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18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
두아디라는 일곱 도시들 가운데 가장 비중이 떨어집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 가운데 가장 긴 편지이지만 그 도시의 중요성은 미미합니다. 두아디라는 카이쿠스(Caicus) 계곡과 허무스(Hermus) 계곡 사이에 위치합니다.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여 많은 상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나오는 루디아라는 여인은 두아디라 시의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 상인들은 동업 조합(길드)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조합마다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발생한 문제는 바고 그런 사회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1장 14-15절에(단 10장 6절)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그의 눈은 불꽃같습니다. 눈은 보는 작용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불꽃’은 심판과 관련된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죄악에 대해서 심판을 행하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 발은 빛난 주석 같습니다. 주석은 구리와 아연의 합금으로 매우 순전하고 단련된 놋쇠입니다. “심판의 위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아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
주님의 칭찬이 주어집니다.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업(주님을 위한 일일 것), 사랑(하나님을 사랑함과 다른 사람을 사랑함), 믿음(주님을 신뢰함), 섬김(봉사와 헌신), 인내 등입니다. 사업(행위. 2장 2절에 행위로 번역함)에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사업’(deeds)만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업에 4가지 내용이 속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점점 더 나아가지고 풍성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점점 발전적이었습니다. 20절에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많은 일들(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이 진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20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
주님께서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장점에 비해 너무 단접이 심각했습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네가 용납함이니”입니다. 용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랜트 오즈번은 ‘용납’은 단지 용납뿐만 아니라 지지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용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골 3장 13절. 히 13장 22절 등) 그러나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다른 복음”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고후 11장 20절) 요한계시록 2장 2절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도 교회가 용납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교회가 서로를 용납해야 하나 포용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부를 했는데 두아디라 교회는 용납을 했습니다.(2장 6절) 고린도전서 15장 33-34절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동무들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 이세벨은 누구입니까? 구약에서 이세벨은 아합의 부인으로 북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물들게 했던(왕상 16장 31절. 18장 4절, 13절, 19절 등) 사악한 여인의 대명사입니다. 자칭 선지자라고 했으니까 가르치는 것으로 영향을 미치는 여자입니다. 선지자라고 했으니까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주장을 한 여자입니다. “가르쳐 꾀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는데 ‘가르침’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 여자가 두아디라 교회의 목회자의 아내라고 주장을 하는데 증거는 없습니다.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자칭 선지자라고(주님께서 세우시지 않았음) 여자가 “내 종들”(1장 1절, 신자들. 아니면 교회의 일꾼들)을 가르쳐서 꾀었다고 합니다. “가르침”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어떤 일을 하게 했습니까? “행음하게(우상 숭배에 대한 은유로 보는 학자도 있고, 실제적인 음행 풍습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2장 14절과 비슷함) 행음과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해서는 안 되는 죄악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에 동참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는 그것을 용납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베풀고 있는데도 그것을 용납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두아디라는 무역의 중심지였고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상업 조합(길드. 예, 모직, 청동, 의복제조업, 염색업, 도자기업, 제빵업, 노예매매업 등)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생계유지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조합에 가입을 하면 우상 숭배의 제사와 그들의 잔치에 참여를 해야 했습니다. 자칭 선지자 역할을 했던 여자는 사회에서 고립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과 적당히 타협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바클레이는 “이세벨의 교훈이란 기독교인은 이 세상과 짝 지어야 하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관습을 그렇게 엄격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세벨은 기독교인이 이 세상의 보통 사업상의 관습을 금할 필요가 없으며, 구태여 그렇게 높은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고집할 필요가 없으며, 기독교인과 세상이 서로 중간 지점에서 만나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설명합니다.
21절.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한 “고집과 완고함”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자신의 고집과 완고함으로 무시를 해버렸습니다.
22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
주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그 여자를 침상에 던질(현재 시제) 것이라고 하십니다. 죄에 대한 쓴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학자들은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질병으로 눕게 하여 고통을 겪게 한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은 그녀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큰 환난”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회개의 내용은 “그의(그녀의) 행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행위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행위를 버리는 결단이 나타납니다.
23절.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
주님께서 그의 자녀를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그의 자녀”는 혈통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녀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사망”까지 말씀하시는 것은 강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겠다고 하십니다.(겔 33장 27절. 재앙으로 죽는다는 것)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의 뜻과(헬, 네프로스. 신장. 정서와 감정의 자리) 마음을(헬. 카르디아. 지성과 생각의 자리)을 살피는 자”이십니다. 예레미야 11장 20절에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렘 17장 10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신 분이라고 하십니다. 18절에 자신의 눈이 불꽃같다고 하신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는 비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죄인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십니다.(계 2장 23절. 14장 13절. 18장 6절. 20장 12절. 13절. 22장 12절) 18절에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하신 말씀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를 아시고 그것에 대해서 갚아주십니다. 각 사람의 행위는 모두 주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24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
두아디라에 남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고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짐으로 지울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안다.’는 말은 경험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에게 승리하려면 사탄의 깊은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것을 경험해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세벨이 자신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가르쳤는데, 사실은 “사탄의 길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더 나아보입니다. 이세벨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사탄의 깊은 것임을 알고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다.”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주님께 대한 충성의 길을 가면 된다는(그것 외에는 다른 짐을 줄 것이 없다는 뜻) 의미로 보입니다.
25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
그들에게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올바른 기독교 교리와 소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거짓 가르침과 반대가 되는 바른 진리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십니다. 확고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보면 배교와 타협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갑추고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내놓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진보적이고 계속적으로 지켜온 진리를 지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양한 혼란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역사적으로 교회가 고백해온 신앙 고백을 굳건하게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그것 가르침과 함께 하지 않고 바른 진리 체계를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26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
“이기는 자”는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바른 진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행위, 주님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22절의 “그의(그녀의) 행위”와 대조가 됩니다. 끝까지(‘인내’를 요구) 그것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장 6절. 3장 21절. 5장 10절. 20장 4절, 6절. 딤후 2장 12절) 시편 2편 8-9절(메시아 본문)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27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
이기는 자와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사람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은 토기장이가 흙으로 만든 토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면 산산조각이 납니다. 철장은 목자의 지팡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즉 양을 위험에 빠뜨리는 짐승들과 싸우기 위해 표면을 철로 도금한 큰 나무 막대기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시편 2편 9절에 메시아가 철장으로 대적한 자들을 깨뜨릴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5절에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분을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다스림에 함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얼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고린도전서 6장 2절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하신 말씀과 의미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왕적 통치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28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 새벽 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민 24장 17절의 예언과 관련)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새벽 별이 새벽 하늘을 다스리는 것처럼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릴 것으로 해석(핸드릭슨)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는 다니엘 12장 3절 말씀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나아보입니다.
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두아디라 목회자와 교회에 주시는 말씀도 교회 전체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