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님을 만난 사람
이제,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물론 세 번째 부류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또한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 되어 첫 번째 부류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생각들로 가득 찬 유다인들은 기적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지만 구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있는 꼴입니다. 미사에 참석하지만 이중적인 삶의 태도로 언제나 괴로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순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 세례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다의 수석 사제들이나 바라사이들처럼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예수님을 이리저리 저울질하고 잇는 사람들은 지금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4) 대사제 카야파의 예언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11,49-50)
그해 대사제인 카야파는 예상 밖의 예언을 합니다. 그 내용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리한 것이지만, 예수님에겐 유리한 것입니다.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11,51-52)
이 구절을 조심해서 주의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것을 미리 말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 구절은 예언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를 통해서도 예언이 일어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의 아내도 밤에 꿈을 꾸고 그 내용을 남편에게 전달했습니다. 불신자나 안티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예언이 역설적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사탄의 역사와 유다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온 인류가 구원을 받는 하느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오묘하고 신비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돌발적 예언이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데 결정적인 동기 부여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11,53)
모든 사건들의 이면에는 음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말로 우연하게 이루어진 사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건들은 우연을 가장한 치밀한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기막힌 음모일수록 더욱 우연을 가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조직적인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하고 고심했습니다. 심지어 대중을 선동하고 당시 총독이던 빌라도에게 협박까지 했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