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다종교 사회에서 복음증거의 길을 제시합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는 철학, 문학, 그리고 역사적 자료가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헬레니즘의 심장 ‘아테네’에서 헤브라이즘의 진수인 “복음”을 전했던 이 설교는 탁월한 인문학적 설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페쉬는 아테네의 바울 설교를 세계 문학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구절이라고 말합니다. F.F. 브루스는 신약에서 주석이 가장 풍성한 구절이라고 말합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마틴 디벨리우스 교수는 사도바울의 아테네 설교가 탁월한 헬라적인 설교라고 하면서 사도행전의 정점(Climax)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 설교를 극찬하면서도 바울의 아테네 사역은 결신자도 적고, 교회도 세워지지 않아서 실패로 규정합니다. 이런 디벨리우스의 입장을 따르는 학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아테네 지도급 인사인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니시우스가 회심합니다. 유세비우스는 아테네교회가 세워지고 디오니시우스가 아테네교회 초대감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는 고린도교회 감독을 거처 당시 대표적인 교회인 알렉산드리아교회 감독이 됩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바울 선교는 큰 결실이 있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복음증거의 모범적 설교
청중 분석 존중 배려하나 복음의 본질 양보 안해
필자가 바울의 아테네 사역이 실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테네의 경험이 다른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아테네를 닮은 도시 고린도 선교에 큰 결실을 얻습니다. 고린도에서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습니다(행18:5). 당시 고린도는 아테네와 함께 헬라를 이끌었던 도시였고 무역을 선도한 국제도시였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아시아의 아테네’였던 에베소 사역도 크게 성공합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초기에 아시아로 가려 했지만 바로 가지 못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케도니아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인도로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역 후에 최종적으로 아시아의 심장인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에베소와 소아시아 선교를 묘사하는 행19:26을 주목합니다. “(전략)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들이 아니라(후략)”라는 구절은 아테네에서 설교할 때 사용했던 말씀(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4b)과 흡사합니다. 이는 당대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빌려왔거나 그의 말을 활용했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 세네카의 말이 다섯 번 인용되었다고 합니다. 세네카는 황제 철학자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노예출신 철학자 에픽테투스와 더불어 스토아를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여러 이유로 세네카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당대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세네카의 명문장을 인용하면서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설득합니다. 문화적 자부심에 충일했던 아테네 철학자들과 시민들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특별한 반론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들보다 세네카를 더 잘 아는 바울의 논리에 감복하였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철학자들에게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이 철학을 만날 때 취할 태도의 모범이 됩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에서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며 하나님을 논증합니다. 이 말은 세네카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26절도 세네카의 말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바울은 신의 존재를 인정했던 스토아학파의 논리를 따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특히 당시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유명했던 세네카의 신론(神論)을 인용하며 참신이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순식간에 바울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그들의 신적 개념으로 하나님을 알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은 세네카의 말로 반박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철학적 논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몇몇 신약 신학자들은 헬라철학을 사용한 바울을 연구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바울은 모든 서신서에서 헬라철학을 인용합니다. 바울의 설교와 바울의 서신들을 연구한 학자는 바울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세네카, 에피메니데스 그리고 아라투스 등의 헬라 시인, 철학자들의 시구와 문장을 24회 정도 인용했다고 합니다. 고향 다소에서 수준 높은 헬라 교육을 받은 바울은 철학자들에게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총신대 신약학 교수인 한천설 박사는 바울의 아테네 설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냉철하고 논리적 설교다. 둘째, 아테네 사람들의 관심과 상황에 맞추지만 복음의 핵심을 양보하지 않았다. 셋째, 구속사역에 대한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며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라고 지적했다.’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복음증거의 모범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청중을 분석하고 청중을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현대는 다종교(多宗敎) 사회입니다. 지나치게 상황에 타협한 설교나 지나치게 청중을 무시하는 설교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상황을 고려한 상황화(Contextualized)된 설교는 힘이 있고 청중에 대한 배려는 감동을 얻게 합니다.
서양 문화 모두 품은 국제도시이며 종교 백화점
세계선교 꿈꾼 바울의 최적지, 사역에 집중 큰 결실
고린도에서 18개월간 사역을 마친 바울은 귀환 여정에서 에베소를 찾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잠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갑니다. 2차 선교여행 초기에 아시아선교를 원했지만 성령님이 막으셨는데 결국 2차 선교 마지막 여정이 아시아의 중심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를 떠나며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3차 선교여행에 다시 찾아옵니다. 에베소는 성경에 16번 등장합니다. 신약에서 중요한 도시입니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으로 에베소에 돌아와 말씀을 배웠지만 성령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안수합니다. 바울의 안수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바울도 기사와 이적을 행하며 힘차게 사역합니다.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매일 성경을 가르칩니다. 또 아시아 선교를 하며 모든 아시아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행19:10). 이 때 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교회들이 세워졌었을 것으로 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에베소 사역에 집중했고, 놀라운 사역의 결실을 얻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선택했던 거점도시였습니다. 에베소의 역사는 BC 13-14 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초에는 아마존부족들이 거주했고, 힛타이트족들이 거주했던 도시입니다. 에베소는 카이스테르(Cayster)강과 에게(Aegean)해를 접한 항구도시요 터키 내륙과 고속도로가 연결된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당연히 에베소는 번창하는 무역도시였습니다.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에베소를 가리켜 ‘소아시아 최고의 상업도시(the greatest commercial center in Asia minor)’라고 했습니다.
에베소는 교통과 산맥과 강 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인 이유로 다민족, 다문화 대형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일찍이 무역, 종교, 문화 등등으로 유명한 도시로 부상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제국 안에서 가장 부요한 지역인 소아시아지역의 중심도시로 부상하였습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제국뿐 아니라 동서양 문화를 모두 품은 국제도시였습니다.
동서양의 종교가 성행한 에베소는 종교 백화점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원래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는데 그 규모가 미식 축구장만 했다고 합니다. 이 아데미 신전은 BC 6세기에 건축되었는데, 헬라 제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습니다. 이 아데미 신전은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이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신전은 규모와 정교함이 탁월한 걸작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아데미 여신을 숭배했던 사람들은 바울이 아데미를 모독했다고 소동을 일으킵니다(행19:28-29).
또 에베소 시민들은 제우스와 헬라의 신들을 섬겼고, 로마 황제 숭배와 각 나라 무역상, 여행객 이민자들이 가져온 많은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종교 백화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집트에서 건너온 이시스(Isis) 숭배와 세라피스(Sarapis)가 성행했는데 이런 신들을 숭배하기 위한 화려하고 웅장한 신전들이 에베소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마술(Magic), 주술(Incantation), 그리고 축신(Exorcism)이 흥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떠돌이 마술사들이 바울을 흉내 내다가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기록합니다(행19:13-16). 이 말씀이 에베소의 역사와 일치합니다. 에베소의 복음화는 이런 우상들을 극복하는 것이었고 우상의 극복은 주의 말씀이 흥왕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행19:19-20). 에베소에 마술이나 주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에베소는 예술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많은 예술가들의 고향으로 알려집니다. 플루타크(Plutarch)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술가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했고, 손으로 직접 무엇을 만드는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하류 시민으로 대접받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예술가들은 다른 도시들보다 나은 평가를 받았고, 예술가들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런 에베소 예술은 에베소 건축술을 만나며 놀라운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예컨대 광장(Public Squares), 경기장(Stadium), 체육관(Gymnasium), 그리고 극장들(Theaters)입니다. 지금도 에베소를 방문하면 대형극장의 유적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피온산(Mount of Pion) 언덕에 세워진 극장은 2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런 에베소 극장은 규모뿐만 아니라 정교함에 있어서도 탁월합니다. 소수의 성지 순례객들이 합창을 해도 공명을 통해 야외극장 전체에 청아한 소리가 전해지는 것을 봅니다.
에베소의 위치, 에베소의 문화적 기반 그리고 혼잡한 종교적 상황은 바울에게는 매력적인 선교지였습니다. 게다가 에베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거주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던 선교사 바울에게는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할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를 살펴보니 바울이 아시아를 가고자 애를 썼던 이유, 2차, 3차 선교여행에 연속 방문했던 이유, 그리고 가장 오래 사역했던 이유를 깨닫습니다. 세계 선교를 꿈꾸는 바울은 에베소 복음화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에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테네와 고린도를 통해 바울을 준비시키고, 훈련시켜 에베소 사역에 임하게 합니다. 준비된 바울 사역에 은혜를 주셔서 에베소 사역에 큰 결실을 맺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를 방문하고 이어서 헬라를 방문하고 아시아로 돌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드로아(Troas)에 잠시 머물며 주간의 첫날(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성찬식과 설교를 합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앗소로 가서 헤어졌던 일행들을 만나 일행들과 함께 미둘레네(Mitylene), 기오(Chios) 그리고 사모(Samo)를 지나 밀레도(Miletus)에 도착합니다. 그러니까 밀레도는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마지막 지점입니다.
밀레도(Miletus)는 소아시아(Asia Minor) 서쪽의 출구 역할을 하는 항구 도시였으며 라트미안 만의 남부 해안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의 밀레도는 해안에 자리 잡은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강과 바다에서 밀려온 침전물이 쌓여서 큰 배의 출입이 어려워졌고, 지금은 항구가 메워져 해안에서 7-8km 떨어진 내륙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밀레도는 성경에 꼭 두 번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와 밀레도에서 말씀을 나눕니다. 밀레도는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 등장합니다. 인생을 정리하는 바울이 밀레도에 둔 병든 드로비모(Trophimus)를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된 바울의 밀레도 설교는 사도행전의 다른 설교들과는 차별성이 부각되는 설교입니다. 특히 바울의 밀레도 설교는 성도들(장로들)에게 주었던 메시지라는 차원에서 바울의 서신서 교훈과 설교 내용이 비교되기도 했습니다. 디벨리우스는 누가의 창작성을 강조하면서 서신서의 가르침과 바울의 밀레도 설교의 가르침의 차이를 강조했습니다.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마지막 지점...교회론과 목회론 풀어 설교
BC 6세기 가장 번성한 학문의 도시, 대형극장엔 유대인 좌석도
반면 루돌프 페쉬(Rudolf Pesch)는 이 설교의 메시지와 사도 바울이 쓴 목회서신이 유사하다고 전제하면서 몇 가지 이유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성령에 의해 장로들이 세워졌고, 둘째로 목회서신이 전제하는 것처럼 거짓교사 출현을 언급하고, 셋째 이 설교와 목회서신에서는 복음과 바울의 권위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 예르벨(Jacob Jervell)은 바울의 이 설교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만 전한 메시지가 아니라 당시 전체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전한 설교에서 교회론과 목회론을 풀어 설명합니다. 설교에는 회상(행20:18-21), 전망(22-24), 자기변명(25-27), 경고(28-31), 축복(32-35) 등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구조분석을 하는 근거는 22절, 25절, 32절에 지금(Now)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장로들을 설득하면서 예수님처럼 그리고 자신처럼 교회와 양떼를 돌보라고 권면합니다.
밀레도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대 도시입니다. 밀레도는 BC 14세기에 요새화된 도시입니다. 망하기도 했지만 다시 일어나 BC 6세기경에는 이오니안 해양 산업의 선도적인 중심지로 출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BC 334년에 알렉산더 대제가 정복하자 밀레도는 새 역사를 맞이합니다. 이때 놀라운 건축물들이 밀레도에 세워졌고 밀레도는 크게 번창했습니다.
밀레도는 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한 학문의 도시입니다. 고대 헬라 역사 지리학자 헤카타이오스(Hekataios)가 밀레도 출신입니다. 또 최초의 철학자,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과학자로 알려진 탈레스(Thales)가 밀레도 사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탈레스는 고대 그리스 7대 현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탈레스는 그가 창시한 밀레도 학파 때문에 유명합니다. 밀레도 학파는 그리스 최초의 철학 학파입니다.
밀레도 학파는 탈레스 이후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가 이끌어갔습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보다 백 년 이상 앞선 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당시 성행했던 헬라 신화적 관점이 아닌 새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이들은 만물의 근원을 자연의 논리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밀레도 학파를 자연 철학파로 분류합니다. 따라서 탈레스의 또 하나 이름은 자연철학자로 부릅니다.
좁은 반도에 위치한 밀레도는 네 개의 항구를 가진 해양도시였습니다. 태풍과 외침을 막아주는 지형 조건은 평화를 누리는 조건이 되기도 했지만 노리는 적들이 많아 많은 전쟁의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침략과 멸망 그리고 재건이 반복되었는데, 재건될 때마다 번창했습니다. 성서지리학자 마크 윌슨은 자신의 책(Biblical Turkey)에서 밀레도가 BC 6세기경에 가장 번성한 헬라 도시(most prosperous Greek city)라고 말합니다.
밀레도는 농업도시로 출발했습니다. 곡물, 포도, 그리고 올리브의 생산으로 밀레도는 큰 부를 누렸습니다. 아울러 밀레도에는 시장들이 발달했습니다. 미첼 레디쉬(Mitchell G. Reddish)는 ‘밀레도에 세 개의 시장(Agora)이 있었고, 그 중 남부시장은 고대 헬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답니다.
밀레도에는 대형극장이 있었습니다. 헬라 시대에 5천3백명 정도를 수용했는데, 로마시대에는 1만5천명으로 확장되었고, 로마 말기에는 2만5천명으로 계속 확장했습니다. 이 극장의 의자들에 새겨진 글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다섯 째줄, 서쪽에서 두 번째 줄 의자들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유대인들 좌석”이라고 새겨 있습니다. 데이빗 그레이브는 자신의 책 “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에서 ‘이는 유대인 지정석을 의미하고, 이는 밀레도에 상당수의 유대인이 거주한 증거다’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2년간 구금생활한 곳...13세기 십자군전쟁까지 성장세 지속
건축전문가 헤롯대왕의 건축 도시로 알렉산드리아의 라이벌로 부상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체포당합니다. 체포된 바울이 로마총독이 머무는 가이사랴(Caesarea)로 옮겨져 2년간 구금생활을 합니다. 이 가이사랴는 백부장 고넬료(Cornelius)가 근무했고, 베드로를 초청했던 곳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빌립 집사가 전도자가 되어서 선교를 하다가 정착해서 살았던 곳이 가이사랴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헤롯 아그립바왕이 가이사랴에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가까운 이 가이사랴는 헤롯의 아들 빌립이 통치하면서 만든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와 다릅니다. 헤롯 빌립은 자신과 로마의 황제 가이사랴(Caesarea) 이름을 넣어 도시의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와 다른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 바닷가의 가이사랴) 혹은,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Caesarea Palestine)’라고 불렸는데, 지중해 해안가에 우뚝 선 로마시대 행정 도시였습니다.
가이사랴는 원래 페르시아 시대에는 베니게(Phoenician)사람들이 거주했던 스타라토 망대(Strato's Tower)라는 도시였습니다. BC 103년 로마가 정복하였고 가이사랴 황제가 헤롯대왕(Herod the Great)에게 주었고 헤롯대왕은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서 국제 해양도시로 건설후 가이사랴에게 바쳤습니다. 건축전문가 헤롯대왕은 괄목할만한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예컨대 예루살렘 성전, 여리고 겨울 궁전, 사해해변에 세운 마사다 요새 등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 받는 건축이 도시 가이사랴 건축입니다.
헤롯대왕은 가이사랴 건설공사를 진두지휘하였습니다. 헤롯은 이 도시를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 가이사랴(Caesarea Augustus)황제에게 헌정합니다. 헤롯은 이 도시건설을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투자했다고 성서지리학자인 데이빗 패드필드(David Padfield) 목사는 주장합니다. 건축전문가였던 헤롯대왕이 온 정성을 다해 건설했습니다. 가이사랴의 규모와 수준은 현대의 건축전문가들도 인정할 만큼 엄청납니다. 당시 최고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라이벌 도시로 부상할 만큼 선진화된 도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놀라운 인공 항구도시입니다. 가이사랴는 현대의 건축술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화려한 도시입니다. 석회암(Limestone)이 많이 사용되었고, 도시 중심가에서 극장으로 연결된 도보는 모자이크 벽돌로 구성되었습니다. 수천 개의 기둥들이 도로변에 세워졌고 그 중에 1천300개가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가이사랴의 활발한 해양무역을 가늠케 하는 대형 물류창고가 발굴되었습니다. 아울러 고대 중국의 도자기가 가이사랴에서 발굴되어 중국과의 교역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하기도 합니다.
헤롯대왕은 가이사랴에 궁궐, 로마황제신전, 극장, 시장, 경기장, 원형극장 그리고 상하수도 시설 등을 건설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극장은 4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극장입니다. 극장 유적에서 본디오 총독 빌라도(Prefect Pontius Pilate)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 발굴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2:20-23에 헤롯 아그립바왕(헤롯대왕의 손자)이 백성들에게 연설하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극장에서 연설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유대인 사학자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헤롯 아그립바왕이 닷새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가이사랴의 헤롯 항구는 대단한 시설과 규모를 자랑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 항구를 아테네 항구인 피레우스(Piraeus)와 비교하면서 경이로운 시설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주변에 섬도 없고, 만도 없는 조건 속에서 이런 항구의 건설은 역사상 최초의 건설공사로 알려집니다. 아쉽게도 이 항구는 AD 130년경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물이 부족했습니다. 목욕 문화가 발달했던 로마시대에 물이 부족한 도시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Carmel) 수니(Shuni) 샘에서 상수도로 물을 관개했습니다. 이 상수 시설은 인구증가로 확장을 거듭해서 그 후 수로(水路:Aqueduct) 공사가 15차례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도시화 공사가 끝났을 때 가이사랴는 팔레스타인에서 예루살렘과 쌍벽을 이루는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다양한 인종들이 살았고, 인구는 10만 명이 넘었습니다. 도시를 건설한 후 곧 로마총독이 주둔하는 유대지방(후에 팔레스타인지방)의 행정수도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로마의 천부장과 백부장이 주둔하는 군사도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정치적 중심도시로 시작해서 군사도시와 상업도시로 성장을 했고 초기 기독교의 중심도시가 되었습니다. AD 3세기경에는 초대교회 지도자 오리겐이 20년 이상 거주했습니다. 또, 오리겐이 자랑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장서가 3만권이었습니다. AD 4세기에는 콘스탄틴 대제의 종교분야 자문관이었고 최초의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알려진 유세비우스가 가이사랴의 첫 감독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잔틴 시대에도 가이사랴는 계속 발전했습니다. 6세기에 성벽이 완성되어 요새화 되었고, 아랍전쟁 후 잠시 쇠퇴하였으나 7세기에 다시 요새화 되었습니다. AD 1101년에 십자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에는 십자군에 의해 다시 요새화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성장세는 13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성서 지리학자인 데이빗 패드필드는 ‘동방견문록을 썼던 마르코 폴로의 출발지가 가이사랴였다’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