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섬겼고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안디옥교회는 기독교 교회사에서 특별한 교회입니다. 바나바가 다소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교회를 함께 목회했습니다. 이 안디옥교회가 역사상 공식적인 선교사를 파송하는 첫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이어 당시 세 번째 도시였습니다. 안디옥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동방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지금은 안타키아(Antakya)로 부르는 안디옥(Antioch)은 정치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시리아 지역 수도였고 로마 군사기지였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은 로마황실의 관심 도시였습니다.
안디옥은 내륙 교통망으로 로마제국의 모든 중요한 지역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실루기아(Seleucia) 항구에서 48km 떨어져서 해양교통도 좋았습니다. 헬라와 로마 문화가 꽃피고 빈번한 무역이 왕래하는 국제도시 안디옥은 복음을 수출하기에 최적화된 도시였습니다. 선교적 인프라가 잘 구축된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를 최초로 파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 이름은 주전 300년경 시리아를 통치하던 셀류코스 1세가 건설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안디옥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셀류코스 1세가 아버지를 기념하여 세운 안디옥이라는 도시들이 많습니다. 켄터키주 루이빌에 남침례교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Seminary) 신약 교수인 폴힐(Dr. Polhill) 박사는 16개의 안디옥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복음 수출하기에 최적화된 국제도시 안디옥에 세운 성숙한 교회
바울과 바나바 첫 선교사로 파송,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이름얻어
당시 안디옥은 다른 고대 도시들처럼 대부분의 시민들이 둘 이상의 노예를 두고 살았습니다. 안디옥은 외부와 연결된 도로망뿐만 아니라 도시 내부 도로망도 상당 수준 발달했으며 특히 오론테스 강을 이용한 수로로 교통과 상수도 시설이 아주 발달했습니다. 안디옥의 생활은 윤택하였습니다.
특히 오론테스 강을 따라 16km 정도에 걸쳐서 늘어서 있는 안디옥의 호화주택 유적은 시민들의 부요한 생활을 보여줍니다. 안디옥은 고대 도시들 중에 가장 발달된 수자원 관리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오론테스 강물을 활용한 도시의 상수도 시설은 상당히 발달했습니다.
안디옥의 역사를 살피면 안디옥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던 다인종 도시였습니다. 혹자는 동방의 모든 인종들이 섞여 살았던 도시였다고 말합니다. 안디옥에는 정복국 로마의 시민들, 문화를 가진 그리스인들, 당시 길리기아에서 살았던 길리기아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 등지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민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안디옥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았던 국제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주요 행정 도시로서 공공질서를 누릴 수 있었고 적당한 문화와 경제적 번영도 누렸습니다. 아울러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았던 안디옥은 종교적으로도 다양했습니다. 예컨대 이집트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아시아의 디오니시우스와 사바시우스, 다소의 산단과 헤라클라스 그리고 페니키아와 시리아의 몰렉 등이었습니다. 이런 우상들이 우글거렸던 안디옥이 역설적으로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이었고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번성할 수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동양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 안디옥은 교회사에서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시작했고, 이방인들을 수용하여 지도자로 세웠던 교회였습니다. 안디옥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많은 전쟁과 이슬람의 지배로 기독교 관련 유적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서두에 등장하는 안디옥교회 리더들의 면면을 살피면 그야말로 다문화 교회요, 국제교회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지도자들이 안디옥교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합니다. 21세기 국제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도자들이 더불어 일하는 교회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인권의식이나 민주의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시대를 앞선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에 흉년이 왔을 때 바나바와 바울 편에 부조금을 보냅니다. 모든 성도(제자)들이 각각 능력대로(그 힘대로) 부조금을 모아서 두 사람 편에 보내어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전달하게 합니다. 힘겨운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는 부조금입니다. 나눔과 섬김에서도 모범을 보인 안디옥교회 모습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세련되고 성숙한 교회입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얻었던 성숙한 교회입니다. 기도와 금식의 과정을 통해 첫 선교사의 파송 과정도 성숙하고 세련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장 성숙한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는 성숙하고 세련된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바울과 바나바로 헌신한 교회입니다.
안디옥에는 베드로의 동굴교회가 있습니다. 베드로 동굴교회는 베드로 사도가 안디옥에서 선교했다(갈2:11)는 것을 기념하는 교회입니다. 베드로 동굴교회가 있는 실피우스 산에는 수많은 동굴들이 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삶의 흔적입니다. 이 동굴들에는 당시 치열했던 성도들의 삶의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는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리더였고, 안디옥교회의 리더였습니다. 바나바의 고향이 구브로입니다. 그의 존재를 알리는 사도행전 4장에서 바나바의 고향이 구브로임을 밝힙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고향 구브로를 향한 사랑을 숨기지 않습니다. 바나바의 생애 그리고 기독교 선교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구브로를 살펴봅니다.
기독교 역사의 첫 선교사들의 첫 선교지가 구브로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첫 해외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조력자 마가 요한이 안디옥을 떠나 첫 선교지로 방문한 곳이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입니다(행4:36). 안디옥교회가 파송한 이 선교팀은 초반에 당시 최 연장자인 바나바가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고향에서 선교를 제안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 있는 섬입니다. 시칠리아, 사르데냐 다음으로 지중해에서 세 번째 큰 섬입니다. 터키 아나톨리아 남쪽에 자리 잡은 구브로는 지리상으로는 서남아시아로 분류되지만 유럽에 가까이 있어서 유럽처럼 느껴집니다. 구브로는 북쪽으로는 터키, 동쪽으로는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 서쪽으로는 그리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접하고 있어 고대 제국들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습니다.
구브로의 역사는 선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비너스라고 불리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고향이 구브로입니다.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가 전쟁의 신 아레스의 광장이라는 의미인데 그 전쟁의 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사랑을 나눕니다. 이외에도 구브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몇 차례 등장합니다.
또 스토아철학의 창시자인 제논이 구브로 출신입니다. 구브로 무역상 아들이었던 제논이 아테네에 이주해서 철학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양 문학의 원조인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구브로가 등장합니다. 이런 고전들에 구브로가 등장하는 것이 구브로의 오래된 역사를 말합니다.
구브로는 성경에서도 구약부터 등장합니다. 구약의 ‘깃딤’(창10:4, 민24:24, 대상1:7, 사23;1, 12, 렘2:10, 겔27:6, 단11:30)이 구브로입니다. ‘깃딤’은 ‘괴롭게 하다’란 의미의 히브리어의 킷티에서 온 말로 과거 이 섬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구브로에 있던 도시인 키티온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행4:36)이었고, 바울과 동행했던 바울의 제자 나손의 고향(행21:16)이었습니다.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구브로는 여러 제국의 지배를 계속 받습니다. BC 707부터 669년까지 구브로가 앗수르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BC 570년에서 545년까지 애굽의 지배를 받습니다. BC 333년에는 알렉산더 대제가 지배하고 BC 57년에 로마에 점령되고 로마의 지배를 받습니다.
바울 시대에 구브로는 로마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황제령이었으나 후에 원로원에 소속되어 대리총독으로 불리는 집정관이 다스렸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했던 서기오 바울이 대리총독이었습니다. 서기오가 바나바와 바울 선교의 첫 열매였습니다. 기독교 첫 선교사들의 첫 선교 열매가 첫 선교지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입니다.
동역자 바나바의 고향이며 안디옥교회 첫 해외선교지
총독 서기오 바울이 첫 열매...나사로기념교회도 있어
이 구브로 섬은 제주도의 5배가 되는 대형 섬입니다. 구브로의 영어 발음은 사이프러스 혹은 키프러스(Cyprus)인데, 우리에게 친숙한 장소입니다. 2002년 1월부터 한국군 출신 최초 유엔군 평화유지군 사령관으로 황진하 장군(육사25기 중장, 전 국회의원)이 근무했던 곳입니다.
구브로는 시리아 해안에서도 96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바울이 방문할 당시 구브로에는 여러 개의 유대인 회당(행13:5)이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 구브로에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다수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구브로가 주목받게 된 것은 구브로 출신 바나바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가 되면서부터입니다. 본명은 조셉인데 위로에 탁월했던 그에게 예루살렘교회가 바나바(위로자)라는 별명을 주었습니다. 권위자(勸慰者)라는 의미인 ‘바나바’는 기독교 교회사에 길이 빛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를 목회하다가 바울을 동역자로 초청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바울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교회를 세웠고, 안디옥교회 선교사로 파송되어 고향 구브로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훗날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유대인 폭동 때 돌에 맞아 순교한 후 구브로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현재 구브로의 중요한 관광명소입니다. 또한 바나바를 기념하는 바나바수도원이 구브로에 아직도 운영 중입니다.
구브로에는 나사로의 무덤이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무덤이 구브로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배를 타고 난파당한 후 기적적으로 구브로에 도착한 나사로는 30년간 구브로에서 선교하다가 소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사로기념교회가 구브로에 있어서 현재 중요한 관광명소입니다. 아울러 구브로에는 바울이 선교 중에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는 교회(성공회)가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또 하나의 관광 명소입니다.
안디옥에서 출발한 바울과 바나바 선교팀은 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Cyprus, 키프로스, 혹은 사이프러스)로 이동합니다. 처음 만난 곳이 ‘살라미(Salamis)였습니다. 살라미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 했던 선교팀은 섬을 가로질러 넘어가 바보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보(Paphos)는 구브로 섬 서쪽 끝에 있는 살라미에서 약 160km 거리입니다. 바보는 오랫동안 구브로 섬의 수도이었으며 AD 4세기까지 무역과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의 선교 당시 바보에 로마 식민지 본부가 있었습니다. 바보는 신바보와 구바보로 나뉩니다. 바울이 선교한 곳은 신 바보입니다. 구(舊) 바보(Old city)는 오늘날의 신(新) 바보(New city)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져 있습니다.
바보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너스 즉 아프로디테(Aphrodite) 여신의 출생지로 알려집니다.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황금을 머리에 쓴 아름답고 숭고한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노래를 바친다”고 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사랑(Love), 미(Beauty) 그리고 풍요(Fertility)를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는 구브로의 바보 근처의 바닷가 물거품 속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구브로는 유명한 구리 산지입니다. 그래서 키프로스라는 이름도 구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키프리오스’에서 나왔습니다. 구브로의 면적은 제주도의 5배 정도인데 지중해 섬들 중에 세 번째로 큰 섬입니다. 구브로에는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특히 로마가 지배했던 주후 1세기에는 상당한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구브로에 성공한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와 바나바도 구브로 출신의 부자였습니다.
구브로(Cyprus)는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했고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58년에 로마에 합병되었고, 기원전 37년에 로마원로원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15년경 아우구스투수 황제시절 바보 지역에 큰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는데 곧 로마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재건되었습니다.
구브로에는 옛날 로마시대의 성(城)이 아직 남아 있고, 성 뒤로는 왕의 무덤 등 고대 유적지가 발굴되었습니다. 로마시대 생활상을 담은 모자이크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4세기 초에 거대한 비잔틴교회가 세워졌었습니다. 그런데 AD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침략해서 교회를 비롯해 많은 유적들을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비잔틴교회 터가 남아있고 꽃무늬 모자이크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구브로(키프로스)는 역사 속에서 부침이 많았습니다. 647년과 802년에 이슬람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1191-1571년에는 십자군들과 베네치아인들이 점령해 라틴 문화와 라틴 교회를 따르도록 강요당하기도 했었습니다. 1571-1878년까지 오스만투르크가 지배를 했고 1878-1960년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에 독립했지만 현재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북쪽은 터키가 점령했고 남쪽은 그리스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바보는 BC 58년경 로마가 지배한 후부터 구브로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총독 주재지였습니다. 바울 때는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 로마의 총독으로 주재했습니다. 발굴된 비석에 의하면 41년부터 54년까지 ‘퀸터스(Quintus)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이 바보에 주재했다고 합니다.
사울이 바울로, 리더가 바나바-바울에서 바울-바나바로
40에 하나 감한 매 맞은 곳...‘성 바울의 기둥’남아있어
사도 바울은 이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려던 바예수(Bar-Jesus)라 하는 유대인 마술사 엘루마(Elymas)는 바울에게 꾸중과 훈계를 받습니다.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는 바울의 저주에 따라 엘루마는 장님이 됩니다. 이 일을 통해 큰 충격을 받은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울의 전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입니다.
결국 구브로 섬의 로마총독 서기오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보에서 행한 영적 능력과 이적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즉 ‘사울’이 공식적으로 ‘바울’로 바뀌어지는 장면입니다. 아울러 여기서 선교팀 리더가 바뀝니다. 이름순서가 바나바-바울에서 바울-바나바로 전환됩니다.
바보에 전해지는 전설 중에 하나가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태장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보에서 태장을 맞고 배를 타고 오늘날 터키 남부에 있는 버가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채찍을 맞은 것을 기념하는 바울채찍교회가 바보항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입니다.
이 바울채찍교회 옆에 ‘성 바울의 기둥’이란 푯말이 있는데, 그리스어와 영어로 새겨진 대리석 기둥이 있습니다.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기 위해 묶였던 기둥이라고 알려집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매를 맞은 상황과 장소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바보에 ‘바울채찍교회’와 바울이 묶였다는 ‘성 바울의 기둥’을 통해 바보가 그 중의 한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오른쪽으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카타콤이 있습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바보에 있었던 신앙의 박해와 수난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은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선교팀은 바보(Paphos)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Perga)로 갑니다. 그들은 제1차 전도여행 때 가는 길 오는 길 2회에 걸쳐 버가를 통과하였습니다(행13:13, 14:24-25). 갈 때에는 버가에서 선교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고 돌아오는 길에 버가에서 복음을 전합니다(행14:25).
버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도시입니다. 먼저 선교팀의 리더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바뀝니다. 이전까지는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할 때 바나바부터 언급합니다. 그러다가 버가를 향할 때부터 선교팀을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에 바울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마가의 이탈입니다. 마가는 일행이 버가에 도착할 때 선교팀을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이 일은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헤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행13:13-14, 15:36-41). 선교여행에 동행하던 마가가 선교팀을 이탈한 이유를 성경은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약 신학자들이 마가가 선교팀을 이탈한 이유들을 찾는 노력을 했었습니다. 혹자는 마가가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로 넘어 가는 산길이 너무 험해서 떠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버가 북쪽에 있는 높은 고산지대가 마가가 선교여행을 포기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만큼 버가의 북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혹자는 마가는 바보(Paphos)섬에서 바울이 채찍에 맞는 고난과 고통을 목격하고 두려워 떠났다고 합니다. 선교현장의 고난을 두려워 마가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 높은 산을 넘어 전도여행을 해야 하는 일정을 바라보며 그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혹자는 선교팀 내부 리더십의 변화가 마가가 선교팀 이탈의 이유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기오 총독을 변화시켰습니다. 아울러 바보 주민들도 다수 회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선교팀 리더가 되자 삼촌 바나바를 따라 나섰던 마가는 리더십의 변화에 불만을 품고 되돌아갔다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마가가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으로 고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바울이 선교현장에서 구약의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에 실망한 마가는 바울의 선교팀을 떠났다고 주장합니다. 여하간 버가는 선교팀의 변화가 이뤄진 곳입니다.
바울이 방문했던 소아시아 첫 도시로 로마시대에 가장 번성
리더십이 바나바에서 바울로, 마가의 이탈 등 의미 있던 곳
버가는 바울이 방문했던 소아시아의 첫 도시입니다. 버가의 역사는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대 해안도시 버가는 밤빌리아 지방의 중심도시로 BC 13세기경 건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리디아왕국에 이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알렉산더대왕 이후 더욱 번성합니다. 버가의 최고 번성기는 로마시대였다고 합니다.
버가의 성벽은 BC 3세기께 건축된 것으로 견고해서 외침을 잘 견디었습니다. 이런 견고한 성을 힘입어 버가는 밤빌리아의 주요 토착 성읍으로 자리 잡습니다. 버가는 헬라와 로마의 지배를 받아서 헬레니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버가에는 그리스 로마 스타일의 원형 극장이 있는데 1,4000명의 관중석이 있는 대형 극장입니다.
버가의 종교 문화는 그리스와 유사합니다. 버가는 에베소와 함께 아데미 여신을 숭배했던 아시아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버가 시가지 외각 언덕에 서 있는 화려한 아데미 신전은 버가가 자랑하는 문화재였습니다. 그들의 종교 문화와 제의는 고대 그리스와 에베소 그것과 유사했습니다. 아데미 여신의 성격은 에베소와 비슷하고 때로는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수렵의 여신으로서 숭배되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은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아라비아 지역에서도 숭배했던 여신입니다.
아데미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중의 하나입니다. 제우스의 딸이자 아폴로의 쌍둥이 여동생입니다. 티탄족 여신 레토는 사촌인 제우스와 사랑을 해서 아데미와 아폴론을 임신합니다. 하지만 질투심이 불탄 헤라의 방해로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제우스의 부탁을 받은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델로스 섬에서 아데미와 아폴로를 출산합니다. 아데미는 평생 남자들을 멀리하고 숲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버가에는 또 아고라가 유명했습니다. 아고라는 아테네에서 유명했고, 에베소에서도 유적이 있습니다. 버가의 아고라 규모는 에베소에 버금가는 규모였습니다. 아시아의 아테네로 인정받았던 에베소와 아고라 규모가 같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버가 시민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버가를 출발한 선교팀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합니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려면 험하기로 유명한 타우러스(Taurus) 산맥을 넘어야 했습니다. 약 100마일의 산길도 어려웠지만 여정에 도사리고 있는 큰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계곡물의 범람이었습니다. 갑작스런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이 범람하여 큰 사고가 빈번했답니다. 더욱 어려운 것은 험난한 산길에 갑자기 나타나는 강도떼(Bandits)로 악명 높았습니다. 선교팀은 험산준령을 넘어 새로운 선교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갑니다.
바울은 선교여행 때 갈라디아 지역을 선교하며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들에 거짓 선생들이 침투해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거짓 복음으로 설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이 편지를 씁니다. 거짓 선생들은 행위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바른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회람문서(Circular documents)입니다.
갈라디아지역에서 유대교 율법주의와 기독교 사이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믿음으로 얻는 자유를 설명합니다. 죄의 형벌과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은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그리스도인의 자유 대헌장(Magna Charta of Christian Liberty)”이라고 부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죄로부터의 자유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함(5:16)으로 성령의 열매(5:22)를 맺는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자유 활용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5:13) 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수신자 문제로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수신지는 어디일까요? 도대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며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신약 신학 학자들은 북갈라디아설과 남갈라디아설로 치열한 공방을 이어왔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수신자들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터키에 살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지리들을 연구하는 마크 윌슨(Mark Wilson) 박사는 자신의 저서 “Biblical Turkey”에서 AD 1세기에 갈라디아라 부르는 곳이 두 곳이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 북부지역에 원래 갈라디아 지역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정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갈라디아주를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바울이 1차 여행 후반기에 거쳐간 도시들 즉,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이 갈라디아주의 도시들이었습니다.
북 갈라디아설은 소아시아 북부의 원래의 갈라디아 지방에 갈라디아서가 보내진 것으로 주장합니다. 이들은 갈3:1의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꾸짖는 말이 켈트족을 일컫는다는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16:6, 18:23에 언급된 갈라디아를 북쪽 갈라디아라고 봅니다. 교부들,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은 북 갈라디아설을 지지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가 소아시아 북부에 있던 고올족 또는 켈트족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졌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북 갈라디아설 주장자 라이트푸트 박사는 '갈라디아'는 ‘정치적 의미가 아닌 인종적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를 쓰기 전인 3차 전도여행중인 주후 57-58년경 마게도냐 아가야에서 썼다고 합니다. 제임스 모펫은 북 갈라디아설을 주장하지만 저작 시기는 갈라디아서 1:6에 근거하여 좀 더 이른 53년경으로 봅니다.
남 갈라디아설은 소아시아 남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 갈라디아서를 받았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의 장점은 사도행전 흐름을 따른다는 점입니다. 반면 갈라디아서에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더베 그리고 이고니온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약점입니다. 남 갈라디아설은 사도행전 16:6과 18:23에 언급된 갈라디아를 남쪽의 갈라디아로 봅니다.
갈라디아서 수신자를 북과 남으로 보는 2가지 견해 있어
믿음으로 구원받는 바른 신앙 진리 가르치는 회람문서
영국 성서 고고학자인 윌리엄 램지(William Ramesy)는 바울의 선교지를 방문해 연구했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 방문한 도시들 즉,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이 갈라디아서 수신지라고 주장합니다. 안디옥 6세가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던 것을 환기시키면서 갈라디아서가 율법주의자들을 위한 편지였음을 주장합니다.
윌리암 램지나 F.F.브루스 등 영국 복음주의 학자들은 남 갈라디아설을 따릅니다. 필자도 남 갈라디아가 수신지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가 예루살렘공회(행15장)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믿고, 북 갈라디아설은 예루살렘공회 후 2차 전도여행 중에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남 갈라디아설을 지지하는 이유는 요세푸스의 주장대로 바벨론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의 강한 정체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바벨론 생활에도 유대인들은 구약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으로 이주하자마자 회당을 짓고 율법을 고수했습니다. 바울의 선교로 예수를 믿었지만 구약의 율법을 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선교하면서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고난(행14:19)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4:11)라며 자신의 고난의 경험을 간증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고도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왜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다시 종노릇하느냐?(갈4:9)고 도전합니다. 그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라며 온갖 고난을 다시 겪더라도 바른 신앙인을 세우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열정이 눈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