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함의 수준.
1. 본문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삶의 영역에서 어떤 기준을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보다 더 높은 거룩함의 기준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신약의 원리와도 동일합니다(딤전 3:1~13; 고후 4:1~2).
2. 본문은 일반 제사장을 위한 장례와 결혼(1~9), 대제사장의 경우의 장례와 결혼(10~15), 모든 레위인을 위한 봉사의 자격 요건(16~24)에 대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삶의 전반에 있어서 특별히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3.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이 아닌 한, 죽은 자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1~6). 이 말은 이방 특히 가나안 백성들처럼 애도해서는 안 되고(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거나 수염 양쪽을 깎거나 살을 베는 행위) 시체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5). 대제사장의 경우는 직계 가족, 자기 부모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체로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었습니다(11). 그는 이런 일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애도 행위도 할 수 없고, 계속해서 성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10,12).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4. 왜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이런 방식으로 요구받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에서 죽음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 저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창 3:19). 하지만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이 죽음의 시간에도 언약의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제사장의 결혼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일반 제사장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 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수 없습니다(7). 또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면 그것은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9).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이스라엘)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13~15). 이들은 세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었다는 점에서 결혼을 통한 경건한 자손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결혼 자체가 신성한 것이라면 이들 제사장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했을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결혼이 제사장의 삶의 중요한 규례로 제시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비교되는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6. 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16~23). 제사장은 제물과 마찬가지로 흠이나 결점이 없이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18~20절은 제사장의 육체의 온전함의 목록들을 제시합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온전함을 요구받는 것은 백성들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요구해야 하는 자들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7. 사도 베드로는 온 교회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2:4~10). 그러니 당연히 모든 성도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능가하는 거룩함과 온전함을 요구받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차원의 것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비록 구약의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도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됩니다. 슬픔을 당했을 때도 믿음의 소망을 드러내야 할 것이고,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모범과 언약의 순결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게 이런 거룩의 질서와 조건을 여전히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여. 거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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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성결 규례들(18장-20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진 오늘 본문은 제사장들이 삶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성결 규례들(21장-22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성결 규례(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레위기를 살펴보면 장이 바뀌거나 문단이 바뀔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반복된 문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말씀의 주체와 전달자,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레위기의 관용적 표현과도 같아 보이는 이 문장은, 마치 각 장이 발신자와 수신자가 정확히 기록된 한 통의 편지처럼 보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이전의 장들은 이를 잘 증명합니다.
(레 20:1-2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레 19:1-2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레 18:1-2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본문을 중심으로 이후의 장들 역시 이를 잘 증명합니다.
(레 22:1-2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레 23:1-2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레 24:1-2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전후의 장들을 더는 살펴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1절 상반절입니다.
(1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오늘 본문 역시 앞뒤 장들과 같이 가장 먼저 말씀의 주체와 전달자, 그 대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는데, 같은 뜻을 지닌 ‘말하다’와 ‘이르다’가 한 문장 안에서 함께 사용된 점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를 한 문장으로 ‘말하여 이르라’로 번역했지만, 새번역 성경은 구분하여 원어 성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직역했습니다.
(새번역 1 상반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에게 알려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전하신 내용이 제사장들에게 어느 때보다 잘 전달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제사장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준행하는 것이 마땅함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힘주어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은 먼저는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져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구별된 제사장들은 철저히 죄로부터 오염될 수 있는 상황과 환경으로부터 구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허용되는 예외의 상황이 있었습니다.
(2-3)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제사장이라 할지도 직계 가족의 죽음(장례)의 경우에는 그들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족으로서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형제는 단번에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자매’라는 표현은 우리를 머뭇거리게 합니다. 엉뚱하게도 ‘제사장들 중에서 여성이 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독특성으로 인한 오해입니다. 한국어는 가족 관계를 구분하는 표현이 매우 구체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먼 친척 관계에 있는 이를 두고 무엇이라 호칭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말은 자녀들의 관계를 중심인물의 성별을 바탕으로 상대의 성별에 따라 형제, 자매, 남매로 정확히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남성인 제가 이성의 누나나 동생이 있다고 했을 때, 이를 자매 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매 사이라고 합니다. 자매 사이라는 표현은 여성인 사람이 동성의 언니나 동생이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언어는 자녀들의 관계를 중심인물의 성별에 상관없이 통합해서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남성의 경우에는 ‘Brother(형제)’로 여성의 경우에는 ‘Sister(자매)’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자매는 동성의 중심인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이와 상관없이 이성의 누나 혹은 여동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시 한번 제사장은 자신을 더럽게 속되게 하지 말라는 명령에 제사장들이 주의해야 할 관습과 함께 거룩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4-6)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머리털과 수염, 살을 베지 말라는 것은 제사장들에게만 전해진 독특한 규례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해진 규례였습니다.
(레 19:27-28)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머리와 수렴, 살을 베는 것은 당시 고대 근동 이방(민족)의 상례(미신적)였다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에게 더욱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이들과 하나님의 음식을 나누는 화목제의 집행자였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거룩해야 했습니다.
이어 거룩해야 할 제사장들의 가정의 모습에 대하여 전하셨습니다.
(7-9)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힘입어 거룩함을 입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거룩함을 입은 제사장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말 것과 그의 딸이 몸을 팔아 자신을 더럽힐 수 없게 해야 함을 강경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제사장이 삶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성결 규례에 대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례와 가정으로 중심으로 전합니다.
대제사장이 지켜야 할 성결 규례(10-15)
(10-12)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다른 제사장들과는 달리 머리에 기름(관유) 부음을 받고, 손으로 위임되어, 예복(성의)을 몸에 입은 대제사장은 직계 가족의 장례라 할지라도 결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민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책무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의무보다 더 무거웠기에 그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성소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13-15) 그는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을지니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자손이 그의 백성 중에서 속되게 하지 말지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대제사장은 그의 자손을 속되게 하지 않기 위해,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과부나 이혼당한 여자, 몸을 파는 여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에게 전할 것을 언급하신 후에, 제사장의 신체 조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의 신체 조건에 대한 규례(16-24)
(16-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그는 그의 하나님의 음식이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휘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니라 이와 같이 그가 내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육체에 흠이 있는 이는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여러 신체장애의 내용을 소개하는데, 이는 얼핏 장애가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장애가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분명 장애가 있는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 19: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신 27:18)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장애가 있는 이들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 전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 아론에게 한 말씀입니다. 대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하는 아론에게 그의 자손이라고 해서 그 혈통을 따라 무조건 제사장직이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즉 제사장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혈통 넘어서는 온전함과 성결이 요구됨을 그에게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24) 이와 같이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였더라
마지막 절인 24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전달자(모세)를 통해서 그 대상에게 잘 전달되었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이 역시 오늘 본문 1절 상반절의 관용적 표현만큼은 아니지만, 레위기에서 자주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앞서 전해진 말씀의 대상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상반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분명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씀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내용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말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말씀의 전달 범위를 확장 시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그 뜻 온전히 이루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모세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이 여러 규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이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과거 죽음의 땅 광야 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벧전 2:5, 9). 오늘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편지로 여겨지고 있는지를 함께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향해 눈을 들 때. 우리는 분명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주님의 통로로, 허락된 삶의 자리에서 영적 촉진자로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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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1장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레위기 18-20장까지의 내용에 대한 재확인입니다. 레위기 18-20장까지의 내용은 주지의 사실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성결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으로는 이방인들의 타락한 성적인 풍습의 금지와 거룩한 삶에 대한 요구,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경우 받아야하는 불순종의 형벌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본문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규례라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인 21장과 이어지는 22장은 앞의 본문에 대응하는 형태의 꼴을 취하면서 일반 백성들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주로 제사 업무를 전담했던,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성결 규례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인 21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단락인 1-9절까지는 제사장 개인 및 제사장 가정의 성결 규례이고 이어지는 10-15절은 대제사장의 성결 규례, 그리고 마지막 16-24절은 제사장의 신체 조건 규례입니다.
여기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규례라는 단어의 뜻은, 오늘 본문 21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사용되고는 있지 않지만, 일정한 규칙이나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을 말합니다. (신 4:1, 5; 14:5). 특히, 규례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히브리어인 ‘미쉬파트’는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이며 (대상 24:19). 헬라어로는 ‘케논’이라 말하는데, 이는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키며,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했던 고대 풍습에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갈 6:16)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인 규례를 제시하시며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오늘 본문 1절인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절대 금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금지 가운데에서 예외 조항을 두셨습니다. 본문 2-3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살붙이 곧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의 주검은 괜찮다. 또한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친누이의 주검도 괜찮다. 그 여자에게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검을 만져 몸을 더럽히는 것은 괜찮다.
바로 살붙이인 가족에 대해서만큼은 주검을 만져 몸이 더렵혀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예외를 두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를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 2:17)는 명령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그 명령을 어기고 말았고,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의한 죄 사함 없이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이 예외 규정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는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제사장에게 죽은 자를 만지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괜찮다는 허용을 해주셨는데 그 대상이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기고 계심을 증거해 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바라는 우리들로서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귀히 여기시는 가족에 대한 깊은 책임과 사랑을 다해야만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이든 간에 만약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사명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는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며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신앙을 핑계 삼아 가족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다운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마 10:37)는 말씀을 마치 가족에게 무관심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으로 삼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살붙이, 즉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우리의 의무와 책임, 사랑을 하나 하나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시작이며, 그 선순환을 통해 우리 신앙도, 올바른 믿음의 선순환으로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이러한 예외 조항이 제사장에게는 허용 되지만, 대제사장에게는 허용 되지 않음을 본문 11절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11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사장들에게는 직계 가족들의 시체만큼은 만지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는 그것마저도 엄격히 금지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보다 대제사장에게 보다 엄격한 성결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며, 더불어 그만큼 대제사장이 맡고 있는 직무가 매우 중요함을 본문이 웅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대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철저하리만큼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는 위치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놓인 위치의 중요성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연결해 준 역할을 한 사람들이 제사장, 대제사장였다고 한다면, 오늘날 믿지 않은 우리 가족과 하나님을 연결해 주는 분은 물론 우리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시지만, 우리 역시 부족함은 많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라 불러주셨기에 그 위치에서 바로 주님과 세상의 작은 통로의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위치는 본문의 대제사장에게 요구한 것처럼 엄격한 성결을 요구하는 자리요,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기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거룩입니다. 왜냐면 그 사람의 영적인 파워는 거룩에서 나오기 때문이고, 레위기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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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제사장의 거룩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제사장의 거룩이 세 종류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체와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에 대해 주의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21장 1절~3절을 보면 나오고 아울러 11절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체를 접촉한 자는 부정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체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영적인 의미로서는 시체가 상징하는 것 때문입니다. 시체는 죽음이 남긴 흔적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은 죄의 저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죄와 죽음은 생명의 반대입니다. 제사장은 생명의 전달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체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 현실적인 이유로는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 업무를 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사체를 가까이 해서 부정해 지게 되면 많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즉,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교제가 방해되지 않게 만드려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 규정은 제사장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시체를 만질 수 있는 경우와 대제사장이 시체를 만질 수 있는 경우는 다릅니다. 대제사장은 11절을 보면 어떤 경우에서든지 시체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할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대제사장은 그 직무를 대신할 사람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성결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에 따라 혹은 그 직임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성결을 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가끔씩 청년들이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목사님이 되셔서 무엇이 제일 좋고 무엇이 제일 힘드십니까? 새벽기도가 제일 힘듭니까?” 그 질문에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 내가 목사가 되어서 제일 좋은 점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실력이 되는 것이 좋다. 다른 직업들은 자기 실력을 쌓기 위해서 또 다른 뭔가를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는데, 목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직업적 실력이 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좋다. 제일 힘든 점은 새벽기도는 안 나오면 된다. 다음에 내가 담임목회를 하게 되면 새벽기도를 안하고 매일 심야기도를 할거다. 그러면 그런 어려움은 사라진다. 내가 느끼는 제일 어려운 점은 목사도 다 똑같은 사람이다. 목사라고 유전자가 다르고 그러지 않다. 그런데 목사는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다른 삶을 요구하신다. 그것이 제일 힘들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냥 주일날 가끔씩 예배만 드리는 사람과 임직자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두 번째 제한 분야는 7절 이하를 보면 제사장이 결혼할 수 있는 대상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결혼해야 하는 대상을 규정해 놓은 이유는 제사장이 이방여인이나, 문제가 있는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신앙적인 변질이 올까 염려한 까닭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그것은 군사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군사전쟁이었다면 군사수와 무기수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이방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별되는가? 이것으로 그들의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쟁은 육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요, 문화전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문화와 철학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이것은 패망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대표적으로 그런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문화나 종교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방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면서 결혼 이야기를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아라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대머리는 제사장이 못된다. 이런 내용이 아니라, 그런 내용이라면 저는 무척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왜 우리교회에는 목사님들 중에 대머리가 없는 줄 모르겠습니다. 확률상으로도 대머리가 몇 분은 더 계셔야 되는데.
아무튼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나 결혼을 통해 신앙의 변질을 가져오거나 타락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훗날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항상 제사장의 타락이 앞서 진행되었습니다. 제사장이 타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이는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변질이나 타락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는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16절 이하를 보면 제사장의 세 번째 제한분야는 신체적으로 완전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신체적 온전성은 그의 사역의 온전성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의 입만 온전해서 안되고, 손과 발만 온전해서도 안되고 제사장은 그의 눈과 다리와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여러 가지 규정으로 제사장이 금지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이런 것 하면 안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입니다. 금지사항이 많을 수록 사람은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아이들도 집에서 키울때 이것 하면 안돼 저것 하면 안돼 라고 하면 자꾸 위축되지 않습니까?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하면 안돼, 저것하면 안돼 이런 식으로 하면 위축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4절을 보면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위축되어서야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른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에게 요구하는 금지규정은 제사장을 위축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사장으로 하여금 규정을 지키지 않았을때 정죄해서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규정이 아닌 것입니다. 아울러 단순히 그의 직무를 수행하게 만들기 위한 행정적인 규정도 아닙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 결혼에 관한 규정, 신체가 온전해야 한다는 규정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제사장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타락하고 죄가운데 있게 되면 그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타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제사장이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신 이유는 첫째가 제사장을 사랑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기에 그 율법들을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금지규정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 바탕에는 인애가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안당하고 욕을 안 먹기 위해 몸사려라. 친절해져라.
이런 소극적인 공무원으로 제사장들을 만들기 위한 규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몰랐거나 무시했기에 신앙의 왜곡과 변질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인데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해서 맞아서 거의 죽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한명이 지나가면서 피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그들을 비판합니다. 매정한 사람, 율법적인 사람들의 이중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장이 한 번 되어 보십시다. 제사장이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졌다면 사람들에게 해명을 해야 되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마땅히 해야 하는 직무에 차질을 빚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을 것입니다. 무책임하게 왜 조심하지 않았냐고 질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강도만난 사람 시체를 돌봐주느라 그랬다고 말하면 변명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들이 매정하고 인간미가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반인의 선택인 것입니다.
즉,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고자 시체를 피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흠잡히지 않기 위해서 시체를 피한 것입니다. 윗 사람에게 질책을 받지 않기 위해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사장이 율법대로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데 잘했다는 사람은 있어도 잘못했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레위인이 율법대로 자신이 부정해 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강도 만난 사람을 피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잘했다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의 근본에는 인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은 율법의 문자만 해석할 줄 알았지, 그 내용과 정신은 몰랐던 것입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준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신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울러 그러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별됨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100주년기념교회도 규정이 있고 정신이 있습니다. 우리 100주년기념교회의 모든 규정의 바탕에는 인애가 있습니다. 그 규정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비판을 면하기 위한 면책규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교회생활을 통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따듯함이 배여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이 시대의 제사장이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신실한 종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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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1장은 제사장의 직무와 정결에 관한 규례가 소개되고 있다. 그것은 시체과 관련해서, 제사장의 가정, 대제사장의 결혼 규례, 그리고 제사장의 신체적인 조건들이 언급되어 있다.
죽은자의 시체와 관련한 제사장의 정결(1-6절)
제사장은 백성 중 죽은자로 인해 더럽혀서는 안된다. 이것은 죽은자의 시체의 접촉을 통해서 의식적인 부정을 입지 말라는 것으로 일반 백성의 시체에는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 형제, 출가하지 않은 처녀인 친 자매의 시체는 만질 수 있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규례를 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깍아서 대머리 같이 해서는 안되고 수염 양편을 깍아서는 안되고 살을 베서도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거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하고, 여호와의 화제, 즉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이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당시 애굽이나 가나안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애도로 삭발이나 몸을 해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제사장들을 그들의 풍속을 좇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당시 애굽 제사장들이 긴 수염의 양끝을 둥글고 짧게 잘랐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화제는 제사의 예물을 번제단 위에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의 방법이다. 이것은 오직 기름부은 받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구별된 직분이요 하나님의 성막 봉사자이기 때문에 이방의 풍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성결해야 한다.
제사장의 가정에 관한 규례(7-9절)
제사장직은 세습직이고 거룩한 직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직분을 행하기 위해서는 결혼에 있어서 거룩하도록 해야 한다. 기셍이나 부정한 여인, 이혼 당한 여인을 아내로 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스스로 더럽히면 그 아비를 욕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찌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사장의 성결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의 결혼에 관한 규례(10-15절)
대제사장의 규례에 관해서는 “자기 형제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찌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신다. 대제사장은 관유를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자이다. 이것은 특별히 구별되었음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은 일반 제사장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기 때문에 제사장들보다 더 엄격한 성결을 요구되었다. 눅 9:60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부모를 장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자에게 “죽은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긴급한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는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찌니 과부나 이혼 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찌니”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제사장의 신체 조건(16-24절)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경 절뚝발이, 코가 불완전하자, 지체가 더하거나 덜한 자, 발이나 손이 부러진 자. 곱사등이, 난장이, 눈에 백막이 있는 자, 괴혈병, 버짐, 불알을 상한 자. 기타 흠있는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그들은 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단에 가까이 하지 못한다.만약 그것을 범하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성소를 더럽힐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지성물이나 성물은 먹을 수 있다.
흠없는 제사장에 대한 성결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점도 없고 흠이 없으신 하늘의 대제사장이시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시고 죄가 없으시고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의를 전가하시고, 의의 삶을 살도록 하시고, 성령님의 열매와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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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죽음과 결혼이라는 삶의 영역에서 어떤 기준을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보다 더 높은 거룩함의 기준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신약의 원리와도 동일하다(딤전 3:1~13; 고후 4:1~2). 여기서 가족들의 죽음이나 자신의 결혼이 관련되는 것은 제사장의 부르심이 단순히 직업적 부르심이 아니라 삶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 본문은 일반 제사장을 위한 장례와 결혼(1~9), 대제사장의 경우의 장례와 결혼(10~15), 모든 레위인들을 위한 봉사의 자격 요건(16~24)에 대한 규정을 다룬다.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이 아닌 한, 죽은 자(시체)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1~6). 이 말은 이방인 특히 가나안 백성들처럼 애도해서는 안 되고(머리털을 깎아 대머리로 만들거나 수염 양쪽을 깎거나 살을 베는 행위)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5). 대제사장의 경우는 직계 가족, 자신의 부모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체로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었다(11). 그는 이런 일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애도 행위도 할 수 없고 성소에 머물러야 했다(10,12).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이런 방식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받는 것일까? 이스라엘에서 죽음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 저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인데(창 3:19),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이 죽음의 시간에도 언약의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3. 제사장의 결혼의 문제가 이어서 다루어진다. 일반 제사장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수 없다(7). 또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면 그것은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정이 삽입된다(9).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이스라엘) 처녀와만(과부도 안 된다) 결혼할 수 있었다(13~15). 이들은 세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었다는 점에서 결혼을 통하여 경건한 자손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백성의 결혼 자체가 신성한 것이라면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했을 것이다. 죽음과 함께 결혼이 제사장의 삶에서 중요한 규례로 제시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비교되는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4. 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한 규정이 이어진다(16~23). 제사장은 제물과 마찬가지로 흠이나 결점이 없이 온전해야 했는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18~20절은 제사장의 육체의 온전함의 목록들을 제시한다. 이 목록에 따라 흠을 가진 자들은 제사장으로서,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제외한 다른 일들에 참여하고 성소에서 주어지는 제물의 음식을 먹을 수는 있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온전함을 요구받는 것은 백성들에게 온전함과 거룩함을 요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5. 사도 베드로는 성도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썼다(벧전 2:4~10). 모든 성도는 세상이 가진 기준을 능가하는 거룩함과 온전함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육체적인 차원보다는 영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비록 구약의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도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된다. 슬픔을 당했을 때에도 믿음의 소망을 드러내야 하고,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모범과 언약의 순결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게 이런 거룩의 질서와 조건을 여전히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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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전체를 보면 1-10장까지는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에 대해서 11-15장은 정결하게 사는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정결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16장에서는 대속죄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제 17장부터 마지막 27장까지는 거룩한 삶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7장은 음식에서의 거룩을 말했고 21, 22장도 음식에서의 거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 20장은 음행하지 말고 우상숭배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섬기고 음행하지 말고 가정을 바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가운데 19장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고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말했습니다. 오늘 21장은 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이 시체로 자신을 더럽히는 것, 결혼 대상자, 신체적 장애와 음식 등에 대해 다룹니다. 21장을 자세히 보면 앞쪽 부분에서 9절까지 보통 제사장에 대해서 말합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는 대제사장에 대해서 말하고 16절부터 끝 24절까지는 다시 제사장에 대해서 말합니다.
1. 제사장의 금지사항(1-9절)
1) 제사장과 시체(1-6절)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사람의 시체를 만져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들도 짐승의 시체에 접근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못하게 했습니다(레 11:24-40).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7일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정결하게 하는 특별한 물을 뿌리고 정결례를 해야 했습니다(민수기 19:11-22). 일반인들은 다른 사람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든지 할 때 사람의 시체를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 3절을 보면 제사장은 자기 가족의 시체만을 만질 수 있습니다. 가족의 장례를 지내야 할 때 더럽힐 수 있지만 다른 사람 시체를 만져서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체를 만지는 것 자체가 더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럽다 하셔서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체를 만진 다는 것은 더럽다고 정해서 하나님 백성들이 생명 가운데 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일반 사람보다 제사장이 시체를 만지는 것에 대해 더 엄격하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6절 뒤에 보면 여호와의 화제, 즉 하나님께 제사를 바쳐드리는 자이기 때문에 거룩해야 하고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4, 5절에는 가족의 죽음 때문에 머리를 깎아 대머리를 하지 말고 수염을 깎지 말고 살을 베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던 방식입니다. 제사장들은 자기 가족을 잃어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 제사장 집안의 여인(7-9절)
7절, 또 제사장은 결혼할 때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 바쳐진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7, 8절에서 모든 사람이 거룩하게 살아야 하지만 제사장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따로 구별된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보통 사람도 거룩해야 하지만 제사장은 더 거룩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9절, 제사장의 딸이 음행을 하면 불살라 죽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여자들이 음행하면 어떻게 죽입니까? 돌로 때려 죽입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의 딸 같은 경우 불로 태워서 더 심한 저주를 내립니다. 돌 맞아 죽으면 아프긴 하지만 시체는 그대로 남습니다. 그렇지만 불 태워 죽이면 더 흉하고 시체가 심하게 훼손됩니다.
2. 대제사장의 금지사항(10-15절)
1) 모든 시체에 접근 금지(10-12절)
10절부터는 대제사장에 대해서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가족 중에 누가 죽었을 때도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됩니다. 머리도 풀지 말고 옷도 찢지 말라고 합니다. 머리를 풀고 옷을 찢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죽었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12절 가족이 죽어 장례가 있어도 하나님을 지키는 성소에 계속해서 있으라고 합니다. 그대로 나오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구별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2) 대제사장의 결혼대상(13-15절)
대제사장은 결혼할 때 처녀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이혼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 기생을 아내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15절, 자손으로 백성중에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이혼한 여자나 기생이었던 사람과 함께 결혼하면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신이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3. 제사장과 신체적인 흠(16-24절)
1) 신체의 흠이 있는 자의 집례 금지(16-21절)
다시 16절에서는 일반 제사장을 위한 규례를 말합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성막에서 제사장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원래 제물을 바칠 때도 하나님께 바칠 때는 흠이 없는 짐승을 바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장도 몸에 흠이 없어야 합니다. 장애는 죄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가 아닙니다. 죄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성막(성전)에서 섬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의 가문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장애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드리고 나온 음식은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성전에서 제사 드린 그 음식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2) 흠있는 자도 집에서 제물을 먹음(22-24절)
22-23절을 보면 제사장 가문 사람 중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식의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라 합니다. 제사장 가족은 제물이나 십일조 사람들이 바치는 속전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제사장 가족이 제단에나 성막 안에 들어가는 것은 금합니다. 그러면 성소를 더럽힌다고 합니다. 그들이 더러운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더럽다고 정하셔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을 맡은 자들, 성직자들은 더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4. 제사장과 그리스도
1) 구약 제사장의 온전함과 제사와 하나님의 온전함
구약 제사장들은 시체를 통한 부정함, 결혼, 몸에서 흠이 없는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온전한 인간, 이상적인 인간을 상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장애가 있다고 인격적으로 가치가 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에는 제물도 온전하고, 제사장도 온전하고, 또 성막의 제도로 온전히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도들이 온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가르쳤습니다. 제사장은 또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야 했습니다.
2) 온전하신 그리스도, 우리를 온전케 하심
그러나 구약 제사장들은 실제적으로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각자 장차 오실 이상적이며 완전한 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실제로 흠이 없으시며 불완전함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행하시는 흠이 없는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완전한 그 분 자신을 제물도 바치는 대제사장이 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 분은 자신의 몸과 피를 통해 거룩하게 만드신 성도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히브리서 10:14).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은 우리들은 “에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베드로전서 2:5)이 되었고 되어 가야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되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흠없는 온전한 제사장이 되어가도록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십니다.
신체에 장애가 있거나, 남들에 비해서 세상적 관점으로 부족한 것이 있어도 염려하지 맙시다.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그것으로 우리는 더욱더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합시다. 그 어떤 인간일지라도 자신이 가진 것이나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온전히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을 사용하시고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머뭅니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9-10)
외부적인 부족함, 어려움이 있을 수록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그 분은 “아들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5:8,9).
고난을 통해 순종하면서 우리도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된 우리 모두는 항상 하나님께 거룩한 사람,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온전하게 되어 갑시다. 우리는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흠 없는 제물로 삽시다. 우리의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서 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