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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추억
“어이, 이 주사! 달걀 구입할 생각 있나? 농장에서 직접 키운 닭이 금방 낳아서 싱싱하다는데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요.”
직장 동료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더니만 달걀 구입 의향을 물었다. 직장 인근에 사는 지인이 닭 농장을 운영한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구입의사를 표시했더니만 동료는 어디론가 잠시 사라졌다가 금방 달걀 한판을 들고 되돌아왔다. 동료가 내 몫으로 건네 준 달걀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유년기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당시 십리나 떨어진 읍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 정문 앞으로 이어진 골목길에는 문방구와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꼬부랑 할아버지의 구멍가게는 나에게 있어서 별천지였다. 낡은 나무판자 진열대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난감들이 수두룩했다.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한 달이 멀다하고 새로운 장난감들이 진열대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학교가 파하면 꼬부랑 할아버지의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장난감들을 구경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일상사였다. 옆집에 사는 석이도 나와 함께 이 구멍가게의 단골손님으로서 장난감에 푹 빠져 있었다. 읍내에 사는 몇몇 부유한 친구들 외에는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라 장난감을 손쉽게 구입할 여력이 없었다. 요즘처럼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꼬부랑 할아버지 구멍가게의 몇몇 장난감들이 무척 갖고 싶었다.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할 때에는 천정에서 장난감들이 어른거렸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내 손아귀에 넣는 유일한 길은 어떻게든 용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공부보다도 용돈 마련 방법을 궁리하느라 생각에 잠기곤 했다. 고향집 뒷동산의 도토리를 주어다가 읍내 5일장에 들락거리시는 어머니께 부탁하면 도토리 판매대금을 돌려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가을철에만 한정되었다. 그러니까 어느 때든지 자유롭게 용돈을 조달할 수 있는 창구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닭장 주변을 서성이다가 암탉이 낳은 달걀을 발견한 것이다. 순간 머리에 떠오른 것이 학교 앞 문방구 천정에 달아놓은 망사바구니에 달걀이 소복이 담겨져 있는 장면이 오버랩된 것이다.나는 곧바로 석이에게로 달려갔고 나의 기막힌 제안을 듣고 난 석이도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석이와 나는 수시로 서로의 닭장 안을 기웃거렸으며 행여 달걀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가족들이 먼저 발견하기 전에 수거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각자 두 개 이상의 달걀을 수거할 경우 주말을 기해 읍내 문방구로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석이와 나는 양쪽 호주머니에 달걀을 각각 하나씩 숨기고서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읍내로 향했다. 호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달걀 촉감으로 인해 마치 갑부가 된 듯 든든했다. 한시바삐 달걀을 되팔아서 할아버지 구멍가게의 장난감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구불구불한 산길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문방구에 도착하여 주머니 속의 달걀을 꺼내 놓으면 주인아주머니는 달걀을 집어들고서 이리저리 흔들어보면서 혹시 오래된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절차를 잊지 않았다. 세상에 나온 지 이제 겨우 하루 이틀 정도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행여 불합격 판정이라도 받는다면 십리의 산길이 헛고생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듯 달걀을 망사바구니에 집어넣고서 동전을 만지작거리면 그때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달걀 대금으로 돌려주는 십 원짜리 동전을 들고서 맞은편 할아버지의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평소 눈여겨보았던 장난감을 구입 할 수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얼핏 가격을 환산해보더라도 달걀 두 세게 정도의 대금으로 과연 어떤 종류의 장난감을 구입 할 수 있었는지 의아심마저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장난감 구입하는데 굉장히 요긴한 자금이 되었다. 그런데 간혹 달걀을 양쪽 주머니에 각각 한 개씩 나눠넣고서 산길을 긴장한 채 조심조심 걸어가다가 읍내 입구에서 긴장의 끈을 놓치는 바람에 넘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달걀은 박살이 나고 호주머니 속은 찐득찐득한 달걀 내용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얼마 전, 50여 년 만에 석이를 다시 만났다. 숙부 장례식에 조문객으로 왔었기에 그 시절의 달걀 이야기를 꺼냈더니 석이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새 희끗희끗한 중장년인 다 된 석이와 나는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삶은 달걀을 나눠먹으면서 추억의 회포를 풀었다. 각자 고향을 떠나서 먹고 살기에 바쁘다 보니 서로가 연락도 끊기고 50여 년이라는 세월이 무심히 흘러버린 것이다.
아무튼 내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상거래 경험은 유년기적 닭장에서 몰래 훔쳐낸 이 달걀을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끝]
할머니와 팔공산 점쟁이
시골인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과정은 대구로 유학해서 마쳤다. 학교 주변에다 월세방을 얻고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서는 할머니께서 동행하셨다. 평생 농사일로 손마디에 굳은살이 배인 할머니께서는 오로지 손자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낯선 도회지 생활을 묵묵히 견뎌내셨다. 근검절약이 생활화 된 할머니께서는 반찬값이라도 벌겠다며 골목 앞 공터에다 텃밭을 일구시고 소소한 반찬꺼리를 충당하셨다. 그리고 이웃의 카시미론 이불 공장에서 버려지는 부산물인 천 조각들을 주어다가 한 땀 한 땀 이어 붙여서 이불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셋방 인근 교회당의 학생회에 출석하며 고향 교회에서 불붙은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처음 교회에 등록을 하고 새벽기도회에 몇 번 출석했더니만 규모가 작은 교회라서 그런지 금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젊은 학생이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한다며 신앙심이 대단히 좋은 걸로 비쳐진 것이다.
그 때 시골 고향집은 원치 않는 우환이 생기는 바람에 할머니께서는 매우 걱정을 하셨다. 어느 날 등교 준비하고 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팔공산에 잠깐 다녀올 수도 있으니 행여 귀가해서 당신이 없더라도 혼자서 저녁밥을 챙겨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뭔가 집히는 것이 있어서 자꾸만 사유를 캐물었고 할머니께서는 집안의 우환 때문에 점쟁이를 만나보겠다고 실토했다. 크리스천인 나는 쓸데없는 짓이라며 적극 만류했고 점쟁이에게 갖다 줄 복채가 있으면 그것으로 대신 고기나 구입해서 실컷 먹자고 주장했다. 나의 적극적인 만류에 할머니의 의지는 많이 수그러드는 듯 했다. 그날 오후,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골목 앞 텃밭을 돌아보고 집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십중팔구 팔공산 점쟁이를 찾아간 것이 분명했다. 저녁 늦게야 허겁지겁 돌아오신 할머니의 모습이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를 추궁한 끝에 팔공산에 올라간 것을 실토했고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연인즉슨 집안에서만 무작정 기다리고 있자니 너무나 답답해서 신통하다고 소문난 점쟁이를 기어코 찾아갔었단다. 점쟁이를 만나서 집안 내력과 사정을 말하고 어떻게 해야 우환을 물리칠 수 있는지 물었단다. 그런데 점쟁이는 쌀알을 탁자위에 뿌리면서 혼자서 씨부렁 씨부렁 주문을 외우더니만 당장 집으로 되돌아가라며 등을 떠밀더란다. 노령의 몸으로 길눈도 어두운데 먼 길을 마다않고 힘들게 찾아온 할머니께서는 너무나도 이상하여 그 연유를 물었단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대답하기를 손자에게 십자가가 보여서 점괘가 나오지 않으니 복채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며 그냥 되돌아가라고 내쫓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때까지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놀람과 신비로움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년기부터 교회당에 출석하고 중고등부에서 임원을 맡고 새벽기도회까지 출석하여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였지만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믿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점쟁이가 손에 쥐다시피 한 복채까지도 거절하면서 되돌려 보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절대자가 분명히 있다는 증거라고 여겨졌다. 만약 그 점쟁이가 돌팔이였더라면 두둑한 복채에 눈이 어두워서 십자가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무작정 푸닥거리를 권유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너무나도 부족한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던가! 나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할머니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침에 뭐라고 하던가요? 다 필요 없는 짓거리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 날 이후로 할머니는 나를 따라서 교회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둔 밤길에도 나와 손을 맞잡고 각종 공 예배에 출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예배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다 찬송을 부르는데 당신 혼자서만 찬송을 몰라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다소 민망하다며 찬송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셨다. 할머니의 간청에 나는 부르기 쉽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찬송가를 골랐는데 그것은 ‘복의 근원 강림하사' 라는 찬송이었다. 내가 먼저 한 소절을 선창하면 할머니는 뒤따라 부르는 식으로 개인 교습을 했다. 그런데 첫 소절은 비슷하게 따라 부르는가 싶더니만 끝부분에는 항상 민요조의 음정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래서 찬송가를 정확히 부른다는 것이 요원할 것 같은 예감에 할머니 맘 내키는 대로 부르시든지 아니면 마치 맆 싱크 하는 것처럼 입만 벙긋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전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내가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는 할머니께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뒷바라지를 중단했다. 대신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셨다. 그런데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되던 어느 날, 월세방 주인집으로 한통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니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고향집 어머니의 전화였다. 마침 다음날이 주말이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서둘러 고향집으로 향했고 고향집 대문에 들어서자 안방에서 바느질 하시던 어머니께서는 할머니께서는 사랑채에 누워계신다고 눈짓했다. 나는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사랑채로 직행했고 사랑채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할머니께서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기는 했지만 의식은 남아있었다. 나는 할머니와 마주보면서 나란히 누운 채 손을 맞잡고 손자가 도착을 알렸고 왜 자꾸만 몸을 떠는지 물었더니 몸속에 마치 뜨거운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것 같다고 토로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임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할머니의 영혼구원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할머니께서는 아직까지도 스스로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영혼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고백 기도를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와 나란히 누운 내가 먼저 한 구절을 선창하면 할머니께서는 그대로 따라하라고 했더니만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서 지난날의 죄악들을 모조리 회개시켰다. 그리고 삼위일체와 십자가 부활을 믿으며 주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할머니의 두 손을 부여잡고 함께 울면서 중보기도를 드렸다.
“사랑의 하나님! 저희 할머니의 기도를 다 들었었지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신 주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고 약속하셨듯이 저희 할머니가 방금 주님을 영접했으니 받아주시옵소서. 하나님, 거짓말하기 없기입니다.”라며 눈물로 매달렸다.
그리고 할머니와 손가락 걸고서 약속했다. 할머니께서 먼저 하늘나라에 가 계시면 이 손자는 이 세상에서 보람 있는 일 많이 하다가 나중에 할머니를 만나러 천국으로 찾아가겠다고, 거기서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는 나는 계속해서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복에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다음 날은 주일날이고 예배에 맡은 순서가 있어서 할머니께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만 남기고 급히 대구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주일 날 오후,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나는 부랴부랴 다시 고향집으로 향했고 일가친척들의 울음소리와 더불어 마당에 모셔진 할머니의 관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다시 한 번 더 보자고 약속했었는데 왜 먼저 가셨나요?' 하면서 울부짖었다. 나의 통곡 소리에 뒤편에서 묵묵히 지켜보시던 막내고모가 눈물을 훔치며 귀띔했다. 할머니께서는 마지막 임종 시에도 기도를 해달라고 하시더란다. 막내고모는 집안의 친척 중에 몇 안 되는 크리스천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할머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굳은 결심을 했다. 비록 성치 못한 몸뚱이지만 사회복지사의 자격증을 취득하여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근무하며 장애인들 속에 부대꼈고 또다시 공직에 입문하여 복지 인프라가 열악한 외딴 섬마을에서 독거노인들을 만나고 조손가정을 찾아다녔으며 타국살이에 힘들어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의 대변인 노릇까지 감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내를 대동하고서 임종을 앞두고서 목포의 병원에 입원중인 섬마을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손 맞잡고 중보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분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기름진 고깃국도 아니요. 눈부신 천사의 날개옷도 아니라 바로 구원과 직결되는 ‘예수의 이름’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른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전도할 기회가 남아 있지만 이제 마지막 육신의 장막을 끝낼 분들에게는 전도할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년 퇴직후 요즘에 들어 나 자신도 평소 앓던 지병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걸음걸이도 뒤뚱거리고 때로는 몸의 균형이 흐트러져 바닥에 넘어질 때도 있다. 신체적으로 힘들고 자신감이 결여되니까 신앙심도 자꾸만 퇴보해 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그 때마다 할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또 내 신앙의 상태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 라는 찬송을 부를 때면 그 옛날 대구시내 변두리 월세 방에서 나의 선창에 따라서 마치 랩하는 것처럼 흥얼거리던 할머니 특유의 민요조 가락이 귓가에 언뜻언뜻 들리는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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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약력 -
2011년 신안문학제 산문부문 금상
2015년 공무원문예대전 동시부문 동상
2018년 목포문학상(남도작가상) 동시부문 당선
2023년 [좋은생각] 생활문예대상 공모전 장려상
2023년 제1회 치유문학상 동시부문 최우수상
2019년 신안군립도서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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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8.31 18:50
첫댓글 관장님이 수정해서 다시 올려 주세요
그게 더 완전하고 빠르겠어요
네, 거의 수정했습니다.
그대로 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관장님 감사합니다
삭제하고 다시 복사해다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