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집사론
이 복 희
"댕댕이 여러분"
목구멍에 걸린 듯 약간 눌린 쉰 목소리가 들렸다. 이순재 배우다. 다른 일을 하다가 얼른 텔레비전 화면을 봤다. 목소리는 그가 분명한데 주둥이가 길고 귀가 축 늘어진 검누른 개가 떠들고 있다. 제법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청중들을 설득하려는 듯 호소력 짙은 연설이다.
보험광고는 주로 낮 시간대에 많이 방영된다. 그 보험만 들어 놓으면 무슨 병에 걸려도 치료비 없어 죽는 일은 없을 것만 같다.
반려동물을 기르기 위해 드는 비용이 수월찮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다. 반려견을 무척 사랑하는 지인 한 분은 기르던 개가 암에 걸리자 수백만 원이나 드는 치료비를 몇 번 쓰다 보니 노후자금이 다 거덜 날 지경이라며 울상이다.
모두가 경험하는 그런 애로점에 착안하여 보험사에서 신상품을 내걸고 열심히 홍보를 하는 중인 듯싶다. 반려견이 없으니 관심도 없다. 그래도 이순재님의 목소리가 저 검누른 개와 제법 어울리는 것 같아 귀를 모아본다. 그러다 퍼뜩 귀에 꽂히는 한 마디.
"우리들의 집사가 언제까지 살면서 우리를 돌볼지도 모르고… ."
"오이? 집사라고라?"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 같은데. 언제 견주에서 집사로 강등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재빠른 상혼이 신선했지만 어쩐지 허무개그처럼 느껴졌다.
집사의 사전적 의미는 '절대적으로 주인의 뜻을 따라 움직이며 돌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 으로 알고 있다. 영화 <남아있는 나날>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집사'다.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주인의 뜻에 맞게 대저택의 모든 일을 빈틈없이 맡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에 긍지가 대단하며 ‘내 생각’ 같은 건 아예 없다. 오직 맡은 일과 지시받은 일에 철저했다. 심지어 역시 집사 출신인 연로한 부친과 같이 일하다 막상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사랑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외면하고 자신의 본분에만 철저히 올인 하던 그.
안소니 홉킨스는 절도 있는 언행과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세심한 곳까지 돌보며 주인을 섬기는 모습을 아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때문인지 '집사'라는 역할의 개념이 대단히 독립적이고도 유능한 것으로 느껴졌다. 집사란 오로지 주인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최근에 북쪽 정은씨의 집사 김 아무개도 그렇고 재판 중이었던 전 대통령의 김아무개 집사를 봐도 지금까지는 '집사는 곧 충견이다'라는 등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언제 이렇게 입장이 바뀌었을까.
가끔 '개팔자가 사람팔자보다 낫다'라는 푸념을 듣는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광경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일견 생명사랑의 한 본보기다.
아기보자기 같은 것에 강아지를 소중하게 감싸서 어깨에 둘러맨 사람, 네 발에 앙증맞은 하이힐을 만들어 신겼던 전철에서 본 그 여자, 유모차에 강아지를 앉혀 밀고 가는 젊은 여인…. 거리에서 점점 눈에 많이 띠는 집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다가 집에 오면 텔레비전에서 그 팔자 좋은 견공들을 위한 생활필수품 광고도 심심치 않게 접한다.
반려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늘어난다 싶더니 이제는 개를 위한 공기청정기부터 사료의 맛을 더해주는 첨가물까지 홍보를 한다. 나중에는 만약을 위해 개들의 헌혈까지 광고를 통해 독려한다. 어쨌든 보험을 비롯한 모든 대비책은 ‘집사’들이 할 일임에 틀림이 없다.
요즘은 어쩌다 공원으로 산책을 가면 목줄에 매인 개를 앞세운 사람들이 많아서 피하느라 마음대로 걷기도 힘들다. 마치 자동차가 빈번하게 오가는 도로를 건너듯 조심해야 한다. 작은 녀석이나 덩치가 큰 놈이나 달리고 싶은 욕망을 목줄에 저당 잡힌 채 앞장을 서다 보니 집사께서는 거의 끌려가시다시피 할 때도 있다. 집사님에게도, 반려견에게도 운동은 필수, 목줄 하나 들지 않고 맨몸으로 산책하는 사람은 어쩐지 비주류의 외로움마저 느낀다.
개띠사람인 나는 개띠가 아니고 차라리 개가 되었더라면 좋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게다가 천성이 게을러 내 몸 하나 건사도 잘 못하니 믿음직한 집사를 둔 개팔자가 오히려 낫지 않았겠나. 하지만 개띠사람의 지금 형편을 보면 개가 되어봤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아 그만 생각을 거두고 만다. 견공의 세계에도 집사에 따라 삶의 질이 다르게 매겨지는 것은 사람의 일이나 매한가지로 보이니 말이다.
이러다가는 집사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설 곳이 없어지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양분되어 안 그래도 이쪽, 저쪽으로 편 가르기가 심한 지금,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마치 어느 집에나 갖추고 사는 가전제품처럼 반려동물 하나쯤 키우지 않으면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
요즘의 반려동물에 대한 열풍은 사람간의 교감만으로는 부족한 어떤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살아있는 장난감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 않을까. 가끔 버려지는 그것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보험광고 방송은 오래 계속된 것 같지 않다. 그 대신 반려견을 위한 텔레비전 방송이 생겼다고 한다. 집사가 없으면 불안해서 우울증에 걸릴까봐 방송을 켜놓고 외출을 한다나. 우울증이란 정서의 결핍으로 비롯되기도 한다. 이제 경계 없이 삶을 나누고 교감하는 인간과 반려동물. 그 점이 문제였을까. 사람들의 우울감도 주체하지 못하는 세상에 반려동물까지.
역시 지금은 공존의 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세상의 집사들이여, 개띠사람이 집사가 되지 못하는 것도 당신들과는 또 다른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 여겨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