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세요
저녁을 먹으면서 곁들인 반주가 흡족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것에 굶주렸는지 K가 술을 조금 더 마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간단하게 생맥주 한 잔 쯤 하는 거야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K는 그게 아니었다. 여성 종업원이 있는 주점에 가자고 했다. 그런 주점을 선호하지 않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K의 말에 권위나 강제성은 없었으나 저녁을 함께 한 이들은 이미 학교 앞의 한 단란주점을 향하고 있었다.
여성이 술집에서 돈을 버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취향의 그렇지 않을 뿐이었다. 대학에 자리를 잡은 지 십년 쯤 되는 K를 자주 보지 못한 사이에 K가 변한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우리들은 주점에 들어섰고 칸막이가 쳐진 곳에 앉았다. 저쪽 홀에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도 있었다. 술집 여성이 가장 싫어하는 직업군 가운데 하나가 대학선생이라던가, 대학선생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대학선생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던가,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있었다.
이제 스무 살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여성 종업원이 우리에게 왔다. 짧은 치마에 소매가 없는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 종업원은 우리 일행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H 교수 옆에 앉았다. 맥주가 몇 병 나왔고 컵이 돌았고 K는 노래를 부른다며 무대로 나갔다. H 교수는 그 여성에게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직업이 이것이냐, 아니면 학생인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냐?”부터 부모에 대한 신원조사, 고향, 졸업한 학교, 지금 어디 거주하는지 등, 마치 인구센서스에 투입된 통계조사원처럼 그 여성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꼬치꼬치 퍼부었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여성 종업원이 하는 이야기의 9할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이름부터가 본명이 아닐 것이다. 행여나 그런 것을 그 여성이 사실대로 이야기한다고 한들 그것이 그 술자리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도 안다. H 교수는 무의미한 질문을 던졌고 종업원은 손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호기심이 일도록 적당히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대답이 그저 꾸며낸 것임을 H 교수는 모르는 눈치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술자리가 파할 때가 되었다. 그때 H 교수는 지갑에서 이만 원을 꺼내더니 여성 종업원의 손을 펴서 쥐어주고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했다. “착하게 살아야 해!” 나는 아연실색했다. ‘저 여성은 지금 매우 착하게 살고 있다. 무슨 형편에서인지 모르겠으나 주점에 나와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나쁘게 볼 일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직업일 뿐이다. 그 자리에 있는 우리들의 직업은 공부하는 것이고 그 여성의 직업은 술집이 직장일 뿐이다. 그게 나쁜 것이라면 그런 집에 술을 마시러 가는 이들도 역시 나쁜 것 아니겠는가?’
나는 그때 “아이, 선배님!”하고 외마디를 내질렀다. H 교수는 외국에서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단에 섰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저 여성에게 그 교수의 이론에 근거한 윤리적 결함을 찾을 수 없는데 도대체 왜 돈 이만 원을 쥐어주고 착하게 살라고 주문을 해야 하는지 도통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돈을 이만 원 주었기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말이다. 이만 원은 봉사료가 아니던가? 그 여성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윤리학 전공 교수로부터 공연히 과잉훈계를 당한 것이다. 운수가 사나운 날이었을 것이다.
이십 년도 더 된 이 옛날 기억을 나는 최근에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지공거사의 대열에 합류했는데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듣는 “행복하세요”라는 말 때문이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나는 매달 지출하는 교통비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아 쓰기 시작했고,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인생에서 한 일도 그닥 없는 것 같고 자꾸만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있는 데다가, 나이를 먹은 게 자랑도 아니고 지하철 무료탑승으로 인해 서울시 지하철 적자가 누적된다는 주장도 있는지라 참 조심스럽게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데 저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내 뒤를 따라오는 이에게 “저 사람은 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이에요”라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들린다.
지공거사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말하기 시작한 게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이 교통카드를 타인에게 양도해서 타고 다니게 하는 일이 있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부정승차하는 이들이 이 말을 들으면 부끄럽게 생각할 거라는 것이 이 제도를 도입한 발상이었다. 그런데 적법하게 타는 나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어르신 건강하세요"였는데 그게 “행복하세요”로 바뀌었다. 어떤 말이든 그것은 부정승차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법은 지키는 게 맞는데 남의 카드를 빌려 타는 이들은 형편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관리하는 구간에서만 내게 행복하라고 말할 뿐 다른 곳이 관리하는 노선에서는 그런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한 번 탈 때마다 약 천사백 원 정도의 교통비를 절약하는 것이고 이 소리를 탈 때 한 번, 내릴 때 한 번 들으니 한번 들을 때마다 칠백 원의 지원을 받는 셈인데 한달이면 사람에 따라 적게는 칠만여 원에서 많게는 십만 원이 넘는 액수이긴 하지만 “행복하세요”라는 한 마디를 교육 받으면서 꼴랑 칠백 원을 받고 있으니 때로는 자존감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다. 마치 일제 강점기 불령선인*이 된 기분이다. 내가 자동차를 없애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한 게 십이 년 전이고 그동안 내가 이 지구 아니 이 서울의 대기질 개선을 위해 미약하게나마 기여를 했는데 그것에 대한 보상도 없이 행복을 강요당하고 있으니 나는 그게 어떤 행복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서울교통공사는 무슨 권리로 내게 “행복하라”고 강요를 하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행복해야지”라고 다짐할 사람은 몇이나 되겠냐는 것이다. 나는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면서 “행복하세요”라고 강요당할 때마다 이십여 년 전 그 여성 종업원이 이만 원을 얻으면서 “착하게 살라”고 훈계 당한 것이 기억나고 그 여성이 그때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새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이렇게 속으로 되뇌이고 있다. “너는 나를 불령시민으로 알지? 됐다, 이놈아!”
*불령선인: 일제 강점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
첫댓글 저도 비슷한 심정을 글로 썼습니다. 아마 봄 무렵이었지요?
고맙지만 배려인지 차별인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얼마 전부터 신호음이 바뀌었더라구요. 속으로 어머 누가 내 글을 봤나 싶었어요.
듣기에 훨씬 좋았어요. 그런 방법도 있는데
영혼 없는 '행복하세요'라는 기계음을 굳이 채택한 창의성 부족한 주관처.
아마 항의를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ㅎㅎㅎ
네 김은중 선생도 계속 항의를 하셨다네요
그 소리가 없어진 대신 감시하는 사람들을 박아놓았더라고요 ㅎㅎ
@이혜연 도시철도공사가 그런 차별화를 한 것은 노인이 아닌 사람들이 빌려서 이용하기 때문에 그걸 식별하기 위해서라네요
그래서 '행복하세요' 대신 감시, 식별해내는 사람들을 세워놓았더라고요
@이혜연 이래저래 서글픕니다. 점점 고령화 인구는 늘어만 가는데....
인구절벽이 마치 고령자 탓인 것처럼 은연중 내비치는 축들도 있고....
5호선을 타면 행복하세요
다른 노선에선 행복을 빌지 않아요 ㅋㅋ 웃어서 죄송해요
저도 처음엔 돈내고 타요 를 잘못 들었나 노화된 귀를 의심하고 잠시 두통이 ㅋㅋ잡문이나마 끼적이던 짓도 내려 놓은지 오래되어서
좋은글 읽는것도 염치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