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
1. 18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사라의 웃은 일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계획을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내 주여” 하나님께 적용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 명 중에 한 분만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 분 중에 소돔과 고모라에는 두 천사가 나타났으므로 이 세 분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두 분은 천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찾았고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또다시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 하신 이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환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담장을 넘어서듯, 넘어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사람의 뜻과 계획과 힘으로 난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태어난 자를 의미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왜 아브라함에게 그대로 드러내실까요? 소돔과 고모라에 행하실 일이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아브라함의 지위나 역할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18-19절). 또한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복의 근원이 되는 독특한 지위를 허락하신 목적이, 대대로 그의 집, 곧 그에게 속한 구별된 무리에게 명하여 하나님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 하신 것이며,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 말씀한 일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한 나라임을 말씀하신 이후에, 이와는 정반대가 되는 소돔과 고모라를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폭력이 횡행하여 그 억울함과 고통을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극에 달하였다고 하십니다(20절).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와 정의의 나라이지만, 세상 나라는 즉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그 죄악을 처리하실 나라입니다. 단순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심판만 다루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소돔과 고모라를 나란히 말씀하십니다. 성격이 전혀 다른 이 두 나라를 나란히 배열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나라와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죄악의 나라이며, 부패한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5. 저주와 심판이 선언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가 세상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가장 명확하고 뚜렷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존하지 못할 세상 나라를 향한 의인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은 성중에 의인만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의인을 인하여 그 성을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노와 심판의 저주 아래 있는 죄악의 도성 소돔을 위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가장 타락한 도성이라 할지라도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에는 여전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른 자세임을 보여줍니다.
6. 주의할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소돔과 고모라 전체의 구원을 위한 기도였지만, 기도의 초점과 관심은 “성중에 있는 의인”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며, 악인으로 인해 의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음도 있겠으나, 소수의 의인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 전체가 지탱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이 그 안에 존재하는 의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심판을 늦추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인의 존재가 이렇듯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상, 우리의 가정에 직장에 교회에 나라와 민족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인의 존재입니다. 즉 의인은 세상을 향한 축복의 존재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존재는 세상 나라를 멸하고 정복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새로워지고 복과 은혜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7. 세상을 위한 기도, 즉 이 세상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는 간절하여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필사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27)”그리고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으나, 아브라함의 기도는 헛되지 않아서 소돔 성중에 거하면서도 소돔의 죄악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던 롯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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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는 누군가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날이 뜨거울 때에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 ‘환대’를 하며 시작됩니다.
(1-2)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은 더위를 피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쉼을 가지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모습은 신적인 모습이 아니라 본문 2절에서처럼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사람 셋을 보았고,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곧장 달려나가 영접했습니다. 현대 사회의 시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근동사회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유목민 삶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근동에서 손님 환대는 죽음에서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당시 풍습은 누구든지 자신의 장막으로 다가오면 쉬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기에 오히려 환대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고 예외적인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19장에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것을 보아서도 당시의 풍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어떻게 맞이 하였습니까?
(3-4)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아브라함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청하며 자신의 집에서 쉬고 가기를 요청합니다. 4절에서 물을 가져와 발을 씻으라는 표현은 당시 먼지가 많은 건기의 가나안 길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지금처럼 운동화가 아닌 샌들을 신고 다니는 문화에서 발은 항상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씻을 수 있는 물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은 충분해 보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6-8)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분명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떡을 조금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쉬는 것을 승락하자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떡을 만들라고 하고, 자신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를 하게끔 하였습니다.
송아지 요리는 매우 귀한 것으로 아주 중요한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하던 음식입니다. 여기에 우유까지 준비하여 아브라함은 지극정성으로 나그네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나무 아래에서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대화의 주제가 변하게 됩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아브라함의 장막에 방문한 그들은 대화의 대상을 바꾸어 아내 사라가 어디있는지 묻습니다. 이제 이들의 방문 목적이 드러납니다. 사라가 장막에 있다는 대답을 듣자 그들은 방문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10-12)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이들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 아들이 생길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할 때 사라는 분명 장막 문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웃어 넘겼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아 생리가 끊어졌고, 아브라함마저 늙었으니 그들이 자녀에 대한 희망 조차 가질 수 없는 신체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족과 고향을 떠났을 때만 해도 그와 사라는 신체적으로 아들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적으로 지나면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어 후손을 이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본다면 그들에게 아들이 생기기까지 시간을 지연시킨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금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7장에서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라도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속으로 웃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부부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들에게 자녀가 생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지만 때때로 상황을 바라보며 절대 불가능이라고 단정짓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바심을 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오히려 실패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지만 사람인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속으로 웃어 넘겼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은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밝히십니다.
(13-14)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본문 13절에서부터 나그네들은 이제 여호와라는 것이 정확하게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웃음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통해 자녀가 태어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사라의 모습으로 오늘 본문은 마무리가 됩니다.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사라는 자신이 웃었던 것이 들키게 되자 바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고, 사람들은 자신의 거짓이 드러나게 되면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이성적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금 네가 웃었다고 말씀하시며 거짓말을 넘어가 주시지 않습니다.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웃음으로 넘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며, 불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상황적으로 불가능할지라도 하나님께 있어 불가능이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각자에게 극한 상황이 다가올 때가 있고, 멸시와 환난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지만 고난과 환난이 그들을 따라왔고, 자녀를 주시겠다고 했지만 신체적인 가능성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은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갈등만 더욱 심해졌고, 상황으로 볼 때 더욱 괴로울 뿐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이 불가능을 말할지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자신이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습니까? 본문에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웃으며 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상황이 아닌 주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며 나아가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은 지난 13년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응답이 없는 가운데 기나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려왔습니다. 햇볕이 뜨거운 어느 날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 셋이 그 장막 맞은 편에 선 것을 보고 놀라며,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그들을 맞아 손님대접을 하는 모습이 창세기 18장 전반부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3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을 예고하시고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 아브라함과 대화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21절에서는 하나님은 소돔 심판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설명해 주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22절에서 33절은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보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돔 심판 계획(16-21)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6절은 하나님의 일행을 다시 ‘사람들’로 언급하며 소돔 멸망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8장 2절은 하나님의 일행을 사람이라고 했다가 13절에서 그 신분을 드러내어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16절에서 하나님의 일행을 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표현 한 이유는 아브라함이 사람을 대접하는 것과 19장에서 소돔 사람들이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대조시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러 나갈 때는 소돔에 일어날 일을 전혀 모르고 단순히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 그곳까지 따라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과 동행하는 것을 표현한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가 분사형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어지는 하나님의 독백은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장소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심판하실 계획을 알려 주신 것처럼, 이번에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심판하실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16절에서는 세 사람이 소돔을 향해 내려갔다고 했지만 17절은 곧바로 세 사람 중에 한 분이 여호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주어 ‘여호와’를 문두에 도치하였습니다. 히브리어의 평범한 문장 구조 배열은 동사 그리고 주어가 또는 목적어가 나오는 구조라고 생각해 볼 때, 주어를 처음에 두며 문장을 시작하는 구조는 17절 이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 지침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침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에게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18절의 표현들은 눈에 아주 익숙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할 때 창세기 12장 2절 3절에서 한 약속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표현은 ‘그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더 정확한 히브리어 원어의 근거에서 보면 ‘그 안에서’ 라고 번역해 볼 수 있습니다. 1차적 해석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이 행한 의와 공도로 말미암아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만민을 위한 복의 통로로 쓰시는 이유를 19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9절의 시작은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의 자식과 권속에게 명령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해석해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그가 남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내시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준행하는 존재로 택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천하 만민이 알게 하려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일 것입니다.
(20-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12절에서 15절에서 하나님은 사라의 웃음을 들었는데, 20절에서 21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소리는 단순히 군중의 시끄러운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희생자들의 피의 소리이며, 마치 하나님께서 땅에서 하늘로 올라오는 아벨의 피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저지른 죄악의 소리를 들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려온 죄의 소리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죄를 짓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 소돔으로 내려가려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8장 21절과 창세기 11장 5절은 동일한 동사로 바벨탑과 소돔을 살피러 가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표현 사용은 두 사건을 같은 관점에서 보게 만듭니다. 바벨탑 사건은 당대를 대표하는 범죄이고 범세계적 심판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는 선지자들이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모든 세대를 대표하는 범죄 도시이고 종말론적 심판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돔을 향한 아브라함의 중보(22-33)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독특하게도 아브라함은 22절부터 조카 롯을 위해 중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롯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에게 끌려가는 롯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군사 작전을 펼쳤던 것처럼 곧 멸망 당할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롯을 구해 내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22절에는 등장인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은 소돔을 향하여 떠나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머물러 서 있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정체가 가장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여호와는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난 것을 볼 때 구약 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로 볼 수 있으며, 이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성자 하나님의 강림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23-24)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첫 간청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23절의 논리를 더 확대하여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이들 50명뿐만 아니라 이들이 살고 있는 장소인 소돔과 고모라도 용서해 줄 수 없는지 하나님께 간청 드리고 있습니다. 소돔의 죄악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될 정도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포함한 당대의 모든 가나안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창세기 13장 13절의 말씀처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50명을 제시한 이유는 그의 조카 롯과 그의 집안 사람들과 혹시 롯을 통하여 변화된 소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 숫자의 의인을 하나님께 말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25-26)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은 간청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기 위해 바른 재판의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은 부당하며, 의인을 악인과 같이 여기는 것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 땅을 심판하는 분으로 고백하며, 사실상 하나님을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으로 믿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소돔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며 사용하고 있는 변론 기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와 공의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의보다 더 숭고하다는 것은 소돔의 용서를 위해서 아브라함이 50명에서 10명으로 거듭 제시하는 동안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들어 준 것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청과 주장을 들으신 하나님은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그들 때문에 소돔 전체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가 의인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의인들 때문에 악인들도 용서하시는 것임을 본문에서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간청의 근거로 끝나지 않고 18절과 1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이 그의 자손들과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의롭고 공의롭게 사는 것의 중요성과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에게 미치는 그 영향에 대해서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약속과도 긴밀히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27-32)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청을 듣고 너무 쉽게 하락하시자, 소돔에 의인 50명이 있을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27절부터 32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 거듭 간청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먼지와 잿 가루라고 하며, 자신을 지극히 미약한 존재라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 자세는 25절과 26절에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심판의 원칙을 하나님께 담대하게 말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많이 대조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조된 모습은 아브라함의 모순된 인격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겸손하게 중보하는 그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10명을 소돔에서 찾으면 멸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모두 6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이 5명의 의인을 조건으로 간청하지 않은 이유는 조카 롯의 가족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를 포함하여 최소한 10명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주석가들의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청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x명을 찾으면, x명으로 인하여 내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를 반복하며 매우 간결하게 그의 간청을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의 간청을 모두 들으시고 대화를 마치신 하나님은 떠나시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본문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온 땅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의와 공도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한 도시를 심판할 때 다수의 악인보다 소수의 의인에게 더 큰 비중을 두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확인시켜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중보에도 불구하고 소돔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그 성의 유일한 의인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만 은혜가 베풀어지고 그 성들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본문을 돌아보면,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며, 그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고, 그 성취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서가 아닐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부터 12절까지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말씀의 근거로 본문을 바라볼 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세상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유일한 의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과 그의 공로로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은혜로 알 수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내어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얼마나 의로우시며, 신실하신지,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그 사랑을 기록한 말씀을 묵상하며, 세상이 알 수 없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한 날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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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장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면 우리는 신학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우리의 상식과 지성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의심과 질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질문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18장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좀더 나은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좀더 깊은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14절입니다.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 되고, 사라가 89세 될 때 천사 둘과 함께 직접 장막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24년 전 아브라함이 75세 때부터 줄곧 말씀하신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내년,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될 때,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수년 간 수차례 말씀하셨고, 어느덧 사라의 나이가 89세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그 말을 듣고서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속으로 웃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웃는 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 14절 말씀입니다. “내가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두 노인에게 장난치는 짓궂은 분이 아니실텐데, 무려 24년간이나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말만 하시고 실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두 사람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생리가 끊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행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지 24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폐경이 되었습니다. 혹 주셔도 낳을 힘도 없습니다. 주시려면 폐경 전에 주셔서 출산 할 수 있게 하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은 능하신 분 맞으십니까?’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성경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고, 특별한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 부부를 통해, 오고 가는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본보기로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란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중에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는 자의 표상이 되어야 했습니다(롬 4:17).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마지막 상황으로까지 몰려갑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 것일까? 약속하신 하나님은 진실로 신실하신 분이실까?
우리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천재적인 귀재들입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치밀하고 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가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데에 명수들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만, 기어이 내가 잘했다고 밝혀 칭찬받고 싶어 합니다. 내가 남들보다 지혜로웠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라 합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응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내가 겸손하기 때문에, 내가 인내했기 때문에, 내가 내 욕망과 권리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셨다고 자랑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높이는 듯하지만, 실상은 ‘내’가 한 것이기에, 모든 칭찬과 시선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자기중심성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기중심적 죄의 속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완전히 자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도저히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성취했다고 할 수 없을 지경까지 몰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조금도 인간의 순종과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연마하고 단련하고 훈련받아서 얻어내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지적인 추구와 열심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반복된 경험으로 다다르게 되는 경지도 아닙니다. 믿음은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마지막 순간, 도무지 자기 힘과 지혜로는 얻을 수도, 알 수도, 살 수도 없는 자기 포기의 순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라를 '기한이 찰 때'까지 계속 담금질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못지않게 우리도 믿음이 부족합니다. 아니, 믿음의 크기가 겨자씨만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지연될 때, 우리는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쉽게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변경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외면합니다. 어떤 때는 따르고, 어떤 때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아니 바로 그 바랄 것 없는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 1%의 가능성이 없더라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일지라도, 그 누구도 책에 기록하지 않은 신비한 영역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라면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소망하고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매사를 견디고, 이 믿음으로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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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날이 뜨거울 때에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상수리나무가 드리워 준 그늘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눈을 들어 보니 낯선 사람 셋이 그의 맞은편에 서 있습니다. 그들을 보자마자 마치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듯이 아브라함이 달려 나가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영접합니다.
생면부지의 타인에 대해서 경계심과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낯선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램브란트의 그림들 중에 아브라함과 관련된 그림이 몇 개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드리기 위해 칼을 쳐들고 있는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비굴해보일 정도로 몸을 납작 엎드려서 세 사람을 영접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담겨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낯선 나그네들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태양으로부터 한줄기의 햇살이 비추는데, 그 햇살이 향하는 곳이 바로 땅위에 기다시피 바짝 엎드려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아브라함을 향해 쏘아대 듯 말입니다. 비취는 그 빛 때문에, 엎드려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비굴함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한 거룩함 같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 의미심장한 그림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자기 앞에 있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선한 사람인지도 확인 되지 않은, 말 그대로 나그네들 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낯선 이들을 아브라함은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인 것처럼 맞이하고 있습니다. 램브란트가 그린 그 빛줄기는 이 극진한 환대의 정신이야말로 거룩함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환대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문을 열어 물리적인 길을 내어주고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 환대가 아닙니다. 환대한다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 인생의 자리에 들어올 여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때로 예기치 않은 때에 원치 않는 이들이 우리의 삶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애써 하던 일을 중단시킵니다. 그리고 애써 마련한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 갑니다. 마음이 바쁠 때는 슬며시 짜증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소중한 시간이 만들어 지는 때는 우리를 찾아온 이들을 환대할 때입니다. 정말 우리의 시간에 의미가 더해질 때는 내 마음의 자리에 그 사람이 거할만한 자리가 생기기 시작할 때입니다. 램브란트는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된 영성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비친 거룩한 빛의 서광은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을 조각해 갈 때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뒤로 하고 달려 나가 낯선 이들을 엎드려 환대할 때 비취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자기를 좋게 보시면, 자기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말고, 마음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들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길어 오고, 이들이 쉴 수 있도록 그늘 밑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는 아내에게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을 해서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가축 떼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고 요리를 하게 합니다. 준비가 다 끝나자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고 이들이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한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인 그가 마치 하인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당신을 겸비하여 한없이 낮추신 그리스도예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환대하고, 귀한 음식을 준비하고, 겸손히 시중드는 모습을 그려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물큰한 감동이 이는 것을 느낍니다. 어찌 보면 이게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성도들 간의 인간관계의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드시고 마음을 상쾌하게 한 다음에 길을 떠나소서.”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 말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를 형용하는 그 어떤 말보다도 이 한마디가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복의 근원, 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언어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도 하찮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환대하시던 주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인간의 구원을 가리켜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 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더욱이 그가 나를 관용의 마음으로 대할 뿐만 아니라, 나를 지극히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동과 힘찬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살게 하는 감동인 것이고 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기운인 것입니다.
이 환대의 이야기는 사실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 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극진한 대접을 받은 세 나그네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전에 했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십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10절)
장막 문 뒤에 숨어서 이 말을 듣던 사라는 ‘나는 노쇠하였고, 내 남편도 늙었는데, 어떻게 그런 즐거운 일이 가능 하겠는가’하고 속으로 웃습니다. 하지만 사라의 쓴 웃음은 일 년 후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대접하던 것이 단순이 나그네들에게 한 손대접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위대한 약속의 성취를 예비하는 잔치가 배설되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만한 음식의 양을 한번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가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만든 떡과 송아지를 잡아 나그네를 대접했습니다. 세 스아면 요즘 단위로 22리터가 됩니다. 또 어린 양 정도가 아니라 기름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준비한 음식은 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습니다.
무려 세 스아로 만든 떡, 그리고 송아지 요리 등을 보아 짐작하건데 이것이 단지 손님대접 정도가 아니라 잔치를 위해 준비하는 음식이라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들도 모르게 이삭의 출생을 기뻐할 잔치를 미리 벌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셨겠지요. 너희들이 지금 내온 음식으로 앞으로 너희에게 있을 복된 일, 즉 이삭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라고 말씀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 이 음식을 장만했지만 실은 이것이 너희를 위해 스스로가 배설한 잔치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부지불식간에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는 잔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이루심은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 받는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를 값없이 사랑하기 참 어렵습니다. 주님은 꿈틀대는 자아가 없었기에 누구든 환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시간에 갇힌 사람이 아니었기에 세상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고 고통에 처한 이들을 온몸으로 품어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에 부딪힌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님을 통해 마음의 상쾌함을 얻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냥 떠나보내지 마십시오. 불편한 마음으로 관계 속에 머물러 있게 하지 마십시오. 환대하십시오. 달려 나가십시오. 가장 귀한 송아지로 준비하시고 또 넘치도록 준비하셔서 맞아들이십시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매일 매일 스스로를 위한 잔치를 배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므레의 아브라함 장막을 방문한 세 사람(천사)이 아브라함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고 이제 그곳을 떠나 소돔으로 출발합니다. 그 천사들을 배웅하러 나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전에 그와 맺은 언약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
v.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번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동일한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5:5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7:5-6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실증이 나는 법인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것이라는 약속만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 어떤 것 하나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아니, 이루어질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99세가 되도록 큰 민족은 그만두고 자식하나 낳지 못한 무자한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사라의 몸은 이미 여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별과 같이 셀 수 없는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야말로 허풍처럼 들립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마 많이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고 천하 만민은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신약을 사는 우리들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많은 사람들의 육체적 아비가 되었습니다. 육체적 아비를 넘어 그는 믿음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후손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완성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과 맺었던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실제가 되지 않는 약속 앞에서 아브라함도 때로는 지쳐했습니다. 힘들어했습니다. 심지어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약속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끝까지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를(믿음)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그 동일한 약속을 오늘 우리에게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성령님으로 인해서 계속 확증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전적 신뢰함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약속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지금도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의인이라 칭하여 주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단지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의인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인이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18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받게 될 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v.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받게 될 복은 인간의 배를 채워주는 물질적 부요함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호령하게 할 권세도 아니었습니다. 그 복은 의와 공도를 행함으로서 여호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었습니다(ESV: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righteousness and justice). 세상이 추구하는 복은 많은 재물과 명예를 쌓아두고 호의호식하며 건강하게 오랫동안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 의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Lord's way)를 따라 가는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분의 의로우심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고난이 아닌 영광입니다. 기독교의 성화의 삶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고행이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몸을 쳐 복종시켜 신을 즐겁게 해주고 그 대가로 무엇인가를 받아 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은 하나님 그 분 자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도를 기뻐하며, 즐거움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단순히 지켜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신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율법이 삶을 짓누르는 무거움이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즐거우니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기쁨을 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만인에게 바로 이런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 복을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과 공의를 지켜 행하는 삶,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20-21절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 됨에 대한 부르짖음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를 지켜 여호와의 길을 걷는 복된 삶을 벗어나 죽음의 삶, 심판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악이 심히 무겁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마치 노아의 시대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시기 전의 모습과 같습니다. 죄악이 그 땅에 가득했고 인간의 마음으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 죄악 됨에 대한 부르짖음을 여호와께서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간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죄를 짓게 되면 그 죄악 됨은 고스란히 하나님께 들려지게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은 항상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대신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아비입니다. 또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의길, 주의 길을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주님 앞에서 복된 주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