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慶尙道) : 경산현(慶山縣)
樂民 장달수
경상도(慶尙道) 경산현(慶山縣)
동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9리, 남쪽으로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29리, 서쪽으로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21리,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1리, 서울과의 거리가 7백 1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압량(押梁 압독(押督)이라고도 함.)은 작은 나라였는데 신라(新羅) 지미왕(祗味王)이 이를 점령해서 군(郡)을 만들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장산(獐山)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년에 장산(章山)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이 경주(慶州)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초년에 임금의 이름과 음이 같은 점을 피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충숙왕(忠肅王)이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해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공양왕(恭讓王)이 왕비(王妣) 노씨(盧氏)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켜,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다시 현령(縣令)으로 낮추었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압량(押梁)ㆍ압독(押督)ㆍ장산(獐山)ㆍ장산(章山)ㆍ옥산(玉山).
【성씨】 본현(本縣) 전(全)ㆍ김(金)ㆍ백(白), 서(徐)ㆍ유(劉) 모두 당(唐) 나라에서 투화(投化)했다. 녹(綠)ㆍ주(珠) 모두 일본(日本)에서 투화했다. 박(朴)ㆍ정(鄭)ㆍ노(魯) 모두 온[來] 사람들이다.
【풍속】 풍속이 검소하고 소탈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산천】 마암산(馬巖山) 현의 남쪽 21리에 있는 진산(鎭山). 동학산(動鶴山)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장고산(長鼓山)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황율천(黃栗川)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영천군(永川郡) 보현산(普賢山)에서 발원하여 성주(星州) 무계진(茂溪津)으로 들어간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마암산(馬巖山)에서 발원하여 황율천(黃栗川)으로 들어간다. 갑지(甲地) 현의 동쪽 11리에 있다.
【토산】 은어(銀魚)ㆍ입초(笠草)ㆍ붕어[鯽魚]ㆍ대추ㆍ매실ㆍ백복령(白茯笭)ㆍ벌꿀[蜂蜜].
【봉수】 성산 봉수(城山烽燧)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 시산(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대구부 수성현(大丘府壽城縣) 법이산(法伊山)에 응한다.
【누정】 망북루(望北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차군헌(此君軒) 채신보(蔡申保)의 기(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을유(乙酉)년 초여름에 부임해서 관사에 있는데 한 달이 넘지 못하여 자식을 잃는 액운을 만났다. 창과 문지방, 뜰과 섬돌에 지난날 드나들던 모습과 글 읽는 소리가 항상 귀에 들리는 듯, 눈에 보이는 듯하니, 우울하여 여기에 어찌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 동쪽에 무성한 숲과 키 큰 대나무가 있어 낡은 집을 비치니 옛 청사였다. 가서 보니 먼지는 낡은 벽을 덮고 이끼는 헌 기왓장에 끼어 있다. 무너진 담과 남은 주초에는 푸른 풀만이 가득한데, 오직 동헌[廳事]과 서쪽 마루[西軒]만은 우뚝하게 홀로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을 수리할 것을 결심하고 아전에게 차례로 돌려 가면서 공사하도록 명했다. 기울어진 기둥은 바로 세우고, 깨진 기와는 갈아끼웠다. 또 옛 재목을 가지고 안팎의 낭무(廓廡)를 만들었다. 초가을에 시작해서 늦가을에 완공하여 가족들을 데려다 거처하기 시작했다. 기왓장 하나에 새겨진 것을 보니 연우(延祐) 7년(1320)에 만들었고, 그때의 감독과 목수의 성명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원(大元) 연우(延祐)로부터 지금까지 계산하면 2백여 년만에 중수(重修)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하게 되어 있는 운수라 하겠다. 이 땅은 연우(延祐) 이전으로 올라가 천지가 개벽(開闢)한 때까지 소급될 것이고, 오늘 이후로 내려가 천지가 뒤집힐 때까지 이를 것이니 강하(江河)가 뽕나무 밭이 되며 또 관청이 되기를 얼마나 많이 할지를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작게는 개인의 영욕에서, 크게는 국가의 성쇠(盛衰), 음양(陰陽), 소장(消長)의 이치에 이르도록 모두 일정한 운수가 있는 것이지 맘대로 옮기고 망녕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인데, 이제 갑자기 인위적(人爲的)인 지혜나 꾀를 그 속에 베풀려고 하니, 이는 한갓 스스로 곤란함을 취하는 것이다. 마루 앞에 대나무 숲을 묶어 세운 듯한 바람 부는 달밤을 만나거나, 눈 오는 아침에 대하면 탐욕으로 더럽혀진 속세의 마음이 얼음녹듯 풀어진다. 아름다운 손이나 좋은 친구와 더불어 푸른 댓잎 소리 들으며 그 밑에서 거나하게 먹고 마시면, 이야말로 양주(楊州)의 학(鶴)이 아닌가! 왕자유(王子猶 왕휘지(王徽之)의 자(子))의 ‘하루도 차군(此君 대[竹])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뜻을 따라 여기에 ‘차군헌(此君軒)’이란 현판을 다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3리 되는 곳에 있다.
【역원】 압량역(押梁驛) 현의 동쪽 12리 거리다. 속설에 전하기를 압독국(押督國)의 옛터라고 한다. 건흥원(乾興院) 현의 북쪽 18리 거리다. 신원(新院) 현의 남쪽 20리 거리다. 월연원(月淵院)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시지원 현의 서쪽 11리 거리다. 광리원 현의 남쪽 1리 거리다.
【불우】 심천사(深泉寺)ㆍ망월사(望月寺)ㆍ밀암사(密巖寺)ㆍ구주사(鳩住寺) 모두 동학산(動鶴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포성(古浦城)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1백 70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성(金城)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1백 55척이더니 지금은 없어졌다. 우곡성(于谷城)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신라 때 이 세 성을 합쳐서 압량군(押梁郡)을 만들었고, 통합한 뒤에는 고쳐서 세 성으로 만들었다.
【명환】 신라 김유신(金庾信) 진덕왕(眞德王) 때에 압량주 군주(押梁州軍主)가 되었는데 군사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항상 음주와 풍악을 즐겼으므로 고을 사람들은 용렬한 장수로 여겼으며 한 번도 싸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유신은 그 사람들을 쓸만하다 생각하고, 곧 백제(百濟)를 쳐서 크게 승리하고 적장 8인을 사로잡았다. 김인문(金仁問) 무열왕(武烈王) 때에 압량주총관(押梁州總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요새지(要塞地)를 만든 공으로 식읍(食邑) 3백호를 받았다.본조 손욱(孫旭)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법을 잘 받들었다.
『신증』 안만철(安萬哲).
【인물】 고려 김정미(金庭美) 충선왕(忠宣王)을 따라서 원(元) 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본조 전백영(全伯英) 벼슬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이다.
【효자】 본조 손일선(孫日宣)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서 살았다. 세종조(世宗朝) 때 이 일이 조종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지고 서요직(西窯直)이 제수되었다.
【제영】 산색농저함(山色濃低檻) 서거정(徐居正)의 시(詩)다. “옛 고을이 말[斗]보다 큰데, 사군(使君)의 재주는 강과 같도다. 어진 소문은 으뜸이었으니, 치적 또한 짝할 이 없으리. 산 빛은 짙어 난간에 나직하고, 가을 소리가 가느다랗게 창에 들어오네. 선비들의 아름다운 모임 성하니, 이 글 쓰는 붓 장광[杠]과 같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34년에 대구(大邱)와 합하였다 왜적으로 인하여 시들어 쇠잔한 까닭이다. 40년에 다시 분리되었다.
【방면】 읍내(邑內) 사방으로 끝이 7리이다. 상동(上東) 처음은 7리, 끝은 10리. 하동(下東)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중남(中南)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외남(外南)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서면(西面) 처음은 7리, 끝은 20리. 북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
【성지】 읍성(邑城) 둘레는 4천8백 척이며 서문(西門)은 진옥루(鎭玉樓)라 부른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3년에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토산】 대[竹]ㆍ연자(蓮子)ㆍ지치[紫草].
慶山縣
東至慶州府界九里,南至淸道郡界二十九里,西至大丘府界二十一里,北至河陽縣界二十一里。距京都七百十里。
建置沿革
本押梁小國。一云押督。新羅祗味王取之,置郡。景德王改稱獐山。高麗初改章山,顯宗屬慶州,明宗置監務。忠宣王初,避王嫌名,改今名。忠肅王以國師一然之鄕,陞爲縣令。恭讓王以王妣盧氏
之鄕,陞爲郡。本朝太祖時,復降爲縣令。
官員 縣令,訓導。各一人。
郡名
押梁,押督,獐山,章山,玉山。
姓氏
本縣 全,金,白。徐,劉。竝唐投化。綠,珠。竝日本投化。朴,鄭,魯。竝來。
風俗
俗尙儉率。觀風案。
山川
馬巖山。在縣南二十一里。鎭山。
動鶴山。在縣西八里。
長鼓
山。在縣東四里。
黃栗川。在縣北九里。源出永川郡普賢山,入星州茂溪津。
南川。在縣南一里。源出馬巖山,入黃栗川。
甲池。在縣東十一里。
土産
銀口魚,笠草,鯽魚,棗,梅實,白茯苓,蜂蜜。
烽燧
城山烽燧。在縣北八里。北應河陽縣匙山,西應大丘府壽城縣法伊山。
樓亭
望北樓。在客館東。
此君軒。蔡申保記:“乙酉孟夏,赴任居公衙,未閱月,有喪明之厄。窓櫳庭除,日者進退之狀、吾伊之聲,常在耳目,安能鬱鬱久居於此?東有茂林、脩竹,破屋隱映,乃古衙也。遂往觀焉,塵侵古壁。苔封殘瓦。毁垣、遺礎莽蒼盈眸,唯廳事與西軒巋然獨存。決意修葺,命
吏輪番以役柱之。傾者平之,瓦之破者改之,又因舊材作內外廊廡。自孟秋始役,至季秋功訖,携一家處焉。見一瓦刻字,有延祐七年造者,其時監造官、匠人姓名,題誌甚詳。計大元延祐,今二百餘年而重修,非我也,數也。此地,在延祐以前,上至開闢;今日以後,下至渾沌,爲江河,爲桑田,爲官廨,不知其幾多翻覆也。因此推之,則小而一身榮瘁,大而國家盛衰,陰陽消長之理,皆有定數,不可轉移而妄動者,乃欲輒施人爲智術於其間,徒自取困耳。軒前有萬竿如束,遇風月之夕,對雨雪之朝,塵世貪染之心,渙然氷釋。每與嘉賓、勝友大嚼於綠葉寒聲之下,眞所謂楊州之鶴也。取王子猷‘不可一日無此君。’之意,扁其額曰‘此君軒’云。”
學校
鄕校。在縣西三里。
驛院
押梁驛。在縣東十二里。諺傳押督國古基。
乾興院。在縣北十八里。
新院。在縣南二十里。
月淵院。在縣北八里。
時知院。在縣西十一里。
廣理院。在縣南一里。
佛宇
深泉寺,望月寺,密巖寺,鳩住寺。俱在動鶴山。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城山。
厲壇。在縣北。
古跡
古浦城,在縣西九里。石築。周三千一百七十尺。今廢。金城,在縣南七里。石
築。周二千一百五十五尺。今廢。于谷城。在縣西六里。《周官六翼》:“新羅時,合三城爲押梁郡。統合後,改爲三城。”
名宦
新羅 金庾信。眞德王時爲押梁州軍主。若無意於軍事,飮酒作樂,州人以爲庸將,恨不一戰。庾信知其可用,於是伐百濟,大敗之,獲其將八人。
金仁問。武烈王時爲押督州摠管。築獐山城以設險,錄其功,授食邑三百戶。
本朝 孫旭。勤謹奉法。
〔新增〕 安萬哲。
人物
高麗 金廷美。從忠宣王朝元有功。官至政丞。
本朝 全伯英。官至知議政府事。諡文平。
孝子
本朝 孫日宣。丁父母憂,皆廬墓三
年。世宗朝,事聞旌閭,授西窯直。
題詠
山色濃低檻。徐居正詩:“古縣大於斗,使君才似江。賢名曾第一,治化定無雙。云云,秋聲細入窓。斯文佳會盛,題詠筆如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