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게도냐와 그리스에 가다(1-6)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요가 진정되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면한 후에 다시 마게도냐로 길을 떠납니다. 바울의 권면은, 20장 17절부터 나오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했던 권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억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말 것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게 된 일은 데메드리오의 소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마술과 요술을 이기고, 세력을 얻었던 때(19:20),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이미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자기보다 먼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어, 교회들의 영적 형편을 돌보고 권면하는 일을 하게 하는 한편,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를 모으는 일을 감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떠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남아 영광스러운 복음의 추수 보기를 원하지 않고, 미련 없이 에베소를 떠납니다. 교회의 어려움이 눈에 띄게 안정되면, 기득권이라고도 할 것 없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로서 이 정도의 모범적 삶을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바울은 신실한 신자의 표본이요 모범이었습니다. 그는 순전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행전 문맥에서의 바울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간사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게 자기 분깃과 얻게 될 이익에 대한 관심은 내려놓은 채 사는 길은 바울만 걸을 길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걸어야 할 길입니다.
바울은 먼저 에게 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기 위해 드로아에 머물며, 디도를 기다립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전달했고, 그 결과를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전 2차 전도여행에서 방문했던 것과 동일한 여정으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들을 방문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헬라”라고 불리는 아가야 지방에서 석 달을 머무는데, 대부분을 고린도에서 체류하며 그곳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때, 로마서를 기록합니다(롬16:23).
에베소를 떠나 자신이 섬겨야 할 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섬기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기 위해 해상 항로를 이용하여 수리아로 가고자 했지만 자기를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공모를 알고는, 마게도냐를 거쳐 육로로 우회하기로 작정하고 이방교회 여러 대표자들과 길을 함께합니다.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모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의 정보망이 당시 지중해 세계 전역에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 부족하고 없는 것 투성이의 전도팀이었을 것이지만 이런 공모가 미리 바울 일행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주시고, 사명을 이루기까지 안전하도록 이끄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편에서 감히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 소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르고, 부르심을 이루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를 예수 안에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말씀하시고, 그 삶을 이루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렇게나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백성된 삶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신 부르심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을 완성하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으셨고, 세상의 부와 명예도 주시지 않았지만 바울을 보호하시고, 말씀을 이루는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붙들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마치기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묵상하며, 오늘 나는 그 길의 중앙을 걷고 있는지, 길을 비켜나 어긋난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수확의 계절에, 삶으로 맺은 열매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며 말씀 이루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유두고의 죽음과 되살아남(7-12)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언급되었던 이방 교회의 대표들은 드로아에 먼저 도착하여 바울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5일 만에 드로아에 있는 이방 교회의 대표들과 합류했고, 일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바울은 잠시 들러 일주일을 머물렀던 드로아에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바울 일행은 그 주간의 첫날, 곧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시작한 바울은 한두 시간 설교한 것이 아니라 밤중까지 계속 설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따라 부활하게 되리라는 요지의 설교였을 것입니다.
쉬지 않고 계속된 설교에 3층 창문에 걸터 앉아있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9절 말미에,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는 말은 그가 실제로 죽었음을 증거합니다. 유두고의 죽음으로, 가장 은혜로워야 할 예배의 시간, 축제의 시간이 가족을 잃은 슬픈 장례식장이 될 뻔한 상황입니다. 바울도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가 목숨을 잃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 위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포갠 엘리사처럼 죽은 청년의 몸을 안고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말하며, 바울은 죽은 유두고를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두고가 살아났고, 올라가 함께 떡을 떼어먹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저 예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유두고에게도 실제로 일어남으로써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이심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 부활을 살아내었고, 유두고를 살려냄으로써 부활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사역을 친히 감당했습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는 말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유두고가 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저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실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부활을 살아내며, 부활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영적 체험의 장임과 동시에, 우리 삶의 현장이 부활을 보여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부활을 말하지만, 삶으로는 다른 이들을 주님 앞에서 낙심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남은 실낱 같은 희망의 끈마저 끊어버린다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는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고 낙심하게 만든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대하셔서 자녀 삼으신 우주적 교회, 그속에서 교회로 존재하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살아내어야 하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하신 선, 투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위대한 투브를 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살아내며, 증명하는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 삶은 꼭 죽은 사람을 살려내어야 하는 기적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깨어진 심령이 회복되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행할 투브입니다. 분열되었던 공동체가 하나되고,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한 치의 거짓없이 순전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오게 만든다면, 그것이 투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살아내어야 할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입니다.
한 사람의 족적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삶에서 무엇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는지가 보이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것을 따라가느냐는 그 사람의 우선순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선택의 기로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주님의 뒤를 쫒아갑니다. 주님께서 명하시는 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고 있습니다. 때론 숨이 막히고 포기하고 싶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기에 종 된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사명의 길을 뚜벅 뚜벅 걸어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종 된 사명자의 자리를 확인하며 나아가십시다.
밀레도까지의 항해(13-16절)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이 새도록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말씀을 듣던 중 졸음에 빠져 떨어져 죽게 되었던 유두고의 생명을 회복시키며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드로아에서 일곱 날을 머물렀던 바울은 이제 그곳을 떠나 앗소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이유 없이 일행들은 배를 타고 보내고 자신은 약 65Km되는 거리를 홀로 걸어서 앗소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만약 바울이 가는 길 중간에 누군가를 만나 격려할 일이 있었다면 그것을 기록하였을 터인데 오늘 본문은 왜 걸어갔는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2절-23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 펼쳐질 예루살렘의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바울인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그 길을 걸으며 바울은 하나님과 독대하며 기도와 결단의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고난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떤 반응들을 보이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바울은 조용히 무리를 떠나 하나님의 뜻에 더 집중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침묵 속에 주님의 말씀과 자신이 주께 받은 사명을 묵상하면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들을 통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길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용기를 주셨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에 많은 선택과 고민의 기로가 찾아옵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때론 무리를 떠나 주님과 깊은 대화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받는 시간을 가지며 우리의 족적을 결정함이 필요합니다.
(14-16)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사도 바울은 다시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게 되었고 함께 배를 타고 미둘레네를 거쳐 다음날 기오에 이르고 또 그 다음날 사모에 이르고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릅니다. 여기서 ‘이튿날’과 ‘다음 날’이라는 단어가 계속 사용됩니다. 이는 바울의 모습 속에 무엇인가 서두르는 모습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배를 타고 그냥 지나가기로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파했기에 정이 많이 들었고 만나고 싶은 얼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1년 만에 지나가는 길에서 그들을 본다면 서로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순절이 오기 전에 예루살렘에 속히 가서 그들이 모았던 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정에 이끌리지 않았습니다. 때론 우리는 정에 끌리기도 하고 개인의 욕심을 앞세워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마음을 억제하고 감정을 억눌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감정과 사욕이 주님의 뜻보다 앞서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절제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 머물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을 알고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밀레도에서 잠시 만나기를 부탁하며 목회 적 당부를 전하게 됩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고별설교(17-38절)
(17-21)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지금부터 나오는 본문은 바울의 공적인 설교는 아니지만 그의 에베소 사역을 정리하며 돌아보고 또한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상황을 믿음 안에 받아들이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첫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행한 바를 알고 있지 않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사도바울의 태도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초심을 잃어버립니다. 결혼할 때 많은 부부가 혼인 서약을 맺고 알콩달콩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혼생활의 여러 어려움들과 관계적 갈등속에 그 약속은 말라 부스러진 낙엽처럼 사그라지고 맙니다. 취업이 되어 기뻐하며 첫 직장에 출근하며 설레던 마음이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인해 힘든 시간들을 보내며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첫날과 지금까지의 사역의 태도에 일관성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사도바울 스스로 사람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안정이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과시하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에 더욱 몰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남편과 아내로서 하나님 앞에 약속했던 것, 기도하며 소명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것을 잊지 않고 신실한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론 우리도 사람이기에 망각하기도 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우리의 느슨해진 신발 끈을 주님 앞에 동여매고 사명의 자리로 힘써 나아가십시다. 그때 사도 바울을 통해 우상숭배의 도시였던 에베소가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게 될 것입니다.
(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임을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표현을 보면 ‘성령에 매여’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심령이 성령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는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매여 살아가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마음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에 눈이 먼 사람은 명예와 돈과 인기에 마음이 매여 있고 쾌락에 눈이 먼 사람은 하룻밤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인생을 삽니다. 여기서 비극은 우리가 매여 있는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고 따라가는 인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 마음이 ‘성령에 매여’있습니다. 비록 그 가는 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자신을 매어 끌고 가시는 분이 믿을만한 분이시기에 사도 바울은 가이드 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믿고 맡겨버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이끌어 가시는 분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사명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25-27)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이제 사도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전하며 끝을 전합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임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며 자신이 만난 모든 이에게 힘써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 그들의 피에 대하여 자신이 깨끗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 ‘꺼리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스텔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물러서다, 피하다, 움츠러들다’라는 단어입니다. 한 마디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전함에 있어서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큰 고민은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의 위험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그것은 나를 향한 위협과 공격으로, 오해와 질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영혼구원을 이루어 가게 하실 것이며 자신이 전한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피 값에 대하여 사도바울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론 어떤 곳에서는 믿는 자들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믿는 자의 수가 많지 않고 도리어 핍박과 환난에 처하였으나 결실의 숫자와 상관없이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도 바울 자신의 사명임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때론 어떤 교회에는 많은 교인들이 몰리기도 하고 어떤 교회에는 평생에 손가락에 꼽히는 교인들만 모이기도 합니다, 어떤 외국나라에는 한 명도 주님께 이끌지 못하고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그 땅에서 살아가기만 해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날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이끌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곳에서 얼마나 가감 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복음을 진실 되게 전파하였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토브의 말씀을 내 입술과 삶으로 많은 사람에게 전하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28-30)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이 떠난 뒤에 교회에 찾아올 이단과 거짓교사의 위험성을 경계하며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는 감독자된 장로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키기 위해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사명의 자리에 세우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심을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말로 인해 에베소 장로들은 큰 슬픔에 처했고 사기가 저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에베소의 지도자로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도록 하시기 위하여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셨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를 각 자 섬김의 자리에 서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 누군가의 권면이 있었을 것이고, 또 뜨거운 마음으로 자원한 분들도 계실 것이고, 누군가의 부탁으로 섬김의 자리에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의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분의 피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게 하시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 교회를 섬기게 하신 분은 동일한 성령 하나님이심을 신뢰하십시다.
(31-32)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에베소의 교인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교인들을 누군가에게 부탁합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탁하다는 단어는 ‘파라티데미’라는 헬라어로 ‘어떤 이의 보호와 돌봄에 맡기다’라는 위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죽을지라도 부모의 가르침과 유언은 자녀의 인생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비록 그들을 떠날지라도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또한 박해를 받아 믿음에 시련을 겪을 때에 거짓 교사들의 유혹이 있을 때에 그것을 이겨낼 빛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떠나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 되심을 기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그들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떠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에 적절한 시기일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이별같이 느껴지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걱정과 염려가 앞서기도 합니다. 이는 맡겨진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법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를 평생 품에 끼고 살아가는 것이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듯이 때로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한 사람을 다양한 성장의 기회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도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함께 하고 있는 그 시기에 나를 통해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힘을 다해 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귀한 섬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5-35절에서 사도 바울은 물질에 있어서 사역자로서 깨끗한 품위를 유지하였고 도리어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며 이득을 위해 복음을 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고자 수고하여 자신과 동행들의 생활경비를 직접 수고하여 채울 뿐 아니라 약한 자들을 위한 구제까지 본을 보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헌신된 사역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여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갔고 또한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절제와 자족과 나눔의 본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돈과 물질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불리는 것만이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으로 생각하며 절제를 넘어 탐심으로, 자족을 넘어 욕망으로, 나눔을 잊고 자신만의 창고를 만드는 세상입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부와 경제적 이익은 무엇을 위해 주어진 것인지, 사도 바울처럼 절제, 자족, 나눔의 가치 안에서 바르게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돈을 우상으로 섬기며 모인 그 돈을 욕망의 침대삼아 안락을 구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36-38)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도 바울은 모든 말을 마친 후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합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은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인사하며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근심 속에서 그를 떠나보냅니다. 장례식에 가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사람들 특히 유가족과 친인척, 직장동료들의 반응을 보면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해준 사람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 장로들이 크게 울며 바울을 위해 근심해준 까닭입니다. 사도 바울이 3년간 자신들과 함께 머물며 주었던 사랑은 쉽게 잊을 수 없던 큰 사랑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가정이던 직장이던 교회이던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또 길게는 모든 사람들을 놓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별과 헤어짐을 두고 누군가 울어 줄 수 있다면, 누군가 마음아파 한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 걱정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헛되지 않았노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누린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이별에 슬퍼하는 이가 하나 없다면 그 인생은 억만금을 가졌어도 헛된 인생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가상의 장례식, 가상의 이별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내 빈소와 헤어짐에 누가 나를 위해 울고, 누가 나의 떠남을 슬퍼해줄지 돌아보며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관계 안에 진심을 다해 서로 사랑하는 복된 관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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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인 고린도를 일컷고 있습니다.
아가야 지방에 속한 에베소에 있던 바울이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아가야로 온 것입니다.
그 먼 길을 오고 가며 바울이 한 일은 딱 한 가지인데, 그것은 제자들을 권한 것입니다.
즉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을 순회한 이유는 그가 전도한 사람들을 ‘권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스리스도인에게 믿음의 성숙과 성장은 중요합니다.
믿고 구원받은 경험과 고백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성장과 성숙은 없어서는 안될 신앙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예수를 안 믿는 것도 아닌데, 신앙이 더 깊어지는 경지가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를 믿기만 하는 거죠.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남은 일은 뭐냐?”라는 질문을 하면 애매하게 답합니다. 교회 잘 다니는 것 정도에서 그칩니다.
“예수 믿으니까 구원받았다. 교회 잘 다니니까 됐다 가 아니라, 이제는 됐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기 위해서, 자기 신앙을 꾸준히 살펴야 합니다. 질이 없는 양은 쭉정이에 불과하며 양이 없는 질은 있을 수 없기때문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여러 말로 제자들을 권했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 잘 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면 바울이 여러 말로 권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여러 말로 권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라고 할때
영생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사람들은 모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사는 것이 영생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다 영생하기 마련입니다.
지옥에 가도 어차피 죽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생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이 어떠하냐, 어떻게 사는 것이 영생이냐, 무엇을 믿고 사느냐,
살기는 살되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을 해야하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은 멀리하고, 끊고, 버리고, 돌이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그런 내용을 권했습니다.
바울은 핍박을 받으며, 많은 어려움가운데, 드로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드로아에서 있었던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유두고가 죽었다 살아난 사건입니다.
요즘은 예배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시간도 거의 한 시간이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늘 했던 맨트가 아니라 조금 달라지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설교 시간이 30분을 넘기면 설교가 길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배의 틀이나 정해진 순서가 아예 없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는 시간도 따로 없었고, 끝나는 시간도 따로 없었습니다. 오직 설교자 마음대로였습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이 일종의 고별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유난히 길었던 것 같습니다.
7절에 보면 바울이 밤중까지 설교를 했다고 되어 있고, 9절에도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라는 표현으로 볼 때 일반적인 예상보다 설교를 더 오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설교를 듣다가 유두고가 그만 졸았는데, 졸다가 삼 층 난간에서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유두고를 살렸다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기적에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바울이 유두고에게 “앞으로는 설교 시간에 졸면 안된다”그런 얘기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그런 얘기도 없습니다.
단지 살려주기만 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기적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기 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만일 내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면 앞으로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한다”라고 조건부기적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혼인 잔치가 있는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고는 포도주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을 뿐입니다.
포도주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포도주를 주었고 떡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떡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5-36)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신 이유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표현을 자주 하셨는데,
민망하다는 얘기는 국어사전에는 ‘답답하고 딱해서 걱정스럽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만
창자가 끊어 지는듯한 아픔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시고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 바로 그런 감정을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구해주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심정으로 바울은 유두고를 살려주었습니다.
바울은, 하루의 노동에 시달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창문에 걸터앉아 졸음과 싸우면서까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다 죽은 노예 유두고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부어 새롭게 살려주시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리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선포했고,
유두고는 정말 다시 살아났습니다.
노예로 하루종일 일하면서 지친 그 고달픔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래도 주의 말씀을 듣고 위로 받으려고 삼층까지 올라가서 창가에 걸터앉아 말씀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긍휼히 여기고 바울이 살려주었습니다.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바울을 통해 유두고에게 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님께서 유두고를 살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에게 보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을 안다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중립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보는 우리의 출발점은 항상 자비와 사랑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면 그 사랑 우리도 나눔이 마땅합니다.
그 사랑 널리 전하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도착, 이동거리 약 5,600km)을 고린도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은 배를 타는 것이었으나, 배를 타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선택은 바울에게는 쉽지 않은 고난의 길이었으나 바울이 걸어서 되돌아간 길에는 바울이 2,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에게는 고난의 길이었을지라도, 이 도시에 있던 성도들은 한번 더 바울을 만나 믿음을 더욱 견고히 세울 수 있었기에 축복의 길이었음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16절까지는 바울 일행이 어떻게 예루살렘까지 가게 되는지 그 이동경로가 상세히 나오고, 17~38절까지는 무려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하면서 세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바울의 이동경로는 상당히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죽은 유두고를 살린 바울은 앗소를 지나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경유하여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의 경유지가 이렇게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이 상당히 바쁘게 움직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이튿날.. 그 이튿날.. 또 그 다음날..’ 이 표현들은 바울 일행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가고자 어느 한 곳에서도 느긋하게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조급히 서둘렀는지는 에베소를 들리지 않고 그곳의 성도들을 자신이 있던 밀레도에 부른 사건을 통해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역한 기간이 무려 삼 년이나 될 만큼 에베소는 바울에게 특별한 애착을 갖게 한 곳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가야했기에 에베소도 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까지 불렀고, 바울의 전갈을 받은 성도들은 한걸음에 밀레도로 달려왔습니다. 밀레도까지 찾아온 성도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 사역했는지를 설교합니다. 19~24절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가려고 하는 예루살렘에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알려주신 정보였기에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는 것이 상식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사명을 마치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환난이 있을지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가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도 자신에게 닥칠 동일한 환난이 찾아올 것이기에 자신을 본받아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교회를 돌보는 일에 전념해 주기를 권면했습니다. 29~30절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교회 안팎으로 고난과 환난이 찾아올 것이기에 이것을 알고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고난과 환난을 극복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고난과 환난이 찾아올 때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오,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지면 믿음도 함께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결국 우리의 믿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요 현실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을 때, 그 땅이 나와는 멀리 떨어진 어느 외딴 무인도나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내 삶의 현장인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바울의 고별설교는 주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35절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에도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할 때, 도움을 받는 입장에 있기 보다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좀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적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풍족함의 축복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가진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주신 분이셨습니다. 즉 많은 것을 가지고 나눠주신 분이 아니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라’ 하셨고,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때리도록 돌려 대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볼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은 풍족함의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럼 왜 주는 것 자체가 복일까요? 누가복음 6장 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주면, 준 만큼 없어지기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준 만큼 채워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준 것 이상으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물질적인 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누구에게 실현되겠습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믿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사람에게 실현될 것입니다. 주님은 신실한 분이시고 식언치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