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은 본질상 완전하게 드러나거나 알려지는 분이 아닙니다(2).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대로 살펴서, 가장 지혜로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세상 지도자의 탁월함과 영광도 보통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위가 견고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악한 자를 제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왕 앞에 서는 것을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여겨서, 자신을 드러내고 스스로 높은 체하려고 합니까? 하지만 탁월한 왕은 모든 것을 살피는 지혜를 갖추었기에 그것을 꿰뚫어 봅니다.
2. 다툼의 문제는 살면서 피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가지는 원칙이 있습니다. 앞뒤를 재지 않고 불같은 성질로 나가서 다투는 것을 피해야 하고(8), 다툴 때도 자기 변론만 해야지 상대의 은밀한 잘못을 드러내지는 말아야 합니다(9). 하물며 아주 조금의 이익을 얻자고, 이웃에 대해 거짓으로 증언하는 일은 얼마나 위험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이겠습니까(18)? 다툼이 일어날 때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상대의 허물을 들추는 일은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자고, 이웃을 해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억울하고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아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3. 이런 지혜로운 신앙은 아무리 나와 다투던 원수라고 하더라도, 그가 목마르고 주리면 물과 음식을 제공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21). 이런 행위는 원수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여 적개심을 스스로 내려놓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22). 사람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은, 비를 일으키는 북풍처럼 사람 마음에 화와 분을 일으키기 십상입니다(23). 하나님의 자녀가 다툼을 일으키는 자가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투는 여인과 큰 집에 사느니 홀로 움막에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은 다툼을 일으키는 자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24).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습니다.
4. 말에 대한 교훈입니다. 모든 말은 경우에 맞아야 합니다(11). 노래는 좋은 것이지만 마음 상한 사람 앞에서 노래하는 것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20).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그것을 듣는 귀가 누리는 영광입니다(12). 지혜롭게 책망하는 사람은 책망할 대상이 지혜로운지를 먼저 살핍니다. 충성된 사자(메신저)는 말로써 자기를 보낸 주인의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는데(13) 이것은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과 같은 것입니다(25). 이런 사람의 존재는 얼마나 귀합니까? 그는 주인의 마음을 추수 날에 얼음냉수처럼 시원하게 해드리는 자입니다.
5. 오늘날 모든 설교자가 하나님을 대하여 이런 자리에 선 사람들이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이런 자리에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충성된 사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습니까?
6. 우리는 또 말의 허황됨을 피해야 하는데 선물을 하겠다고 자랑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14). 쉼 없이 말을 많이 하는 것 보다, 오래 참고서 한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강하고 자극적인 말보다는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 더 힘이 있습니다(15). 우리는 늘 거꾸로 행동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7. 또한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꿀이 있다고 해서 ‘웬 떡이냐’ 하면서 지나치게 과식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습니다(16). 꿀을 많이 먹는 것은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이며, 어리석고 헛된 일입니다(27). 이것은 지혜를 꿀에 비유하여, 꿀을 먹으라고 한 24:13~14의 말씀과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웃집에 다니는 것,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상대방이 싫어하거나 피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17).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이나 태도, 행동이 다 여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은 형국이 됩니다(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