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는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은 이 세상 음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삶의 맛입니다. 그 맛은 어둠의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력을 줍니다.
나의 하나님
15절에 나오미는 룻에게 말합니다. 룻이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내자 “보라, 네 동서는(오르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생각해주는 마음입니다. 룻은 오르바처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아무도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뭐라고 답변을 합니까? 16절에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고 말합니다. 즉 함께 가고 함께 머무는 것은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강권이 아니고, 억지도 아닙니다. 자발적입니다. 그것에 헤세드 사랑의 모습입니다. 헤세드는 어떤 의무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으로 가 보면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16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의 되시리니”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 백성이 “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룻이 “이스라엘 백성”의 독특한 역사적인 의미를 어느 정도 알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누구한테서 배웠겠습니까? 나오미의 집에 시집 와서 배운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아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거기에 가담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자신의 인생을 가담시키는 길은 지금 나오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룻의 얘기는 신명기 23장 3절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룻이 나오미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이주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총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3장 3절의 말씀은 완전히 닫아 놓은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하나님이 어머니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합니다. 그 앞에 15절에 동서는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룻은 모압의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도적으로 포기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앙적 결단입니다. 18절에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고 했습니다. 룻은 돌아가지 않고 나오미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의 결심은 단지 돌아가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나오미와 함께 하는 것만이 아니고 문맥의 흐름을 따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위대한 결심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집에 시집 와서 신앙적인 감화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시어머니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배우고 하나님을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나오미의 집은 완전히 몰락했고 밑바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볼 때는 모압의 그 어느 집안보다 귀중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속한 집안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곤궁에 처한 나오미이지만 끝까지 자발적으로 함께 하기를 결심하고 따릅니다.
죽음까지
17절에 나오미는 심지어 죽음까지 언급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은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이 쓰고 있는 말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모압 신을 섬기는 언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모압 신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백성이 된 것처럼 말합니다.
룻은 어머니가 가시는 곳, 머무시는 곳, 죽으시는 곳에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자발적인 충성입니다. 죽음과 무덤에 이르는 충성입니다. 죽음 이외에는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의 권유에 따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갑니다. 나오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들었어도 끝까지 모든 것을 내놓고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따르는 것이 단지 나오미를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알고 나오미와 함께 합니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과 같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에(수 2장 10-11절) 모든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에 가담합니다.
여호수아 2장 10-11절을 봅시다. 먼저 9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합니다. 이 지식, 앎은 확신의 지식이고 자신의 모든 삶을 거는 지식입니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땅의 백성들의 상황도 얘기해줍니다. 간담이 녹았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10-11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40년 전 일임)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무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민 21장 21-24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할 때 통과하기를 요청했으나 거부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시혼은 이 전쟁에서 죽임 당함) 옥에게(바산 왕인데, 그 역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다가 죽임 당함. 그가 가지고 있었던 성읍은 60개였다. 신 3장 4절))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시편 135편 10-1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는 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하신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임)”
그러면서 “선대해 달라.”고 청합니다.(12절) ‘선대’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뜻입니다.(하세드 했으니까 헤세드 해달라고 함. 친절함)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사람들을 다 멸절시키라고 했는데 그 가운데서 건짐을 받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비록 나오미는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고, 그녀의 삶이 다 무너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보호 받을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21절에 “텅 비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삶을 잘 표현해줍니다. 베들레헴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어떤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곳은 낯선 땅이고,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고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소중했고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이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에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결단을 합니다. 죽음까지도 거기에서 의미를 둡니다.
우리 시대를 보십시오.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목표, 내 계획, 내가 살고 싶은 삶,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 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온갖 고난을 겪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약적인 충성을 하십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계 3장 14절)이십니다. 그 충성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시대를 이기는 삶으로 이끕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라고, 내 인생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것이라고 신앙 고백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