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이성복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 1993년)
* 이성복 :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19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계명대학교 문창과 명예교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 1992)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1986)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 1993년)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 문학과지성사, 2012)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어둠 속의 시(1976-1985)』(열화당, 2014),
시선집 『숨길 수 없는 노래』(미래사, 1991) 『정든 유곽에서』(문학과지성사, 1996),
산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문학동네, 2001/ 개정판, 2014)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문학동네, 2001, 2015) 『오름 오르다』(현대문학, 2004) 『타오르는 물』(현대문학, 2009)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문학과지성사, 2004, 2015) 『끝나지 않는 대화』(열화당, 2014) 『고백의 형식들』(열화당, 2014),
시론집 『불화하는 말들』(문학과지성사, 2015) 『무한화서』(문학과지성사, 2015) 『극지의 시』(문학과지성사, 2015) 등이 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중에 천재 작곡가라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절대음감에 청음력도 뛰어나다고 들었다. 한동안 그가 작곡한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을 꾸고 났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걸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이 곡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던 어린 작곡가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작곡가는 꿈을 꾸고 곡을 쓰기도 하는구나. 신기했는데 생각해보니 시인도 비슷하다. 꿈을 꾸고 나서 바로 시로 옮기려고 했는데 펜과 종이가 없어 잊었다고, 이후로는 머리맡에 늘 메모지를 챙긴다는 시인을 나는 알고 있다.
진짜 꾸는 꿈만 시가 될까. 시인은 눈을 뜬 채로도 꿈과 비슷한 현실의 느낌을 포착할 수 있다. 그 예로 이성복의 ‘음악’을 소개한다. 이 시는 꿈속 같은 현실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비 오는 날, 차 안에 있으면 세상과 고립되었다는 고즈넉함에 휩싸이게 된다. 비 때문에 유리창 너머 보이는 세상은 다른 때와 좀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이럴 때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에 떨어진 듯 좀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늑한 고립감 안에서 시인은 음악을 듣고 있다. 어쩐지 저 아름다운 음악이 진짜 세계인 듯하고, 나는 잠시 이상한 나라에 온 것만 같다. 이런 느낌은 찰나에 스치고 지나가지만 강렬하다. 비와 음악이 내 정신을 흔들어 진짜 나를 끄집어냈다는 생각도 든다. 원래 음악은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이 시의 느낌도 그렇다. 그렇지만 분명 마음에는 오래오래 남는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 동아일보 2021. 09. 11.
이십 때 초반에는 잘 몰랐고, 내 나이가 서른이란 터널을 막 지나면서 사랑하게 된 대중가요가 있다. 이미 작고한 가수 김현식(金賢植, 1958~1990)이 부른 <비처럼 음악처럼>이 그것이다. 이 노래를 난, 자주 차에서 듣는 편이다. 그것도 비오는 날이면 으레.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오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오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오~ 오 오
절규에 가까운 노래의 가사가 실은 참 시적이다. 시적인 이 노랫말을 차 안에서 들으면서 내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해 둔 이성복 시인의 ‘음악’을 찾아 꺼내게 되면 둘은 서로 친화력을 발휘한다. 잘 어우러지면서 쓱쓱 비벼진다. 전주비빔밥처럼. 아무튼 명시 ‘음악’은 이성복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 1993년)에 나온다. 다음이 그것이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 1877~1953)가 그렸다는 <푸른 바이올린>을 가져다가 누군가 김현식의 노래를 연주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고, 아니면 곡만 연주하되 시낭송을 이성복의 시로 대체해도 정말이지 좋을 것이다. 그렇다. 시에서 대중음악이 투명하게 보이는가 하면 그림이 아스라이 들려오기도 한다.
심상훈 작가ㆍ인문고전경영연구가 / 글로벌이코노믹 2021-04-30
라울 뒤피 ‘푸른 바이올린(Le Violin Bleu)’, 20세기, 종이에 잉크, 구아슈, 수채, 개인소장.
시를 쓰는 사람에게 소망을 한번 말해보라고 한다면 대다수가 훌륭한 시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훌륭한 시인은 일단 시를 잘 쓸 줄 알고 수준 높은 시로 독자를 많이 거느린 시인이 아닐까. 그런데 그런 시인이 잘생기기까지 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시인 이성복, 앞의 기준을 들이대면 필자가 만난 대한민국 시인 중 그는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시인이 아닐까 싶다. 김수영 시인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이미지, 균형 잡힌 이목구비, 뚫어버릴 듯 쏟아내는 눈빛은 처음 보는 나를 단숨에 압도해버렸다.
발길에 짓밟혀 납작해진 못과 철사 토막을 주워다 놓고 오브제로 활용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땐 ‘역시 대단한 시인이구나’하고 그의 이미지와 상반된 섬세한 시적 정신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러한 감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인용 시는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을 때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분리 성찰하여 아련토록 섬세하게 조응 확인해 냈다.
지금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인용 시를 비 오는 풍경이 아니라 눈 오는 풍경으로 한번 바꾸어보자. “눈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더 아름답지 않은가?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이렇게 감미로운 시를 썼고 잘생긴 시인에게 독자 관리는 어떠했을까. 존경스럽다.
김영남 시인
이 시에선 비오는 날 차안에서 듣는 음악의 장르가 분명치 않다. 클래식인지 팝인지 대중가요인지도 모르겠고 대중가요라면 발라드인지 트로트인지는 더욱 알 길이 없다. 명백한 단서가 없지만 일단 대중음악이라 간주하고 읽는 게 다가서기 편할 것 같다. 대중가요의 경우 평소 가사에 별 관심을 갖지 않고 듣던 노래도 비오는 날 차안에서 가만 귀 기울이면 그 노랫말이 꼭 내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래 맞아, 저건 바로 내 얘기야’라는 생각이 들 때는 무심히 무방비로 감수성이 열려있을 때일 것이나, 반드시 사랑에 빠져있거나 이별을 겪은 다음이 아니라도 경험하는 현상이다.
상념의 날개에 그 음악이 매달리면 리듬을 탄 모든 가사들이 동일시되고 만다. 삶의 보편적 주제를 큰 깊이 없이 슬쩍슬쩍 건드려주는 상투성이 더욱 그렇다. 요즘은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일이 많다.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음악영화 ‘원스(Once)’를 보면 주인공 남녀가 녹음실에서 데모시디를 만들어 ‘카 테스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좋은 스피커에서 듣는 것만으로는 수요자 음질 측정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스’의 거리 음악들이 우리 정서와도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다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실연의 상처를 안고 더블린에서 낮엔 청소기수리공으로, 밤엔 길거리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부른다. 여자도 한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남자는 멀리 떠나버리고 길거리에서 장미를 팔며 아이와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간다. 여자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남자의 노래를 듣게 되고, 남자는 여자의 고장 난 청소기를 고쳐주며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러나 이미 사랑의 상처가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리면서도 한편으론 쉬 다가가지 못하고 주저한다.
남자는 자신을 휩싸는 애잔함을 선율에 담고 여자는 이 노래에 가사를 붙여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을 확인한다. 주춤거리는 두 사람이 마음껏 사랑하고 존재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서로의 영감을 자극하는 노래를 부를 때뿐.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보는 것인데, 그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까지 마치 내 이야기인양 안타까운 마음으로 빨려들게 한다. 비록 내 사랑이 아닐지라도 잔잔하고 담백한 사랑의 멜로디가 내 감정의 선을 잘게 긁어댄다.
어제(2014년11월22일) '슈퍼스타K6'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특히 우승을 거머쥔 곽진언의 읊조리듯 저음으로 전하는 음악은 듣는 이를 푹 빠지게 만들었다. 이번엔 ‘사연 마케팅’을 거의 가동하지 않았지만 1991년생 23살 청년의 곡절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상금으로 가장 먼저 아버지 집을 사드리겠다는 평범한 멘트나, 진행자가 이 순간 가장 생각나는 사람에게 한 말씀 하라고 할 때, 그는 울음을 참으며 “동생이 보러 왔는데,,, 잘하자” 라는 싱거운 한 마디까지도 울컥하게 했다. 자라면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으로 공부한 사실도, 사업 실패 후 택시운전을 한다는 아버지에 대한 사연도 징하게 그의 음악에 녹아들었다. 노래는 그 사람을 닮아있고 그 사람은 그 음악을 닮을 수밖에 없다. 개성과 진정성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시문학에도 꼭 같이 해당하리라 믿는다.
권순진 시인
첫댓글 노래 가삿말은 다 시적이라
더 마음에 와 닿는거 같아요
음악은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가 있는 거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내 삶을
누군가가 대신 살았을까요?
또 그 삶을 내가 살아야 했던 삶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