彖曰 艮 止也 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 艮其止 止其所也 上下敵應 不相與也 是以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也(단왈 간지야 시지즉지 시행즉행 동정불실기시 기도광명 간기지 지기소야 상하적응 불상여야 시이불획기신 행기정 불견기인 무구야)
단전에 이르기를 간은 그침이니, 때가 그칠 만하면 그치고 때가 행할 만하면 행하여 움직이고 고료함에 그 때를 잃지 않아 그 도가 환하게 밝음이다. ’그 등에 그침‘은 그곳에 그치기 때문이다. 상하가 적응하여 서로 더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몸을 얻지 못하며, 뜰을 걸어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을 것이다.‘【周易(역경, 주역), 艮卦第五十二(간괘제오십이), 艮卦02(간괘02)】
※ 해설 : 현대인들은 시간에 쫓겨 살면서 느림의 여유를 느낄 겨를 조차 없이 속도와의 싸움을 즐기고 있다. 느림과 빠름의 어정쩡한 절충주의는 간괘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간괘는 오직 시간의 본성과 일치된 행위를 최고로 꼽는다. 시간은 至公無私(지공무사)하다. 뜨락을 함께 거니는 동료에게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편애하지 않는 행위는 시간의 정신과 부합한다. 한때는 불교에 심취했던 周濂溪(주렴계, 1017~1073)는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는 『法華經(법화경)』도 ’간‘이라는 글자 하나로 모두 풀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성인은 간괘의 원리에 근거하여 교화를 베풀었다고 주렴계는 말했다. 그 요체는 곧 중도[中(중)]이다. ”성인이 가르침을 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악을 바꾸게 했으며, 스스로 중도에 이르러 그치게 하였다.“ 중도는 두 얼굴을 갖는다. 이미 드러난 중도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중도가 바로 그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현상적 차원과 본질적 차원으로 구분한다. 전자에 따르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펑펑 울고, 자식이 상장을 받으면 기뻐하는 것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시중‘의 정신과 일치한다. 이때의 중은 조화[和(화)]이다. 간괘는 중도와 시간을 결합시켜 설명한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時中(시중)‘이다. 멈추는 것이 옳으면 멈추고, 행동하는 것이 옳으면 행동해야 한다. 멈춰야 할 때는 나아가거나, 나아갈 때는 멈추는 것은 시간의 정신에 위배된다[不中(부중)]. 멈춤과 그침을 뜻하는 ’止(지)‘ 위에 한 一(일) 자를 붙이면 옳을 정[中正(중정)]이다. 따라서 ’시중‘은 존재와 인식과 가치와 행위가 조화된 역동적 개념이라면, 중정은 정태적 개념인 것이다. 간괘는 ’動靜(동정)‘에 시간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만약 동정에 시간이 배제되면 물리적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시간에 사람냄새가 물씬 담긴 행위가 배제되면 쇠로 만든 시계의 숫자판에 불과할 것이다. 주역의 시간은 항상 가치문제가 수반되기 때문에 ’간괘의 원리가 현실에 밝게 빛난다[其道光明(기도광명)]‘고 했던 것이다. 정이천은 『맹자』를 인용하여 공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시중‘의 구현였다고 했다. ”군자는 때(시간)를 귀중하게 여기니, 중니의 ’行止久速(행지구속)‘이 그것이다. 간의 실체는 독실하여 광명한 뜻이 있다.“ 맹자는 공자를 백이, 이윤, 유하혜와 차별화하면서 공자는 시간의 정신[時中(시중)]을 꿰뚫은 성인이라고 칭송했다. ”속히 떠날 만하면 떠나고, 오래 머물 만하면 오래 머물며, (관직에서) 물러날 만하면 물러나고, 벼슬할 만하면 벼슬한 것은 공자이시다. …공자는 때를 알아서 알맞게 해 나가셨던 분이다. 그래서 공자를 집대성한 분이라 부르는 것이다.“ 간괘의 핵심은 ’時中(시중)‘에 있다. 청나라의 惠棟(혜동, 1696~1758)은 ’시중‘의 위대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은 참으로 심오하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時中이다. 「단전」에 ’時(시)‘에 대해서 말한 곳은 24괘, ’中(중)‘에 대하여 말한 곳은 35괘이며, 「상전」에서 ’時(시)‘에 대하여 말한 곳은 6괘, ’中(중)‘에 대하여 말한 곳은 36괘이다. 時(시)에 대하여 말한 곳에서 …時行(시행), 대체로 待時(대시), 時變(시변), 時用(시용), 時義(시의), 時發(시발), 時舍(시사), 時極(시극)이라 했고, 中(중)에 대하여 말한 곳에서는 中正(중정), 正中(정중), 大中(대중), 中道(중도), 中行(중행), 行中(행중), 剛中(강중), 柔中(유중)이라 하였다. 또 蒙卦(몽괘)에서는 時中(시중)하라고 했다.“ 子思(자사)는 『중용』에서 공자의 학문의 결론은 ’군자와 시중[君子而時中(군자이시중)]‘이라고 밝혔고, 맹자 또한 공자를 ’시간의 정신을 꿰뚫은 성인[聖之時者(성지시자)]‘이라고 극찬하였다. 동양의 中(중)사상이 요순에서 시작되었다면, 이러한 ’중‘의 시간적인 적합성[時中(시중)]’의 뜻은 공자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시중’은 주역의 근간이다. 예컨대 山地剝卦(산지박괘) 「단전」은 ‘군자는 줄고 불고 차고 비는 하늘의 운행을 숭상한다[君子尙消息盈虛天行也(군자상소식영허천행야)]’라 했고, 雷火豐卦(뇌화풍괘) 「단전」은 ‘천지가 차고 비는 운동은 시간과 더불어 줄고 부는데, 하물며 인간이며 하물며 귀신이랴![天地盈虛(천지영어), 與時消息(여시소식),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 況於鬼神乎(황어귀신호)]’라고 말했다. 이는 時中(시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상수학에서는 특정한 시점(시간)과 특정한 공간이 만나는 특이점을 ’宮(궁)‘으로 표현했다. 궁은 갓머리 갓머리 ‘갓머리 ‘宀’ 지붕 아래 천간[口]과 지지[口]가 하나로 결합된 모습을 본뜬 글자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시중’의 범주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천간과 지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특정한 시공, 예컨대 ‘갑자’라든가 ‘임진’이라는 날짜에 농사 시기를 결정하거나 혼인날을 탹일하는 방법 등의 사회적인 시간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간괘는 상하 모두가 산이다. 초효와 4효, 2효와 5효는 음끼리 상대하고, 3효와 상효는 양끼리 상대하는 적대적 관계[適應(적응)]이다. 음양이 교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없다[不上與也(불상여야)]. 그것은 주관적 판단과 억측에 사로잡혀 진정한 자아 혹은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不獲其身(불획기신)]는 것을 가리킨다. 더욱이 밖으로는 ‘성인의 큰 보물은 지위’라는 의미에서 보면, 시간과 대응하는 지위는 하늘이 부여한 선험적인 명령[命(명)]이다. 군자는 하늘이 부여한 자신의 위상을 사무치게 새겨야 한다. 여기서 벗어난 일체의 사특한 생각은 올바르지 않다. ‘位(위)’는 곧 역사적 사명과 결부된 일종의 분수이다. 분수에 넘치거나 모자라는 행위는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지위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지위에 설 만한 자질을 갖출 것을 근심해야 한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자질을 갖추기에 힘써야 한다.“ 때와 지위는 하늘의 일이지만, 이를 깨닫고 실천하려는 덕성은 군자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