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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趙明熙, 1894~1938)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며 교육자이자 시인이다. 그의 아호는 포석(抱石)으로, 돌을 품어 안는다는 뜻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시대를 살다 간 다른 문학인들과는 달리 그 흔한 TV 방송에서조차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조명희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이 다른 이들에 비해 뛰어나지 못해서도 아니고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성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미·소 냉전과 이념의 시대라는 정치적 사상적 그늘이 그를 양지로 꺼내주지 못했던 탓이다. 한 한국전쟁 영화에 등장하는 인민군 간호장교를 악마가 아닌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영화감독이 정보부에 끌려가 산송장이 되어 실려 나오던 공포의 세상에서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1988년에야 풀린 ‘북으로 간 예술가들의 월북 이전 활동에 대한 해금조치’ 이전에는 이념이 다른 작가들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할 수 없었던 극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 북한이나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사회주의 작가들의 작품이나 평가가 금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분단되어 있는 사상의 벽 안에서 잠시라도 조명희를 양지로 꺼내본다는 것은 너무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조명희는 민중민족문학의 선구자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와 문학활동을 하던 중 러시아 혁명시대의 소련(소비에트연방)으로 망명하여 다양한 문학활동을 통한 조선독립운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소련 정보부에 연행되어 스파이혐의로 처형된 비운의 독립인사다. 이로 인해 조국 독립 후 분단과 동란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에게는 발굴되지 못한, 또 발굴할 수 없었던 잊혀진 작가로 머물러 있었다.
그의 발굴 이전에는 좌파 계열의 카프 문학가(일제 강점기에 KAFF가 주도했던 계급 문학. 카프(KAPF)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n)의 영문 약칭) 로 치부 받았지만, 1988년 발표된 [월북문인의 해방이전 작품 공식해금조치] 이후에는 디아스포라 문학(망명자나 추방자들이 모여 자기나라 언어나 그런 취지로 발행하는 문학행위)의 선구자이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재평가를 받은 문학가이다.
조명희의 출생지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 4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6세의 나이에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됐다. 몇 개월 후 출소한 그해 가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고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중 극작가였던 김우진(1897~1926)을 만나 교류했고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도회에 가입했다.
1923년 귀국한 뒤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인 [金英一의死(김영일의 죽음)]와 역사극 [婆娑(파사)]를 연달아 발표했고 적로(갈대피리)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으며, 1925년에 카프의 창설 회원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며 조명희 대표적인 단편집 [낙동강]을 남겼다.
1927년에 김기진(1903~1985), 김동환(1901~1958), 김복진(1901~1940), 박영희(1901~1950), 안석영(1901~1950)등과 함께 경향극 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조직해 잠시 활동했으나 반체제 문학활동으로 인한 일제의 감시와 검거 위험이 목을 조여 오자 검거를 피해 1928년 7월, 처자식을 남겨둔 채 소련으로 단신 망명했다.
일본 동양대학 출신인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일본은 팥죽노점상을 해야할 정도로 궁핍한 처지의 그에게 금전이나 안정된 직업을 미끼로 끈질기게 친일활동을 회유했으나 그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 그에게 자존심이 상한 일본은 조명희의 잡아들일 결정적인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소련 망명 첫 해에 대표적인 항일 단편작품인 [짓밟힌 고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에 소련작가동맹 의장이었던 알렉싼드르 파데예프의 권유로 소련작가동맹에 가입해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고향] 편집을 담당하며 글을 기고했으며, 망명 생활 중에 많은 고려인 후학을 양성했다. 1930년에 러시아 우수리스크 푸칠롭카 육성촌에서 거주하며 육성농민청년학교에서 근무했고, 그 다음해에는 우수리스크로 이사하여 조선사범대학에서 근무하다가 최종적으로는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어과 교수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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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보국 헌병들에게 체포, 구속된 직후 찍은 수인사진. 머리를 삭발당한 모습에 수인번호가 적혀있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잘 사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동경하여 소련 망명 후 열정적인 문학활동으로 스탈린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소련에서의 문학활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한채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던 조명희에게 불운이 닥쳤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 당시 ‘스탈린의 미친개’로 악명이 높던 소련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 니콜라이 예조프의 대숙청 때 정보요원들에게 체포되어 연행된 것이다. 소련 정보국인 KGB는 일본 스파이와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1938년 4월 15일에 사형을 선고했고, 최악의 독재자 스탈린의 반대파 숙청정국과 맞물려 속전속결로 처리된 이 사건에서 변변한 변호나 구명운동의 기회조차 가질 겨를도 없이 선고 후 1개월도 되지 않은 그해 5월 11일 총살형이 집행되어 향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명희는 '인간백정'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3년이 지난 뒤, 니키타 흐루시초프(그는 구 소련의 국가원수인 서기장으로, 쿠바로 핵미사일 이동 중 해상봉쇄로 맞선 케네디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이다.) 정권 때인 1956년 7월 20일 제 20차 소비에트 당대회 이후 조명희에게 적용된 스파이 혐의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를 통해 무죄판결 및 공식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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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위해 수많은 정적과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인간백정 스탈린과 그의 충견 예조프. 151cm의 신장을 가진 단신의 예조프는 스탈린의 대숙청 때 스탈린의 사냥개, 피의 난장이로 불리며 소련을 공포로 몰아 넣으면서 인간사냥에 앞장섰다. 내무인민위원장 예조프의 마구잡이 숙청이 소련의 고급인재를 과하게 유실시켰다는 것과 그의 잔혹성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스탈린은 그를 해임하고 독일 스파이나 스탈린 암살계획 등을 씌워 처형해 불태워버렸다. 레닌과 혁명을 함께 이끌다 스탈린에게 처형된 니콜라이 부하린은 "내 인생에서 저런 간악하고 잔인무도한 자를 본 적이 없다"는 말로 예조프를 평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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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은 1923년 2월 동양서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희곡집 [김영일의 죽음]을 를 발간하고, 4월 8일 동명 32호에 [내 영혼(靈魂)의 한쪽 기행(紀行)]과 [아침]으로 문단에 나와 5년 남짓 조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928년 러시아혁명의 극심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포석이 조선 문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조선 최초의 창작희곡 [김영일의 죽음]을 쓰고, 최초의 조선 순회공연을 다녔다는 것이 포석의 첫 번째 문학적 업적이다. 포석은 또 1924년 조선 최초의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으니 그것이 두 번째 문학적 업적이다. 그리고 프로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는 단편소설 [낙동강]을 1927년 7월 조선지광 69호에 발표했다. 포석의 [낙동강]은 당시 조선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문학적 업적이다.
포석이 지닌 역량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봐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희곡, 시, 소설, 평론, 동요, 번역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포석의 문단 활동 첫 출발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해 조선 최초의 순회공연을 벌인 기획자이자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천재작가 조명희. 그는 우리 근대문학 최초의 희곡을 썼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집도 냈다. 프롤레타리아(민중) 문학의 선구자로 부르주아(부자, 기득권)를 비판했으며, 수필에서도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다루어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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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들레르가 될 수 없으며 타고르도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것만 쓸데없이 흉내 내지 말 것이다.”
포석 조명희의 시집 <봄 잔디밭 위에> 머리말이다. 일제강점기 민족 민중 항일 작가로 시대를 읊은 포석의 문학과 삶을 꿰뚫는 말이다.
충북 진천 벽암리에 포석 조명희의 문학관이 있으며 여느 문학인들에 비해 뒤늦은 2015년에야 문을 연 문학관 광장의 조명희 동상은 러시아에 살고 있는 그의 아들 등 후손들의 기금으로 세워졌다.
"나는 이날까지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허다히 보아왔다. 내 나라에서나, 남의 나라에서나-. 그러나 내 눈에 비친 그런 시인 중에는 포석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준엄한 시인은 없었다." 김소운.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22) 포석 조명희". 중앙일보, 1981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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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포석 조명희(1894∼1938)의 문학비를 참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극동연방대학에서 동방경제포럼 행사를 마친 뒤 학교 밖 정원에 있는 조명희의 문학비에 들러 참배했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민중문학 작가인 조명희는 1928년에 소련으로 망명한 뒤 일제 수탈의 실상과 한인의 저항을 묘사한 소설 '낙동강' 등을 집필했다.
읽으면 추가 도움이 될만한 조명희 관련 기사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515
조명희 ‘로력자의 고향’…연해주 망명 문단의 ‘문예지 1호’ 발견하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0543.html
조명희의 단편 낙동강 전문
http://ko.kliterature.wikidok.net/wp-d/57e7e7d576ed101d1d2ccf28/View
첫댓글 자료 올리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최기만수필가님, 사상적 이념등으로 뒤늦게 해금된 그의 문학에 찬사를 보냅니다 6.30.진천 문학관 기행을 기획하고 있는데 센토벗님들 함께 하고싶어요 담주 공지올릴 예정입니다
마침 우리 센토카페에서 충북 진천 조명희 문학관으로 문학기행을 계획하신다는 소식을
단톡방에서 들었던 차에 도움이 될까 해서 자료를 올렸습니다.
포석 조명희 자료를 찾던 중에 더 많은 자료를 접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사로잡히곤 하는군요.
러시아 혁명기의 인간백정 스탈린의 숙청으로 수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죠.
조명희도 스탈린 폭정의 아까운 희생자입니다. 덕분에 하루종일 러시아 혁명사도 다시 공부했네요.
레닌이 만성폐질환으로 일찍 죽지 않았으면 스탈린이 러시아를 죽음의 나라로 만들었을까..
부하린과 트로츠키 등을 생각하면서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말처럼 허무한 말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군요..
천재적인 포석선생님께서 용기있는 삶을 사셨군요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나 다시 명예를 찾으심에
존경감사한 마음입니다
당시에는 극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걸핏하면 숙청당해 죄 없이 죽음을 맞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일단 권력에 미치면 뵈는게 없으니 전두환도 광주시민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겠지요.
복권이 되어 명예가 회복됨은 다행이지만 사람은 가고 없으니 허탈한 일이지요?
관심의 말씀 감사합니다.^^
위대한 빛의 포석선생님의 발자취를 읽으면서
치열 하게 사신 선생님의 곧은 의지에 고개숙여 집니다
불과44년에 그나큰 업적을 세우셨는데도 이념이 무었이길래 아직도 조명 되지 않은게 안타까웠습니다
보석찿는데 선수 이신 지기님 고맙습니다
환상짝궁 우연 선생님 포석선생님 자료 구하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산 김원봉의 독립인사 분류 조차도 안 된 나라입니다.
정부의 독립훈장 추서 움직임에도 빨갱이가 무슨 독립인사냐며 난리를 치는 부끄러운 우익의 나라죠.
한국은 의식주보다 이념에 목숨을 거는 나라라 국가발전이 더디면서도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분단 자체보다도 분단을 이용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포석에 대한 자료를 접하고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면 감동이 더 깊어질 듯 하군요.
조선생님의 격려말씀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에 적절한 문장의 배열로 편히 읽어내리면서도 가슴 찡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항상 그렇지만 선구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선배들의 결기에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럼요. 가슴에 전해지는 전율과 안타까움이 없다면 같은 한국인이 아니겠지요.
식솔을 남겨두고 이역만리로 홀로 떠나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사형집행을 앞두고 자신을 지켜줄 나라가 없다는 서러움에 목놓아 울고도 싶었을까요?
선구자들에 결기에 동참해 주시는 황대감님은 진정한 애국자십니다.. 진짜 농담 아닙니다.ㅎ
1960년대 공부했던 우리 또래의 학생들에게 <카프> 계열의 작가는 화성인만큼이나 생소했습니다.
그 때는 정지용이란 이름도 정0용 같이 써야 했을 때여서 백석의 그 아름다운 시도 한줄 배우지 못했습니다.
조포석의 <낙동강> 같은 작품은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부지런한 센토 식구들이 생가로 나들이 간다니 좋은 연구도 뒤따르길 기대하겠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늘 큰나무 같아서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늘 반갑습니다.
한 나무에서 사과나 배, 수박이나 감도 열리니 그 단맛들을 두루 경험함은 참 귀한 일입니다.
선생님은 시대의 변혁기를 살아오신 분이고 그 체험들을 후배들에게 들려주시니
선생님의 존재만으로도 저희는 큰 정신적 의지가 됩니다.
6월말 괜찮으시다면 선생님을 제 차로 편안하게 모시고 다녀오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