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공의로 균형잡힌 삶.
1. 이스라엘의 시민법은 정의와 긍휼의 균형을 말합니다(1~9). 먼저 재판에 관련된 규정들이 나오는데(1~3, 6~8) 거짓된 풍설을 유포하지 말고, 악인과 연합하여 악한 의도로 거짓 증거하지 말 것, 다수에 동조하여 악행하지 말며 거짓 증거하지 말 것, 가난한 자를 동정하거나 그에 동조하여 정의를 타협하지 말 것(3,6), 거짓을 멀리하고 무죄한 자,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 것, 뇌물을 받지 말 것,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2. 자비의 규정도 있는데(4~5),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면 돌려보내고, 원수(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린 것을 보면(도와 줄 상황)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반드시 정의롭고 공의롭게 원칙과 기준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반드시 긍휼과 자비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비도 가려야 하지만, 긍휼도 베풀어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면서도, 시비를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구별하시는 중에도,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3. 이어서 안식일, 안식년의 규정이 언급됩니다(10~13). 육 년 동안 땅에서 일해 소산을 거두고, 제 칠 년에는 땅을 쉬게 하고 자연히 나는 것은 가난한 자와 들짐승이 먹게 하되, 포도원, 감람원을 다 그렇게 하라는 안식년의 규정입니다(10~11). 다만 안식년 규정은 땅을 쉬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농사를 위한 방법만이 아니라, 안식년에는 기경을 하지 않고, 그곳에서 나는 열매는 가난한 자들이 먹도록 두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육 일 동안 일하고 제 칠 일은 쉬라는 것인데, 소, 나귀,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미물까지도 생각하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드러나 있습니다(12).
4.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에 대한 규정도 있습니다(14~19).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은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고 지키되, 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고, 예물을 가지고 오라는 적극적 명령이 들어있습니다(15). 맥추절(the Feast of Harvest)에는 수확의 첫 열매를 거둔 것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명합니다(16a). 수장절(혹은 초막절, the Feast of Ingathering)은 연말에 수확을 저장하는 것을 기념하여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16b).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는 이렇게 삼대 절기에 매년 세 번 성소에 나와야 합니다.
5.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위엄있는 명령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인도와 보호를 약속하십니다(20~31).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길을 인도하실 텐데, 20~22절의 여러 가지 설명과 표현으로 보아 하나님의 사자는 성육신하기 전의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 섬기고 그곳 사람들을 본받지 말고 그 신상들을 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먹고 마시는 것을 주시고 병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6.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실 것에 대한 약속(27~31)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벌을 앞서 보내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 주실 것입니다(28). 왕벌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 왕벌이거나, 재앙이거나 어떤 다른 수단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엄을 백성들 앞에 보내서 미리 쫓아내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27). 이것은 아마 여리고 성의 라합의 증언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을 말함일 수 있습니다. 쫓아내시는 방법도 단번에 쫓아내지 않고 점진적으로 쫓아내서, 들짐승이 우글거려 어려움이 되지 않게 하겠다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배려를 보여주십니다(29~30). 이후 가나안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될 때, 이스라엘은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아야 합니다(32).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본받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33).
7. 우리는 본문에서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봅니다(22:21~27; 23:9, 12). 그러나 또 한 편 가난한 사람이라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엄격하게 공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드러나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함께 보듯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함께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와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니, 주님을 의지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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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에 관한 법
십계명을 내려주신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0장 이후 계속해서 백성이 지켜야 하는 규례를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례 중에서 특별히 공평에 관한 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3절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과 술수가 판을 치는 삶이 아니라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명하셨습니다. 1절의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명예와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기 위하여 유포되는 아무런 근거 없고 진실성이 결여된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요하게 악한 소문을 전파하여 그릇된 여론을 형성해 가는 일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물리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신체나 생명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영혼과 심령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또한 인격과 지위와 재산상의 큰 피해를 안긴다는 점에서 사악한 폭력과 살인 행위와 같은 중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고 진실과 다른 거짓된 내용을 전파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철에 자주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상대방을 해롭게 하고 큰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거듭하여 거짓 증거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가지 않으면 세속적인 가치관에 이끌려 죄악의 물결에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이 유혹 앞에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도모하는 군중 심리에 휘말리지 않을 방법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때만 다수의 여론에 의지하지 않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으며, 오직 진실에 의한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의 어려움일지라도 일방적으로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로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약한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기에 정의와 진실에 입각한 공정한 판결은 중요합니다.
4절~5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원수라 할지라도 그와 문제가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경우 그가 당한 어려움에 대해 친절하게 도와주며 원수에게도 섬길 기회가 주어지면 상대방의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원수의 길잃은 가축을 보거든 반드시 그 원수에게로 인도해 넘겨주어야 합니다. 원수의 나귀가 짐을 싣고 가다가 짐의 하중으로 인해 힘에 겨워 나귀가 엎드러져 있는 것을 보거든 그냥 버려두지 말고 원수를 도와 함께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원수와 화해하고 서로의 악한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기회를 삼도록 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절 중에서)
6절~9절입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재판관은 뇌물을 받지 말고 공정히 판결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하여 부당하게 판결하지 말아야 하며, 거짓 일을 멀리하고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판결을 굽게 하는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하며,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던 것을 기억하며 이방 나그네에게 일방적으로 부당한 판결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재판관들이 지나친 동정심이나 자기 감상에 치우쳐 가난한 사람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재판해서도 안된다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한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의 공의의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정신입니다.
근묵자흑,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는 말처럼 악한 일을 가까이하면서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7절의 ‘거짓을 멀리하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악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편견과 사사로운 욕심을 배제하고 정의와 진실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악인은 세상의 윤리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을 말한다기보다는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분리된 사람의 말과 행동은 불의하고 불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등지고 지속적으로 악행을 일삼으며 불의에 전념하는 사람을 의롭다 하지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건강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뇌물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수한 의미의 선물이 아닌 불의한 의미인 뇌물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뇌물은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고, 명철을 망하게 하며, 결국에는 그를 죽게 합니다. 뇌물은 강력한 중독성이 있어서 그 맛을 보면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계속 뇌물의 노예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재판을 굽게하며 그릇된 길로 빠져들게 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본문은 뇌물의 유혹은 처음부터 아예 멀리해야 하며,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말까지도 굽게 하기 때문입니다. 뇌물로 인해 양심의 눈이 어두워지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례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이지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종교적으로나 법적으로 또는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거나 소외당하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금지의 뜻을 지닌 ‘로’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며 이방인에게 불이익을 가하거나 그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며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 이방 나그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서러운 일인지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말하며, 대중이라는 이름 아래 무심코 행하는 악을 경계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른말을 하며,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뇌물로 인해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살라고 명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가 동일하게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뉴스를 통해 범죄와 범법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접할 때마다 참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도를 접할 때마다 내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세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그리고 매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절기에 관한 법이 언급됩니다. 이러한 법들은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쉼과 안식을 주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주어졌습니다.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10-13절)
(10-11)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하나님은 여섯 해 동안은 땅에 씨를 뿌리고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일곱째 되는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먹게 하고, 거기에서 남는 것들은 들짐승들이 먹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엿새 동안만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어서 자신에게 속한 소와 나귀뿐만 아니라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도 숨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나오는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하신 사건에 근거하여 제시되었다면, 23장의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규정은 사회적인 약자와 들짐승의 생존 그리고 가축들과 나그네의 돌봄에 근거하여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신학적인 이유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의 안식일(안식년)규정은 사회학적인 이유가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7년째 되는 해에 저절로 자라나는 농작물은 가난한 자들, 즉 농작지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들이 먹도록 하고, 그들이 먹고 남긴 것들은 들짐승들, 즉 가축이 아닌 들판의 짐승들이 먹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포도원과 감람원도 일곱째 해에는 가지를 치지도 않고 보호하지도 않으며 수확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그 열매들은 가난한 자들과 야생동물의 먹을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자신도 안식하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가축들도 쉬게 하고,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도 모두 쉼을 누리도록 해야만 합니다.
(12)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12절에서 ‘쉬라’, ‘쉴 것이다’, ‘숨을 돌리다’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쉬라(샤바트)’는 ‘하던 일을 중지하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쉴 것이다(누학)’는 ‘육체적으로 쉬다’라는 뜻을 그리고 ‘숨을 돌리다(나파쉬)’는 ‘정신적으로 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일곱째 날은 본인이 평소에 하던 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안식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속한 가축들도 육체적으로 쉬게 하고, 자신에게 예속된 사람들도 쉬게 하여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의무적으로 배려해야 하는 날입니다.
요즘은 전 세계적으로 주4일 근무제를 시행하는 회사도 많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주7일 동안 쉬지 않고 공부하거나 일하시는 분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르는 가축들까지도 일주일에 하루는 무조건 쉬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며 일주일에 하루 만큼은 온전히 쉼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가며 숨을 돌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13)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로 시작되는 13절은 바로 앞의 10-12절 말씀을 충실히 지킬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고 말씀 하시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을 평가할 수 있는 배경과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 말씀은 출애굽기 21장부터 기록된 인간관계에 관한 규정을 마감하고, 14-19절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준비하는 경첩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 주는 고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매년 지켜야 할 세 가지 절기의 규례(14-19절)
(14-15)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14-19절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차례 성소에 가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세 가지 절기에 대해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절기는 무교절,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입니다. 먼저 ‘무교절’은 보리가 막 나기 시작할 무렵인 봄에 드리는 ‘보리수확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칠 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고 처음 수확한 보리로 만든 빵을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곡식 원래 상태의 맛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축제를 통해 햇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저절로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의 고백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16-17)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두 번째 절기인 ‘맥추절’은 히브리어로 수확의 절기를 뜻하며, 무교절 절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교절 후에 익은 보리나 밀 같은 밭곡식의 수확에 대해 감사드리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맥추절은 첫 곡식을 거두고 나서 7주 후에 오는 절기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리고 ‘수장절’은 ‘초막절’이라고도 불리며, 히브리어로 한 해 끝에 거두어들인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잔치라는 뜻입니다. ‘한 해의 끝’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가을을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였기에 나온 표현입니다. 이 절기는 주로 포도와 올리브를 추수하며 감사하는 ‘과일수확 축제’입니다. 맥추절이 밭곡식의 추수를 지키는 절기라면, 수장절은 밭 과일의 추수를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세 가지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최초의 수확인 보리를 수확하는 일은 무교절과 이후 칠 주 후에 다른 곡물을 수확하는 일은 맥추절과 그리고 가을에 모든 농작물을 마지막으로 거두어들이는 일은 수장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연중 3대 절기는 원래 추수와 관련된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기들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행하신 바들을 기억하는 사건들과 연결되었습니다. 보리걷이를 시작할 때 출애굽을 기억하면서 무교절과 더불어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칠 주 뒤에 밀걷이를 마무리할 때 율법 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칠칠절(오순절)을 지켰으며, 가을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호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과일 포도 수확의 명절인 수장절(초막절)을 지켰습니다.
(18-19) 너는 네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제물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지니라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18-19절은 희생 제사 때에 유의할 규정을 몇 가지 첨부합니다.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과 혼합하는 것을 금하고 희생제물의 기름은 다음 날까지 보관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누룩은 희생제물의 피와 섞이면 불결해지는 것으로 여겼으며, 기름은 오직 여호와만을 위한 것으로 신속히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는 규정은 어떤 의미인지 사실 정확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가나안적인 종교적 풍습 등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이방인의 관습을 어미와 새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 규례로 인해 유대인들은 우유와 고기를 섞어서 먹지 않고 꼭 구별하여 요리합니다.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열심히 산다는 이유로 일주일 내내 일을 하며 사는 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습니다. 6일 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7일째에는 평안하게 쉼을 누리며 안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기에 스스로 학대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인해 쉬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매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절기를 통해서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남을 도와준 것은 잘 잊지 않아도 도움을 받았던 것은 쉽게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를 모르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 내밀어주셔서 받은 은혜들을 항상 기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0-19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선포된 율법으로,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그리고 매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절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쉼과 안식을 주시며, 이스라엘 자손이 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주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정복을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하십니다. 물론 이 약속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금까지 선포된 모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앞길에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사자는 ‘보냄을 받은 자’, ‘천사’, ‘선지자’, ‘제사장’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즉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도록 부름받은 사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사자가 누구를 의미하는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자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던 모세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들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자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부리는 신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은 이 사자를 천사로 번역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을 목적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걷는 길은 안전하고 편한 길이 아니라, 위험하고 불편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목적지인 가나안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도 이스라엘 자손이 걸었던 광야의 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영원한 나라를 목적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걷는 이 길도 좁고 불편한 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 말씀입니다.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럼에도 우리가 이 길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건 우리 혼자 걷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좁은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목적지인 영원한 나라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1-22)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신이 보낸 사자에게 청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도록 부름받은 사명자이기에, 사자에게 청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청종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청종하다’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고, 그것을 온 인격으로 수용하여 순종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매주 수요성경공부를 통해 솔로몬왕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이스라엘 자손의 재판을 바르게 분별하고 판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요청했습니다. 듣는 마음은 단순히 소리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듣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고막만 진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진동시켜서 우리로 하여 그 말씀에 청종하게 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면 사자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자는 하나님이 보낸 일꾼에 불과한데 그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사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탁받은 자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스라엘의 원수를 자신의 원수로 여기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자신의 대적으로 여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직접 싸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18편 6절 말씀입니다.
(시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면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하나님의 사자는 이스라엘 자손보다 앞서가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은 그 땅에 사는 족속들, 즉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끊는다’는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이 더는 그 땅에서 생존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파멸시켜 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을 제거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24-26)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 정착하면 온갖 가증스러운 이방 종교의 흔적을 모두 없애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들이 섬겨왔던 신들은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타락시키고,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에 있는 우상들을 다 깨뜨리고 부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서 하나님만을 일편단심으로 섬기면 그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고 약속하십시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질병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장수의 복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깨뜨리고 부수어야 할 우상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이제 그 우상을 우리의 눈과 마음에서 완전히 제하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또 모든 의를 실현하러 오신 주님을 닮아서 우리도 옳고 바른 삶, 의로운 삶을 살아가십시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넘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27)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자손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은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에게 자신의 위엄을 보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과 싸워 보기도 전에 그 마음이 녹아내릴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공포와 두려움이 그들을 엄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셨고, 광야에서 지금까지 그들을 어떻게 돌보셨으며, 최근에 아말렉 족속을 어떻게 멸망시키셨는지를 들은 가나안 거주민 중에 두려움에 떨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을 통해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등을 돌려 도망가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자손이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배척하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인생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뻐하는 인생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또 하나님은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에게 왕벌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왕벌’로 번역된 단어는 왕벌, 말벌, 땅벌 등을 뜻하는데, 재앙 또는 전염병의 의미도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을 떠나보내기를 거부하다가 재앙을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막는 사람들이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29-30)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을 한꺼번에 몰아내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 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두셨습니다. 이것은 혹시 가나안에 거주하는 사람이 부족하여 그 땅이 광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을 조금씩 쫓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는 이처럼 섬세합니다.
때론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일하시는 것이 더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어떤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시지 않아서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적합한 때와 적합한 방법을 아시는 섬세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31) 내가 네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그 땅의 주민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차지하게 될 영토의 범위는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지중해)까지며, 광야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까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는 본문에서 처음 언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동일하게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8절 말씀입니다.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 도착하기 전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이후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32-33)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과 어떠한 동맹을 맺어서도 안 되며,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꼬임에 빠져 그들의 신을 섬기므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다면 가나안에 사는 이방 족속은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그 때까지 가나안 땅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즉 그들은 보지 못한 곳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향하는 그 길은 꽃길이 아니라 척박한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광야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목적지인 가나안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이방 족속을 물리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땅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그들에게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생을 두 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에게 인생길은 두렵고 떨리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최종 목적지가 영원한 나라인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를 목적 삼고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걷는 그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붙들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꽃길이 아닐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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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평에 관한 법,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세 가지 절기에 관한 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주어질 약속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1~9절은 공평에 관한 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1절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모든 법은 공평해야 합니다. 돈이 많다고 부자를 두둔해서도 안되고, 가난하다고 빈자를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다수를 편들고자 부당한 증언을 해서도 안되고, 소수를 무시하여 업신여겨서도 안됩니다. 악의 편에 서서 위증해서도 안되고,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힘있는 자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라갑니다. 또한 거짓인 줄 알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참으로 억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주 금요일(2016년10월28일), 전주지법 제1형사부는 강도치사 혐의로 기소된 지적장애인 최대열씨 등 ‘나라슈퍼 삼례 3인조 강도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1999년 2월 6일, 즉 17년 전에 있었는데, 이 사건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3사람은 각각 징역 3년~6년을 선고받았고 모두 복역을 마쳤다는 사실입니다.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살이까지 마친 이들에게 17년 만에 무죄가 선고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3~6년의 시간과 17년 동안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아야만 했던 지난 세월을 누가 무엇으로 보상해 줄 수 있겠습니까? 당시 경찰은 이들이 지적장애인인 것을 이용해 강압적인 수사 하였고, 결국은 허위자백을 받아냈습니다. 다행이도 이 사건은 진실이 밝혀졌지만,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 세상은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죄있는 사람을 선인으로 판단하는 불의한 재판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의 심판,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심판은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0~13절은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안식년은 6년 동안 땅을 경작하고 그 소산을 거두어드릴지라도 7년째 되는 해는 그 땅을 쉬게 하라는 제도입니다. 안식년 제도를 두신 이유는 가난한 자들이 먹고 또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11절입니다.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아나 과부, 나그네를 돌볼 책임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 하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잘먹고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이들이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우리에게는 그런 나라를 함께 일구어 나갈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안식년은커녕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6일간 일하고 7일에는 쉬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건만, 이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도 주인의 눈치만 보면서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만 쉬는 것은 참된 안식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쉬어야 그 종들과 동물들도 쉴 수 있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인은 언제든 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쉬면 남들도 쉬는 줄 압니다. 자기가 안식일을 지키면 아래 사람도 안식일을 지키는 줄 압니다. 주인만 쉬는 안식, 그것은 참된 안식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이가 함께 안식할 때, 비로소 참된 안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과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안식년, 안식일의 정신은 하나님을 신뢰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쉬지 못하는 이유는 먹고 사는 걱정 때문입니다. 좀 더 많이 갖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못쉬고 남도 못쉬게 만듭니다. 이것은 불신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년이 이르기 전 해에 두 해에 먹을 양식을 주시겠다 하셨고, 안식일 전 날은 이틀치 먹을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신뢰한다면, 먹고 사는 걱정 때문에 쉬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자기 생각과 능력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안식년과 안식일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세상의 논리와 물질이 중심이 되면, 안식년과 안식일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결단이 있을 때, 그리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14~19절은 3대 절기에 대한 말씀이며, 20~33절은 명령과 약속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3대 절기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과 연결되는데 이 날은 이집트 노예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첫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두 번째 절기인 맥추절은 무교절이 끝나고 7주가 지나서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 또는 50일째 되는 날에 지킨다고 하여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무교절은 봄추수의 첫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라면, 맥추절은 가을추수의 첫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세 번째 절기인 수장절은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절기는 그 해의 마지막 감사절기로 추수를 모두 마친 후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지금 우리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절기입니다.
3대 절기의 공통점은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 1년에 3번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하겠으나, 특별한 날로 정하여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실천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2절입니다.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한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신다면, 우리에게 부족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권력을 가진 자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면서 권력을 자기 손에 쥐려 합니다. 그러나 그 말로는 비극이며 처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한국의 현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칼로 자기 뜻을 실현하고자 했던 제자를 책망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빼어 든 칼을 칼집에 도로 꽃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모두 칼을 들어 권력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칼을 들어 권력을 잡은 자는 그 권력의 칼에 찔려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께서는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칼과 권력을 붙잡는 사람은 반드시 망할 것이요 오히려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높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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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사법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거짓 증언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고,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수의 의견에 거슬러 말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굳은 마음을 먹기 전에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거짓 증언을 금하는 것은 거짓 증언의 피해자가 대개 사회적 약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증언은 한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는 신뢰의 토대를 허물어 뜨립니다. 법이 강자의 편익을 위해 오용될 때 사회에는 불신의 벽이 쌓이게 됩니다. 어느 법철학자는 ‘법은 선이 떠나버린 세계에서 활동하는 선의 대리자’라고 했습니다. 법조차 무너지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두둔해서도 안 되지만,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부당하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재판관들에게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공직자들에 대한 인사 청문회를 볼 때마다 서민들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 탈법, 불법에 가담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드로는 사위 모세에게 공직자들을 뽑는 기준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출18:21,22)
이런 지도자 어디 없을까요? 능력도 없고 덕도 없는 사람, 사람은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 다른 이를 깎아 내리는 일에 바쁜 사람, 부정직한 소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겠습니다만 국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뇌물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말을 왜곡시킨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공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요즘의 뇌물은 금품이나 물건만이 아닙니다. 자녀들에 대한 직업 알선도 있고, 특채도 있습니다. 뇌물이 말하는 사회는 불의한 사회입니다. 그리고 결국 망하는 사회입니다. 모두가 공멸하는 사회입니다.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출23:9a)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잠시 집을 떠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자기의 고향을 떠나 낯선 외국인들 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마음 시린 일이었을 겁니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거의 밑바닥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10절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규정을 잘 살펴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쉬어야 할 대상들이 열거된 순서는 ‘너(이스라엘백성)’, ‘소와 나귀', ‘여종의 자식’, 그리고 맨 나중이 ‘나그네’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는 재산으로 분류되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은 돈 보다 사람이 못하게 치부되는 이 시대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그네, 즉 사회적 약자에게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생계 대책을 세우라고 엄중하게 지시하고 계십니다. 곡식과 올리브 혹은 포도를 거두고 남은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삼년에 한 번씩 거두는 십일조도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복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들의 구호에서 한 발짝 벗어나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먼저 그들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실패를 겪어본 사람만이 실패자들의 쓰라린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복과 관련이 됩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저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날의 품삯을 받지 못한 이들이 주인을 원망하면서 주께 호소하면, 죄가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24:15).
어떤 일로 이웃과 척졌다 해도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신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길이고, 우리도 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