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 바울은 성령님의 강력한 간섭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가고 싶은 아시아를 막으시고 빌립보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발길을 돌려 유럽을 향하는 순간부터 유럽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럽 복음화에 전초기지가 되었던 빌립보교회는 성령님의 간섭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시대에 마케도니아를 대표하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완벽한 도시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비옥한 평원, 그리고 평원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 그리고 로마에서 이스탄불을 잇는 에그나티아 고속도로(Via Egnatia)를 갖추었습니다. 게다가 가까이 있는 팡게오 산에는 유명한 금광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BC 6세기입니다. 그때는 그리니데스(Krenides)라고 불렀는데 이는 샘물(Spring)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풍부한 빌립보가 그 지경의 ‘샘물’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미 빌립보는 금광과 풍부한 수자원을 갖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빌립 2세가 BC 358년(혹 360년이라는 자료도 있습니다)에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도시 이름을 지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의 아버지인 빌립 2세는 여러 가지 이유로 빌립보에 대한 애착을 가졌습니다. 특히 빌립보 지역의 금광을 좋아했습니다. 빌립 2세는 빌립보 지역의 금광에 대한 소유권 강화와 경비 강화를 위해서 도시를 개명하였고 도시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빌립보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BC 168년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가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에 패배하면서 로마가 빌립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BC 42년에 시저(Caesar)가 사망하자 권력다툼으로 인한 전쟁이 일어납니다.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가 카시우스와 함께 옥타비우스와 안토니를 대항해 빌립보 근처에서 싸웠습니다. 이 전쟁이 유명한 빌립보 전쟁입니다. 빌립보 전투에서 율리스 시저의 암살자들이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패배합니다. 옥타비우스와 안토니가 로마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이 빌립보 전쟁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로 참전했던 시인 호레이스는 훗날 적장이었던 옥타비우스(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아 문학 활동(특히 시작활동)을 하며 뛰어난 작품들을 남깁니다. 그는 로마 후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활동합니다. 이 빌립보 전쟁은 로마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중요한 전쟁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빌립보 전쟁이 로마의 공화정을 종식시킨 전쟁으로 정리합니다.
유럽 복음화의 전초기지 빌립보교회는 성령님 간섭으로 세워져
로마직할시 빌립보는 퇴역군인 정착지...시민답지 못한 모습보여
이 빌립보 전쟁에서 이긴 옥타비우스는 10년 쯤 지난 후에 옥티움(Actium) 전투에서 자신의 마지막 정적인 안토니 제거하고 황제가 됩니다. 이때 옥타비우스(훗날 아우구스투스로 개명)는 다시 빌립보를 애착합니다. 빌립보를 로마 직할(로마령) 도시로 세우고 이름도 자신의 딸의 이름을 따라 ‘콜로니아 율리아 빅트릭스 빌립보’(그러나 통상은 빌립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로마 퇴역군인들을 빌립보에 이주시켜 살게 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빌립보를 로마령(직할:the Roman Colony) 도시로 세우면서 빌립보 도시는 더욱 크게 번성했습니다. 빌립보는 농업과 상업이 함께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주변 도시 유력한 무역상들이 빌립보로 가서 무역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만큼 빌립보는 활발한 교역 도시였습니다. 두아디라 자주장사 루디아를 포함한 많은 외지인들이 상주했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빌립보가 로마령(직할) 도시의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되면서 많은 외부인들이 출입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정부는 대략 세 가지 목적으로 직할도시를 활용했습니다. 먼저 정복한 땅에 전진기지로 직할도시를 활용했습니다. 새로운 지역 관리수단으로 직할도시였었습니다. 다음은 가난한 로마시민 보호를 위해 직할 도시를 세웠습니다. 셋째로 퇴역군인들의 정착지로 직할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빌립보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직할도시였습니다.
로마시대 로마령(직할) 도시가 누렸던 특별한 지위는 대단했습니다. 직할도시 시민인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직할도시였던 빌립보 시민들이 누렸던 특혜를 몇 가지로 정리합니다. 우선 빌립보 시민은 로마시민과 동등한 법적인 지위를 누렸습니다. 당대 로마시민권은 헬라 문화권에서 귀족 신분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로마시민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다음, 그들은 로마시민들과 같은 특혜들을 향유했습니다. 로마시민처럼 면세권이 있었고, 항소권도 갖고 있었는데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태형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실형이 선고되어도 선고에 불복하고 직접 항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는 매를 맞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임을 주장할 때 감옥의 간수가 당황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로마 직할시 빌립보에 퇴역군인들이 정착합니다. 그런데 로마 퇴역군인들 중에는 외국군에서 포로로 잡혀 로마군에 편입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시민권자였지만 시민답지 못했던 것처럼 빌립보교회 성도들도 천국시민이었지만 천국시민답지 못했습니다. 빌립보도시 곳곳에 ‘시민답게 살아라!’라는 현수막이 있었고 바울이 이 말로 성도들을 설득합니다(빌1:27).
빌립보를 떠난 바울 선교팀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는 약 150킬로(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바울 선교팀은 그리스 반도 북부를 동서로 잇는 간선도로인 에그나티아 고속도로(Via Egnatia)를 통해 이동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이 이동했던 자세한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경로를 밝힘으로 그들이 로마의 간선도로인 에그나티아를 이용하여 이동했던 것을 밝힙니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 Θεσσαλονίκη)는 에게해 북서쪽 터마만(Themaic Gulf) 끝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주요 무역항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기 전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에서 마케도냐 지역의 중심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라는 도시 이름은 기원전 315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인 카산더 장군은 새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아내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데살로니가로 불렀습니다. 그의 아내 데살로니가는 필립 2세의 딸이요 자신의 주군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동생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배를 받던 데살로니가는 BC 168년에 피드나 전쟁(Battle of Pydna)에서 로마가 마게도냐를 무찌른 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후 BC 148년에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고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도시가 됩니다. 이때부터 데살로니가의 황금기가 시작됩니다. 데살로니가는 ‘전 마케도니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마케도니아를 대표하는 도시 역할을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항구도시입니다. 바다와 연결된 항구도시와 두강(바다르 강과 비스트릿자 강) 그리고 로마의 주요 간선도로인 에그나티아 고속도로(Via Egnatia)가 교차하는 데살로니가는 고대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할 때 데살로니가는 고린도와 더불어 국제 상업 도시로 다양한 인종들이 몰려와 사는 국제 도시였습니다. 유대인들도 다시 이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바울이 방문했던 회당을 위시해서 데살로니가에 다수의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도 바울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데살로니가는 빌립보보다 더 큰 도시였고 헬라문화가 번성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자유도시(Civitas Libera)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시의회에서 선출된 5-6명의 읍장들(행17:6)이 자치적으로 시정을 돌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상류층은 로마의 보호와 특권을 누렸고 데살로니가의 하층민은 로마와 기득권층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바울 선교팀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 토착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주로 세 종류의 종교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상을 버린 것을 바울이 칭찬합니다(살전1:9). 이 종교들이 데살로니가 선교와 목회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진 데살로니가 사역
다인종 국제 상업 도시로 헬라문화 번성...3개 종교에 대항
먼저는 로마 황제숭배 종교입니다.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시이저가 암살된 후에는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를 ‘신의 아들’로 부르며 숭배했습니다. 이러한 황제 숭배 분위기는 데살로니 시민들의 폭동(행17:7) 이유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리스 신화의 영향이었다. 데살로니가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했습니다. 디오니소스(Διόνυσος)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로마 신화에 술의 신 바커스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로써 포도주를 관장하는 신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은 이 종교의 영향으로 술을 탐닉하고 무분별한 성행위를 일삼아 데살로니가는 타락한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서신은 이 타락을 경고합니다(살전4:7).
셋째는 카비루스(Cabirus)의 숭배였습니다. 카비루스는 하층민의 권리를 대변하다가 암살당했습니다. 데살로니가 민중들은 자신들을 대변한 카비루스를 영웅적 순교자로 추앙하며, 그를 신격화했습니다. 그들은 카비루스가 부활해서 그들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 종교의 영향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부활과 심판 메시지를 받을 때 개념은 쉽게 이해했지만 곡해도 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서신서에는 부활과 종말 신앙에 대해 많은 언급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와 관련된 두 사람 야손(Jason)과 아리스다고(Aristarchus)가 등장합니다. 야손(행17:5, 롬16:21)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마카비서가 비교적 상세하게 야손을 소개합니다. 야손은 70문도 중에 하나이며 바울의 고향 다소 출신이었답니다. 그리고 훗날 바울이 그를 다소의 감독으로 임명했답니다.
아리스다고(행19:29, 20:4)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과 로마행을 동행합니다. 성경은 아리스다고를 신실한 바울의 동역자로 소개합니다. 윌리암 램지(William Ramsay)나 F.F. 브루스(Bruce)는 아리스다고가 바울의 시종(侍從)으로 바울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동방정교회와 카톨릭의 전승에 의하면 아리스다고는 예수님의 70문도 중에 하나이며 훗날 아파메아의 주교로 봉직했다고 전합니다. 데살로니가 사역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을 확인합니다.
데살로니가의 소동을 피하여 바울과 실라는 밤에 베뢰아로 이동합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로부터 약 73킬로(Km) 떨어진 도시로 해발 약 2천미터인 베르미온 산(Vermion)기슭에 자리 잡았던 도시입니다. 밤중에 출발한 바울일행은 로마시대 주요 간선도로인 에그나티아(Via Egnatia) 고속도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에 방문했던 도시들은 모두 에그나티아 고속도로 선상에 있는 도시들이었습니다.
현재는 ‘베리아(Veria)’라 불리는 베뢰아는 바울 당시에 빌립보, 데살로니가와 더불어 마케도니아 3대 주요 도시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베뢰아는 고대도시입니다. 베뢰아는 BC 9세기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베뢰아에 관한 오래된 기록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BC 5세기(437년)에 남긴 기록입니다.
베뢰아가 처음 주목을 받은 것은 마케도니아 에르게아스 왕조시절입니다. 에르게아스 왕조는 마케도니아 왕국 첫 왕조입니다. 에르게아스 왕조를 대표하는 인물은 빌립보를 세운 필립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3세(대제)입니다. 필립 2세는 마케도니아를 통합하였고 알렉산더 대제는 이집트와 인도까지 확대하여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 시절 마케도니아 왕국은 통일된 주화를 발행했는데 그 주화를 베뢰아에서 발행했습니다. 이 시절에 베뢰아에서 아테네와 고린도처럼 체육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기념하는 베뢰아 체육대회는 당시 그리스 각지에서 선수들이 출전했던 국가적인 행사였습니다.
베뢰아가 영향력 있는 도시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에그나티아 고속도로의 건설되고 로마 정부가 베뢰아를 활용하면서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베뢰아는 본격적으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BC 2세기 중반부터 1세기에 베뢰아는 큰 변화를 겪습니다, 조용한 농업 도시였던 베뢰아는 로마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베뢰아는 원래 감, 배, 사과, 석류와 복숭아 등으로 유명한 농업도시였습니다. 할아크몬(Haliacmon)과 악시오(Axios), 두 강이 주는 풍부한 물과 비옥한 토질은 과일의 수확량도 품질이 탁월한 과수원 도시로 알려졌었습니다. 이런 농산물 생산 덕분에 베뢰아는 농산물 장터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에그나티아 고속도로의 건설 덕분에 교역이 많아져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베뢰아에는 많은 외부인이 찾아와 정착하였고 상당수의 유대인도 거주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나 빌립보 같은 상업 도시로는 발전하지 못했고, 장색 세공업과 석공업의 중심지로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사도바울 당시에 베뢰아는 부유한 유대인들이 정착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의 선교 당시 유대인들을 위한 2차 세계대전 전까지 그리스 전체에는 7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했는데 그 중에 6만 명 정도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지역에 살았다고 합니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베뢰아 에그나티아 고속도로 통해 진행
바울 사역의 큰 결실 있던 베뢰아, 교회 유적 아직도 남아있어
BC 2세기 하반기에 마케도니아 로마 총독 나이우스 에그나티우스가 건설한 고속도로인 에그나티아는 당대 많은 도시들을 번창하게 만든 젖줄이었습니다. 에그나티아 도로는 로마가 제국을 통제하고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었지만 가장 큰 혜택은 바울이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에그나티아 고속도로를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피드나(Pydna) 전투(BC 168)에서 로마가 이기자 로마에 투항한 첫 번째 도시가 베뢰아입니다. BC 49-48년에는 시저(Caesar)에게 승리를 거두기 전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지냈던 곳이 베뢰아입니다. 키케로가 데살로니가에서 피신해서 베뢰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성경을 모범적으로 상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 사람들은 바울의 전도를 받아 신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베뢰아는 사도바울의 사역에 큰 결실이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전도를 방해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주민을 선동하여 소란스럽게 하자 바울은 혼자 배를 타고 아덴으로 이동했습니다(행17:10-15).
사도바울과 예루살렘 여행에 동행했던 소바더의 아버지 부로(행20:4)가 베뢰아의 첫 결신자로 알려집니다. 선교여행을 정리하고 마케도니아를 거쳐 아시아로 가는 길에 바울의 제자들이 동행합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바울의 제자들 가운데 부로의 아들 소바더가 동행합니다. 소바더의 동행이 베뢰아에 바울의 사역과 활발한 교회활동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 소바더가 로마서 16장(21절)에 바울의 친척으로 소개되는 소바시더와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천주교 교회전통(교황령:Apostolic Constitution)에 의하면 바울이 감옥에서 만났던 ‘오네시모’가 베뢰아 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 성인들을 기리는 정교회 달력(Calendar of Orthodox)에 의하면 바울의 겉옷을 보관했던 ‘가보(딤후4:13)’가 베뢰아 교회 초대 감독이었다고 합니다. 여하간 바울의 선교로 베뢰아 지역에는 교회가 잘 세워졌었던 같습니다. 그 후에 베뢰아 지역의 기독교 활동은 활발했었고 13세기와 14세기에 세워진 베뢰아 교회들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 속에시작한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감옥도가고 연속적인 소동(행17:8,13)을 경험하고 급히 도피합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한길에도 고난과 아픔이 있을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이어 베뢰아에서도 소동을 만나뱃길로 도망가서 아테네에 도착합니다. 아마도 피레아스 항 구를 거쳐 아테네로 들어간 것으로 유추합니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로서 번성했던 도 시이며 지금은 그리스의 수도 입니다. 현존하는 도시들 가운 데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 입니다. 어림잡아도 도시의 역 사가 3000년이 훌쩍 넘습니 다. 아테네는 고대 헬라문화의 요람이라고 보아도 과하지 않 는 대표적인 헬라 도시였습니 다.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은 도 시의 수호신 ‘아테나’에서 유 래하였습니다. 아테네의 수호 신이되기위하여전쟁과지 혜의 신인 아테나와 바다와 자연의 신인 포세이돈이 경쟁했습니다. 인간에게 더 유용한 것을주는자가수호신이되 기로 했는데, 아테나는 평화와 풍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 를 선물하고, 포세이돈은 말과 샘을 선물했습니다. 결과는 아 테나가 승리했고, 그래서 도시 는 아테네라는 이름을 갖게되었답니다.
아테네에 들어서면 아크로 폴리스가 시선을 압도합니다. 헬라어로 ‘아크로’는 ‘높은’이 라는 의미이고 폴리스는 도시 국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도시 를의미를합니다.도시의언 덕 혹은 도시의 중심지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헬라문화권 에 있는 도시마다 아크로폴리 스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아 크로폴리스하면 아테네의 아 크로폴리스를 의미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을 위시한 여러 신전들이 들어선 아크로폴리 스는 헬라문명의 상징입니다.
아크로폴리스는 도시의 성 소이자 시민들의 정신적 위안 소요 피난처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아크로폴리스라 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이 아크로폴리스가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서울대학교에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있습니다. 이런 용례에 서 아크로폴리스는 민주주의 요람이나 민주광장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 아고라 광장이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로 아고라의 의미 는 ‘모이다’입니다. 아고라도 고대도시마다 있었던 ‘시민들 의 회의 장소’였습니다. 이 아고라광장은 도시 회의 장소는 물론 간단한 운동 시합장이었 고,국가나왕의메시지가전 달되는 광장이었습니다. 후기 그리스 시대에는 상인들의 노 점이 들어서고 아고라 둘레에 고정된 상가들이 들어서서 공 공시장의기능을하기도하 는 시민들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아크로폴리스 언덕
을거닐며우상신상들을보 았고 아고라 광장을 거닐며 아테네 시민들과 철학자들과 더불어 대화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 덕분에 아테네 는 들끓었습니다. 바울을 만났 던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바울 을 ‘아레오파고스’에 세웠고 바울은 아레오파고스에서 복 음을 전합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 대법원이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의 기원은 그 리스 신화에 나옵니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자신의 딸(알키 페)을 겁탈하는 포세이돈의 아들(할리로티오스)을 현장에 서 살해합니다. 당시 제우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포세이 돈은 아레스를 살인죄로 고발 합니다. 그래서 올림푸스 열두 신들이이언덕에모여서재 판을 합니다. 문헌에 나타난 역사상 최초의 재판입니다. 이 런사건을통해이언덕을‘아 레스의 언덕’이라는 의미로 ‘ 아레오파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로마의 원로원처럼 고대 그리스의 귀족 들이 사법적인 결정을 했던 장소요 기관이었습니다. 아레 오파고스는 아크로폴리스 언덕과아고라광장중간에위 치해 있습니다. 신전이 즐비하 게 늘어선 아크로폴리스 언덕 과인간군상들을내려다볼 수있는절묘한곳에인간들 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정 이 있었습니다.
고대 역사가(歷史家) 헤로 도토스(Herodotos)는 자신이 쓴인류최초의역사책'역사 (ἱστορία)'에서 아레오파고스 를 언급합니다. 페르시아 군이 침략했을 때 아레오파고스를점령했던 사실을 전합니다. BC 5세기경 솔론이 아테네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아레오파 고스는 민주주의 실험 장소로 지정되었습니다. 아테네 시민 들이 경청과 배려를 연습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공간을 의 미하기도 하고 아테네 시민법 정 기관의 이름이었습니다. 사 도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했던 시기에 아레오파고스는 모든 종교적, 정치적 사건을 재판과 교육감독도 했습니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의 도입을 아레오 파고스에서 필터링했습니다. 듣도보도못한부활의복음 을 전했던 바울의 메시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아 레오파고스에 초청강사가 되 어 설교합니다. 아테네 철학자 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파 고스로 가면서 말합니다. “네 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 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 겠느냐?(행17:19)” 바울에게 아레오파고스에서 설교를 요 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설교를 할 기회를 잡 습니다. 바울의 아레오파고스 설교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연설입니다. 복음과 바울의 헬 라문화에 대한 소양이 아테네 를 정복하는 장면입니다. 바울 의 아레오파고스 설교는 기독 교 역사는 물론 인류문화사에 찬란히 빛납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다종교 사회에서 복음증거의 길을 제시합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는 철학, 문학, 그리고 역사적 자료가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헬레니즘의 심장 ‘아테네’에서 헤브라이즘의 진수인 “복음”을 전했던 이 설교는 탁월한 인문학적 설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페쉬는 아테네의 바울 설교를 세계 문학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구절이라고 말합니다. F.F. 브루스는 신약에서 주석이 가장 풍성한 구절이라고 말합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마틴 디벨리우스 교수는 사도바울의 아테네 설교가 탁월한 헬라적인 설교라고 하면서 사도행전의 정점(Climax)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 설교를 극찬하면서도 바울의 아테네 사역은 결신자도 적고, 교회도 세워지지 않아서 실패로 규정합니다. 이런 디벨리우스의 입장을 따르는 학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아테네 지도급 인사인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니시우스가 회심합니다. 유세비우스는 아테네교회가 세워지고 디오니시우스가 아테네교회 초대감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는 고린도교회 감독을 거처 당시 대표적인 교회인 알렉산드리아교회 감독이 됩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바울 선교는 큰 결실이 있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복음증거의 모범적 설교
청중 분석 존중 배려하나 복음의 본질 양보 안해
필자가 바울의 아테네 사역이 실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테네의 경험이 다른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아테네를 닮은 도시 고린도 선교에 큰 결실을 얻습니다. 고린도에서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습니다(행18:5). 당시 고린도는 아테네와 함께 헬라를 이끌었던 도시였고 무역을 선도한 국제도시였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아시아의 아테네’였던 에베소 사역도 크게 성공합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초기에 아시아로 가려 했지만 바로 가지 못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케도니아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인도로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역 후에 최종적으로 아시아의 심장인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에베소와 소아시아 선교를 묘사하는 행19:26을 주목합니다. “(전략)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들이 아니라(후략)”라는 구절은 아테네에서 설교할 때 사용했던 말씀(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4b)과 흡사합니다. 이는 당대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빌려왔거나 그의 말을 활용했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 세네카의 말이 다섯 번 인용되었다고 합니다. 세네카는 황제 철학자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노예출신 철학자 에픽테투스와 더불어 스토아를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여러 이유로 세네카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당대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세네카의 명문장을 인용하면서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설득합니다. 문화적 자부심에 충일했던 아테네 철학자들과 시민들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특별한 반론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들보다 세네카를 더 잘 아는 바울의 논리에 감복하였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철학자들에게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이 철학을 만날 때 취할 태도의 모범이 됩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에서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며 하나님을 논증합니다. 이 말은 세네카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26절도 세네카의 말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바울은 신의 존재를 인정했던 스토아학파의 논리를 따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특히 당시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유명했던 세네카의 신론(神論)을 인용하며 참신이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순식간에 바울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그들의 신적 개념으로 하나님을 알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은 세네카의 말로 반박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철학적 논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몇몇 신약 신학자들은 헬라철학을 사용한 바울을 연구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바울은 모든 서신서에서 헬라철학을 인용합니다. 바울의 설교와 바울의 서신들을 연구한 학자는 바울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세네카, 에피메니데스 그리고 아라투스 등의 헬라 시인, 철학자들의 시구와 문장을 24회 정도 인용했다고 합니다. 고향 다소에서 수준 높은 헬라 교육을 받은 바울은 철학자들에게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총신대 신약학 교수인 한천설 박사는 바울의 아테네 설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냉철하고 논리적 설교다. 둘째, 아테네 사람들의 관심과 상황에 맞추지만 복음의 핵심을 양보하지 않았다. 셋째, 구속사역에 대한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며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라고 지적했다.’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복음증거의 모범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청중을 분석하고 청중을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현대는 다종교(多宗敎) 사회입니다. 지나치게 상황에 타협한 설교나 지나치게 청중을 무시하는 설교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상황을 고려한 상황화(Contextualized)된 설교는 힘이 있고 청중에 대한 배려는 감동을 얻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