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살면 박해가 있을 것임을 가르쳐주면서 이런 박해가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십니다. 박해가 있다고 해도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떤 믿음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살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4-25절을 봅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생각인데,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그 선생 같을 수 있고, 종이 그 상전 같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같다’는 말은 ‘닮고자 하는 열망’을 가짐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집 주인’이라고 하시고 제자들을 ‘그 집 사람들(구성원들)’이라고 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집’이라고 할 때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집에서 사는 식구들, 구성원들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이 ‘바알세불’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9장 34절에 바리새인들이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12장 24절에도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기적을 행하는 일을 보고 귀신의 왕에게, 사탄에게 돌리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바알세불’(바알 + 세불, 거처)이라는 말은 원래 ‘집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악령들의 왕으로 사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비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이것도 고난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 때 이런 소리를 듣지 않겠느냐, 주님을 사탄으로 몰아세웠다면 제자들은 사탄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이런 소리를 들을 것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각오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어려움을, 박해를, 심지어는 죽음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26-28절은 이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26절을 봅시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두려워하지 말라야 할 첫 번째 이유는 다 드러나고 다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진리는 진리로, 진실은 진실로, 불의는 불의로 다 드러난다는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박해, 모함, 비난에 의해서 진실이 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님께서 ‘감춘 것, 숨은 것’이 없도록 다 드러내신다, 그러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신실하게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라는 뜻으로 봅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제자들의 선포 사역과 관련지어 보는 것입니다.(막 4장 22절. 눅 8장 17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 계셨을 때는 은밀하게 말씀이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부활 이후에는 제자들이 복음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27절과 연관 지으면 두 번째 해석이 나아보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을 때는 첫 번째 해석이 나아보입니다.
2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지붕)에서 전파하라.”
이 말씀은 담대하게 주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어두운 장소’ ‘귓속말로 하는 것’은 은밀성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은밀하게 가르쳐주신 진리가 있는데 이 진리를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는 살아 있는 메시지들입니다. 이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선지자 역할을 하는 존재로 서 있습니다. 이 시대를 향하여 주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전파하는 공동체로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이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때 때로는 비난도 받고 모함도 있고, 욕도 받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박해나 비난 등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지 못합니다.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면서 길을 가기 위해서는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의존하라
복음을 전할 때 박해가 있게 되면 염려가 되는 것이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게 됩니다. 이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교훈을 하십니다.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명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종류의 죽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몸은 죽는데 영혼은 죽지 않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몸과 영혼이 함께 지옥에 멸하는 죽음입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능히 건드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멸하다’는 말은 존재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지옥의 고통의 형벌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 있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말씀하면서 이 영혼과 육체를 능히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에 대해 두려워하면 비겁해지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다음 육체와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줍니다. 자신의 자녀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29절. ‘너희 아버지’)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29-31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쳐줍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참샙돠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한 앗사리온은 1/16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 가운데 1/16에 해당됩니다. 참새는 그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식사였습니다. 시장에서 팔리는 가장 값싼 음식에 속했습니다.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에 해당되는 참새 1마리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아무 것도 아니고 아주 하찮은 존재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계시다고 하십니다. 그런 참새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자녀가 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 때 이 땅에서 박해도 받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박해와 죽음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 없고 관심을 갖지 않을 리 없음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세밀한 분이십니다. 세밀하게 우리를 알고 계시고 돌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이 있고 죽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난과 죽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돌보시는데 박해가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32-33절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님과 관계가 있다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주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독특성입니다. 이 땅에서 하는 것이 하늘과 연관이 됩니다. 이 땅에서의 고백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입니다. 이 땅에서의 부인은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부인입니다. ‘시인하다’는 말은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백한다는 뜻인데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하늘에서 우리 자신이 부인될 것입니다. ‘부인’은 관계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살지만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짐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그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눈치를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 사실이 변함이 없는 법입니다. ‘대통령, 정치인’이라는 공인이 되었기 때문에 신앙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국민들 앞에 있지만 또한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도 분명하게 이런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