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e | 최양숙
가을이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명곡 '가을편지'를 듣다 보면 텅 빈 가슴은 어느새 추억으로 덧칠된다. 이제는 e메일, 핸드폰 문자에 밀려 사라졌지만 가을이 오면 누구나 가슴 속에 쌓여온 사연들을 글로 써서 편지를 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광속 디지털 시대에 느려터진 아날로그 편지의 활용의미는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렇지만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 한 장이 안겨주는 감동과 미덕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고은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는 가을을 대표하는 국민가요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른 가수 최양숙을 헌정공연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꿈만 같다. 대중가요사상 가장 우아했던 여가수로 기억되는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성악에 기초한 클래식한 창법으로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최양숙은 서울음대 성악과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60~70년대를 풍미했던 최초의 여성 샹송 가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성악가에서 대중가수로의 변신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때문에 데뷔 초기에는 본명이 아닌 예명 정은영이나 주미옥으로 활동을 했다. 우아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적인 보컬은 60년대 남성 팬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샹송을 전문으로 부른 가수는 한국대중음악 역사를 통틀어 손꼽을 정도지만 시작은 40년대 초기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에 유학해 성악을 전공했던 고 현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인은 전문 샹송 가수는 아니었다. 60년대에 등장한 최양숙은 국내 최초의 샹송 여가수였다. 남성 샹송 가수로는 1959년 6월 원각사에서 '샹송 독창회'를 열었던 한동훈이 있다. 60년대는 패티 페이지, 냇킹콜, 루이 암스트롱, 브렌다 리, 클리프 리차드등 세계적인 가수들의 내한공연이 줄을 이었다. 그 중 프랑스 여가수 이베트 지로의 60년대 이뤄진 두 차례 내한공연과 70년대 아다모의 내한공연은 샹송에 대한 국내 대중의 관심에 불을 지폈다. 이후 70년대에는 연세대 여대생 이미배와 모델출신 루비나가 샹송 전문가수로 활약을 했고 90년대에는 포크가수 이주원의 부인 전마리가 등장해 샹송 가수의 명맥을 이었다.
서울음대 성악과 출신 대중가수의 계보도 살펴보자. 우선 최양숙보다 앞선 1959년 서울음대 성악과 3학년 때 독일로 진출해 클래식과 민요를 주 레퍼토리로 활동했던 릴리화(본명 최정환)가 있다. 1960년 라디오주제가 '눈이 내리는데'로 데뷔해 1963년 '황혼의 엘리지'로 스타덤에 오른 최양숙이 뒤를 이었다. 팔방미인인 조영남의 등장은 1966년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8년 전경옥이 1998년 신개척지인 아트 팝 음반을 발표했다. 그게 전부다.
193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최양숙은 자고 나면 발성연습을 하듯 울음부터 터뜨렸던 울보였다. 원산 명석보통학교 시절 학업은 물론 소학교 콩쿨대회에서 상을 독차지했던 탁월한 재능의 아이였다. 12살 때 6.25 전쟁이 터져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월남해 피난민을 위해 임시로 운영된 무학여중에 다녔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지라 부친은 의대 진학을 원했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올라온 최양숙은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성악가의 꿈을 안고 1954년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서울예고는 1953년 11월 이화예고에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는 오현명과 정훈모 선생에게 성악을 사사 받았다. 여고 시절 반장은 물론 학교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재원이었다.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학업성적뿐 아니라 1955년 10월 11일 서울음대에서 주최한 '제7회 전국 중고등학생 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 부문 1등 상을 수상해 교내외에서 촉망받는 성악가로 주목받았던 유명인사.
1957년 3월, 서울예고 수석 졸업 후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진학했다. 대학 2학년 때 오페라극 '라 트라비타'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그녀의 꿈은 세계적인 오페라가수였다. 대중음악과의 인연은 그해 서울대와 이화여대생들이 주축이 된 KBS 합창단원으로 몇 달간 동남아 순회공연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오랜 항해의 지루함을 잊기 위해 선상의 즉석 음악경연대회에서 출연해 샹송 '쟈니 기타'를 불러 큰 호응을 얻었다. '가수로 전향해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1958년 가을 귀국 후, 김희조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쟈니기타'와 '핫샤바이' 두 곡을 녹음하며 대중가수로 외도를 시작했다. 쓸쓸함이 담겨있는 독특한 저음의 음색으로 노래한 그녀의 샹송 노래는 그 고급스런 분위기 때문에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때 본명이 아닌 '정은영'이란 가명으로 취입을 했다.
이후 KBS 라디오 드라마 [어느 하늘 아래서]의 주제가인 한운사 작사, 손석우 작곡의 '눈이 내리는데' 를 가슴 저리는 감성으로 불렀다. 이 모든 것은 당시 남산 KBS의 음악과장이던 조백봉이 합창단에서 활동하던 그녀의 노래에 반해 이뤄졌던 일이다. 드라마주제가가 방송을 타자 대번에 제자의 음색을 눈치챈 당시 서울대 음대학장 현제명 선생에게 불려가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작 음반 취입 때는 당사자가 서울에 없어 한명숙과 블루벨즈의 노래가 재녹음 되었다.
주미옥이란 이름으로 뷔너스레코드를 통해 발표된 '내 옛날 꿈이'역시 대학 시절의 녹음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몇 곡의 대중가요를 취입했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여전히 그녀는 서울시향에 소속되어 성악 활동을 계속했다. 1962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결혼을 한 그녀는 모교인 서울예고 음악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교직 생활이 적성이 맞지 않고 건강까지 나빠져 공백기를 가졌다.
그녀를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로 인도한 것은 예그린악단과의 인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음악생활을 시작하면서 이호로, 김광수의 주선으로 MBC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본명을 사용했다. 김호길 작곡의 '그리운 눈동자', '사랑한다고 말해다오' 뿐 아니라 샹송 곡 '빠담빠담', '사랑의 찬가', '루나롯싸' 등이 조용하게 히트가 되며 '최양숙'이란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폭넓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63년쯤. 오아시스레코드로 픽업되어 막 작곡가 활동을 시작한 서울음대 선배 박춘석의 처녀작 '황혼의 엘리지'와 김영광 곡 '모래위의 발자욱'을 취입하면서부터. '황혼의 엘리지'는 이미 선배 가수 백일희가 재즈풍의 곡으로 취입했던 노래였다. 하지만 최양숙이 부른 애잔한 분위기의 '황혼의 엘레지'를 리메이크해 빅히트를 터트리며 자신의 대표곡이 되었다.
1963년 최양숙은 최희준과 함께 'UN센터'에서 이봉조악단과 무대에 올랐다. 서울음대 출신이라는 학벌 프레미엄에 우아하고 맑은 음색은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박춘석을 비롯해 손석우, 김영광, 김동현, 이호등 여러 작곡가들의 창작곡과 '파리의 하늘밑', '사랑의 찬가', '장미빛 인생', '라메르'등 샹송 번안곡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고 신성일 남정임주연의 영화 [초연]의 주제가를 부르며 왕성한 활동을 재개했다. 1966년은 그녀의 음악인생 최고의 해. '황혼의 엘리지'가 공전의 빅히트를 이어가며 제2회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최희준과 함께 남녀 가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공보부에서 시상하는 무궁화 상을 비롯해 무려 6개의 가요 관련 상을 싹쓸이하며 최정상의 가수로 떠올랐다.
1967년 6월 '몬트리올 엑스포67 박람회'에 대중가수로서는 유일하게 아리랑예술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민간외교관 역할을 했다. 이때 전 시향지휘자 김생려의 주선으로 미국 뉴욕, 투에르토리코에 이어 프랑크 시나트라의 주 무대였던 라스베스가스 디저트 인 쇼 무대에 진출했다. '베로니크'란 프랑스어 예명을 사용한 그녀는 힐튼호텔과 계약을 체결해 전 세계 힐튼 체인망을 따라 노래를 하며 샹송의 본고장 파리를 비롯해 이태리, 벨기에, 필리핀, 홍콩, 일본을 도는 순회공연을 1년 5개월여 동안 펼쳤다.
샹송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던 그녀는 귀국 후인 1968년 11월 시민회관 귀국공연에 이어 남산 회현동에 모던한 감각의 라이브카페를 겸한 고급 한정식집 '산장'을 개업하며 사업가로 거듭났다. 그해 12월 일본 NHK TV에 출연에 이어 1970년 1월에는 일본작곡가 고지 요시유키의 주선으로 일본 콜롬비아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독집 [베로니크의 미드나잇 스페셜-일본데논사.1970년]을 발매하는 등 국제적인 행보를 거듭했지만 대박성공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가요계 최정상에 등극했던 최양숙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활동이 다소 주춤했다.
기성세대들을 제치고 청년들이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떠오른 1970년대는 통기타 소리가 요란했던 포크송 열풍 시대였다. 군사정권의 통제가 극에 달했던 당시, 청년들은 사회가 혼탁해지면 질수록 맑고 은유적인 포크 가락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순수함을 더욱더 추구했던 것은 기성세대가 구축한 혼탁한 사회에 대한 염증이었고 낡은 가치관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국민가요 '아침이슬'을 세상에 내놓은 김민기가 한국 포크의 살아있는 전설로 대접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포크송의 기세등등하고 도도했던 열기는 여러 가지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 중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던 이미자, 나훈아 같은 트로트 가수들까지 포크송을 취입했던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최초의 여성샹송 가수인 최양숙도 예외는 아니었다. 통기타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1971년, 그녀는 의미 있는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다. 1971년 1월 1일, 그녀는 신보 [세노야 세노야]를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사실 이 음반의 초반 수록곡들은 팝송과 샹송 번안곡들이 주종을 이룬 평범한 가요 음반이었다. 문제는 이 음반의 발매 직후 다시 제작되면서부터. 음반에 뒤엉킨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보자.
최양숙의 친오빠인 최경식은 역사적인 김민기 독집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던 당대의 저명한 평론가다. 그는 1970년 명곡 '아침이슬'이 처음 발표된 명동 YWCA 청개구리 홀의 개관에 참여하며 포크송 보급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때 청개구리 홀에서 인연을 맺은 서울미대생 김민기의 음악성을 높이 산 그는 외국 포크송이 아닌 우리의 얼이 담긴 포크송 창작을 독려했다.
당시 평론가 최경식은 자신과 함께 CBS에서 라디오방송을 진행했던 고은 시인의 시 '세노야'와 '가을편지'를 포크송으로 소개할 요량으로 서울음대 작곡과 여대생 김광희와 서울미대생 김민기에게 멜로디 작업을 의뢰했다. 이제는 한국 포크의 명곡으로 각인된 두 곡은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되어 방송을 탔고 최양숙의 1971년 1월 신보를 통해 가장 먼저 공식 발표되었다. 고은의 시가 대중가요로 변신해 지금껏 애창되고 있는 노래는 3곡이나 된다. '세노야'는 서울음대 김광희가 작곡을 해 노래까지 불러 최초로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고 음반으로는 최양숙이 가장 먼저 취입했지만 양희은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노래다. 이 곡은 1971년 발표된 최양숙 초반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동진의 명곡 '작은 배'와 '가을편지'가 있다. 문제는 '가을편지' 작곡 이후 포크송 창작 작업에 의욕이 넘쳤던 김민기가 창작 포크송 '꽃피우는 아이'를 만들어 최경식에게 들려주면서 시작되었다.
김민기의 창작 포크송을 듣고 감탄한 최경식은 이미 제작된 여동생 최양숙의 평범한 가요앨범을 포크 질감의 선구적 앨범으로 다시 제작해야겠다는 중대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제작사인 대도레코드는 이미 제작한 최양숙의 신보를 과감하게 버리고 앨범재킷과 수록곡을 대거 수정해 재발매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에 최양숙은 김민기의 클래식 기타 연주에 맞춰 '꽃피우는 아이'를 취입했고 기존 노래들까지 통기타 중심의 편곡으로 다시 취입했다. 그렇게 재발매된 음반이 '꽃피우는 아이'가 타이틀로 장식된 앨범이다. 초반과 재반의 음반번호는 'EU715'로 동일하다. 하지만 최양숙의 얼굴 사진이 크게 장식했던 촌스런 초반 재킷은 신선한 감각의 디자인으로 수정되었고 타이틀곡도 '세노야 세노야'에서 '꽃피우는 아이'로 교체되었다. 이에 초반에 수록된 '까치', '떠날 수 없는 아픔', '현해탄의 무지개', '빗소리', '백조의 호수'등 무려 5곡이 재반에서는 빠졌고 그 자리에 '꽃피우는 아이'와 한국중가요의 고전인 '사의 찬미', 번안 곡 '젊은 날의 그 시절', '지난 여름의 왈츠', '사랑하는 마음' 등 5곡이 추가되었다. 김민기의 참여로 작품성이 강화된 재발매 신보가 발표된 후, 최양숙은 1971년 5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컴백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변신한 모습을 대중에게 의욕적으로 과시했다.
샹송가수 최양숙이 포크가수로 변신했다는 사실만으로 관심을 이끌어냈다. 예상외의 호응에 고무된 대도레코드는 곧바로 신인 포크가수 김민기의 독집(음반번호 EU716)까지 연이어 발표했다. 제법 팔려나가던 최양숙과 김민기의 포크 앨범은 갑자기 음반 진열대에서 사라졌다. 이듬해인 1972년 봄, 전도양양해 보였던 최양숙의 음악적 변신과 도전은 군사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김민기로 인해 꽃피우지도 못하고 숨죽여야 했다. 김민기의 독집이 그랬듯 그녀 앨범도 타이틀곡 '꽃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운명을 함께 했던 것. 의욕을 가지고 도전했던 최양숙의 시도는 주목받기도 전에 숨죽여야 했다. 금지의 아픔을 겪은 최양숙은 활동을 접고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73년 여름, 명동에 소재했던 살롱 '라데빵스'에 다시 출연하면서부터다. 의욕을 박탈당해 소모적 음악 활동에 머물렀던 당시, 그녀는 1974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했던 제1회 한국가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반전의 기회를 맞이했다. 1975년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된 '가을편지'를 악단 세션으로 재녹음해 다시 세상에 내놓자 빅히트가 터졌다. 노래에 담긴 짙은 계절의 고독감은 여전히 향내가 진동했고 탁월한 서정성은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시키며 이 노래에 불멸의 생명력을 부여했다. '가을편지'의 절정은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하는 대목일 것 같다.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운 심정, 이보다 더 심오한 고독의 정의가 어디 있겠는가.
계절의 고독감이 짙은 탁월한 서정성은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시키며 이 노래에 불멸의 생명력을 부여했다. 작곡자인 김민기는 물론이고 양희은, 최백호, 이동원, 조관우를 비롯해 최근에는 보아까지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가수는 실로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무수하다. 고은의 시가 대중가요로 변신한 노래는 3곡이다. 하나같이 불멸의 명곡들이다. 김광희가 최초로 부르고 양희은이 히트시킨 '세노야', 조동진의 '작은 배' 그리고 '가을편지'다. 동요 '등대지기' 역시 영국 민요에 고은의 시를 노랫말로 붙인 것이다. 사람이 그리운 가을. 오랜만이라 서툴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적은 손 편지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그 편지는 받는 이의 가슴에 작은 행복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이지적인 외모의 최양숙은 60년대 기라성 같은 가요계의 스타들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지요. 「 가을편지 」를 필두로
「 눈이 내리네 」, 「 호반에서 만난사람 」, 「 황혼의 엘레지 」등 수많은 힛트곡을 우리들에게 선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샹송가수 최양숙, 특이한 창법과 미모에 이끌리어 이 시천도 70년대 초부터 최양숙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지요.
저음의 가수 이미배에게도 많은 관심과 호응을 보낸적이 있었지요. ㅋ ㅋ 검달님의 화려한 히스토리 소개에 몰랐던
최양숙의 이모저모도 알게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성악을 하셨네요 ...
가을에 잘 나오시는 이미배님 하구 헷갈려요 ㅋㅋ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