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역사
Contents
1.1 몽골의 침공과 후퇴(생략)
2 영국의 침공과 아프가니스탄 왕국 시대
3 공화국 시대
4 공산정권 시대
5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6 나지불라 - 무자헤딘 내전
7 무자헤딘 - 탈레반 시대
8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 영국의 침공과 아프가니스탄
1931년부터 1973년까지 쓴 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
... ... 아프가니스탄은 왕국으로써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 시절까지도 왕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1973년 당시 국왕이었던 모함마드 자히르 샤 국왕의 해외순방 중 자히르 샤의 친인척이었던 사르다르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함마드 자히르 샤 국왕을 몰아냈고 다우드 칸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3. 공화국 시대
1974년부터 78년까지 쓴 공화국 시대의 국기.
1973년, 쿠데타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정을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정을 선포한 다우드 칸은 새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겸 총리가 되었다. 그는 보수적인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사회를 바꾸려고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다우드 대통령은 친소련 정책을 펼치면서 국내에 있던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정치세력들을 탄압했고 공산주의자들 이외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는등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불만을 키우게 된다.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대통령을 살해하였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은 다우드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사직했다고 거짓 발표를 내보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 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4.공산정권 시대
쿠데타로 다우드 칸 대통령을 살해하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운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주의체제를 심는 급진적인 공산화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민주당의 급진적 공산화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발을 키웠고 특히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종교의 영향력이 컸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나날이 커져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공산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소위 '무자헤딘(مجاهدين)'이라는 이름의 이슬람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히딘간 충돌로 나라 전역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 내부 또한 여러 파벌들로 분열되어 결집력이 매우 취약했다. 이듬해인 1979년 당내 권력 투쟁에서 타라키가 실각당하고 하피줄라 아민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내정간섭을 거부하였고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세력, 당내 정파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민의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분열을 더욱 고착화시켰고 이로 인해 아프간 공산정권은 붕괴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에 인접국이었던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이 이 지역에서 쌓아온 소련의 영향력상실과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판단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개입을 보이기 시작했고 1979년 12월 27일 소련은 육,공군 전체 병력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시켜 아민 대통령을 사살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이었다
5.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국기.
한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하여 체코 영사로 밀려나다시피한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친소련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점령한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게릴라와 소련군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소련군과의 전쟁 중 무자헤딘은 친소 카르말 정부군 또한 공격하였고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한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소련은 막대한 양의 돈을 전비로 쏟아 붓고 병력을 추가하였지만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고 1985년에 접어들면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개입 중단을 고심할 무렵,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 내부에서도 카르말이 물러나고 무하마드 나지불라가 대통령이 되는 권력교체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을 비롯한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정 수립등의 유화 정책을 제시했지만 무자헤딘의 반발로 인해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소련은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철수를 시작했고 이듬해인 1989년 마지막 주둔 소련군 병력마저 철수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6.나지불라 - 무자헤딘 내전
1987년부터 92년 멸망까지 쓴 국기.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물러나자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부를 공격하였고 이는 아프가니스탄 내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간의 유혈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철수 후에도 계속된 소련에서의 무기 지원과, 주둔했던 소련군이 두고 간 전투기와 전차등 화력 강한 무기들로 무장한 나지불라 정부군이 강력한 전면전을 구사해 무자헤딘 세력에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전면전에서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열세였던 무자헤딘들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고 이를 거점삼아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저항했다. 정부군은 무자헤딘의 게릴라 공격에 수도카불과 일부 평야지대만을 장악한 채 물러나야했다. 내전중 정부군의 공군기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발생과 민간 산촌 마을에서의 약탈과 강간, 방화등은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민심을 잃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나지불라 정부군은 패퇴를 반복했고 정부군 내에서도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늘어났으며,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끊기게되 정부군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자헤딘은 카불을 제외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4월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지인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한 대대적인 무력공세 작전에 돌입하였고, 치열한 전투끝에 마침내 카불 도심지 진입에 성공하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부르하누딘 라바니,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굴부딘 헤크마티야르,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등의 무자헤딘 출신 인사들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7.무자헤딘 - 탈레반 시대
무자헤딘의 국기로,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UN에게는 2001년 탈레반 패망 때까지 정식 국기로 인정되었다. 지금의 아프간 국기는 2002년을 기해 바뀐 것으로 이후로는 국장 도안만 조금씩 바뀌었다.
그러나 나지불라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장악한 무자헤딘도 각기 다른 여러 무장군벌과 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와 같은 몇몇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군 철수후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내전 중 서로 다른 파벌들을 통합시켜 단일 조직체로 만들려는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나지불라정부 붕괴 이후 무자헤딘들끼리의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서로 전투를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내전 상태로 돌변하였다.
이런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가 여러 이슬람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탈레반이라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조직을 결성하였고 탈레반은 내부분열로 약화된 무자헤딘 세력들을 격퇴하였다. 또한 탈레반은 나지불라 정권 붕괴후 군벌 세력들의 횡포와 약탈에 지친 아프간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 그 영향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이후 1996년 탈레반은 수도 카불에 입성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탈레반 정권의 국기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율법에 입각한 이슬람 원리주의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하는가 하면 음주,담배,흡연,면도,영화를 금지하였다. 연날리기나 부즈카시같은 아프간의 전통놀이도 이슬람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이들은 집권기동안 문화재 파괴, 민간인 학살, 법 위반자에 대한 손목절단과 잔인한 총살형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포로 몰아갔다.
탈레반이 장악한 국토는 3/4에 달했고 탈레반정권이 수립된 후 부르하누딘 라바니, 아흐마드 샤 마수드등 몇몇 무자헤딘 세력들이 1/4에 해당되는 북부 산악지역으로 달아나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을 결성하여 탈레반 정권에 대한 무력저항에 나섰다. 탈레반은 나머지 북부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북부동맹을 공격했으나 동맹군의 완강한 저항에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한편 동맹군 역시 탈레반이 장악한 남부 지역으로 남진하여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군사력이나 규모의 열세로 인해 탈레반과 북부동맹간의 불균형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8.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가 발생
테러의 주모자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알 카에다가 아프간의 탈레반들과 연합했으며 아프간에서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아프가니스탄은 다시한번 주목을 받게 된다. 미국은 탈레반에게 이들의 신변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한달만에 끝이 났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반(反)탈레반 정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미군과 NATO군의 침공에 정권을 잃은 탈레반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카르자이 정권에 항거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상태에 놓여있다.
2012년 2월 미군들이 코란을 불태운 사실이 드러나면서 아프간 전역 및 이슬람권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에대한 보복으로 미군 2명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차림 군인들에게 사살당한 일이 벌어졌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이 해명과 사과를 했지만 반발은 누그러들지 않고 있다.
4월에는 수도 카불에서 곳곳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벌어졌다. 카불 최대 호텔이던 카불 스타 호텔에선 무장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난입하여 마구잡이 사격을 감행했다. 이들을 소탕하는데 정부군은 무려 6시간 이상을 소비했으며 미군의 출동에 사람들은 돌을던지며 불만을 토로했다
9.아프가니스탄의 과거와 현재
1967년의 아프가니스탄
2007년의 아프가니스탄
이슬람문화재
바비얀석굴
출처:엔하위키 미러
첫댓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어 좋습니다. 좋은 자료로 무지를 조금씩 깨울 수 있게 해 주신 '이디엘' 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