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존 오웬과 그의 작품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탐구하는 많은 이들이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고 있다. 영국 신학자들의 황태자, '칼빈에 버금가는 학식을 가진 천재' 그에 대한 화려한 수식어가 말하듯 그는 청교도들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2세에 옥스퍼드의 퀸스 칼리지에 진학해서 고전, 수학, 철학, 신학, 히브리어 등을 수학했다. 오웬은 십대 때 하루 18시간에서 20시간을 공부했다. 26세 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41년 동안 8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모든 저술들은 주옥과도 같이 귀한 고전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지금까지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 그는 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실한 목회자요 은사를 받은 대설교자로, 옥스퍼드 그리스도 교회의 감독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그리고 크롬웰 경의 군목으로, 한 세대에 걸쳐 가장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낸 저자이며,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린 인격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많은 고전에 통달하고 헬라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히브리어와 랍비들에 대한 지식에도 깊이 몰입하며 천재성에 있어서 널리 인정받은 인물이다.
존 오웬의 작품에 대해 필자가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그의 저술을 중심으로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1) 1643년 오웬은 예정교리, 원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속죄의 범위, 구원에 있어서 인간 의지의 역할 등에 대해서 검토하며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을 논박하는 고전적인 칼빈주의에 대한 강력한 해설을 담은 [알미니우스를 드러냄]이란 책을 출판함으로 그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2) 그는 교구민들에게 교리문답을 교육 시키는 일에 탁월했으며 교리문답 책자를 어린아이와 성인들을 위해 한 권 씩 총 두 권을 저술하기도 했다.
3) 1640년대 설교와 저작들을 통해서 그의 명성은 급격히 퍼져 나갔으며 30대 초반에 이미 천 명이 넘는 성도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 왔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 앞에서 히브리서 12장 27절을 설교하여 큰 감명을 주었고 그로 인해 궁정 목사로 또한 영국 의회가 인정한 설교자로 의회에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4) 오웬은 일찍이 당대의 소장 학자로서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논쟁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1642년 [알미니안주의의 해부](The Display of Arminianism)을 작성하여 런던에서 다음 해에 출간하여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을 세우고 알미니안 주의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주력하였다.
5) 오웬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1646년 의회에서 설교하게 되면서 부터다. 이날 오웬은 자신의 회중 교회 적인 의지를 강하게 선포하였다. 오웬의 이날 설교는 이미 자신의 교회정치관을 잘 드러낸 저술 [교회정치에 대한 사상들](Thoughts on Church Government)속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1646년까지 에섹지방의 포드햄에서 살면서 결혼도 하고, 후에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에섹지방의 코게샬 장로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지만 회중교회를 개척하였다. 코게샬 (Coggeshall)에서 회중교회 목회를 하던 1648년 오웬은 백스터(Richard Baxter)와 논쟁을 하게 되는 데, 그의 저술이 상당히 반율법주의 경향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던 논쟁이 바로 반율법주의 논쟁이다. 오웬은 ‘구원은 거룩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다’(salus electorum, sanguis Jesu)를 발표하였다.
6) 1648년 챨스 1세 국왕이 의회파에 의해서 살인자요, 폭군이라는 선고를 받고 처형된 바로 그다음 날, 의회에서 설교자로 초빙을 받아 매우 인상 깊은 설교로 감동을 주었다. 예레미야 15장 19-20절을 본문으로 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서 격려를 받는 의로운 열정” (Righteous Zeal Encouraged by Divine Protection)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는 특히 종교의 잘못이나 실수는 사회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한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의 권세와 국가의 권력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여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담겨있다. 물론 세상을 어지럽히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세속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s church) 교수회장으로 선임된 오웬의 탁월한 행정력은 눈부신 업적을 남겨놓았으니,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맡기고 경건과 신앙심의 고취는 물론, 일반 교육수준을 크게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많은 설교와 저술을 발표하였다. 그는 종교 자유와 관용을 강조하였다. 유대인들을 다루는 일에 관한 회의에도 참가하였고,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를 왜곡한 쏘씨니언주의자(Socinianism)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이 만족설을 약화시키는 입장에 서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배척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7)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의 시절에, 그는 이 시절에 [성도의 견인], [그리스도의 대속], [죄 죽임], [삼위일체와의 교제], [분리], [유혹]. [성경의 권위]에 대한 주요 작품들을 포함한 수많은 저서들을 출판했다.
8) 오웬은 크롬웰이 왕이 되려고 한 것을 반대한 것으로 호국경 시절 말기의 크롬웰로부터 호의를 잃게 된다. 1665년 그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고 피신하는 동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시편 130편 강해] 그리고 방대한 [히브리서 주석] 의 첫 권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9) 1674년 오웬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전이 될 [성령론]을 출판했고 2년 후 아내와 사별하고 18개월후 미망인 도러시와 재혼하였다. 오웬은 말년에 천식과 담석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이 질병들로 인해 설교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저술에 매달려 [칭의] 와 [영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 등의 주요 작품들을 쏟아 내기도 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혼신의 노력을 다해 지성적으로 헌신하였는가! 그는 자신이 죽기 하루 전날인 1683년 8월 23일 그의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나는 이제 내 영혼이 사랑했던 분, 아니 오히려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신 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 위안의 전부였습니다. 나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교회라는 배를 남겨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선장이 그 배에 계신다면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가련한 사람 하나가 없어진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깨어서 기도하며 소망으로 참고 기다리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지금도 견고히 서 있습니다."
II.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
[들어가며]
오웬은 기도의 본질에 대해서 바로 알고 기도와 성령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문화나 배경을 참조하지만 그의 특징은 철저하게 성경에 대한 주해에 기도를 두고 있다. 그는 모든 신학의 기초는 오직 성경뿐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한 신학자였다. 그가 이성이나 상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모든 것은 성경의 계시를 그 기초로 하고 있다. 17세기의 오웬은 당시의 로마 가톨릭이 지닌 예배 의식,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 사용과 예배 의식, 또한 소시니안들과 같은 견해에 비판하며 기도에 대해 논하고 있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화와 환경은 달라도 그가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해석해 나가고 있다는 그 개혁주의적 입장 때문에 그의 글을 우리의 기도를 올바로 인도하기에 매우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책의 내용의 개요만 읽어도 기도생활에 있어서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에 그 개요를 중심으로 그의 글을 요약 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오웬의 머리말]
1. 우리가 바로 알아야만 할 기도의 용도와 목적 –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기도
신앙의 생명과 활동은 근본적으로 기도에 있음은 당연하다.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는 온갖 오류들이 기도의 본질과 용도를 왜곡시키고 올바로 기도하는 것을 무시하게 했다. 이런 기도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위험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기도의 본질과 용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특별히 이것이 공격받고 있을 때에 이것을 살피고 방어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2. 기도의 두 가지 원리 – 성경의 계시와 믿는 자들의 경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기도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자 노력했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능력을 받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며, 자신들이 그동안 해 왔던 방식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두 가지 원리, 곧 성경의 계시와 믿는 자들의 경험을 부지런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후자가 전자에 의해 판단이 되어야 할지라도, 후자가 있을 때에야 비로서 전자의 진실성에 대해 안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관습이나 전통, 꾸며낸 결과들로부터 나온 모든 추론들은 아무 필요가 없다. 우리의 문제는 신자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역의 결과는 무엇이며, 이를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능력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과 경험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지, 어떻게 부름을 받았든지, 자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와 간구의 영으로서 성령을 주실 것을 은혜로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기도할 때 진리를 바로 깨닫고 약속된 도우심과 후원을 기대하며 자신들이 받은 바 능력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형식적인 기도문 사용을 강요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매사에 기도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여, 거룩한 말씀의 가르침에 정면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3. 기도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한 지침들
1)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자연의 빛과 하나님의 수많은 명령들은 피조물로서의 필연적인 의존과 순종, 더불어 이 원리에 생명과 빛을 준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기도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며, 그 대상을 향해 기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2)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게을리 하고 있다.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관계에서부터 목사나 교사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이를 행하고 있다면, 우리가 다루는 기도의 본질이나 방법에 대한 거부감의 없을 것이다. 신앙적으로 생긴 문제들은 자신들의 맡은 의무를 잘 감당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3) 자신을 위해,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이성)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사람은 매사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본성을 향한 우리의 의무는 우리가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께 최고의 것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를 통해 사람들이 눈먼 희생으로 드리고 있다고 책망하신다.
4)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우리가 가진 모든 영혼의 기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한 최선의 도움을 받아 신실하게 사용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형식적인 기도문을 사용해서 기도하는 것이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 기도한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5)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도우심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든,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움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완벽하고 동일하게 기도할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든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든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신 바 된 도움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를 받아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무시하는 것이다.
6) 우리는 분명히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문을 만들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다. 따라서 기도문은 자연의 빛으로 보든, 성경의 빛에 비추어 보든, 편의상 덧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7) 신자들에게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기도문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주겠다는 약속을 주시지는 않았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문을 만드는 것이, 모든 선한 일이 그러하듯이 성령의 일반적인 도우심을 받아서 하는 좋은 일로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그 도우심은 은혜와 간구의 영으로서 기도할 때 우리를 실질적으로 돕는 성령의 역사와 같은 종류의 도우심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기도문을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은혜와 은사의 도우심을 받아 실질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지, 형식적인 기도문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8) 성경에는 주기도나 시편, 혹은 다윗의 시들과 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영감으로 작성된 기도문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원래 계획된 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용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용도와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적으로 만든 기도문들에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에 사람이 만든 것을 더하는 것이 될 뿐이다.
물론 형식화된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을 죄를 짓는 것이나 혹은 절대적으로 불법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정죄하지는 않는다. 또 기도문을 사용하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어찌할 수 없이 무지함으로 예배를 드릴 때 여러 면에서 실수한다고 하더라도, 신실하게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받아 주실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거룩한 두려움과 신실함으로 예배하고 복음의 규칙에 맞게 행동하고 있다면, 비록 그가 예배의 방식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부패한 면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아 주실 것이다. 문제는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에 의해 증명이 되지 못할뿐더러, 사도들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도 없으며, 초대교회의 관습에 의해 지지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예배에 사용되는 형식화된 기도문들에 포함된 어리석은 요소들(1)
1) 기도문은 예배를 미신적으로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교회에 의해 처음 예배에 받아들여진 기도문들에는 시대를 거듭하면서 미신적이고 타락한 이교도적이고 교리들이 더해졌다. 모든 개혁교회는 그런 이교적이고 타락한 교리들이 점점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그런 인식이 바로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로 받아들여진 내용에 인위적으로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그것들은 점점 교회의 예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토록 가증스런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나 미사의 희생(the sacrifice of mass)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교회의 예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미신적으로 교활하며 사변적인 사람들의 논쟁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오염시켰으며, 마침내 온 세계의 가시적인 교회에 널리 펴져 있는 우상숭배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가증스런 것들이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된 형식적인 기도문들은 그들의 미신적이고 무지한 마음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쳐서 그들로 하여금 이런 기도문을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점점 그리스도인들을 어리석은 완고함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교리적으로 화체설이나 미사에 믿을 만한 근거나 이유를 보지 못했고 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동 원리들, 즉 믿음과 이성과 감각에 모순이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현혹되어 받아들인 것들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한 것들이 교회에 들어올 때, 자신의 이성이나 믿음, 감각을 사용하여 제대로 비판하지 못함으로, 오히려 이것들이 교회 안에 서서히 들어와 마침내 자리를 잡았고, 이와 더불어 형식적인 기도문들이 계속해서 예배에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그들의 모든 영혼을 오염시켰다.
2) 형식적인 기도문을 통해 마음이 우상숭배에 마비되어 갔다
성찬에 관한 교리들과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서서히 부패되어, 그것들이 가진 진리나 오류를 객관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즉시 받아들이지도 거절하지도 않게 되었다. 오히려 형식적인 기도문들의 사용과 더불어 서서히 교회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사람들의 신앙과 이성, 감각을 마비시켜, 진리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약을 먹은 것과 같았다. 우상숭배의 기초가 되는 것들, 곧 화체설과 미사의 희생은 그 내용이 잘 표현되어 있는 형식적인 기도문들을 통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이 우상숭배에 완전히 마비될 때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와 신앙에 있어서 영혼이 환상과 상상에 의해 사로잡히고 외적인 의식에 의해 동요되면, 항상 그랬듯이 세상 사람들의 의식은 마비되고 결국 우상숭배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형식적인 기도문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면, 우상숭배와 같은 예배가 교회 안에 들어와 일반적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를 흘린 수많은 거룩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주었던 자유를 제대로 사용했더라면, 교회 안에 잘못된 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삼키고 피를 마신 이 미사라는 괴물은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서 맹위를 떨치면서 그 가증한 모습과 힘을 가지게 되었다.
3) 형식적인 기도문은 예배에 대해 인간적인 방법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외적인 질서에 의해 진리가 변질되는 곳에는 왜곡된 진리들이 기도문의 형식을 빌려 빠르게 퍼져 나가게 된다. 그리고 몇몇 부류의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사용하는 다양한 예배 의식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오류가 포함된 신앙의 교리들을 성도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 외에 다른 용도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와 예배의 방법에 관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을 경멸하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을 무시하고 마차에 실은 법궤가 흔들릴 것 같으니 손으로 그것을 붙잡으려 했던 웃사와 동일하다. 화체설과 희생의 미사와 이와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가증스러운 예배는 바로 이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예배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형식적인 기도문들을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와 더불어 세상은 이런 가증스러운 것들에 대해 저항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로부터 성경에 의해 보증되지 않은 그런 형식적인 예배를 만들어 강요할 권한을 부여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좀 더 일직 드러났다면, 수많은 악이 예방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 오랫동안 어떤 예배 의식서도 만들지 않았으며,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미사와 예배에서 그 어떤 성상(image)들도 사용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4) 인위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가져오게 되었다
형식적인 기도문들과 함께 교회 안으로 들어온 또 다른 악은, 이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의식들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신교들에 의해 고백되었듯이 예배에서 미신적인 요소들을 증가시켜 결국 예배를 우상숭배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서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은 계시나 자연스러운 예배의 정황이 허락하지 않는 어떤 의식도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한다.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의식들과 자연적인 빛은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데 필요한 규칙들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기도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 그리고 그것들이 예배에 사용되면서 이런 규칙들은 불필요한 겉치레들에 의해 대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점점 외적인 자세와 몸짓, 의복과 음악, 절하는 것과 굽실거리는 것, 십자가를 긋는 것과 분향, 재단, 형상, 십자가 등과 같은 수많은 의식들이 들어와 예배를 어리석고 미신적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런 온갖 종류의 겉치레들을 행하는 것이 미사의 핵심적인 내용들이 되었다.
5. 기도문 사용의 강요는 성령의 은사들을 매장시키는 것
기도문 사용의 강요로 인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배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게으름과 불신앙에 진노하사,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은사들을 철회하실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교회를 지키시기 위해 하늘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시는 지속적인 중보사역에 대한 증거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공적 예배와 관련해서 로마 가톨릭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지금도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의 기초이자 미사의 모든 내용이 놓여 있는 형식적인 기도문의 사용이 무너지면 그들은 자신들이 처음 나온 구덩이로 빠져 버릴 것이다. 이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람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사적이며 공적인 기도에 있어서, 자신들의 헌신에 대해 자랑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죄와 무지 그리고 미신들을 따르도록 종용한다. 그들의 주장이 허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부분 혹은 모든 헌신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알려졌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헌신의 제도가 명확히 기도에서의 모든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교제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하고 욕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교회에서 성령과 성령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기독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령과 그의 사역을 거부할 수 없고, 따라서 교회도 동일하게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이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만든 헌신의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있다면, 그들은 교회에 약속된 성령과 그의 사역에 대해 무지한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6. 교회에 약속된 성령과 성령의 사역, 기도에 관한 정리
1) 어떤 사람이나 교회도 공적이거나 혹은 사적인 예배에서 자신을 형식적인 기도문에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2) 성경에는 특별히 기도할 때 도와주기 위해 세상의 끝날 까지 교회에 성령을 주시겠다는 많은 약속들이 있다. 이것들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의 거룩과 위로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현재 낙심 중에 있는 자들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3) 기도할 때 약속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이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약속들은 경멸을 받을 것이며, 진리와 함께 효력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4) 성경에는 이것들이 분명히 약속이 되어 있고 이것들을 간구하도록 명령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경험하는 축복을 누려왔다.
5) 교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의 의식이나 형태나 내용은 성경의 가르침과 외적인 환경이 조화를 이룬 자연의 빛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모임에서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이것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없다. 이 이상의 것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것이 아니며, 사도들이 행한 것도 아니고, 이후에 초대교회가 행한 것도 아니며,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성경의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다.
6) 교회들 사이에서 믿음의 일치와 교제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교리적인 면과 예배의 형태까지도 일치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7) 기도가 다른 것들과 차별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믿는 자들의 실질적인 경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편견이나 나태함이나 혹은 반대되는 원리와 의견에 의해서 그 내용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8)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분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 우리의 생애 동안 우리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사용하여 부지런히, 자주, 간절하게, 인내를 가지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진리를 인정하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며, 그것이 없이는 아무리 같은 생각을 가지더라도 소용이 없다.
7. 기도에서 성령의 역사를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
성령의 역사와 은혜는 세상에서 많이 비난을 받아왔지만, 오늘날처럼 성령의 모든 내적인 은혜와 역사가 그토록 심하게 비난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펠라기안(Pelagians)조차도 그런 극단적인 비난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아주 극단적인 사람들은 무지하게도 공개적으로 하늘의 일들에 대해 비난하고 대담하게 신앙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무시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일을 일삼고 있다.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는 전통적인 믿음과 그리스도와 복음과 믿음과 경험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더욱 부패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신들의 영혼 안에서 신앙의 힘과 경험을 잃어버린 사람의 고백은 거의 쓸모가 없으며,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것이 신적인 계시에서 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상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몇몇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교제하는 교회들의 거짓된 모습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들이 설령 참이라고 할지라도, 칭송을 받아야 할 것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고려할 가치조차도 없는 무신론자들과 비성경주의자들과 복음의 초자연적인 진리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자들이며 세속적인 것에 매달려 진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들 이외에도 복음적인 은혜를 도덕이라는 위선으로 거부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권위와 증거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과 성령과 그의 사역에 대해 대담한 의견들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온 국가를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물들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들의 불경건과 온갖 종류의 부도덕, 넘치는 죄악들을 통해 드러난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무관심하며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보존하고 이런 악에서 교회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인 기도가 무엇인지, 그것의 효력이 나타나는 원천과 원인에 대해 확증할 필요가 있다.
제 4장 기도의 본질- 로마서 8장 28절에 대한 주해와 방어 (1)
기도는 믿음과 사랑과 존경과 두려움과 기쁨과 다른 은혜들을 말로서 하나님께 요청하고 간구하고 찬미하는 선물이나 능력으로서, 영적인 기능(faculty)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런 선물이나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따라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이며, 그 결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1.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성령
성령의 사역에서 첫째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의 상황에 맞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곳에서는 기도의 본질이나 존재 자체가 파괴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라는 말씀으로 이것을 확증하고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악하고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보다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자신이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사도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를 알 수 있다는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기도해야 할 것을 찾는 데 신중하지 못하며, 이는 기독교에서 성령의 사역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사람들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는 모를 수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사전에 가르쳐 주는 만들어진 기도문들이 이런 결점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성령과 그의 도우심을 배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그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기도의 내용을 적어 넣으면 결과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정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그의 도우심을 거부하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의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할지 신뢰하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이다.
성경의 주기도문에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가 요약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것과 그 기도를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은 별개이다. 후자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있어서 결코 온전한 기도의 내용이 될 수 없다.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부터 말하는 것이다(마 12:34). 우리에게는 기도할 때, 세 가지 결점이 있는데,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약속을 따라 역사하시는 간구의 영이신 성령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부족함을 알지 못한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셋째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없이는 사람은 그 누구도 기도해야 할 바대로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은혜의 영의 도우심과 후원이 없이는 그것들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명백하다면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우리에게는 우리가 관련되어 있는 모든 일시적인 일들과 우리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외적인 곤란과 압력, 어려움들이 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스스로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놀랄 만큼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그것들에 대해 알고 있고 해결되기를 자연스럽게 바라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어떻게 언제 어떤 상태와 제약 아래서, 어떤 마음과 정신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에 대한 대부분의 기도를 ‘울부짖는다(howling)'고 하실 뿐, 마음으로 부르짖는다(crying)'고 하지는 않았다(호 7:14).
사실상 자연의 신에게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자연의 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살피는 복음적인 기도의 의무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들이 가장 잘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가장 잘 놓친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우리의 일상적인 부족함들을 기도의 내용으로 아는데는 우리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더 높은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림자처럼 보내는 이 헛된 삶의 여정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전 6:12).
종종 신자들조차도 일상적인 일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 올바른지 몰라 당황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존재를 파괴할 수 있는 고통과 좌절과 부족을 겪을 때, 그것에서 벗어나는 기도 제목으로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특별한 성령의 조명이 없어도 어느 정도 혹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기도하는 (그들의 기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든가, 혹은 최고의 목적이나 최상의 선을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한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2) 우리는 자연적인 양심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내적인 부족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연적인 빛과 평범한 율법의 외적인 글자를 통해 깨달아지는 죄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도 부분적으로 이것들을 깨달을 수 있으며(롬 2:14,15),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1)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는 지식은 매우 어둡고 혼란스러워, 결코 그것으로 우리의 부족을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로 아뢸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이나 다른 섭리적인 사건들을 통해 각성되고 자극받은 자연적인 양심으로 인하여 자기 영혼에 파고드는 직접적이며 혹독한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죄를 각성시키기 전까지, 이 모든 것들은 마음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 어느 누구도 이것을 하나님께 제대로 아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방인들은 그런 죄의식 아래서 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화목(propitiation)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추측한 신들에게로 나아간다. 그렇게 될 때 자연적인 양심에 의해 깨달아지는 죄에 대한 책임으로 말미암는 기도는 오직 ‘가증한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2) 우리 모두는 자연적인 양심의 빛과 결정으로 깨달아지는 이런 것들이 신자들의 삶에서 얼마나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3) 신자들이 간구할 때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죄에 대한 각성이다
다윗은 자신의 원죄와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시 51:1-5),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시 51:6,7),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발견하도록 자기의 마음의 중심을 살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신의 온 영혼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의 주된 내용은 우리의 영혼의 모든 기능들이 내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폭력과 사악함과 그와 관련된 수많은 일들을 깨닫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더해지면 우리의 기도의 온전한 내용이 된다. 이 내용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의 모든 신비를 높이며 그를 통해 받은 모든 열매들과 유익들을 인정하고, 우리의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과 매순간 때를 따라 은혜의 보좌 앞에 영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이 된다. 우리가 간구할 때 성령의 영적인 조명의 은혜가 없이도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할 만큼 무지하거나 불경건한 사람은 거의 없다.
2. 하나님의 약속들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도의 내용
그 약속들은 기도의 척도이며 기도의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밀한 것은 오직 우리 주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그의 뜻과 은혜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며 우리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들 안에 준비되어있고 제시되어 있는 선과 은혜와 친절과 자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할 기도 내용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들 곧 영적인 일들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 곧 그분의 약속들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친절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전 2:11,12, 고후 7:1).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도 우리 스스로 이것들을 받고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복음과 은혜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며(롬 10:14),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생각하는 것이다(히 9:1).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혀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모든 것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계속해서 기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하나님에 대해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기도해야 할 가난과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찾지 못하도록 하는 아주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이 자기 자신의 상태와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공되는 은혜로운 공급들과 부족한 부분들을 적절하게 채워 주시는 것과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고는 것을 이해할 때, 바로 그때에만 제대로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3. 기도의 내용과 관련해서, 기도할 때 고려해야 할 기도의 목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스스로 잘못된 목표를 세워서 기도의 모든 유익을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야고보 사도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목표대로 구하지 않는다면, 잘못 구하는 것이므로 응답 받을 수 없다. 아무리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결코 부합할 수 없다. 우리는 간구할 때에 하나님의 영의 실제적인 역사가 없이 우리의 본성적이고 불안한 추측에 의존함으로서 실패할 때가 수없이 많이 있다. 기도의 내용이 그 자체가 아무리 탁월하고 우리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설정한 잘못된 목표들에 의해 가치가 떨어지거나 부패되거나 헛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우리로 하여금 바른 목표를 설정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
2.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약속대로 성령의 은혜와 자비를 알게하심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간구할 때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지, 우리가 어떤 은혜에 참여하기를 바라는지를 알 수 없다. 가톨릭교도들처럼 그 의미도 알 수 없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는 것, 즉 간구할 때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구체적인 목표도 없이 말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특히 합리적인 피조물들에게는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을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 내용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이외의 다른 것이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약속에 따라 간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나, 혹은 약속에 들어 있는 은혜와 자비를 아는 것을 필수 불가결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과 유익한 것과 유용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장 잘 아신다. 우리는 성령이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이것들이 사도가 고린도전서 2장 9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준비하신 것을 언약의 약속을 통해 선포하셨는데, 이는 언약의 약속들이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 안에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약속 안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한 것보다 더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약속들로부터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약속들을 알 수 있는가? 보통 신자들은 이 약속들에 대해 완전히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혹은 비교적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 약속들이나 혹은 이 약속들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을 자주 읽어서 잘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렇게 기억된 약속들만으로 신자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도의 내용을 공급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속하지 않는다.
성령은 기도의 내용과 관련하여 신자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이해하도록 하시며, 생각을 밝히 깨닫게 하여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시며, 그들의 아름다움과 영광, 합당함과 매력을 알게 하신다. 그리고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중보의 열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들을 깨닫게 하신다. 또한 자비와 용서와 거룩의 탁월함, 새로운 마음의 원리들과 성품들과 경향들과 행동들,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들 안에 있는 진실하고 신실한 모든 것을 알게 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계속해서 이런 것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로 가득 차게 될 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미의 내용이 된다. 신자들은 성령의 실질적인 도우심을 받으므로 이렇게 될 수 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에 이런 지식과 더불어 사랑을 불어넣으실 뿐 아니라,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려 주시고, 그들에게 열정과 갈급함으로 이를 추구하도록 불러 일으키시는데,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대답:
1. 은혜와 간구의 영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약속을 주셨지만,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문을 만들도록 약속되지는 않았다.
2. 기도문의 내용이 신자들의 다양한 상황에 맞도록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과 기도해야 할 의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3.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도해야 할 내용을 객관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과,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기도의 내용을 알게 하고 이를 사랑하도록 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전자는 사람이 하는 일이고, 후자는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4. 기도의 내용을 하나님의 영이 깨닫게 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의미가 없는 것처럼, 기도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5. 신자들로 하여금 약속된 은혜와 자비를 깨닫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간구하도록 마음과 영혼을 유지시켜 주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이것은 기도에 영적인 아름다움과 질서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성령의 모든 지혜가 신자들이 필요한 것을 올바르게 구하며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사랑하고 찬미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기도문은 영적인 혼란과 무질서 이외에는 다른 어떤 유익도 있을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약속들에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명령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들을 고백하고 간구할 때, 이것들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된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더불어 율법은 영적이며 내적인 것이므로 성령의 은혜로 가르침을 받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을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의 참된 내용을 제공받게 된다.
왜냐하면 영혼은 율법이 가진 신앙과 거룩함과 우리의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 미치는 율법의 내적인 영향력과 어느 때나 어떤 일에나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올바르며 하나님과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만, 자신이 그 기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신자들에게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롱하고 책망할 죄에 대한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통로를 통해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간구할 바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이 얼마나 이 명령의 요구를 꺼려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알게 하신다. 이처럼 성령을 통해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매사에 마땅히 기도할 바를 겸손하게 구하게 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은혜와 자비를 느끼며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3. 성령은 신자들이 올바르고 적절한 목표를 가지고 어떤 것을 기도하거나 간구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
성령께서 그렇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기도의 내용으로 그 무엇도 우리에게 그 자체로서 탁월하거나 유익하거나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하는 기도는 그 자체로 무효가 되거나 부패될 것이며 아무 쓸모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본문을 통해 볼 때 명확하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중보하시기 때문이다(롬 8:27).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 의해서 그렇게 하거나, 혹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스스로 우리 밖에서 하나님을 향한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시며, 그가 중보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관련된 성령의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홀로 자신의 인격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해야 할 일을 하셨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도록 인도하시고 간구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은 성령의 뜻을 아신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곧 하나님은 간구할 때 간구하는 목적과 계획을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신다. 이처럼 기도할 때 올바른 목적과 계획을 갖도록 하여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 성령은 기도의 내용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도록 중보(intercession)하실 뿐 아니라, 기도의 목적과 관련하여 그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일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다음과 같은 일을 계획하도록 인도하신다.
첫째, 간구와 기도를 통해 얻는 모든 성공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도록 인도하신다. 신자들의 열망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다. 성령의 특별한 도움과 후원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할 뿐이다. 그런 기도는 부패되고 가증한 것이 된다.
둘째, 성령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간구로 그들이 더욱 거룩해짐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분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주신다. 이런 목적이 없는 곳에서는, 비록 기도의 내용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는 가증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비와 은혜와 약속대로 하나님의 가장 좋은 사랑의 열매를 간구할 수 있지만, 이런 목적들이 없다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이런 목적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가 스스로 세워 놓은 모든 목적들을 버리고,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욕망들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 6장 올바른 기도의 방법 (1)
성령은 신자들의 지성에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 곧 기도의 내용을 알게 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며, 그들의 의지와 감정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열망하도록 하신다. 바로 여기에 기도의 올바른 방법이 있다. 지성은 기도해야 하는 것을 인식하는 빛을 가지지만, 의지와 감정은 이런 일에 죽어 있으며 관여조차 할 수 없다. 때때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영혼에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재능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전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행위이다.
1. 성령께서 은혜와 간구의 영으로서 사역을 완성하려 하실 때, 기도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을 향해 순종하도록 역사하심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에는 특별히 강하게 짓누르는 마음에 중압감으로 탄식하는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과 기쁨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의 부담은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들의 의지와 감정을 움직여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자연적인 감정으로는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헬, 훼페렌튕카네이)”(롬 8:26)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쉬낱니람베네타이’를 사용하였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 우리가 일할 때 도와주시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중보자로서 스스로 간구할 수 없는 자를 대신해서 간구한다는 의미를 가진 ‘휘페렌튕카네이’를 사용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도록 하신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가 ‘탄식한다’고, 곧 겸손히, 슬프게, 간절히 열망한다고 말하고 있다(롬 8:23). 그리고 그는 또한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셔서 우리로 간절하고 애타게 우리의 기도해야 할 것을 구하도록 하신다.
2. 성령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에 세밀하게 관여하심
성령은 참으로 우리의 온 영혼에 역사하셔서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영적인 것들의 진실과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지성으로 이해한 것을 선택하고 사랑하게 하신다. 또한 우리의 감정으로 하여금 지성이 알고 의지가 받아들인 것을 즐거워하고 열망하도록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효력으로 실질적으로 기도하게 하시며, 말할 수 없는 즐거움 가운데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것들이 완전히 성취되기를 원하는 간절하면서도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열망을 갖도록 하신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말로 겸손히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되어 효력을 발생하도록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현재 누리는 영광스러운 상태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사도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라고 말하며,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복된 사역에 대해 로마서 8장 16절과 17절에서도 말하고 있다. 그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롬 8:23) 스스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받을 때에,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바로 그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헬라어 “엔튕카네이”를 사용하는 반면에, 본문의 성령에 관해서는 “휘페렌튕카네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것에 어떤 것을 더해 주심을 내포한다. 주님께서 더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은 자신 안에서 언제나 완벽하게 활동하는 은혜를 더욱더 고양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영혼의 기능들을 더욱더 힘 있게 사용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특별한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성령의 동일한 도우심과 동일한 은혜의 역사를 사모해야 한다.
3. 성령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기뻐하도록 하심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데 필요한 믿음, 사랑, 존경, 두려움, 신뢰, 복종, 기대, 희망 등과 같은 은혜를 불러 일으키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쁨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지도 않을 뿐 더러, 메마르고, 짐스러운 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도는 기도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기도의 내용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거룩한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자녀가 부모님들에 대해 갖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다.
우리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즐거움에는 어떤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가?
1)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데는 육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볼 수’ 있는데(히 11:27), 이는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 곧 어떤 대상을 믿는 자들로 분명히 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있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그를 즐거워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구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은 바로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 이시다(히 4:16).
더 나아가 이런 은혜의 보좌는 그것이 세워져 있는 장소로 인하여 더 큰 의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가장 거룩한 곳, 곧 지성소이다.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인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힘입어 담대하게 그분이 계신 성소로 나아가는 것이다(히 10:19). 그러므로 보좌 위에 앉아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간구하는 죄인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그분의 보좌는 다르게 표현이 된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볼 때, 어리석게 그것을 피하려는 생각과 더불어 그들 안에 두려움과 공포만 자아낼 뿐이다(사 33:14, 미 6:6-7, 계 6:16,17).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에 대한 정당하게 고려하지도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의 이름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할 뿐, 아무리 하나님께 나아갈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신 분,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시기 위해 높아지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사 30:18). 이것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으며, 기쁨으로 그분을 부를 수 없고, 자녀로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도 없다. 우리가 은혜의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주어진 계시로부터 온다. 골로새서 2장 1절과 2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 안에 분노가 없으시다는 것과 우리가 화평하기 위해 자기 팔을 잡으면 화평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2)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간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친히 주신 다른 이름이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라 불리워 지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며, 전능하신 주님은 자신이 우리 아버지이며,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심어 주신다(고후 6:18).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모든 복음적인 예배와 모든 우리 기도의 궁극적 대상이시다. 이것은 바울 사도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한 성령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의미로 에베소서 2장 18절에 잘 표현되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드러내시며, 우리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며 만족스러운 일이겠는가?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기도할 수 없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 아버지인 하나님을 느끼며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도할 때 아버지라는 개념 아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그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만큼 본질적인 것은 없다. 이것이 없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거룩한 즐거움을 가질 수 없으며, 그 거룩한 즐거움이 없다면 삶에서 우리가 하는 기도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어떤 영적인 즐거움이나 만족감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3) 우리에게는 거룩한 곳, 곧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참 마음과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은 서로 반대 되는 것이며, 전자는 후자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거하는 곳에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없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함은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데 있다.
(1)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담대함(헬, 파레시아)’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상태나 조건, 원인에 따라 각각 확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속박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있는 곳에서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를 알지 못하며,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 위압감을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주어진 기도문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와 담대함의 영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마음은 우리 아버지께 자녀로서 참되고 진실하게 기꺼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뢴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 언제나 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는 유혹과 영적인 침체와 죄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를 게을리 함으로 인해 다양하게 방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의 영을 받은 모든 신자들은 뿌리와 원리로서, 이러한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필요할 때 그것을 사용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마음에 갈등을 느끼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사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고 담대하게 우리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일을 숨기지 말고 아뢰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라고 하셨다. 이것은 항상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2)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우리가 간구하는 것들을 기쁘게 받아주신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 기쁨을 가질 수 없으며, 그것은 결국 우리의 기도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자신을 숨기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기쁨도, 자유도, 참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할 때 성령을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런 확신과 담대함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드리는 기도에 모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와 자신들을 기뻐하신다는 거룩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자기 교회에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든지 신자들을 받아 주시고 그들의 요구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들어 있다.
죄인들은 본성상,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거나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고 근거 없는 생각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이런 저런 것들을 하실 수 있을까? 그런 일이 과연 하나님께 가능할까? 라고 말하면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한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 한,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성령은 우리로 언약의 약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깨닫게 하며 우리로 담대하게 그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신다.
4. 성령은 기도할 때 신자들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받으시는 유일한 방법이요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하심
이것은 복음 시대에 기도의 근본적인 방향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구별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을 통해 가장 거룩한 곳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믿음과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와 관계에 대해 특별히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이요 우리를 받아 주시는 수단이요, 원인되심을 알게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야 할 부분이다. 실제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믿음으로 바라보지 않는 모든 기도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성령은 신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방법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라고 명확히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고,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로 말미암은 칭의(justification)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롬 5:2).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간구할 때 은혜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 실제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으로 하여금 영적으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로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성령의 역할이 바로 ‘아들의 영’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역할이다.
제 7장 기도의 형식과 소리 내어 하는 기도와 관련된 기도의 본질
에베소서 6장 8절에 대한 주석과 방어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구하고”(엡 6:18). 이는 환경이 허락될 때마다 우리가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감당해야 할 지속적인 의무이다.
1.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맡겨야 할 기도의 형식과 내용
본문은 모든 신자들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곧 우리의 형편과 필요가 요구에 따라, 모든 방법으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분명 우리의 기도는 고정된 틀로 국한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의 다양성은 우리와 교회의 다양한 형편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기도문을 읽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곧 은혜와 간구의 영인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올바르게 기도하고자 애쓰고 노력하며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 이미 그것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상황이나 부르심, 혹은 상태에 따라 자신들의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은사(the gift of prayer)’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성도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사 59:11), ‘두루미처럼 소리 내어 울 수밖에 없는’(렘 8:7) 시험들과 버림받음을 경험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분명하고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상한 마음으로 슬피 울며 신음할 수밖에 없는 때를 경험하지만,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의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의미를 알지 못하는 형식적인 기도문만을 외우는 사람들은 참된 기도의 본질에 대해, 적어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 무지하다. 이렇게 자신이 처한 삶의 다양한 정황에 따라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간구들은 그 기도 안에 조화롭지 못한 소음에 불과하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령으로 하는 기도
1)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우리가 자연 상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자연의 신에게 의존하고 능력을 힘입기 위해 기도하거나 그런 자연적인 힘 아래서 도덕적인 가책을 느끼며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죽음 아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가는 기도’를 말한다.
2)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인 필요를 하나님께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기로 계획하셨으며, 그들이 기도할 때 복을 주신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휘하여 기도할 수 있는 정도까지 성장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죄를 범하는 것이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다.
3) 참된 신자들에게 있어서 형식화된 기도문은 받아들여질 만한 복음적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 목적을 위해 제공되는 성령의 도움을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리적인 가르침을 넘어, 신자들에게 형식화된 기도문을 강요하는 것은 성령으로 하는 기도를 경험해 보지 못한 데서 나오는 무지의 결과이다.
* 양자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두 종류이다.
(1) 첫째 공개적으로 죄의 세력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위험이나 두려움이나 시련이나 고통에 처해 있거나 다른 질병들에 걸리지 않으면 좀처럼 기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의 계획은 자신들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형식화된 기도문을 가지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느낌이나 생각,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황에 맞지 않는 기도문을 읽고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기도문을 부적(Charm)과 같으며, 그들의 생각은 그런 기도문으로 인해 혼란해져서, 심지어 자연의 빛이 인도하는 대로도 기도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깨우지 못하며, 그런 기도는 단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외식에 자신을 맡기는 것일 뿐이다.
(2) 둘째 가르침과 말씀의 능력이나 혹은 다른 수단에 의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느끼고 기도해야겠다고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의 게으름이나 사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마음과 양심에 계속해서 기도하도록 자극받지 못해서, 실제로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조명과 은혜를 통해 신실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이 함께 기도하든 간에 구해야 할 바를 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형식적인 기도문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할 수 있으며,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진보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그것을 자신들이 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라면, 정형화된 기도문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기도, 곧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능력과 공적인 기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1. 자신의 형편에 따라 기도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1) 모든 사람은 자신이 처한 조건과 관계와 정황과 의무에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부르짖을 수 있다
인위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만든 기도의 형식은 제멋대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 어느 때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자신의 정황이나 마음의 상태에 맞지 않는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게으른지를 깨달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무지나 편견이나 미신에 사로잡혀 기도할 때, 성경이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ave, ’인사하다‘. ’숭배하다‘)' 혹은 ’끄레도(credo ‘내가 믿는다’)'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말한 것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얻고자 하거나 이런 저런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며 거룩한 의무를 모독하는 것이다. 위선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삶에서 위선을 범한다. 그리고 기도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다른 의무를 감당하는 데에서도 게으르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순종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롬 12:1).
2) 신.구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든 기도들은 성령을 통해 자신들 안에 일어난 은혜로운 개념들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한 결과였다.
그들의 기도는 외적인 도움이나 지원을 받거나 사전에 그들에게 주어진 형식화된 기도문의 도움을 받아 한 것이 아니었다.
3) 우리에게 자신의 능력에 따라 기도하라는 명령들은 우리가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명령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라’, ‘영과 이해로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아뢰라라' '우리의 현재의 염려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아뢰리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아라', '성령으로 아바, 아버지께 부르짖으라'고 명령을 받고 있다.
4) ‘사람들 각자의 능력’이란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향상시킬 수 있도록 정하신 모든 수단을 양심적으로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1)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와 소욕과 행동을 부지런히 살펴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면서도 완벽하게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피사 자신의 마음을 아시고 자신을 시험하여 자신의 뜻을 알아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신을 알고 있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은혜로 인도해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시 139:23,24). 우리가 받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진실하게 살피는 사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수많은 상황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이런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기도가 황폐해 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에 간구함으로 올바르고 유용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상태와 성향과 다양하게 다가오는 은밀한 죄에 대하여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2)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 것 또한 능력을 크게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통해 우리의 부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러한 명령들과 약속들이 바로 우리들의 기도의 내용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떤 말과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기도할 때 어떤 말과 표현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지시해주신 성경의 내용과 위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어떻게 아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 필수적인 수단이다.
5)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의 내용을 조직하고 기억하고 표현하는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고 예배하라고 주신 능력을 왜 사용하지 않는가? 기도의 영적인 은사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은혜로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도의 은사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능과 능력을 사용할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더 살아나게 된다. 기도의 은사를 가진 모든 사람이 기도의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똑같이 기도하지는 않는다. 때로 더 능력 있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며, 그 성격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부분적으로 그들 사이에 기도의 내용을 조직하고 판단하고 기억하고 표현하는 능력에 따라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기도에 있어서 이런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에 의존하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서 이런 능력은 분명하나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가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하는 기도는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다.
2. 영적인 은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음
1) 다른 은사나 은혜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행해지는 은사가 있다. 기적이나 치유나 방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2) 다른 은사나 은혜가 없으면 받거나 사용할 수 없는 은사가 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말로 표현하는 은사’는 지혜나 지식에 의존한다. 그러나 지혜나 지식이 없이 말로 표현하거나 이런 표현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 뿐 아니라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기도의 은사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의 저자가 아니라,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시는 총체적인 저자이시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이 받은 은혜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적절한 말로 우리 마음의 열망들을 기도로 표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기도를 부탁받았을 때, 우리의 필요와 형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말을 사용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도 우리는 성령을 의지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중 앞에서 기도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가 요구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역사함으로 기도하게 하실 때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곧 그가 표현하게끔 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 표현하지 않도록 하실 때, 그것은 그분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답답하기만 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그때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침묵으로 괴로워하던 다윗과 비슷한 상황이다. 다윗은 성령의 도우심 후에야 비로소 기도하고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 ‘기도의 은혜’(the grace of prayer)'와 ‘기도의 은사(the gift of prayer)'를 구분하지 않으면 건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첫째 주장은 '기도의 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기도의 은사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며, 둘째 주장은 '기도의 은사를 가지고 있거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말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기도의 은혜나 혹은 기도를 통해 구원받는 은혜를 가져올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진리와 우리의 경험에 위배되는 것이다.
* 대답:
1) 첫 번째 주장은 사실이지만, 제한을 가지고 있다.
(1) 첫째로, 우리는 기도의 은혜를 습관이나 원리로 이해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습관이나 원리의 측면에서 기도의 은혜는 거룩해진 모든 사람, 심지어 모태에서부터 거룩한 어린아이들에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실질적으로 기도할 때, 역사하는 기도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이 은혜롭게 역사하셔서, 하나님을 향해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열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소리를 내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2) 둘째로, 그런 사람일지라도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영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지속적이고 빈번하게 자신이 받은 능력을 사용해서 이 은사를 더욱 불러 일으켜야 한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 의무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설령 ‘기도의 은혜’가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서원을 기도를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은사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형식적인 기도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3) 셋째로,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운 도우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이나 조건, 의무나, 부르심 등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정리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기도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 되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모든 성도들은 기도의 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도움을 향상시키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그것들이 채워지기를 갈망하고 죄의 용서를 위해 자비를 구하거나 자신의 인격의 성화를 위해 은혜를 공급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아뢰고 기도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받아들이실 방법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둘째 주장은,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기도의 영의 은혜로운 도우심과 분리될 수 없다면, 이 은사와 능력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기만 하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가?
이런 결론에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1) 첫째로, 그런 결론은 결코 나올 수 없다. 즉. 은혜가 있는 곳에는 은사가 있을 수 있지만, 은사가 있는 곳에 반드시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은 잘못된 것이다. 은사는 은혜를 위해 있지만,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은혜는 은사 없이 행해질 수 있지만, 은사는 은혜 없이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2) 둘째로, 이 은사가 다른 토양에서 자라지만,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 은사는 분리될 수 없는 간구의 영으로서 성령의 사역 중 구분된 하나의 사역이다. 은혜와 간구의 영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을 때, 일반적으로 조명하심을 통해 말로써 기도하는 은사가 흘러나오도록 한다. 그러나 영적인 조명이 없이 기도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는 기도의 은사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우리는 이런 광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3. 기도의 의무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음
성경에서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 ‘우리의 입술을 논쟁으로 채우는 것’,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 ‘그로 우리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한나처럼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이 들리지 않는 기도를 할 수 있지만(삼상 1:13), 명상으로 하는 기도조차도 지성으로 이루어진 기도의 내용들이 감정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므로, 표현되지 않고 머리로만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나가 마음으로 기도할 때,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고뇌하는 것들이 음성으로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삼상 1:16). 한나는 자신이 간구하고자 하는 바를 조용히 표현하고 있었다.
1)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이다.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장 5절, 고린도후서 8장 7절, 에베소서 6장 19절, 골로새서 4장 3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은사와 관련해서 두 가지의 의무가 있다.
(1) 첫째, 말씀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능력이다.
(2) 둘째, 우리를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말하는 능력이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은사이다. 에베소서 6장 19절은 “나의 입을 벌려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권면한다. 이것은 기도하고 설교하는 거룩한 일에 사용되는 성령의 은사이다. 우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이런 은사가 우리나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한다. 교회의 모든 유익은 이 은사에 의존하고 있다. 교회의 기초는 바로 이 은사를 통해 세워지는데, 이는 그것이 특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행 2:4). 또한 교회를 유지하게 하는 것도 이 은사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과 교회가 공적으로 엄숙하게 교제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어떤 역사나 은사 또한 이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은 바로 말을 통해 설교나 기도로 표현되어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때때로 다른 때보다 기도하고자 하는 것을 간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생기를 불어넣기도 하시고, 움직이도록 하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습관적인 은혜로 그들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은혜를 불러일으켜서 실질적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소원을 바로 표현하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의무를 감당하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빌립보서에는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상황에 맞게 기도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다. 우리가 받은 직분이나 소명에 합당한 일을 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대화를 하는 것과 같은 온갖 종류의 의무를 감당하는 데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소리를 내어 기도함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목사들은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 소리를 내어 간구하고 기도하고 중보하고 감사하는 일을 해야 한다(딤전 2:1).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했다’는 것은 목회자의 직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정형적인 예이다(행 6:4). 목사가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선한 은사들’ 중의 하나이다(약 1:17). 목사들은 이런 은사들을 통해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설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받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은사인 것이다. 기도하고 설교할 때 이런 영적인 능력이 목회에 반드시 있어야만 할 이유는 그 어떤 사역도 말씀과 기도가 없이는 제대로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이나 가족, 또 모임 속에서 이 은사를 사용해서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큰 유익이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생동감 있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지 알아보자. 이것을 알기 위해 두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은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제들이 있다.
1.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들
1) 우리는 교회가 받은 은혜와 간구의 영의 특권에 대해 계속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주된 수단이다. 은혜와 진리의 영을 받을 수 없는 세상은 하나님께 제대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여러 가지 거짓된 것들로 가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영에 사로잡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지어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들이 찌르고 때린’ 분을 영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1) 첫째,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이 예언의 영으로 자유롭게 기도한 내용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에게 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시 79:6, 렘 10:25).
(2) 둘째, 믿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와 간구의 영으로 간구하는 것은 구원받을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요, 열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원의 약속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들 드리거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가 이를 통해 얻는 이익은 매우 크다. 이것이 교회가 재충전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2) 복음 아래서 이 특권이 더 확대된 것에 대해 특별히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성령은 위로부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우리 심령 가운데 부어졌다. 지금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구약 시대에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보다 그 은혜의 범위가 더 크다. 이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으며,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다. 구약 시대보다 신약 시대에 더 큰 성령의 역사가 부어졌다. 육체와 육신의 규례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기도문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더 큰 은혜의 간구의 영을 가지고 있는 신약 시대를 사는 신자들이 형식적인 기도문이 필요하며, 그것을 필요로 해야 하는가? 결코 아니다. 율법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과거에 성령의 이슬은 오직 이스라엘 땅과 아브라함의 육체를 따라 난 후손들에게 내려졌지만, 이제 성령의 소나기는 모든 민족,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하며 그 이름을 외치는 모든’ 민족들에게 부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부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시온 산에서 온 세상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유효적(effectual)인 사역을 통해 그분이 높여지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라는 위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은 ‘자신을 영원한 성령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가정에도 적용되며 우리의 모임에도 적용된다. 각자의 가족은 성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섬길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없는 가정은 형식이 있다고 해도, 줄곧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온 세상에 있는 신자들에게 동일하게 일하신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한 성령으로 아버지께 나아간다’(엡 2:18).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은혜의 확장을 통해 우리에게 정당한 영광을 받기를 기대하신다.
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으므로, 우리의 영혼에 큰 유익을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 사람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은사를 무시하는 죄를 짓게 된다
(1) 첫째, 그들이 이 은사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찾거나 획득하려고 하지 않을 때이다. 그 결과 이 은사는 완전히 무시되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값진 유익조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2) 둘째,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은사를 무시로, 부지런히, 계속해서, 사용하지 않을 때, 이 은사가 주는 목적과 그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늘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왜 개인적으로나 가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나 필요를 느낄 때마다 기도하지 않는가?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경험하며, 모든 죄를 이기며, 모든 선한 것을 획득하며, 매사에 순종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기도하려고 할 때 많은 어려움과 좌절들을 경험하게 된다. 올바른 기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며,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이것을 가로막고, 우리를 산만하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축복은 바로 이 기도에 달려 있다. 이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자유롭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우리가 자녀로서 기쁘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와 간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주시는 은사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죄가 되는가! 이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우리 영혼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간구의 영을 주셨는데,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경계를 받았던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로운 도우심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 어찌 책임을 지겠는가?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도 이를 무시하고 내적으로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큰 죄를 짓는 것인가? 자신이 배운 대로 영적인 관심은 없이 오직 양심의 평화를 얻기 위해 기도하려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도대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도우심을 무시하며 기도하겠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당신은 계속 영혼에 손해를 당하면서 감사를 잃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죄를 저지르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유혹들과 위험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의 간구의 영의 도우심을 힘입는 이런 기도를 요구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