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공동체 만들기.
1. 본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시민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개인 재산의 보호에 관한 법규입니다(1~15). 가축을 도둑질한 경우(1), 훔쳐서 죽이거나 팔았다면(수중에 없을 경우) 소는 하나에 다섯, 양은 하나에 넷으로 배상해야 합니다. 도둑을 죽인 경우(2~3a), 밤이면 그를 쳐죽여도 죄가 없지만 낮이라면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당방위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도둑질의 경우(3b~4), 배상을 원칙으로 하되 갚을 수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배상해야 합니다.
2. 수중에 물건이 있을 경우에는 소, 나귀, 양 구별 없이 갑절을 배상해야 합니다. 남의 밭을 침범한 경우(5), 짐승이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먹었으면, 자기 밭이나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해야 합니다. 화재로 손실을 입혔다면(6) 방화자가 배상해야 합니다. 맡은 물건(돈이나 물품)을 도적질 당한 경우(7~8), 도둑이 잡히면 도둑은 갑절을 배상하지만,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맡은 사람은 재판장에게 가서 자기가 손댄 여부를 조사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죄를 면할 뿐 아니라 지속적인 신뢰 관계를 위하여 필요한 일입니다. 공동체의 보호를 위한 깊은 배려가 이 규례 안에 있습니다.
3. 장물에 대한 규정은(9) 남이 자기 잃은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경우, 재판장에게 가서 확인되면 죄 있는 자가 갑절을 배상해야 합니다. 맡은 물건(짐승)에 문제가 생긴 경우는 약간 복잡합니다(10~13).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갔으나 목격자가 없는 경우, 맡은 자는 임자 앞에서 여호와로 맹세하면 임자는 믿을 것이고 배상의 책임은 없습니다. 도적질 당한 경우, 맡은 자는 임자에게 배상하고, 야수에게 물려 죽은 경우, 죽은 짐승을 증거물로 채택하고 배상의 책임은 없습니다. 짐승이나 물건을 빌린 경우는(14~15) 짐승을 빌려왔는데 임자 없이 있을 때 죽거나 상하면 빌린 자가 배상해야 합니다. 임자가 함께 있었을 경우라면 배상할 필요는 없으며, 세를 낸 경우에는 세낸 돈이 배상을 대신합니다.
4. 그 다음 큰 항목은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의 보호에 관한 율례입니다(16~31). 먼저 혼전 관계에 대한 율례입니다(16~17). 정혼하지 않은 처녀와 동침한 경우, 예물을 주고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혼전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녀의 아비가 거절할 경우, 예물을 대신하여 돈(위자료)으로 배상해야 합니다.
5. 무당은 죽여서 이스라엘 중에 없게 해야 합니다(18). 수간, 즉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죽여야 합니다(19).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도 죽여야 합니다(20).
6. 약자에 대한 율례가 있습니다(21~27). 이방 나그네는 압제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근거는 이스라엘 자손들도 전에는 나그네였었기 때문입니다(21).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말아야 합니다(22~24). 그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그 해롭게 하는 자들을 죽이시고 그들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긍휼은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회적 약자에게 반드시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7. 가난한 자에 대한 도리입니다(25~27). 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빚쟁이처럼 압박하지 말아야 하고 이자는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대부업의 부당함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옷을 담보로 잡은 경우, 해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8. 백성들은 세워진 지도자들을 욕하고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28).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을 인색하게 하거나 더디게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29a). 장자와 가축의 처음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29b~30).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31).
9. 본문은 하나님께서 개인 재산을 어떻게 존중하시는 지와,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의 보호에 관심을 가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억울한 자와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고(31),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율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의도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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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5일은 ‘법의 날’이었습니다. 법의 날은 법의 존엄성을 되새기고, 법치주의 확립의 의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1964년에 제정된 국가기념일입니다. 고대나 중세 권력자들은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군사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이유도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법치주의는 법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권은 법을 법치주의의 본질인 국민의 자유는 뒷전으로 미루어두고 자신과 당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계명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 즉 '언약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23장 33절까지 이어지는 언약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님의 가이드라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과 함께 언약서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제하고 단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즉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는 죄와 죽음의 권세에 묶여있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죄에 대해 자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고 여겨집니까? 왜 그렇까요? 이유는 율법 안에서 자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율법 안에서 자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율법을 지키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교통법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거리에서 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건넜는데 바로 앞에 교통경찰이 있다면 운전자는 당연히 움찔합니다. 법규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호를 지키고 건널목을 지난 운전자는 교통경찰이 있다하더라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유는 교통법규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교통법규를 어겼기에 법규에 속박되어 있고, 교통법규를 지킨 다른 운전자는 법규로부터 자유함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겁고 나를 속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말씀을 지키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라면, 예를 들어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다른 생각을 품었다면 간음한 것과 같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십계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죄에 대해 나약하기에 우리는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22장은 크게 두 섹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5절은 배상에 관한 법, 16-31절은 도덕에 관한 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둑질과 같이 의도적인 범죄에 대한 손해 배상과, 고의가 아닌 과실에 대한 손해 배상 규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도둑질에 따른 배상 (1~4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손해 배상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해서 도살하거나 팔면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1)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친 만큼만 배상하도록 하는데, 도둑질 한 경우에는 다섯 배나 네 배로 갚아야 하고, 만약에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3)고 엄격하게 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둑질한 짐승이 살아서 그의 손에 아직 있으면 ‘같은 종류의 짐승으로 갑절을 배상하도록’(4)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이스라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소와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한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는 힘든 농사일과 각종 짐 부리는 일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면서, 소의 각종 부산물은 주요 식량자원이자 원자재로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양도 많은 문화권에서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경제적 동물의 이용 외에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양은 중요한 희생동물임과 동시에 소유한 양의 수가 재산을 뜻했고, 털과 가죽과 고기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짐승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경제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나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서 무거운 배상을 하게 한 것은 이웃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최근 청소년 범죄 연령이 낮아지고 잔혹성이 커지다보니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거나 폐지하자는 의견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있습니다. 찬성 측에서는 청소년들이 촉법소년이라는 법을 악용하고, 낮은 처벌 수위로 재범률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의 청소년에게 교화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꼭 처벌만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법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거미줄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오랏줄입니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도 ‘바늘을 훔친 자는 주륙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는 말로 고무줄 같은 법집행을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배상제도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큰 재산을 도둑질한 자는 작은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는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둑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주인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3a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이 한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했다가 죽게 되더라도 그 도둑을 죽인 집 주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기가 없기에 침입자를 알아보려고 불을 켜다가 주인이 먼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식별이 가능한 해가 뜬 후라면 도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고, 그를 벌하도록 재판장에게 데려가게 하셨습니다. 이 규정은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 놀란 사람과 대낮에 들어온 도둑 모두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2. 타인의 밭이나 곡식 등에 대한 배상 (5~6절)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가축을 풀어놓아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먹게 하면, 즉 남의 밭이나 포도원을 훼손하면 가축의 소유자는 자기 밭의 제일 좋은 산출물과 포도원에서 최상품의 포도나 포도나무로 배상해야 합니다. 타인의 재물을 그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길을 다니다보면 길바닥이나 심지어는 도로에 내동댕이쳐있는 전동킥보드를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무슨 심보일까요? 자기 것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전에 교외에 있는 조그마한 찜질방을 갔는데, 월요일 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무리가 들어왔는데 그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목회자들이 월례회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하려고 샤워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샤워실 곳곳에 수건과 대야가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분명 제 앞에서 들어간 일행은 목회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나중에 주인이라도 보면 어쩔까 싶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을 다 수거해서 수거함에 넣고, 대야도 정돈하고 나왔습니다.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농사철이 시작되면 땅 속에서 월동하는 해충의 방제를 위해 논.밭두렁이 태우기나 잡풀 소각 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한 화재가 빈번해지자, 산림인접지역에서는 논두렁 태우기를 금지하고 있고, 부득이하게 논.밭두렁 소각이 필요할 때는 시군 산림담당부서의 허가를 받아 공동 소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은 불에 타기 쉽습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이웃의 재산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하한 목적으로 들판에 불을 놓는 경우 주의할 것을 당부함과 동시에 남의 곡식이나 밭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위탁 물품이나 짐승에 대한 배상과 소유권 분쟁 시의 배상 (7~13절)
7절과 8절은 위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그 이웃집에서 도둑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그 도둑질한 자는 갑절로 배상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탁받은 사람은 위탁물을 잘 보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탁물을 잃어버리거나 도둑을 맞았다면 손실을 갚든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자신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판장으로부터 잘못이 없다고 인정받으면 물품을 위탁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9절은 어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하여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유권 분쟁이 생길 경우,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쌍방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10-11절에서는 나귀, 소 그리고 양과 같은 짐승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맡긴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아무도 안 볼 때 끌려갔다면, 맡은 자는 그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여호와께 맹세하면, 맡긴 자는 그대로 믿어야 하고, 맡은 자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0~11절). 그러나 도둑맞았다면 맡은 자는 맡긴 자에게 배상해야 합니다(12절). 그리고 만일 맡은 짐승들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로 내놓으면 그 찢긴 것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3절).
4. 빌려온 짐승에 대한 배상 (14~15절)
이웃에게서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빌려온 짐승의 주인이 없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합니다(14). 그런데 그 짐승의 주인이 함께 있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사용료를 내기로 하고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5).
이상에서 배상에 대한 규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중요한 점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반드시 배상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배상하되 경우에 따라서 두 배, 네 배, 다섯 배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도둑과 같이 나쁜 의도를 갖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는데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었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은 자신의 것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배상하되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위탁받았으면 마치 자기 것처럼 책임감을 갖고 지켜야 하며, 만약 위탁한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맡은 사람은 배상하거나, 책임이 없음을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 받아야 하며, 맡은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맡긴 사람을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과 함께 언약서를 주신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즉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나 한 사람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상에 대한 법이 의도하는 바는 공동체 전체의 화합과 평화입니다.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선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온전한 내려놓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한 것도 대단한데,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남을 속여서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자기 관할 구역의 세금을 미리 로마 제국에 선납하고 자기 마음대로 더 거두어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즉 그는 부당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따라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남은 절반으로 네 배의 배상을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재물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율법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 삭개오가 아니라, 존경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삭개오와 같이 율법 안에서 자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웃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고 달려 갑시다.
본문 16절부터 17절은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법에 대해, 18절부터 20절은 이방 풍습에 대한 법에 대해,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대한 법입니다.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16-17절)
(16-17)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만약 공동체 내에서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꾀어 동침하였을 경우에는 납폐금을 주고 아내를 삼아야 합니다. 납폐금이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예물이나 돈을 의미하고, 성적인 결합은 상대방과 하나가 됨을 뜻하기에 약혼하지 않은 여자의 삶을 책임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가 결혼을 거절하게 되면 납폐금은 지급해야 했습니다. 납폐금을 얼마 지급했는지 정확히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만 신명기 22장 29절에 근거하여 은 오셉 세겔을 주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방 풍습에 관한 법(18-20절)
이어 이방 풍습에 대한 세 가지 명령이 나타납니다.
(18-2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이 세 가지 명령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에 관한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무당’은 마법사, 요술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여성형이므로 ‘신접한 여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무당에 대해서는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점술은 고대근동 사회에서 흔히 행해졌던 종교 행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무당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배필로 하와를 보내 주셨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부부로 맺어진 남녀의 성적인 결합과 이로 인한 자손의 번성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 섭리를 벗어나는 부끄러운 행위 즉, 짐승과 교합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하게 된다는 것은 단지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멸이라는 개념은 생명을 포함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까지도 함께 파괴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스며들어 있던 이방 풍습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강하게 하십니다.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공동체 중 약자에 관한 법(21-27절)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12장 37-38절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수많은 잡족’도 함께 출애굽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그들도 함께 광야생활을 했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도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기에 그들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그네들을 학대하지 않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는 동시에 나그네였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과부나 고아에 대해서도 해롭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대를 받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오히려 섬겨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이들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짓밟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벌하시고,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경고를 더하십니다. 이어서 공동체의 채무관계에 대한 법이 이어집니다.
(25-27)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을 경우 채권자처럼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이자는 곡식에 대해서 33.3퍼센트에 달했고, 은을 빌릴 경우에 20~25퍼센트인 것을 감안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애와 사랑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담보로 가지고 있던 물건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줄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가는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고아, 과부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지금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우리들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습니까?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소외된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서 세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교회 내에서만 사랑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이 전해지도록 주님의 통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법(28-31절)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관한 법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8절에 재판장의 원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기에 본문에서 나오는 ‘재판장’으로 해석하기 보다 ‘하나님’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백성의 지도자들에 대한 저주를 금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다른 성경 번역본에서는 ‘재판장’이 아니라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하는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제물 드림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29-30)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예물을 드릴 때는 먼저 지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지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고린도후서 9장 7절과 같이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곡물에 대해서는 처음 추수한 것을 드리고, 짐승에 대해서는 칠일 동안에는 어미의 젖을 먹게 하고, 여덟째 날에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방 종교에서처럼 사람을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13장 13절 대속의 개념으로 모든 탄생을 대표하는 장자를 받으시는 대신 레위인을 대속물로 받아 하나님의 소유로 삼고, 성소를 관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에 대해 언급하며 마무리 됩니다.
(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앞서 말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에 대한 결과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의 모습으로는 그 사람의 거룩함을 볼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먹는 음식이야 말로 거룩한 삶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기에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 즉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먹는 행위조차 거룩해야 한다면 우리의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거룩한 성도의 삶을 보이시겠습니까? 그것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때에 비로소 삶에서도 거룩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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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과 ‘율법’ 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의 압제에서 자유를 얻어 언약의 땅으로의 새로운 시작을,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살아갈 원칙과 윤리강령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출애굽은 대단히 주요한 사건입니다. 율법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많은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형식을 갖춘 신앙과 신념은 율법주의로 내몰리고, 율법은 배제하고 폐기할 것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담고 있기에 소중합니다. 본문을 통해 율법의 진의와 뜻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실 때, 전제하신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 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율법을 주신 일차적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관계가 있기에 율법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관계가 없다면 율법은 불필요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백성, 백성과 백성사이에 질서를 유지시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를 존중하시기에 율법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핵심은 존중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의 질서도 존중하십니다. 한 사람의 소유권도 인정하시고, 질서가 파괴되거나 침해될 때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보호해주십니다. 도둑을 맞거나, 인권이 침해당하는 경우, 철저하게 보상을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물리적 충돌로 인해 손해가 발생했을 때, 구체적 배상을 명령합니다. 율법은 한 마리를 도둑질하여 적발 시 종류에 따른 갑절 이상의 배상, 가축이 타인의 경작물에 손해를 입혔을 때의 보상법, 이웃집에 귀중품을 맡겼다가 이웃집이 도둑을 맞았을 경우의 처리법, 한 가정의 딸이 성적으로 유린당했을 때,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셨습니다. 예배하러 나온 사람이 형제에게 '라가', 즉 바보라고 하여 한 인격을 모독한 경우, 예배보다 먼저 사람들 사이에 질서, 즉 화해가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 곧 사랑, 즉 질서의 회복이라 알려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 사이에, 하나님 사이에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파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을 보호하고 가꾸어야 합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통한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할 때가 많으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성한 질서입니다. 이 시대, 율법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사람 사이에 예의와 도덕, 질서가 파괴되어 얼마나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어수선합니까?
율법의 정신, 복음을 따르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몰입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범위를 예배에만 한정 짓지 않았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실생활에 일어날 수 있는 충돌과 피해를 조정하고 구체적인 보상을 하나님은 명하셨습니다. 율법은 구체적인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이기에, 눈으로 보이는 화해와 물질적 보상과 배상이 따릅니다.
본문 18, 19절은 무당과 수간하는 이들을 죽이라고 섬뜩한 명령이 있습니다. 살인마저 사랑으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깊은 뜻을 21~23절을 통해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그네, 과부, 고아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회적 약자였기에, 너희를 돌본 하나님의 정신, 율법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라 명령합니다. 그럼 수간, 즉 동물과 성관계한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개인 취향과 선택을 존중해달라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욕정의 대상, 동물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그 동물은 그 행위를 원하겠습니까? 말 못하는 동물은 피해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물, 동물을 욕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동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파괴행위로 간주하시기에, 이들을 엄중하게 다스리라 명한 것입니다. 연약한 동물들, 항거할 수 없는 자연, 역시 하나님의 돌봄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동식물과 자연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동일 선상에서 무당을 죽이라는 명령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 매개의 역할을 하는 무당은 궁극적으로 무당 본인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어 꼭두각시로 삼습니다. 한 인격을 파괴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무당을 반드시 제거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말세 때 사회가 많이 소란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조정하고 권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범람하고 심지어 국가권력까지 손 길을 뻗었습니다. 사회정의는 상실되었고 약자들은 짓밟히고, 끝없는 이기심으로 자연 파괴와 약탈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고, 성도는 어떻게 처신해야합니까?
율법과 복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서 출발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정의와 바른 질서를 세워가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한 손에 농기구와 다른 손에 무기를 쥐고 삶을 이어갔던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 역시 이 땅을 농기구와 무기를 쥐고 경작과 전투를 멈추지 말아야합니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타성에 젖어있던 중세교회에 종교개혁은 믿음과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었듯이 우리와 이 시대에 개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개혁의 첫 단추는 바른 관계와 질서의 회복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첨벙거리며 율법의 정신과 복음을 논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베드로처럼 깊은 곳에 노를 저어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빈 그물을 내리는 수고를 마다치 마십시다. 약자와 시대를 돌보는 일이 힘겹고 고단할 것이지만, 역사와 시대 속에서 일하시며 짧지 않은 손으로 격려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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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크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기까지의 이야기, 즉 출애굽 이야기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에 관한 내용으로 나뉩니다. 따라서 출애굽하기까지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 가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구약의 율법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저는 어제 한 교우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그 교우님의 질문은 이 18절의 내용을 오늘날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무당을 보면 죽여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당과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우리는 구약의 계명들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목적은 20장 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유대교에서는 이 구절을 제1계명에 포함하고 있지만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십계명의 서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게재된 십계명에는 이 구절이 제1계명 앞에 위치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들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지침서가 됩니다. 이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현실화’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유이며, 광야 같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18절에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19절에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0절에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등과 같은 계명들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무속인들이나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무속신앙이나 타종교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 이 계명들의 요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어둠의 영과 연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이요,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율법에 대해 열심이 있었고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성령님을 통해 깨달은 율법의 비밀은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율법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변화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된 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것, 이것이 구원의 참된 의미임을 알았습니다.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애굽의 종이었고 이 세상과 죄악의 종이었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이것이 구원의 출발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21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애굽 땅에서 어떠한 처지에 있었는지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압제당하고 학대받던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요 마음이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이웃은 더 이상 내가 짓밟거나 탈취하거나 손해를 끼쳐도 되는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주위에 있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은, 그들을 향하여 따뜻한 손을 내밀어야 하는 진정한 이웃일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위에 군림하는 백성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마음으로 존경해야 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일 수 있었습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이 하염없이 어리석어 보이고 무거운 굴레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교우님들,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능력의 손을 내밀어 우리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날마다 필요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고, 그분이 먼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주시기에, 광야에서도 하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