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여행기>
이 정 미
인도는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나라다. 인도의 국토는 서유럽 전체의 크기와 비슷하고, 남한 면적의
33배나 되는 28만㎢ 이며, 인구는 세계인구의 6분의 1에 가까운 11억에 달하고 있다. 또한 지방에 따라 판이한
풍토, 다양한 인종구성, 공용어만도 15종에 이르는 복잡한 언어분포, 힌두교 및 회교 등 각종 이질적인 종교의
번성, 격심한 빈부의 격차, 교육의 차이, 그 외에 수 천년을 내려온 사회신분제도 등 사회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인도인들은 다양성과 이질감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수 천년의 전통
을 계승하여 왔으며, 지금도 그러한 인도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인도는 카스트 종교제도로 인해 미래의식이 없어서인지 늘 빈부격차를 겪고 있어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인도 거리를 가다 보면 빈부격차를 실감할 수 있다. 노숙자와 가족 단위로 구걸하는 사람들로 인해 자본주의 원리
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도주의 정신을 심어준다. 높은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나면 교복을 입고 스쿨버스 타고
학교다니고 외국유학까지 간다. 인도 국민을 지배하는 것은 이슬람교와 힌두교이다. 불교의 원조는 힌두교라고
한다. 인도 거리에서 흔히 보는 문양은 코끼리이다. 거리에는 소와 개들이 한가롭게 거니는 풍경을 어디에 가든
눈에 뛴다. 거리의 소들은 주인이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 외 가끔 염소도 다닌다.
거리 모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릭샤라고 불리는 소규모 교통수단이다. 운전자 뒤칸에 두세명 승객을 태우는
인력거 모양이다. 자전거를 개조한 릭샤와 소형 자동차를 개조한 릭샤가 있다. 릭샤꾼들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영업용 택시운전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본 인도 여자들은 모두 사리라고 불리는 색색의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닌다.
반면 나이 어린 여자나 학생인 10대, 20대 여자들은 우리처럼 바지에 티셔스 차림이다. 책가방을 둘러매면 대뜸
학생인 줄 파악하게 된다. 남자들은 80%가 바지에 와이셔스 차림을 한고 있다. 노숙자이건 장사꾼이건 막일하는
사람이건 거의 동일하다. 와이셔스는 긴팔에 팔을 걷어서 입기도 하고 아예 짧은팔 와이셔스를 입는다. 특이한
것은 거의 콧수염을 기른다.
9월 18일 인천공항에서 오후 7시 30분 비행기 타고서 7시간 30분 걸려서 11시 45분(한국시간)에 수도인 ‘델리 인디라
간디’공항에 도착했다. 인도 현지 시간은 오후 8시 15분이다.(이하 인도 현지 시간) 실지 여행은 다음날인 19일부터
시작했다.
19일(금)
오전 8시에 호텔에서 조식을 마쳤다.
이슬람 사원, 바하이 사원, 대통령궁, 전사자를 위해 영국에서 지어준 위령탑을 구경했다.
간디화장터이며 추모공원인 ‘라지가트(아래 사진)’, 간디 저격장소 및 간디 기념관을 갔다.
(위사진: 간디기념관 입구의 간디 흉상)
올드 델리의 재래시장인 ‘찬드리초크’와 델리의 인사동과 비슷한 ‘잔팍로드’에 갔다.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인 ‘자미 마스지드’에 갔다. 신발을 벗고서 구경하는 곳이다.
이슬람 신자들은 하루에 5번이나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오후에 델리 기차역으로 갔다. 말로만 듣던 인도 여행이 적응하기 힘들다던 것을 확인해 본 체험이었다.
침대가 있는 야간 특급열차를 타고서 ‘바라나시’로 이동하기 위해 12시간을 달리는 것이다.
저녁으론 기차에서 한식 도시락을 먹었다.
20일(토)
다음 날 오전이 되자 차창 밖으로 인도의 시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의 농촌처럼 바라만 보아도
무척 평화로워보였다. 소와 염소 등이 한가로이 노닐고 움막 집에서 분주히 아침을 맞이하는 가족들,
머리에 집을 싣고서 풀 베러 가는 사리 입은 여자들....그런데 그 농촌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야외에서
볼일을 본다.
고생스런 기차 여행을 마치고 오전 8시 경에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바라나시는 인구가 300만명으로
델리에서 750km이며 3000년 고도의 힌두교 최고의 도시이다. 호텔로 이동했다. 이동 즉시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고고학 박물관(일명 ‘석조 박물관’), 사르나트(녹야원), 인근의 바라트 맛타 사원으로 갔다.
1931년에 세워진 그곳은 대리석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사원으로 한국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붓다에 관한 회화와 보리수 나무(아래 사진)가 있다.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였으나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밀려 현재 불교 신자는 1%도 못 미친다.
우리가 8일간 인도를 여행했을 때에 교회 건물을 딱 한 번 보았다.
인도에서 불교의 4대 성지는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 붓다가 득도한 보드가야, 처음으로 설법을 핀
사르나트, 붓다가 대열반에 든 꾸쉬나가르 등이다. 우리는 이중 사르나트에 갔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40분 거리이다.
녹야원(위 사진)은 부처님이 설법을 하고 명상, 해탈한 곳이다.
고고학 박물관에는 입구에 사자 3마리조각상이 맞이한다. 사자상 밑에는 코끼리, 사슴, 말 등의 조각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곳의 조각들은 반 정도가 머리, 코 부분이 부서져 나가고 없다. 이유는 발굴과정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조각들의
명칭에는 호국신과 파괴신이 동시에 있다. 불교를 신봉했던 아소카왕이 지은 영불탑으로 갔다.
그 후 비단공장에서 쇼핑했다. 저녁 식사 전에 카펫트 공장에서 카펫트를 구경하며 인도 민속춤을 구경했다.
호텔에서 석식 후에 호텔 연회장에서 한국문협주최의 여행참가한 회원의 시낭송회를 했다.
21일(일)
다른 날에 비해 일찍 기상했다. 5시에 호텔을 나와 버스로 갠지즈강을 향해 출발했다.
인도에는 두개의 큰 강이 대륙을 관통하고 있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하는 갠지스강은 동부 인도로 흘러서 벵갈만으로
빠져나가고 인더스강은 서부(현재 파키스탄 영토)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간다.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을 일컫는다. 인더스 문명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에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본 문명의 수준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리아 등에 버금가는
세련된 문화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갠지스 강은 인도인에게 매우 성스럽게 인식되는 곳이다. 매일 힌두교 신자들은 새벽에 이 강에 와서 목욕을 한다.
갠지스 강을 향한 길에는 목욕을 하기 위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갠지스 강으로 가는 길은 시각적으로나 후각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거리는 너무 지저분했다. 상점은 아직 닫혀 있었고
구석구석마다 남자 노숙자들의 잠든 모습이 곳곳에 눈에 들어왔다. 그 외 관광객을 향해 구걸하는 사람들, 좌판에 과일,
칫솔용 나뭇가지 등을 놓고 파는 사람들로 인해서 하나의 풍경으로 시각적으로 보아넘기기에는 정서적으로 썩 유쾌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거리에는 이상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좋게 표현하면 향이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에는 거리를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소들이 오히려 노숙자, 구걸자보단 편해 보였다. 어쨌든 지저분한 거리에 유쾌하지 못한 인도인들의
행열 탓인지 우리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이 “옆 사람들과 줄을 맞춰서 걸음을 빨리 하세요”라며 서로 당부했다.
10분간 걸어서 갠지스 강에 도착했다. 입구 주변엔 꽃 노점상들이 즐비했다. 보트를 타고 갠지스 강을 건너갈 때에 꽃을
손바닥만한 잔에다 촛불과 함께 담아서 소원을 빌면서 강에다 띄우는 것이다. 강 입구는 많은 사람으로 인해 시장처럼
복잡했다.
우리 일행은 배를 두 척 대여했다. 배에는 두 명의 노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배는 주로 와국인 관광객을 위한 것 같다.
우리 일행 말고도 유럽 여행객들도 꽤 있었다. 배를 탔을 때에는 날이 흐렸다. 우리 배 옆으론 현지인이 배에다 기념품을
담고서 관광객이 탄 배로 접근하며 물건을 팔았다. 우리 배 옆으로 접근한 배는 우리가 한국인임을 금세 알아차리고
“강(江) 가 슈퍼마켓!”이라며 서툰 한국어로 말해서 우리 일행은 그런 그들의 장사 수완에 웃었다. 강 주변에는 관광객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우리 관점으로 보면 여관 수준)가 강을 향해 놓여 있다. 강을 타고 한 가운데로 이동하면 가트(강과
육지가 닿는 공간에 있는 계단)에서 목욕할 준비를 하는 인도인들이 보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영복 차림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우리 관점으로 보건대 한쪽에선 시체를 화장해서 강에다 던지는 힌두교도들의 의식으로 인해 강은 무척
오염되어 보였는데, 즐겁게 목욕을 하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시체를 화장하는 그들의 장례문화는 무척 엄숙해 보였다.
부자일수록 질좋은 나무로 화장을 한다. 강가의 이 화장터(아래 사진)는 촬영을 못하게 되어 있다.
한쪽으로 가면 남자들이 강에서 빨래하는 장면이 있다. 빨래를 주로 남자들이 한다. 강에서 빨래를 할 때엔 몽둥이로 힘있게
탁탁 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외 힌두교도들이 가트 주변의 공간에 모여서 기도하는 의식이 보였다. 우리들이 배위에서 여러
장면을 보며 왔다갔다 하는 동안에 어느새 갠지스 강의 일출 장면이 눈에 들어 왔다.
곧 호텔로 돌아와서 조식을 했다. 12 20분에 점심을 먹고나서 바라나시 공항으로 향했다. 국내선을 타고 카주라호 市를 향해
출발했다. 국내선은 생각과는 달리 무척 깨끗했다. 40분 만에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카주라호는 인구가 1500만명으로 동네가
깨끗했다. 곳곳에 야자수 나무가 있다.
버스로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문화가 있는 서쪽 사원과 동쪽 사원으로 향했다. 차창으로 풀밭, 움막,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 등이 보였다. 볏집으로 만든 움막들은 한국의 농촌 모습을 연상한다. 각 사원은 버스로 15분거리인데 규모에서 차이가
엄청나다. 까마수트라 사원이라고 하는 서쪽 사원은 힌두교 사원인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고 에로틱 예술의 상징인
미투나 상이 있다. 동쪽 사원은 자이나교 사원인데 서쪽 사원에 비해 볼거리가 많지 않다. 서쪽 사원에는 모두 9 개의 사원들이
있다. 9번째 사원은 윤회사원이라고 한다. 서쪽 사원을 나와서 버스로 걸어가는 도중에는 노상 남자장사꾼들이 우리 관광객에
게 벌떼 같이 달려들어서 우리는 무척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에는 이런 호객꾼들 등살로 관광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자바리 사원에는 사원 외벽에 가장 예쁜 요정 압사라의 조각이 아름답다. 그 옆에는 그 유명한 남녀 교합상(아래 사진)이 있다.
여러 개의 이런 조각상 탑은 얼핏보면 남녀의 성적 문란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진짜 의도는 당시 전쟁에 많이
나간 남자들로 인해 자손 번식을 홍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녀교합상으로 된 탑은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파괴신은 31미터로
힌두교 사원 중에서 제일 높다. 우측의 사자상은 칸델라 왕조의 상징이다. 힌두교 신자들이 기도할 때에는 파괴신에게 먼저
기도한다.
22일(월)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버스로 4시간을 소요해서 오차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는 차창으로 넓은 초원에 시골 모습이 들어왔다.
이곳 인구의 70%는 농부이다. 오차는 습관상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을 주는 완전 시골마을이라고 한다.
오차는 마을 이름인데, 그곳에 전델라왕과 분델라왕이 생존했던 17세기에 만들어진 오차 성(城)이 있다. 현재 인구는 5천명
이다. 그 성은 모습이 아름다운 데칸 고원에 있고 힌두 사원이 있다. 그 성 안의 라마궁전과 장기궁전으로 갔다. 오차 성 주변
에는 장사꾼들이 많았다. 오차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로 라마궁전으로 향했다.궁전은 말 그대로 왕이 살던 곳인데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터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이다. 궁전 중에서 특히 지붕은 모두 힌두교 양식으로 되어 있다. 라마궁전
천장에는 내세를 보장해 주는 보호신 문양들이 있다. 이 궁전은 한때 수몰되었다가 영국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아래 사진: 궁전으로 가는 길에 여자 인부들이 외국 관광객들에게 모델 사진을 찍게 해주고는 팁을 요구했다.)
오차 성을 나와서 잔시로 이동했는데 오후 6시 30분 경에 도착했다. 잔시에서 특급열차로 2시간 30분 소요해서 무굴 제국의 옛
수도 아그라에 도착했다. 인도인은 아침은 카주라호에서, 점심은 오차에서 저녁은 아그라에서 지낼 정도로 세 곳은 통해있다.
아그라에 도착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쳤다.
23일(화)
오전 9시경에 타지마할에 도착했다.
입구에 원숭이가 있는 곳은 붉은 성인 아고라성이다. 이곳도 역시 장사꾼들이 벌떼같다.
타지마할(아래 사진)은 350년전에 만들어졌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타지마할에는 유럽인들을 비롯한 전세계
관광객들이 많았다. 타지마할의 중앙 성은 온통 흰색이고 웅장하다. 올라가는 길에 연못이 있고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신고서
들어가게 되어있다.
아그라성은 이슬람 양식의 붉은 성 무굴제국의 군사기지로 강대한 권력의 상징물이다. 아그라 성 위의 광장에 서면 아그라의
젖줄인 아무나 강의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을 먹고서 쇼핑센터에 들른 후에 버스타고 쉬크리 성으로 이동했다.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이다. 희한한 것은 이동 중에
차창에 보인 시골에 돼지가 많이 다녔다. 쉬크리 성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다. (일회용으로 촬영)
쉬크리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악바르 황제의 왕궁과 이슬람 사원이 있다.
또 다시 버스로 4시간 이동해서 저녁 9시 경에 핑크 시티라고 불리는 자이푸르에 도착했다. 4 시간 이동 중에는 차창으로 시골
동네만 들어왔는데 노숙인이나 거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24일(수)
자이푸르에는 대리석(sandy stone)으로 치장된 돌산이 많다. 오전 8시부터 높은 곳에 위치한 암베르 성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산 밑에서 순서대로 코끼리를 타고 올라갔다. 코끼리들은 관광 상품인 듯 몸통이 모두 화장품으로 색색깔로 치장되었다. 생전
처음 코끼리를 타는 것이 우리는 신기했다. 코끼리 타는 관광상품 탓인지 유럽인들을 비롯해서 세계 관광객들이 많았다.
코끼리는 말처럼 속도가 매우 느렸다. 코끼리 앞에는 조련사가 타고 있다. 코끼리는관광객을 위해서 종일 노동하는 것이다.
암베르 성에서 내려올 때에는 한쪽에 위치한 광장에서 5명씩 릭샤를 타고 내려왔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라자스타 양식으로 된 암베르 성은 모든 성이 그렇듯이 접견실, 왕비실, 집무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왕비가 12명이었다.
거울의 방, 라호르의 문, 호수정원 등을 보았다.
점심을 먹고나서 천문대(잔타르 만타르?)에 갔다. (아래 사진은 인도 고대의 시,분까지 표시되는 해시계, 이곳에는 이론 종류의
해시계들이 많다.)
천문대를 나와서 시티팔래스궁과 궁녀들을 위한 바람의 궁전(하와마할)을 보았다. 1727(?)년에 만들어진 시내에 있는 궁전이다.
(아래 사진은 거리에 있는 바람의 궁전, 옆에 서신 분이 한국문협 시분과 회장이신 김송배 시인, 그 옆의 붉은 치마 입은 분이 민봉기 소설가)
가는 길이 핑크시티인데 거리에는 소들이 많다. 그 외 왕의 의상박물관과 무기박물관을 들렀다. 자유롭게 근방의 재래시장을
구경했다. 재래시장은 물건이 무척 싸구려인데 호객꾼들의 등쌀이 심했다. 거리에는 릭샤가 많이 다녔다. 질서정연한 신호등이
보이지 않았다.
25일(목)
버스로 5시간 걸려서 처음 도착했던 델리로 갔다. 첫날 델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밤이어서 제대로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델리에 근접하는 길 중 고속도로를 지나갔는데 공장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델리는 무척 깨끗했다. 그동안 보았던 릭샤에 노숙
자, 거지들이 있었던 분주한 거리하곤 이미지가 영 달랐다. 승용차에 오토바이가 많이 보였다.
연꽃모양의 바하이 사원(아래 사진), 뉴델리 최고의 볼거리인 세계문화유산인 꾸뜹 미나르 유적의 승전탑을 보았다. 그것 역시
세계 관광객들이 많았다. 벌라만다르, 장미공원등을 구경했다.
바하이 사원은 여러 종교인이 한 장소에서 각자 해당하는 종교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천주교는 천주교
대로 한다.
저녁에 델리 만다라 간디 공항으로 이동해서 26일 01시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인도 여행을 마쳤다.
첫댓글 꽃다지님 올려주신 기행문을 잘 읽고 내려왔습니다.어찌나 상세하게 적여 주셨는지 현지에서 내가 보는듯 했습니다.. 헌대 불교 신도수가 1%뿐이라! 놀랬어요.많을줄 알았는데...갠즈스강 주변이야기, 오차마을 이야기, 발을벗고 관람을 한다는 이야기 모두 자세히 적어 주셨기에 감사 했습니다. 바하이 사원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도의 문학기행을 아기자기한 해설로 보여주셨네요. 여성의 섬세함이 잘 배어있어 더 정감이 갑니다. 좋은 공부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좋은 체험을 쉼터 가족을 위해 담아오셨네요. 잘 구경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인도의 문화를 직접 찍어주신 사진을 통하여 보고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시한번 살펴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