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8장 후반부와 19장에 이름이 거명되는 아볼로는 신약 초대교회의 유명한 설교자로, 알렉산드리아 출신(행18:24)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아볼로의 고향인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도시로, 주민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고,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이 편찬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해상과 육로가 모두 열려있는 입지조건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였고, 헬라문화의 다양한 부류의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당시 아테네 버금가는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영지주의와 헬라철학으로부터 기독교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애썼던 알렉산드리아 신학 학파의 본고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배출해낸 인물로는 클레멘트(AD150-215년), 오리겐(185-254년), 아타나시우스(293-373년)등이 있습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곳 출신으로 언변이 좋고 구약 성경에 능통한 자였습니다(18:24),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웠고 그 도 곧 예수에 대해 에베소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예수를 부분적으로만 알았습니다. 그에게 예수의 도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쳐준 사람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습니다.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예수를 제대로 알고 난 후 고린도로 넘어갔는데, 그 때 바울이 에베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온 바울의 상황에 대해 1-2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1 -2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만난 "어떤 제자들"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된 사람들이 아니라, 아볼로를 통해서 예수를 알게된 사람들입니다. 즉 아직 브리스길라나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기 전에 아볼로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제자들을 가르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전해진 예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아볼로가 이들을 제자로 키워냈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에게 바울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은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예수에 대해 알고 있었고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온전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려고하는 온전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빌2:6-11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 성육신입니다.
2) 십자가 대속의 죽음입니다.
3) 죽음을 이기신 부활입니다.
4) 승천과 재림으로 완성되는 심판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죄악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셨고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복음을 알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를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이 질문한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아직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이 예수의 복음을 가르쳐주기위해 묻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5-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그들이 듣고 세례를 받으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예수의 온전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 예수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셔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공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예식이요, 주의 공동체가 그들을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입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이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그전부터 이미 돕고 계셨지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것은 그들이 결단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후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미 성령은 그들가운데 역사하고 계셨지만 그들은 이제 비로소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인생의 주권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이미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은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이미 도우시고 이미 우리 가까이 와 계시지만 우리가 결단하고 주앞에 나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인생의 주인으로서 역사하여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원하는 곳으로 이 자동차를 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에 대해서 듣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나마 알게됩니다. 그분이 바로 내 조수석까지 찾아오셔서 내 인생길을 코치해주시고, 나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내가 자동차를 몰고 있습니다. 이미 그분의 코치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자동차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인생의 자동차를 운전하시기 시작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내가 그 분께 결단하고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어드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입니다. 그 때 내 인생이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확증시켜주시는 주님의 역사가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너는 내것이다' 확증해주시는 주님의 역사가 성령세례입니다.
바울이 물었던 그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성령을 받았는가?
나는 예수의 복음을 알고 있는가?
그분의 성육신, 대속의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 재림.
이 예수의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분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직 요한의 세례밖에 알고 있지 못하던 그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를 내 인생을 도우시는 분 정도로만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분이 나를 도우시는 것은 알지만 아직 내 인생의 자동차를 내어드리지는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어디로 갈지 불안해하며 도움의 손길만 요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분께 맡기십시요.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더이상 움켜쥐지 말고,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께 맡겨 드리십시다. 그럴때 주님이 '너는 내것이다'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세례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두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6-7절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사람쯤 되니라
성령세례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두가지 선물은 첫번째가 방언이요, 두번째가 예언입니다. 이것은 단지 외부적인 은사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내적 은사로 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한다고 이미 배웠습니다.
즉 방언은 소통하는 능력 즉, 공감력이요, 예언은 감화력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먼저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과 공감하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타락으로 상실된 하나님과의 소통의 능력이 성령이 내안에 오심으로 회복됩니다. 주님과의 소통이 회복되고 주님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면 이제 사람과의 제대로된 소통도 가능해집니다. 바벨탑에서 죄악때문에 나눠어진 인간의 언어가 성령의 세례로 말마임아 방언을 통해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진정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은 우리와 교감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공감력/소통력의 은사인 방언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과 소통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주님의 말씀이 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이 감화력, 예언의 은사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그 당시 에베소에는 주의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당시에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었던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내안에 있습니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소통의 사람, 공감의 사람으로 말씀의 감화력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영적상태를 확인하십시다. 내 인생 자동차의 주도권이 아직도 내 스스로에게 있다면 이 때를 기점으로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께 넘겨드리십시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깊이 있게 소통하고 사람과 공감하며 사람을 감화시키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당시에는 비난을 받는 모순의 표적이셨던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우리에게 미친 것처럼, 우리도 이시대에 공감력과 감화력을 지닌 주님의 표적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십시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한 말씀 이 21-22절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하나님께서 에베소에서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신 일이 있은 후 사도는 앞으로의 전도 일정과 관련해 오늘날의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갈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협력하던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고 바울 자신은 잠시 더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23-29절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그런데 바로 그 때 에베소에서 바울로 인해 큰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로 인해 에베소에 거의 폭동 수준의 소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는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은으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던 은 세공 기술자들 중 데메드리오가 나서서 자신들의 생업과 풍족한 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도시들이 무시를 당했다고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그러자 에베소 온 시내 사람들이 바울과 같이 다니던 두 사람을 붙잡아 연극 공연장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아데미는 당시 소아시아 모든 여신의 어머니 신으로 풍요와 다산의 에베소의 수호신이었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누구나 자기 이득을 쫓아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아닌 이익이 되는 것을 쫓아 처신하고 결정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자기 이익 때문에 말도 다르게 하고 앞뒤 다르게 살아갑니다.
특히 금전적 손익 앞에서는 신앙도 뒷전이고, 종교도 수단일 뿐입니다. 금전적 이익 앞에서는 신앙은 둘째 치고 법도 양심도 없습니다. 선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진리라는 미명으로 자기 이익과 생존을 위해 선동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돈 때문입니다. 진리와 정의, 심지어 복음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돈 때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아예 노숙자로 살 작정이 아니면 대부분 돈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돈의 지배를 받고 있고, 돈의 계산에 빠져 있고, 돈의 논리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게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바울은 돈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바울 역시 돈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저축하고 모아두거나 물려받은 돈으로 전도여행 경비를 충당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결코 돈에 의지하여 그의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오직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주님을 생의 목적과 전부로 삼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호흡하며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는 길에서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주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영광된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30-32절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이 연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바울의 제자들과 친구들이 바울을 말린 것입니다. 그리고 연극장에 모인 수만의 인파들은 자기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그 이유를 모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극적인 선동에 휩쓸려 이유도 모르고 뜻도 모른 채 몰려온 것입니다.
말씀에는 바울이 왜 연극장 안으로 들어가려했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연극장 안으로 들어가 에베소 사람을 설득하려 했는지, 붙잡힌 두 사람을 구해내려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흥분한 군중들이 가득한 연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실은 뭇매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주저없이 연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비롯한 바울서신 전반에 걸쳐서도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음이 두려운 현실이건만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을까봐 쩔쩔매며 살지 않았습니다. 실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바울이 배짱이 컸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미 죽을병에 걸렸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현실과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 영원한 가치, 영원한 약속과 완성이 무엇인지를 주님 안에서 확실하게 보고 알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비밀이며, 약속이며, 존재감이며, 영광이며 기다림인 것입니다.
33-41절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그리고 연극장의 무리들은 두 시간이나 소리를 질렀고 가까스로 서기장의 설득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곧 데메드리오 한 사람의 선동에 의해 촉발된 소요가 서기장 한 사람에 의해 진정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힘과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선동에 의해 엄청난 소요가 일어나고 한 사람에 의해 그 소요가 진정되었듯이 한 사람의 힘과 의미는 말의 표현을 넘어갑니다. 바로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세상이 들어오고 주님 한 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세상에 임했듯이. 바울과 사도들 한 사람으로 인해 생명의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갔듯이 한 사람의 힘과 의미는 결코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그 한 사람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 누군가를 위해 사람의 진정한 가치와 약속, 인생의 목적과 영광이 무엇인지를 아는 하나님의 그 한 사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는 동안 주 안에서 하나님의 그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쪽의 로마령에 속한 중요한 도시입니다. 큰 상업 지구로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지만,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였습니다. 도시의 주요 부분에는 극장, 목욕탕, 도서관, 광장, 포장도로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데미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큰 헬라에서 가장 큰 건물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에베소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약 3년 동안 강론하였습니다. 본문은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중요한 도시 에베소에서 바울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강론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중 에베소라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복음의 전파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다(1-7)
(1-3)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에베소에서 가르쳤던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에베소에 이르러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만난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던 아볼로와 관계되어있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 제자들도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요한의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예수님의 세례와 구분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물로 베푸는 세례' 하고 하였고, 예수님의 세례를 '불과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 라고 하였습니다(마3:11).
예수님도 요한의 세례를 자신이 하는 세례와 구분하셨는데, 예수님은 율법은 요한 때까지이며, 그 이후로는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눅16:16). 이렇게 예수님은 요한을 율법에 속해 있다고 하시며, 복음과 구분하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로마서(롬7:7)에서 말씀하시듯이, 요한도 자신의 세례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하며, 율법에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했습니다(눅3:3). 율법에 대해서 정의할 때, 율법은 모세오경만으로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포괄합니다(롬3:20). 그리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창조질서이고,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윤리, 도덕, 양심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실제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상식적인 윤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옷과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 주라’ 하고, ‘세리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은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세례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윤리와 율법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에 속한 요한의 세례로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는 하지만, 성령이 오시진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사모하고 그 율법에 합치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평가 절하해서도 안 되고, 평가 절상해서도 안 됩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며, 의를 의로 여기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창조질서에 어긋나게 되기도 합니다. 율법이 있을 때 죄를 알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복음과 구분하고, 율법이 있어야 할 자리와 복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구분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고,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우리가 한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로 우리를 백성이 되게 하셨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율법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종종 율법과 복음을 혼돈하여서, 율법을 말해야 할 때 복음을 말하고 복음을 말해야 할 때 율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과 복음의 혼돈은 신앙에 혼란을 초래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일어나는 성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율법적으로만 말하거나, 혹은 복음적으로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을 통한 판단과 복음을 통한 해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서야 성령이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다 (8-10)
(8-9A)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은 먼저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권 혹은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정하고 있어, 국민의 나라 즉, 민주공화국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과 같이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나라를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는데, 그가 강론한 장소는 회당으로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회당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을 교육하고 율법에 따른 예배를 드리고, 율법에 의해 구성원들을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율법의 통치를 받는 중심지가 회당인데, 이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강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비방하는 사람으로 인해, 바울은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강론을 거부하는 것은 율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오용하는 인간의 문제로 인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죄인인 우리가 그것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 안에 죄를 역동해, 율법에 저항하고 율법을 이용해 자기의를 추구하게 하여, 우리가 죄인임을 더 드러나게 합니다(롬7:8).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실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창조질서가 담긴 선한 것이지만, 인간은 율법을 바르게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죄로 오염돼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회당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제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강론합니다.
(9B-10)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두란노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이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원이라 번역된 스콜레는 강연이나 모임을 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 서원은 여론과 문화가 생산되고 공유되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고, 이곳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이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 제국의 문화와 여론의 요충지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공개적으로 강론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병든 사람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떠나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대표적인 표적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마12:28). 귀신은 사탄을 추종하는 영적인 세력이고, 사탄은 불법적으로 세상의 통치권과 권세를 잡고 있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귀신이 떠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회복되고 임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가운데, 유대인들 중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시험 삼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유대인 중에서도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는데 이들은 마술을 행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변질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능력을 행하는 수단으로 여겼기에, 예수님의 이름도 자신들의 주술적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율법과 예수님을 수단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목적과 소원을 이루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귀신을 이길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귀신이 떠나가기는커녕, 달려들어 그 사람을 이겨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목적이 되며, 하나님이 나를 위한 수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소원과 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긴 우리의 목적과 소원이 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복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다(11-20)
(18-20)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 마지막 단락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를 자복하고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됩니다.
바울이 황제의 통치 아래 있는 로마제국의 거점도시 에베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강론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방법도 아니고, 인간적인 실천 운동도 아니고, 윤리의 회복운동도 아니며, 정치활동이나 정책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믿음을 얻으므로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났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지 그 정체성을 얻게 될 때, 그 정체성에 따라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파할 때, 율법이 실현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이 되었습니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로 우리에게 어떤일이 있어났는지 알때, 우리가 무엇을 행할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우리의 전환점이자 터닝 포인트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 복음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나라를 우리 자신에게 강론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평안과 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로마, 알렉산드리아, 수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큰 항구도시로 바울 당시 인구가 25만명 정도였습니다. 3개의 큰 도로를 통해 화물 유통의 요충지가 되었기에, ‘허영의 시장’이라 불려질 정도였습니다. 여러 촌락과 도시의 지역 관리들은 로마와 황제에게 새 신전을 지어 바치고 이로 인해 경제적 부수입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얻고자 서로 경쟁을 벌였는데, 에베소는 1세기에 두 번이나 이 영예를 얻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주둔 된 적이 없었고, 그 지역 출신의 관리가 다스렸으며, 로마의 지방장관들이 정기적으로 순회하면서 재판을 열곤 했습니다.
상품들과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도시였기에 풍요와 다산의 신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은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로 태양의 신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로서, ‘달의 신’과 ‘수렵의 신’으로 일컬어지고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로 불렸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길이 약 130m, 너비 약 67m, 높이 약 18m인 웅장한 크기의 신전으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데미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는 극찬도 있습니다. 신전에는 항상 수많은 순례자가 모여들었고, 이를 상대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거나 기념품을 파는 장사꾼들이 중요한 상권을 형성했습니다. 특히 순례자들의 종교적 열심을 이용해 여신상이나 신전 모형을 팔아 왔던 ‘은 세공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조합을 형성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회 속에서 세례를 주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습니다(19:8-10).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생각이나 느낌으로 끝나지 않고 놀라운 능력을 보입니다(19:11). 사람들은 그 능력을 보고 들으며 두려워합니다. 죄를 자복하고 마술책을 불태웁니다. 20절 마지막은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21절부터 41절까지는 “이 일이 있은 후에” 라고 시작하며 세력과 세력이 충돌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마게도냐에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던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가 있었고, 아가야에는 아테네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도시의 교회들을 다시 찾아가 상황을 살피고, 예루살렘 교회에 기부할 것을 독려하려 결심했습니다(롬15:25-28; 고전16:1-11; 고후8-9장). 그리고 최종적으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고 말합니다. 직역하면 ‘내가, 반드시 로마도 보아야만 하리라’는 문장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울에게는 자기 안위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이르러야 한다는 예수님 명령의 수행 여부가 중요했습니다. 21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성령 안에서’라는 의미의 구절이 함께 있습니다. 이 결심이 자기 열심히 아닌 성령의 감동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는 사역이 성공했다고 해서,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든든한 세력이 되었지만 이를 등에 업고 자기 평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외롭고 위험한 여정을 떠나려 준비합니다.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새로운 도전을 위해 선발대로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냅니다. 디모데는 2차 전도 여행 중 사도행전 16장 3절부터 바울과 함께 여정을 다녔습니다. 에라스도는 로마서 16장 23절과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서 고린도 재무관(청지기)이었다고 합니다. 2차 전도 여행을 하던 바울과 만나 복음을 영접했으며,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장기 체류하게 되자, 그를 돕기 위해 찾아와 합류했다가 마게도냐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27)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 시기에 은 세공인 조합장이던 데메드리오는 바울과 그 세력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를 맞습니다. 24절에서 그는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했다고 하고, 25절에서는 ‘우리의 풍족한 생활’ 이라고 표현하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을 밝힙니다.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와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귀도 떠났지만(12절),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병과 귀신을 가져오는 신이라 해도 싸워 이기려 했던 것입니다. ‘이 생업’(25절), ‘이 영업’(27절)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27절에서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고 멋진 명분을 들지만, 결국 돈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전했던 메시지 중 그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도 ‘메시아가 너희 죄 때문에 죽었다’도 아닌,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사회는 말합니다. “하나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중요하다.” 거창하고 화려한 명분이 우리를 속이고 설득하려 하겠지만, 그 속에 ‘적지 않은 벌이’와 ‘풍족한 생활’과 ‘이 생업’과 ‘이 영업’을 지켜야 한다는 욕망이 들어 있다면,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28-3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욕망은 사람들을 끓어오르게 합니다. 그들은 분노라는 감정을 삶에 가득 채우고 열정적으로 쏟아냅니다. 소리칩니다. “에베소 사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이 말을 당시 언어로 발음하면 ‘메갈레 헤 아르테미스 에페시온’입니다. 이 말을 2시간 정도 외칩니다. 사람들의 외침으로 요란스럽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듭니다. 일제히, 모두 하나 되어,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감정의 고양, 큰 소리로 요란스러워지는 파급력, 하나 되어 행동하는 실행력, 붙잡고 달려 들어갈 정도의 추진력. 하지만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동역자들에 의해 멈추어 섭니다. 무력하게 주저앉은 것 같았지만, 그는 진리의 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현상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진리나 명분이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는 속과 겉이 일치합니다. 뜨겁기 때문에, 하나 되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닙니다.
(32-34)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본문은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외침을 이기려 목에 핏대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난 군중은 우리 말을 들을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들 또한 결국 누군가에게 ‘선동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사람들이 결국엔 ‘유대인을 향한 편견에 사로잡힌 군중’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음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편견과 혐오로 진리를 배격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 또한 편견과 혐오에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선동을 주도한 자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언변이 뛰어난 알렉산더라는 사람(딤후 4:14에서 구리 세공업자로 바울을 괴롭혔다고 알려진)을 앞세워 변명하려 했으나, 그 변명 또한 성난 군중의 외침에 묻히고 맙니다.
(35-41)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총독을 보좌하여 법령을 입안하고, 각종 기금을 관리하며, 대소 집회를 관장하는 행정관이던 ‘서기관’이 무리를 진정시킵니다. 많은 무장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와 신전지기의 자부심에 맞게 행동하라고 말하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것을 요청합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억울하게 끌려온 것입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정식 절차를 거쳐 적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정당성이 없는 모임은 아무리 뜨겁다 해도 ‘불법 집회’일 뿐입니다. 그렇게 열정적이던 무리는 결국 흩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는 여전히 여정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교회란 큰 세력이 되었다 할지라도 복음을 위해 거침없이 내려놓고 여정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는 동료를 위해 사지로 뛰어들려 하며, 동료들은 그러한 지도자를 말리고 권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곳이어야 합니다. 선동가 데메드리오를 앞세워 자기 이익을 지키는 조합이 아닙니다. 거창하고 화려한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편견과 혐오와 배제라는 칼을 휘두르는 폭력집단도 아닙니다. 자신들이 왜 소리치고 분노하는지도 모르면서 뜨거움을 이어가는 요란한 무리도 아닙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처럼 선발대가 되어 길을 떠날 수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처럼 억울하게 붙잡혀 위협받을 수도, 바울처럼 무력감을 느끼며 멈춰 설 수도, 제자와 친구임에도 아무런 도움 줄 수 없이 말리는 것만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교회’입니다. 그렇게 바울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로마를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십니다. 자신의 길을 걷는 이를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 께서 우리를 교회로 살아가야 한다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난을 직면해 견딤으로, 시대와 사회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어주는 통로로 살아가는 하루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