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여대생 피살사건
진범으로 몰린 대학생 장씨와 정씨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 혹은 무죄선고를 받아 자세한 발생원인을 알기는 어렵다. 피해자 박양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만으로 박양과 교제 중이던 사람들을 연행·조사하여 간접증거만으로 무리하게 기소한 사건이다.
1. 시기
1981년 9월 21일
2. 관련인물과 사건전개
가. 관련인물
박00(피해자), 장모씨(피의자), 정모씨(피의자)
나. 사건전개
경찰은 9월 28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이미 신병을 확보한 대학생 장모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고 발표했다. 장씨가 박양을 불러내 남서울호텔 나이트클럽으로 가서 놀다가 밤 11시 30분쯤 나와 잠실 쪽으로 가던 중 야적장 부근에서 내려 삼정장여관에 들어가려 했으나 박양이 거절하는 바람에 티격태격하다가 우발적으로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숨진 박양의 오른쪽 귀밑에 있는 이빨자국과 용의자 장씨의 치열이 거의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통보를 받았고, 박양의 티셔츠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2개를 감정한 결과 혈액형이 장씨와 같은 A형이며, 장군이 박양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면서도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제대로 대지 못해 범인으로 확신했다. 용의자 장씨는 1981년 여름 박양이 미국으로 연수를 갔을 때 알게 되어 교제 중이었다.
장씨의 자백은 받았지만 사건발생 10일이 넘도록 경찰은 물증인 금반지 2개와 현금 10만원 등은 찾아내지 못했다. 또 부검과정에서 피살자로 추정되는 남자의 혈액형을 판별하는데도 실패했다. 박양의 티셔츠에서 발견된 머리카락도 A형이 아닌 O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지만 용의자 장씨를 진범으로 발표할 수 없었던 경찰은 육감수사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으며, 검찰의 수사지휘를 요청하였다. 검찰에서는 장군을 직접 심문한 후 증거가 불충분하고, 피의자가 자백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귀가조치 시켰다가 11월 28일 장씨를 살인 및 사체유기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그러던 중 1982년 1월 24일 서울지검은 대학생 정모씨가 몰고 다니던 포니승용차 시트커버에서 박양의 것과 동일한 혈흔이 검출되었다고 하면서 진범을 검거하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재판부는 박양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선고에서 “피고인의 최초 자백 시부터 3회 피의자 신문 때까지의 자백은 수차례 걸쳐 변경되어 있어, 이 사건 범행의 구체적 내용을 알고 자백한 것인지 여부에 관하여 의문이 있다”고 했다. 또한 검찰이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출했단 승용차 시트커버의 혈흔에 대해서도 “시트커버나 베개커버 위의 혈흔이 피해자의 혈액이 묻어 생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2개의 머리받침대를 사용한 일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두 개의 베개커버에서 혈흔이 검출된 사실 등으로 직접적인 자료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3. 대책
경찰이 먼저 사건을 맡아 수사하면서 미국연수 동기생인 장씨를 연행했을 때 인권과 증거문제가 대두되어 검찰이 정밀수사 끝에 장씨를 풀어주었었다. 그런 뒤 검찰은 다시 정씨를 진범으로 확정했고,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판결 전 “무죄가 나온다면 이제 모든 수사기관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수사도 법원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은 그만큼 자신 있는 수사를 했는데, 재판결과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자백만이 아닌 명확한 물증(직접증거)의 필요성과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사건으로 당시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어제의 오늘]1982년 여대생 피살 용의자 무죄 판결
출처 : 경향뉴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객관적 증거가 부족해 사실로 인정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관용구처럼 이 말을 되뇐다. 또한 이 말은 의심을 살 만한 심증적 정황이 충분해도 구체적 물증이 없다면 범죄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법언(法諺)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81년 9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공터에서 여대생 박모씨가 사체로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이 사건은 신문 제목을 연일 시커멓게 장식했고 단숨에 전국적 관심을 끌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박씨와 교제 중이던 해외연수 동기생 장모씨로부터 범행을 자백받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장씨의 자백 외에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치흔(齒痕)이 장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점 때문에 범인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다. 장씨는 결국 15일 만에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검찰에 의해 풀려났다.
이듬해 1월 새로운 용의자가 검거됐다. 피해자의 또 다른 해외연수 동기생 정모씨였다. 이번에도 경찰은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자백이었다. 또 피해자의 것과 동일한 혈액형의 혈흔이 묻은 정씨의 자동차 시트 커버를 증거로 제시했다. 첫번째 용의자 장씨를 풀어주었던 검찰도 이번에는 공소유지를 자신했다.
그러나 1심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정씨의 자백 내용이 수차례 변경됐으며 이는 부정확한 기억을 되살린 것이 아니라 자백에서 범죄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을 수정해 진술토록 한 것으로 보여져 신빙성이 없다는 점, 차에서 발견된 혈흔이 피해자의 혈액형과 일치한다 해도 그것이 피해자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 등이 무죄 판단의 근거였다. 항소심 재판부도 같은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정씨는 구속된 지 309일 만인 11월20일 석방됐다.
1년 넘게 전국적 관심을 집중시켰던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았다. 하지만 이 사건의 수사·기소·재판 과정에서 증거재판주의, 피의자 인권, 과학수사 등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또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으면 범죄가 될 수 없다’는, 당연하면서도 걸핏하면 간과되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켰다.
<유신모기자>
첫댓글 이러면 앞으로도 미제사건이 많이 일어날수도있겠네요.....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면.............
그 만큼 인권이 많이 향상 되었다는 뜻이네요. 99명을 놓쳐도 억울 한 1명이 있어서는 않된다는 ...............
이거 죄와벌에서햇던거자나.... 포니승용차그놈아버지가대단하놈이여서빠져나간거던데...??
맞아요.빽의 권력이 더 컸던 시절의 사건 ㅎ
정씨가 모 재벌 회장의 친척이라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