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기.
1. 21장부터 23장까지는 시민법이라고 해서, 사회 구성원 간의 질서와 평등, 사랑, 관계를 위해 중요한 원리들을 말씀합니다. 이 시민법의 필요는 참된 안식에서 멀어진 죄인된 인간들이, 비틀어진 인간 본성을 교정하는 역할을 하고, 근본적으로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이웃을 대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21장에서는 종에 관한 법, 폭행에 관한 법, 상해와 변상에 관한 법들입니다.
2. 먼저 히브리 종에 대한 법규가 먼저 나옵니다(2~11). 남종의 경우 6년이 지난 7년째에는 해방이 됩니다. 영원한 히브리 종은 없습니다(2). 그가 총각으로 왔으면 총각으로 나가고, 처자를 데리고 종이 되었다면 처자를 데리고 나갑니다(3). 그러나 주인이 아내를 주어 자녀를 낳았다면 처자는 상전에게 속합니다(4). 하지만 여기에는 자원하는 종의 규정이 있습니다(5~6). 종이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고 하면, 재판장에게 데려가 재판장이 종의 귀를 뚫어 영원한 종으로 표시하고 그는 영원한 종이 됩니다.
3. 여종은 남종과 같은 규례로 해방되지 않습니다(7). 다만 상전이 그 여종을 기뻐하지 않으면 해방시켜야 하며 주인이라 해도 여종을 외국인에게 팔 권리가 없습니다(8). 상전이 여종을 아들에게 준다면, 딸같이 대접하여 의복, 음식, 부부관계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9~10). 만일 그 대우를 주지 않으면 여종은 속전 없이 해방될 수 있습니다(11).
4.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소유할 수 없고 그 권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노예라고 할지라도 모두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종이 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누구나 종이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노예에 대한 개념은 ‘물건취급’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법으로 명하신 ‘인간권리’에 대한 존엄한 법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 법 자체를 지킬 수 없으나, 이 법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새길만 합니다.
5. 이어지는 것은 개인적 상해에 대한 법규입니다(12~36). 원칙적으로 살인은 사형에 해당합니다(12). 고의성이 없는 살인(13)의 경우,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고, 계획적인 살인인 경우(14) 하나님의 제단이라도 잡아내 사형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규정에서는 부모를 때리는 자는 사형이고(15), 부모를 저주하는 자도 사형입니다(17). 사람을 납치하여 파는 경우(16)도 사형에 해당합니다. 싸움으로 인한 상해의 경우, 상대방이 다치게 되면 그 기간에 대한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18~19). 상전이 종을 때려서 죽거나 다친 경우는(20~21), 종이 바로 죽었다면 반드시 형벌을 받지만, 하루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은 면합니다. 비록 종은 상전의 금전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존중은 요구됩니다. 임신한 여인을 다치게 한 경우(22~25), 해가 없으면 남편의 청구대로 재판받아 벌금을 내야하고, 해가 있으면, ‘그대로’ 갚을 것입니다.
6.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 이는 이의 원리”가 적용됩니다(23-24). 하지만 이 무서운 율법의 원리는 사실상 되갚아줄 때, 그 이상으로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가 깔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의 근동의 풍습은 완전한 보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계선은 인간의 완악함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정신은 신약이나 구약 모두 사랑으로서, 긍휼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28~32), 소는 돌에 맞아 죽고 그 고기는 먹을 수 없으며, 주인은 형벌을 면합니다. 그러나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소였는데 주인의 단속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면, 소와 주인도 돌로 쳐 죽여야 하지만, 만일 피해자가 속죄금을 요구한다면 원하는 대로 속죄금을 주어야 합니다.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인 경우에는 소는 죽이고, 소 주인은 종의 상전에게 삼십 세겔을 지불합니다. 구덩이를 파고 부주의하게 둔 결과 소나 나귀가 빠지면 구덩이를 판 사람이 짐승의 주인에게 돈을 주어 배상하고 죽은 것은 본인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33~34). 소가 소를 받아 죽인 경우는(35~36) 산 소와 죽은 소를 팔아 반분하여 나누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도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소인데 주인의 단속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면, 소를 소로 갚아, 죽은 소를 본인이 가지고 산 소를 죽은 소의 주인에게 주어야 합니다.
8. 21장에서 23장의 시민법은 당시 이스라엘 문화와 시대에 맞는 법이었지,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였으니, 내가 당한 손해만큼 상대방에게 상해를 가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민법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만 구속력이 있는 법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 이 법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기도 합니다.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분명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신,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이 계명 준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해와 폭력과 억압과 차별이 없는, 그리고 그 외적 행동을 통해 내적 평안과 안식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전히 이 시민법은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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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규는 이러하니라(1절)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셔서 십계명을 선포하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한의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를 중재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간청을 들어주었고, 이제 모든 하나님의 율법이 모세의 입을 통해서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이어서 모세에게 구체적인 율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십계명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언약서'라고 부르는데, 23장 33절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시는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님의 가이드라인이었고, 이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가 드러나며,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여기서 '법규'는 히브리어 '미쉬파트'입니다.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심판' 혹은 '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법규(미쉬파트)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자, 그리고 재판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를 우리는 각자의 소견과, 각자의 입장에서만 이해하고 판단하고 삶을 다스리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늘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마음이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 세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이제 내가 너희에게 큰 가이드라인을 주었으나 이것에 맞게 삶을 잘 꾸려 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라'고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분명히 언급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다운 삶인지를 세심하게 집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두려워하며,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세심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꾸려가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삶의 자리일 지라도, 매일 반복되서 지겨워보이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고, 말씀하시며, 주님의 마음을 허락해 주셔서 오늘도 주님의 백성으로 생명의 통로의 삶을 살아가게 인도해 주십니다.
히브리 종을 사면(2-6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할 구체적인 법규로서 먼저 '종에 관한 법'을 말씀하십니다.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법규로서 첫번째로 종의 보호와 종의 자유에 대한 법을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히브리 종'은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는 사람, 혹은 남의 물건을 훔쳤다가 들통이 나서 피해자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데 대책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종종 스스로 누군가의 종이 되어 조금이나마 삶의 안정을 찾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종의 빚이 얼마고, 그들을 사기 위해 얼마의 금액을 주인이 지불했든지, 종으로 주인을 섬기기 시작한지 6년째 되는 해까지만 종으로서 일하고, 일곱째 되는 해에는 그 몸값을 묻지 말고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규는 경제 논리의 관점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종의 빚이 얼마냐에 따라 그 종이 주인을 섬겨야 하는 기간을 정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을 선포하심으로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종이 주인에게 부당하게 오래 동안 착취 당하지 않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사람의 기본적인 인권이 박탈되는 것의 한계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주인이 6년 동안 부리던 종에게 자유를 줄 때에는 어떤 조건도 제시해서는 안됩니다. 이 법과 유사한 신명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주인에게 자유인이 되는 종에게 빈손으로 나가지 않도록 '한살림'을 준비해 줄 것을 명령하십니다.
(신 15:12-15)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핵심은 '배려'입니다. 종으로 살던 사람이 자유를 얻는다 해도 당장 먹고 살 대책이 없으면 다시 종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사회적 약자인 종을 보호하는 법규를 명령을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이전에 애굽에서 '종'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유케 해주셨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맛본 백성은 억압되어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알기 때문에 속박 당한 자들에 대한 염려가 각별해야하며, 무엇보다 은혜로 자유케 되었기에 받은 은혜에 합당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6)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앞서 2절에서 제시한 기본적인 원리 안에서 구체인 세부 사항이 더해집니다. 먼저 종의 결혼 관계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홀로 종으로 들어왔으면 홀로 나가고, 아내를 데리고 들어와 함께 종이 되었다면 아내와 함께 나갈 수 있는 권리입니다. 또한 홀로 들어와서 주인의 배려로 가정을 일구었다면, 가족들을 두고 홀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6년 동안의 종살이 후 자유를 앞둔 종이 '나는 나의 주인과 나의 처자를 사랑하므로, 혼자 자유를 얻어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주인은 종을 재판장에게 데려가 증인으로 삼고, 종은 귀를 문이나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어 종신토록 주인의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평생 주인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고백이 참 놀랍습니다. ‘나는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인께 충성하며 다시 종살이를 한다’는 것이 아닌, ‘나의 주인과 나의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주인은 종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며, 그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가 뚜렷해집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히브리어 ‘아헤브’는 출애굽기에 단 두번 등장합니다. 앞서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첫 번째 ‘아헤브’(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 등장하는 ‘아헤브’(사랑)은 종이 주인과 아내를 사랑하기에 평생에 종으로 살아가기를 자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웃 사랑에 대한 장벽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랑해야 할 장벽을 두고 사랑해야 할 대상을 정해 놓았던 우리에게 더이상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우리에게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딸 같이(7~11절)
(7)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여종의 경우 주인이 남종을 내보내듯이 내보낼 수 없으며, 여종은 6년이 지나서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이 법규가 성을 차별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에 대한 배려입니다. 여성의 경제권이 거의 인정되지 않던 당시 고대 사회에서 홀로 된 여성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사회에서 이 법규는 여종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도록 배려할 것을 주인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여종은 어느 종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종은 부모에 의해 종으로 팔린 자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빈곤에 처한 부모가 딸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부요한 사람에게 파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경우 사는 자와 파는 자는 결혼을 전제로 합니다. 주인이 직접 아내로 맞거나 자신의 아들에게 아내로 주기 위해 다른 사람의 딸은 사는 것입니다. 이것에 8절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8)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그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는 팔지 못할 것이요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출 21:8, 새번역) 주인이 아내로 삼으려고 그 여자를 샀으나,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그 여자에게 몸값을 얹어서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내야 한다. 그가 그 여자를 속인 것이므로, 그 여자를 외국 사람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이처럼 결혼을 전제로 여종을 데려왔기에 만약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주인은 그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그 여인을 타국인에게 팔아서는 안됩니다.
(9)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할 것이요
한 남자가 여종을 며느리로 삼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데려왔다면, 그녀를 딸처럼 대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종이라는 신분으로 출발했으나 결혼을 통해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으니 그녀가 누릴 수 있는 모든 법적인 권한을 보장하라는 의미입니다.
(10-11)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 그가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법규는 한 남자가 여종을 아내로 삼았다가 세월이 지나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었다 할지라도 남자는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죽는 날까지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의무는 아내에게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그녀와 동침하는 것'을 제공하는 등으로 규정합니다. 남편이 이 세 가지 의무를 꺼려할 경우, 남자는 그녀를 아무런 조건 없이 자유인으로 보내야 합니다. 경제적인 논리가 적용되기 전에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종으로 팔려왔을지라도 자존감을 박탈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법규의 취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과 지금 우리의 모습은 참 다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해 명령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시선, 그리고 하나님 백성 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규의 시작을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으로 시작하셨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지금도 삶의 무게를 그대로 짊어져야 하는 우리의 이웃들, 숨 막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자들에게 우리는 그 짐을 덜어주고, 한 숨을 돌릴 수 있는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눈을 들어 우리의 도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시선을 따라 더 낮은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 연약한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4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이집트의 법과 질서를 따라 살았던 이스라엘 자손이 자유인이 된 이후에 그들의 합의를 통해 법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법을 받았습니다. 이집트의 법과 질서는 철저히 인본주의적이었으며 통치 계급에 유리한 법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의 변화를 겪은 이스라엘 자손은 ‘정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초부터 배워야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처벌을 요구하거나 사면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정의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고 공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신뢰함으로 세상이 추구하는 질서와 안전 이상의 샬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12-17)
(12-14)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12-17절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라는 표현을 통해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하여 특별히 경각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첫 번째 죄는 살인입니다. 고의로 타인을 살해하여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고대 근동의 다른 법전에서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인에 대한 세상과는 다른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살인죄를 언급하신 것은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창세기 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살인죄는 생명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신성모독 행위입니다. 살인죄는 가해자의 고의성이 확인되어야 했고 두 사람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아 사형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13절은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고의성이 없는 살인의 경우에는 사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해자의 가족으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피의 복수가 이어지는 것을 막으시고자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주셨습니다. 고의성이 없는 사망 사고의 가해자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그해의 대제사장이 별세하기까지 도피성에 머물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죄수를 감옥에 가두는 이유 중에 하나가 사회의 안전을 위해 죄를 지은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라면, 도피성 제도는 고의성이 없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이스라엘 사회가 피의 복수를 중단하고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성 제도를 악용하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도망하는지 반드시 찾아내어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거룩한 하나님의 제단으로 피한다고 하여도 그를 끌어내어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즉, 도피성은 죄인들이 처벌을 면제받을 수 있는 무법지대가 아니라 무분별한 피의 복수를 막고 생명을 보존하는 샬롬의 피난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샬롬을 주시고자 마련하신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의 노예였을 때 기본적인 인권은 고사하고 물건 취급을 받았던 인생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언약서를 통해 생명의 가치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하며 그 근거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15-17)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형에 해당하는 두 번째 죄는 부모 폭행죄입니다. 부모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하는 것 뿐 아니라 부모를 저주하는 언어 폭력까지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부모 폭행죄는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에 해당하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에 위배 됩니다. 가정은 이스라엘을 이루는 기초 단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권위에 자녀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한 가정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의 질서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질서까지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언제나 온전한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을 통해 자녀들을 보호하고 자녀들의 필요를 채우며 신앙이 전수 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에게는 부모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해서 인내하고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가 요청됩니다. 반대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권위를 부여해주셔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줄 알고 가정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태도로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가꾸어야 합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세 번째 죄는 유괴와 인신매매입니다. 사람을 유괴하여 이익을 얻기 위해 매매하는 등의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노예를 물건처럼 거래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요셉을 물건처럼 팔았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의 노예로 살았기에 사람을 수단화하는 문화에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 사람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유괴 사건이나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범죄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먼 얘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 이익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돈이면 타인을 조종하거나 적당히 이용할 수 있다는 세속적 가치관을 경계해야 합니다.
상해죄에 관한 법률(18-27)
(18-19)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경험합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싸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상대의 신체를 훼손하여 발생하는 손해에 대하여 상해를 입은 사람이 완치되기까지 가해자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해를 입힌 사람에게 벌금을 선고한다든지 얼마간 사회와 격리를 시키는 방법으로 징계를하는 대신에 피해자가 온전히 회복 되기까지 곁에서 돕는 방법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게 하셨습니다. 싸움은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상대방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얼마나 아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싸움 이후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은 상대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고 회복되기까지 곁에서 도우며 비로소 상대의 아픔을 직면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게 됩니다.
(20-21)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
고대 근동의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노예 제도가 일반적이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가장 약자로 여겨지는 노예 신분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을 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인은 종의 생명을 해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었기에 마치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에 아무리 하찮게 여겨지는 종이라도 그의(그녀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이 종을 때려 죽게 된다면 주인은 단순히 자신의 재산을 잃은 것에 그치지 않고 살인죄가 적용 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통상 종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었고 종들이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손해는 오롯이 주인의 손해로 돌아왔기 때문에 별도의 피해 보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처럼 아무리 주인이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었던 것입니다.
(22-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두 사람이 싸우다가 의도치 않게 옆에 있던 임산부를 낙태하게 한 경우에 그 여자의 남편이 제시하는 적절한 보상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상해를 입게 되었다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갚아 주어야 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다른 법전에서도 발견되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은 만일 싸움으로 의도치 않게 옆의 여자가 죽게 된 경우 가해자의 딸을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다소 과격하게 느껴지는 동해보복법은 복수를 정당화하는 규정이기 보다는 개인의 복수심을 제한하고 모든 인간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규정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그의 족속을 속여 혼인을 빙자하여 할례를 받게하였고 할례를 받아 신체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세겜 뿐 아니라 성의 모든 남자를 학살하였던 사건을 떠올려봅니다. 상대적으로 싸움의 한편이 힘이 세고 경제력이나 권력까지 세다면 다른 상대에게 자신이 우위에 있는 힘의 크기만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과도한 피해 보상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만’, ‘이는 이로만’, ‘손은 손으로만’ 갚도록 제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지나친 복수를 막고 비교 우위에서 오는 불평등한 피해 보상을 막고자 하신 것입니다.
(26-27)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
주인이 노예에게 상해를 입히게 된 경우 주인은 종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피해를 보상해야 했습니다. 노예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받던 고대 근동의 사회에서 노예의 신체적 훼손은 단순히 주인의 경제적 손실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결코 물건 취급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쳐서 상하게 하면’, ‘쳐서 빠뜨리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주인이 종에게 입힌 신체적 훼손은 분명한 의도를 가진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주인은 더 이상 종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종의 신체적 피해가 어떠하든지 그 댓가는 종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인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종을 보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종을 부리면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한 인격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위험에 처한 주인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서는 고대 근동의 다른 법전들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법의 정신과 원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살인죄와 상해죄, 유괴와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와는 무관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언약서를 쉽게 무시할 것이 아니라 언약서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정교한 법과 규범이 있지만, 겉으로 유지되는 질서 이면에는 여전히 억압과 차별 그리고 약자에 대한 횡포가 존재합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고 살아갈 뿐 이웃을 위해 좀처럼 손을 내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인죄와 상해죄, 유괴와 같은 범죄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으로 오늘 하루 ‘나 정도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괜찮게 사는 것이라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기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잇대어 이웃을 향해 힘껏 손을 내미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땅을 치유하고 살리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십계명을 전하셨고, 모세가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그것을 풀어 설명합니다. 우선 종교에 관한 율례를 다뤘고, 노예법, 여종 및 사형 집행에 관한 법 등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사람을 해친 짐승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가축이 입은 피해를 어떻게 배상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을 해친 짐승에 관한 법률(28-32)
(28-29)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게오르크 옐리네크라는 옛 독일 법학자는 법이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말했습니다. 도덕규범 중에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또 모든 도덕을 법으로 치환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법에는 여러 맹점이 있습니다. 우선 법은 외적으로 사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지 그 내면의 옳고 그름을 다루지 못합니다. 법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의롭지 못한 행동을 금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법은 이러이러한 행동은 옳은 것이니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못하고, 다만 이러이러한 행동은 그른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법이 금하지 않는 범위까지는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낳기도 합니다. 위법만 아니면 벌을 받지 않으니 탈법, 편법도 괜찮다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법의식이 저하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법은 본래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성긴 그물밖에 될 수 없습니다.
도심부 일반도로에서는 제한속도가 50km로, 도심부 외 주택가 등 이면도로에서는 제한속도가 30km로 규정되었습니다. 이 정책으로 아이들과 노약자들을 포함한 보행자 안전은 개선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49km로나 29km로 다니는 차에 부딪히면 사람이 다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법안의 의도는 보행자 안전을 우선으로 삼고 운전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법의 형식은 이러한 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고속도로까지 제한속도를 10km로 정한다면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법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법은 그 의도와 표현이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모든 법에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법조문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법관이 해석해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 역시 어제 말씀에 이어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해설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육 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문자대로만 적용한다면 앞서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한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말씀은 자기모순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아무리 십계명이라고 할지라도 해석을 통하여 일상생활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담긴 의의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를 다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광야 생활을 하고 가나안에 정착해야 할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실질적 고민과 해석의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일례로 기르던 소가 사람을 받는 바람에 사람이 죽게 된 경우를 듭니다. 살인입니까? 살인이 아닙니까? 살인이라는 단어 자체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적용은 굉장히 다양하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소의 주인이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어떤 이는 전혀 책임이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 주인이 소가 그렇게 받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면 살인의 책임에서 면제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임자가 받는 버릇이 있는 소에 대해 경고를 들었는데도 관리를 소홀히 하여 사람이 죽었다면 살인에 해당하기에 소유자도 죽이라고 명합니다.
여기서도 해석의 여지는 물론 있습니다. 소가 어느 정도 주기로 받으면 받는 버릇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면 얼마나 또 어떤 강도로 말을 들어야 경고라고 할 수 있는 지 등등입니다. 소 역시 가축화된 동물이기에 그 본래 성향은 여타 들짐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보통 소를 순한 짐승으로 생각하는데, 천성이 그렇다기보다는 인간의 꾀에 길들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 힘이 생기면 사람의 힘으로 통제가 안 되므로 코를 뚫어서 고삐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세고 성질이 거칠어서 고삐만 놓아주면 사람을 들이받는 소도 있는데, 이런 소를 우리 말로 부사리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만약 소가 그런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람을 받아 죽였을 때는 돌로 쳐서 소를 죽이고 그 고기도 취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말씀을 반영합니다. 새번역으로 창세기 9장 5절에서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짐승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했다면 역시 보복을 받아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게다가 사람이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깨뜨린 것이기에 신성 모독에 부합하는 투석형으로 죽이고, 저주받은 동물로 간주하여 먹지 않았습니다. 이때 주인은 재산상 상당한 손해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소가 받는 성질이 있음을 주인이 알았다면 그 주인은 더욱 큰 책임을 지게 됩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는 창조 명령을 준수하지 못했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인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대가로 소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내어놓아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간혹 개가 사람을 물어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특히 연예인이 기르던 개가 주민을 물어 죽게 한 경우가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개가 사람을 공격해 숨지게 한 경우에 견주에게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내린다고 합니다. 개를 안락사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고대 이스라엘과 현대 우리나라 중에 어느 사회가 더 생명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0-32)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법규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그렇지만 고의적으로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기에 속죄금을 내서 생명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속죄금이란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신 지불하는 돈인데,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덮다’, ‘가리다’라는 뜻으로서 죄를 덮어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생명의 대가라고 할 때 사용한 대가라는 단어 역시 속전 또는 속량을 가리킵니다. 즉 죽음에 대해서 반드시 그 생명의 손실에 해당하는 대가가 치러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새번역 성경은 30절 말씀을 보면 “피해자 가족이 원하면, 소 임자를 처형하는 대신에, 그에게 배상금을 물릴 수 있다. 그 때에 그 배상금 액수는 재판관이 정한다”고 합니다. 소 임자를 처형하지 않는 유일한 근거는 그 피해자 가족이 소의 주인을 죽이기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 역시 오히려 과거에 법에 대한 감수성이 더 뛰어났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현대에는 사적 복수 내지 손해 배상이 모두 공적인 형벌 제도에 흡수되면서, 오히려 피해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그 가해자의 처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피해자의 가족에게, 그리고 그 배상금은 재판관에게 지정함으로써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또한 희생된 사람이 어린아이일 경우에도 동일한 법규를 적용했으며, 다만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은 삼십 세겔을 물고 소 역시 돌로 쳐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는 어린아이나 종 역시 하나님에게서 나온 동일한 생명의 권리를 누리고 있기에 그 피에 대한 대가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즉 피를 불러온 죽음에 대해서 반드시 구원의 근거로, 동물이기는 하지만 피의 대가가 필요하고 일정량의 속죄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구원에 해당하는 대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속죄금이 되시고 우리 생명의 대가가 되심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기독교의 고유한 가치는 내가 소중하기에 다른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아득히 넘어섭니다. 다른 사람이 나만큼 소중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순간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연합은 쉽게 깨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유혹은 우리에게 늘 다가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뿐 아니라 저 사람도 자신의 형상으로 소중히 빚으셔서 우리를 자신의 공간에 초대하시고 함께 살아가신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소중하다고 인식해야만 절대적으로 생명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가축이 입은 피해에 관한 법률(33-38)
가축이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를 다룬 후, 인간이 가축에게 해를 입히고 동물끼리 서로 해를 입혔을 경우를 다룹니다.
(33-36)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려니와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지니라
구덩이라는 단어는 보통 수조나 우물을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유목 생활을 하는 현세대에 대한 법규라기보다는 이후 가나안 세대에게 주는 미래적 선포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구덩이는 소중한 자원이지만 짐승이나 사람에게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인은 돌로 덮어 사고를 방지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관리를 소홀히 하여 소나 나귀가 빠지면 잘 보상해야 했습니다. 또 소가 소를 받았을 때 역시 미리 인지했는지 여부에 따라 그 배상이 달라지게 했습니다. 다만 어느 경우에도 가해자 역시 크게 손해를 보지 않도록 조정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별히 잘 보상하다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샬람인데, 샬롬과 동일한 어근을 지니며 그 의미는 온전하다, 완전하다 등입니다. 그래서 보상과 배상을 통해 회복된 평화의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 구속의 차원에서 발생하여 관계의 회복을 낫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의 근본 원칙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구성원의 샬롬에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피해를 입었든지 간에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통해서 법의 적용과 원리에 대해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법 이해와는 많이 다른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계명과 율법을 주실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법을 주시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 법을 해석하고 실행했습니다. 이에 비해 현대는 법을 만드는 입법부,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법부 모두 국가기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가는 그나마 신뢰할 대상이지만, 얼마든지 법을 악용하거나 오남용할 수 있습니다. 국가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면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13장 1절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씀하셨고, 10절에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선포합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법은 사랑하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괴리 가운데 영원히 다스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살아갑니다.
마라톤 영웅이신 고 손기정 옹이 남기신 일화가 있습니다. 본인이 상금을 받으셨는데 세무사에게 찾아와 세금을 먼저 내야겠다고 말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세무사가 연세도 높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신고하시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국가로부터 평생 많은 혜택을 받고 살았기에 나라를 위해 마지막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고 주장하며 세금을 계산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계산한 것을 받아들고서는 제한 금액이 너무 적다고 최대한 많이 내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셨답니다. 세무사가 법적으로 최대한 많이 낼 수 있도록 계산하자, 그제서야 그렇지, 이만큼은 내야 마음이 편하지 하며 돌아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치유하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손을 내밀어 작은 이웃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을 주고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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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기초가 되는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21장부터 24장까지 계속하여 율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책으로 기록되었고(24: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들을 준행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율법의 첫번 내용은 노예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버린 자들, 연약한 자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 큰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1-6절 말씀은 종에 관한 법으로
‘제 7년에는 값 없이 자유를 주라’고 말씀합니다.
노예들은 남에게 억눌려 살며 억울한 일을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한없이 슬픈 삶을 삽니다. 한 번 노예가 되면 일생동안 부려 먹는 세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7-11절은
‘여종의 의복과 음식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죄악의 노예된 인생들이 만들어낸 노예 제도에 의해 슬픈 삶을 사는 여종들을 돌봐주도록 명하셨습니다. 여종은 타국에 팔지 말며(8) 아들에게 주기로 했으면 딸처럼 대접하고(9)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가 싫으면 속전 없이 자유를 주되(8) 다른 곳에 장가들더라도 의식주를 책임지도록 하셨습니다.
12-17절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와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 사람을 죽인 자와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 하는자, 사람을 유괴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도록 율례를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에 해당하는 본문의 네 가지 죄는 모두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를 동시에 파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 공동체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할 기본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파괴함으로써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극단적인 형벌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다룬 본문은 구체적인 죄목에 대한 교훈에 앞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의 삶의 원칙은 공동체의 유지가 가장 우선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언제나 공동체가 요구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에 삶의 최상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12)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범죄행위입니다.
본문에서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극악한 범죄 중에서 사람을 죽이는 죄를 가장 극악하고 심각한 범죄로 규정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장 무서운 형벌로 다스리고 가장 심각한 범죄로 규정하신 이유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육체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악을 짓기 때문입니다. 창1:26-27에 말씀하신 것 같이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령이 인간의 육체 속으로 불어넣어 졌습니다. 인간들의 몸에 하나님의 영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
하는 범죄 행위로 하나님의 극단적인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5)
부모를 치는 것은 창조질서의 파괴며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두 번째 사형의 죄는 아비나 어미를 치는 것입니다. 직접 사람을 죽인 것은 사형에 해당하지만 부모를 쳤다는 이유로 사형을 시킨 것은 좀 지나치는 처사는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치는 것을 그토록 중한 죄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게 하셨을까요? 이는 부모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모가 단순히 가족에서의 어른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정과 자식을 다스리는 존재로 여겨 왔습니다. 부모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졌고 부모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치는 것은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부모가 대변하고 있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행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에 못지 않게 심각한 죄로 극형으로 다스리게 한 것입니다.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16)
사람을 유괴하여 팔았든지 물건 취급했다는 것은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짓밟는 신성 모독적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괴범의 극형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가장 가치있는 존재로 대해야 합니다.
17절은
사형에 해당하는 네 번째 죄로써, 15절에 이어 또 다시 반복하심은 부모에 대한 죄가 얼마나 심각한 죄 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말로써 부모에게 짓는 죄가 직접 때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심각한 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권위는 자식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신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절부터 36절까지는 사람이 상대방의 신체에 상해를 입힌 경우의 보상 규정과,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의 보상 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상해를 입힌 자에 대한 보상규정의 핵심 사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선포하심은 물론 죄에 대해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여기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해보복법이 범죄자에 대한 복수의 개념이 아니라 형벌을 통해 범죄의 재발을 방지함으로 그로 하여금 영원한 심판에 들게 하지 않으시려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처음부터 범죄자에 대한 형벌의 개념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인도를 목적으로 한 사랑의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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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의 말씀은 종과 폭행과 임자의 책임에 대한 법입니다. 십계명과 함께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삶의 규정입니다. 첫 번째로 오늘 본문 1절에서 11절은 종에 관한 법으로 남종과 여종에 대해 말씀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동족이 히브리 남자나 부부를 종으로 샀으면 남자나 부부는 육년 동안은 종노릇을 해야 하지만 칠년 째에는 반드시 다시 자유인으로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과 남자가 종이 된 후 가정을 갖게 되었을 경우와 관련된 말씀이고, 여종에 관한 법으로는 세 가지로 첫째 주인이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사왔다가 맘에 안 든다고 해서 타국인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과 둘째는 만일 여자를 자기 며느리로 사왔으면 딸 같이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과 셋째는 주인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어도 아내로 사온 여자에 대해 육체적 경제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노예제도는 없습니다. 혹,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경우가 있지만 국가 제도 자체에 노예제도는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종에 대한 오늘 말씀은 우리 시대와는 동떨어진 말씀처럼 보입니다. 마치 고대 사회에나 해당되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말씀이듯,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와 인간 존중입니다.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존중받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에 매여 있던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우리들을 대우해주시고 존중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대우와 존중을 받은 자로 사람을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어떤 존재였던가를 겸손히 생각하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우 받고 존중받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 사람을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참된 자유인의 실상이며, 자유로운 삶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폭행에 대한 말씀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와 상해 보상에 대해 말씀합니다. 먼저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세 가지로 고의로 사람을 죽였거나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거나 인신매매범은 반드시 죽이라고 하시고, 상해보상과 관련해서는 첫째 서로 싸우다가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그가 다쳤으면 생활비와 치료비를 보상해야 하고, 둘째 주인이 종을 때렸을 때 종이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주인에게 책임이 있지만, 며칠 후에 죽었으면 종이 주인의 소유이듯, 주인 스스로 자신의 재산상의 손해를 본 것이기에 져야 할 책임이 없고, 셋째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낙태시켰으면 남편의 청구대로 보상해야 하고, 넷째로는 동형복수법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사회에는 늘 폭력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폭력, 정치적인 폭력, 언어적인 폭력 등등 여러 가지 폭력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 마음속엔 폭력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폭력으로 인해 물질적 손해나 육체적, 심적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실로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폭력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폭력은 인간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폭력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지으셨을 때의 본연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폭력은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말씀과 성령과 기도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자신이 소중하듯 남도 소중하다는 사실과 폭력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며 존중과 연합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세 번째는 주인의 책임에 대한 말씀으로 주인이 기르던 소가 사람을 받아서 죽이면 그 소와 주인도 죽이라는 것과 다른 집의 소나 짐승이 누군가가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죽거나 다치면 반드시 보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결국 자신의 소유에 대해 관리를 잘하라는 것입니다.
회사나 공동체의 문제는 관리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리의 문제입니다, 시간관리, 건강관리, 인간관리, 재무관리, 마음관리, 언어관리, 표정관리 등등 관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관리의 지혜와 온전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관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머물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 안에서 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