을 방문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을 방문한 유다 왕에게 라못 길르앗을 다시 수복하는데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아합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400명을 모아 놓고 라못 기르앗으로 싸우러 가도 되는가를 묻자,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400명 선지자들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 왕은 다시 이스라엘 왕에게 물어볼 만한 다른 선지자가 요청하고, 항상 자신에게 나쁜 말만 하기에 싫어하는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다는 답변에 마지막으로 그에게도 물어보자고 간청하였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이번 전쟁의 승패를 묻는 아합 왕의 질문에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리이다(15)”라고 역설적으로 대답합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오기 전에 모여 있던 모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데, 미가야 선지자는 이들과는 정반대로 패할 것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모여 있는 선지자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자신을 떠나 악행을 일삼는 아합을 죽이기 위해 거짓말 하는 영들을 모든 선지자들에게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미가야의 말에 격앙된 시드기야 선지자는 미가야의 뺨을 때리고, 아합 왕은 화가 나서 미가야를 잡아 옥에 가두어 자신이 무사히 돌아올 때 까지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제공하라고 합니다.
“미가야가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실 수 있으면, 주께서 나를 시켜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미가야는 한 마디 더 붙였다. "여기에 있는 모든 백성은 나의 말을 잘 기억하여 두시오!" (28.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아람 연합군의 두 번에 걸친 침공에 두려워 벌벌 떨던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승리자로 만들어 주신 이유는 아합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20:13, 28).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통해 그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끝이 없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신에 대해 바른 말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오만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의 이 같은 모습은 본문의 아합 한 사람으로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등 돌리는 인간들에게 왜 이처럼 먼저 다가오셔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도자기를 만들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흙을 뭉개고 다시 빚습니다. 그리고 설사 잘 만들었다 할지라도, 가마에서 구워지면서 모양이 변형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립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과 하와를 없애버리고, 흙으로 다시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이야말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당신의 말씀을 저버린 아담과 하와를 내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파생된 죄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결국에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대속의 재물로 삼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이스라엘, 그리고 이방인 여인과 결혼한 아합 왕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진흙으로만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을 당신들의 형상대로 빚으시고, 그것에 생령을 불어넣어주셨기에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한,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곤 합니다.
“사람은 구하면 앙분을 하고 짐승은 구하면 은혜를 한다”
사람은 죽을 고비에서 구해 주면 그 은혜를 쉽게 잊고 도리어 은인에게 앙갚음을 하지만, 짐승은 죽을 고비에서 구하여 주면 은인을 따른다는 뜻으로,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건만, 짐승만도 못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비난받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저버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아합 왕에게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합을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하려고 선지자들에게 거짓말 하는 영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선지자 미가야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아합을 죽이려 하셨다면, 아합에게 미가야 선지자들 보내지 않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아합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아합의 귀에는 결국 하나님의 말은 거짓으로 들렸습니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선 기간 동안이 이 사회에는 서로 상대방을 음해하는 온갖 루머와 거짓이 넘칠 것입니다. 정치권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라 종교계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단 내의 분란, 교회내의 분란, 교단끼리의 분란 속에서 서로 자신의 옳다고 주장합니다. 누가 옳고 누가 잘못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다. 솔로몬의 간구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아니라면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건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의 욕망 속에 빠져버린 아합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은 거짓이요, 거짓이 참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의 자리에서 바로 서있는 선지자 미가야처럼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거짓과 참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열왕기상 20장부터 22장까지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3번에 걸친 전쟁이 기록되어 있는데, 앞선 2번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이스라엘은 결국 3번째 전쟁에서 패하고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전사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죽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2번에 걸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아람보다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관계는 마치 고양이 앞의 쥐와 같았습니다. 아람왕이 이스라엘왕에게 말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0장 5절에 보면, 아람의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왕 아합에게 말하길, “너의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까지 다 내 것이니 나에게 넘겨라” 아람의 왕 벤하닷이 요구한 것이 단지 재물이라거나 영토였다면 그런 요구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에게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벤하닷이 아합에게 요구한 것은 재물만이 아니라 “너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넘겨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굴욕적인 요구입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일지라도 이처럼 함부로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아람왕의 요구에 이스라엘왕은 한마디도 못하고 꼼짝없이 원하는대로 ‘아내와 자식들까지 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지언정 사랑하는 가족들을 적에게 넘겨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이처럼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약소국가였는지, 아합이 얼마나 비겁한 자인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2번이나 연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었습니다. 아합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기게 하실지 직접 들었고, 자신이 들은 그대로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어야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어떤 결과가 찾아올지 알았기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2번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합이 행한 것은, 나봇을 죽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이런걸 가리켜 ‘기고만장’이라 할 것입니다. 2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 원하던 포도밭 획득, 3년 동안이나 전쟁없이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면서 아합은 기고만장 할대로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리고 전 같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아람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29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여기서 이스라엘 왕은 아합입니다. 아합은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함께 당시 아람이 지배하고 있던 길르앗 라못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고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갔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아합이 탐낼만 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때 아람의 왕 벤하닷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가족들을 넘겨줄 정도로 나약하고 비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합이 이제는 똑같은 상대를 향해 담대하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합이 갑자기 용감해졌기 때문입니까?
30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변장을 하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변장을 했다는 것은 왕이 왕복을 입지 않고 일반 병사의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변장을 했겠습니까? 혹시라도 적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왕이 평범한 일반 병사의 옷을 입고 전장에 나간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간 이유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1명의 선지자인 미가야의 말, 즉 아합을 전쟁터에서 죽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400명의 선지자들에게 거짓말을 시키셨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 변장을 하고 전장에 나간 것입니다.
이때 아람왕은 정예요원 30명을 선발하여 이스라엘의 왕 아합을 잡으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정예요원은 일반병사 복장을 한 아합왕을 찾지 못해서 그들의 특수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지만, 누군가 무심코 쏜 화살이 아합왕의 갑옷 솔기를 맞혔습니다. ‘솔기’는 갑옷과 갑옷 사이를 이어주는 이음매 부분입니다. 만일 화살이 갑옷에 맞았다면 아합은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갑옷과 갑옷 사이 틈새에 화살이 꽃혀 아합왕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고 말았으며 그 피를 개들이 핥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부류의 인물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용감한 자와 비겁한 자입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이 거짓말 하고 있을 때, 단 1명의 선지자 미가야만이 바른 말을 했습니다. 뺨을 맞아가면서 심지어 감옥에 갇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을지언정,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걸어갔던 미가야는 용감한 자였습니다. 반면에 최고의 자리,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아 400명의 선지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백성들 앞에서는 용감한 척 했으나 정작 전쟁터에는 변장을 하고 나갔던 아합왕은 비겁한 자였습니다. 용감한 자와 비겁한 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용감한 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비겁한 자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비굴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 자리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자리일지라도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 자리가 비록 편안한 자리일지라도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8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오늘 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의 자리를 지켜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