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오 해체 이후 재즈가수로 독립한 이경우는 한영애와 더불어 1989년 독집 ‘블루스맨’
음반으로 가요계에 소울 블루스 열풍을 몰고 오며 주목 받았다. KBS 2TV ‘연예가 중계’
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
담당 PD 박성주는 ‘원조 격인 선배가수가 없냐’고 물어오자 이경우는 까까머리
속초고교 시절에 우상으로 숭배했던 박인수가 떠올랐다.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노래하던 박인수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 함께 출연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은 시작됐다.
이때가 1989년 여름이었다. 이경우는 “처음 만나보니 돈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순수한 사람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박인수 돕기 운동’의 중심에서
땀을 흘리는 그로서도 박인수는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좋게 말하지만 그는 사실
최대 피해자였다. 방송출연 후 기행을 일삼던 박인수는 출연업소에서 해고당했다.
노래 외에는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던 그는 일을 찾기보다는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시작했다. 이경우는 새벽 1~2시에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
하는 선배가 안스러워 여관에서 재우고 용돈도 주곤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희망 없는
관계가 답답하고 싫었다. 1994년 어느 날 MBC TV ‘주부가요열창’에 조영남과 함께
나간다며 박인수가 찾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만나 목욕비를 쥐어주며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조영남으로부터 “박인수가 방송에 나오기로 했는데 목욕탕에서 갑자기 쓰러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박인수는 ‘저혈당’으로 고생했으며 전성기 시절부터 대마초 등 마약의 유혹에
빠져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다.이후 박인수는 홀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가요계의
‘왕따’로 전락했다.
살아가는 법 모르는 골치아픈 인생
이경우는 고향 속초로 내려가 수산물 가공공장과 재즈클럽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어느 날 윤항기 목사가 운영하는 선교원에서 ‘박인수가 기거하고 있다’
고 연락이 와 찾아갔다. 오 갈데 없는 후배를 돌보던 윤항기 목사도 성도들에게
‘천 원만 달라’는 식으로 민폐를 끼치는 박인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98년 겨울 이경우가 운영하는 속초 블루노트 재즈클럽에 내복도 입지 않고
런닝샤츠 차림에 구두를 구겨 신고 가방하나 달랑 든 버버리 코트의 걸인이 나타났다.
박인수였다. 놀란 마음에 고향친구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취직시켜 주었다.
하지만 고질병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아 휘발류 차량에 경유를 넣는 등 말썽을
다반사로 일으키자 영어학원 강사자리를 주선했다. 영어는 유창했지만 문법을 모르고
말만 하니 또 문제였다. 별 수 없이 박인수의 명성을 기억하는 고향 후배의 야간업소에
소개했지만 웨이터 등에게 민폐를 끼치는 못된 버릇이 도져 쫓겨났다.
마지막으로 무의탁 노인들이 머무는 속초의 양로원에 집사자리를 잡아주었지만 허사였다.
이경우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통을 호소해 와 너무도 괴로웠었다”고
한숨을 내쉰다.
2000년 가을 박인수를 보살펴주었던 전도사에게 연락을 해 서울로 떠나 보낸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2001년 서울로 올라온 이경우는 일산에 ‘하사와 병장 음치클리닉’사무실을
열었다. 처음에는 상계동을 염두에 뒀지만 일이 꼬여 일산에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인수형과 나는 전생의 어떤 연결 끈이 있는 것 같다. 정 목사가 전화를 했을
때 병원이 아닌 어디에 기거하고 있다고 했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인수형과는 그저
용돈 주고 연명이나 하도록 도와주는 관계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빼어난 가창력, 라이브 무대의 황제로
본명이 백병종인 박인수는 흑인 노래인 소울의 맛을 제대로 알고 불렀던 가수였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도“박인수는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소울 가수다.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인수는 한편의 소설 주인공처럼 불우한 인생과 가수로서의 영욕을 함께 맛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1947년 9월 3일 평안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6ㆍ25 전쟁 때 북에
남은 아버지와 형과 헤어지고 전북 정읍의 열차 안에서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7세 때
본의 아니게 고아가 됐다. 이후 고아원과 춘천의 미군부대를 2년 간 전전하다 춘천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미 8군 어린이 교육봉사회에서 미국인 토마스의 눈에 들어
1960년 켄터키로 입양됐다. 미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양부모와의 불화로 1963년
홀로 귀국했다.
미8군 무대에서 잡일을 하며 연명하던 그는 타고난 음악성과 미국에서 익힌 리듬감으로
노래실력을 인정 받으며 1965년부터 ‘키보이스’ ‘코끼리 브라더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등 수 많은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노래 생활을 시작했다.
1966년 키보이스와 청계천 3가 센추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활동하며 일반무대로
진출했고 1967년부터 신중현 사단에 합류하며 빼어난 가창력으로 라이브 무대의 황제로
통했다. 그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본능적인
음악 감성이 몸에 뱄다”고 말한다.
‘봄비’ 폭발적 인기, 기행으로 스스로 자멸
그의 음반 녹음은 1969년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노래코러스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1970년에 결성된 신중현 그룹 ‘퀘션스’의 데뷔앨범에 ‘봄비’를
취입,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거머쥐었다.
신중현곡 ‘봄비’는 그룹 ‘덩키스’의 보컬 이정화가 1969년 최초로 노래했다.
차분한 보컬로 노래한 이정화의 오리지널 ‘봄비’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폭발적인 소울 창법으로 노래하는 박인수가 신중현의 권유로 이 곡을 재취입하자
당시 대중들은‘이정화는 봄비고 박인수는 소낙비’라며 다이나믹한 박인수의
‘봄비’에 열광했다. 이후 박인수는 소울과 사이키델릭 등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이 땅에 수혈하는 음악 전도사로 2장의 독집 앨범을 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대마초사건은 그에게 활동금지의 족쇄를 채웠다. 진보적인 그의 독집
음반들은 퇴폐적이라는이유로 발매가 금지됐다. 또 자유분방하고 감성적인 그는
공연을 밥 먹듯이 펑크 내는 등 어느 누구와도 화합하지 못했다.
1972년, 1982년 두 번의 결혼으로 1남 1녀를 두었지만 방랑벽이 심해 가족들로
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해금이 된 1980년 박인수는 또 하나의 불후의 명곡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
라는 독집 음반과 1989년 재즈가수인 선배 김준의 도움으로 마지막 독집음반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텐데’를 의욕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잠적해
버리는 기행으로 스스로 무덤을 팠다.
박인수는 음악적으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최고 가수였지만 삶 자체는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한 불우한 환경으로 황폐화 된 6ㆍ25 전쟁의 희생양이었다.
- 출처 한국일보 -
출처 : http://blog.daum.net/soongmac/6897430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박인수 '봄비'
단숨에 '한국 소울 뮤직의 대부' 자리매김
봄에는 정말 비가 많이 내린다. 초봄에 내리는 비는 동장군의 마지막 발악인 꽃샘추위를 동반
시키지만 봄비를 단비라 말하는 것은 온 대지를 촉촉이 적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돕는 생명
수이기 때문이다. 봄을 노래한 시즌 송의 기본 정서 는 명랑하고 희망과 극복의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봄비'를 소재로 한 노래의 공통된 정서는 '나를 울려주던 봄비',
'봄비 속에 떠난 사람' 같은 가사처럼 통속적이다.
가슴 먹먹해지는 절창 압권
이은하의 '봄비'는 많은 대중이 기억하는 빅히트곡이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절창이 압권인
박인수의 '봄비'는 최고의 명곡으로 손색이 없다. 1970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신중현이 리드한
록밴드 <퀘션스>의 첫 앨범에 수록된 노래다.
당시 객원가수로 밴드에 참여했던 박인수는 이 노래
하나로 한국 소울 뮤직의 대부라는 빛나는 지위를 획득했다.
박인수는 임희숙, 여성듀엣 <펄시스터즈>, 남성듀오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 등 후배들의 음악
영웅으로 군림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1965년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할램가 뒷골목에서 몸에 밴
흑인 특유의 리듬감으로 무장해 미8군
오디션에서 A등급을 받고 한국 최초로 결성된 록밴드 <코끼리브라더스>의 객원보컬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흑인의 한이 가득한 소울을 기막히게
소화했던 그는 <키보이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 등 수많은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활약하며 미8군 무대에서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단숨에 미8군 여군들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박인수는 '라이브무대의 황제'라는 극찬을 받기
시작했고 1967년 소문을 들은 신중현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1970년 결성된 신중현 밴드
<퀘션스>의 첫 앨범에 수록된 '봄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박인수는 비로소 일반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신중현은 "박인수는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사실 '봄비'의 오리지널 가수는 박인수가 아니다. 신중현 밴드 <덩키스>의 메인 보컬이었던 여가수
이정화가 주인공이다. 비록 인지도를 얻지 못하고 월남 공연을 떠난 후 행적이 끊겨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보컬이지만 이정화는 신중현사단의 가수를 언급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전설적인 여성보컬이다.
1969년 신중현은 이정화가 먼저 발표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던 노래를 박인수에게 다시 부르게
했다. 적중했다. 박인수는 "아이고 세상에. 노래가 히트하면서 여대생들이 엄청나게
따라다녔어. 밤새도록 집으로 전화하고 찾아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라며 당시의 인기를 전했다.
시대초월 리메이크 잇따라
가히 가슴을 치는 절창이 압권인 박인수의 버전이 '소낙비'라면 부드럽고 여성적인 이정화의 오리지널
버전은 '가랑비'로 비유된다. 박인수 버전이 엄청난 대중적 파장을 일으켰지만 이정화의 오리지널 버전
또한 은근한 매력이 상당하기에 비교해 들어보길 추천한다. 편곡에 따라 노래의 느낌이 변하는 것을
무수한 서바이벌 오디션을 통해 경험했겠지만 가수의 창법 또한 얼마나 중요한 지를 실감할 것이다.
박인수는 1987년 블루스 돌풍을 일으켰던 <신촌블루스>와 인연을 맺으며 자신의 보컬 능력을 재확인
시켰다.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록그룹 페스티발'에서 박인수는 무려 7분40초의 롱 버전으로
명곡 '봄비'를 열창해 "역시 박인수"라는 탄성을 불러일으켰던 것.
가슴에 비수를 꽂듯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인수는 무책임한 방랑벽으로 자신의
음악재질을 탕진했던 한국대중음악계의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그의 대표곡 '봄비'는 장사익, 록밴드
<키브라더스>, 김추자, 인순이, 체리보이, 홍서범 등 남녀 가수 구분 없이 시대초월적인 리메이크
작업이 이루어졌다. 나미가 부른 '봄비'도 있다. 솔로 데뷔 이전 본명 김명옥으로 극장 쇼 무대를
주름잡았던 나미는 1976년 여성 5인조 보컬그룹 <해피돌스>의 메인 보컬로 캐나다로 진출해
한 장의 앨범을 발표했었다. 수록곡들은 모두 팝송인데 단 한곡이 우리말로 노래한 '봄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