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예술 영재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미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예원학교 합격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왕 미술을 하려면 미국에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추천하면서 거처를 마련해 준 삼촌 덕분이었다. 미국에서는 뉴저지 지역의 작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에서 입시미술을 경험한 덕분인지 미국의 시골 학교에서는 미술 천재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환율이 매우 높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모든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이 지급되는 Cooper Union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Cooper Union은 공학, 건축학과, 예술학과로 구성되었고 전교생이 1,000명 이내인 작은 학교였다.
이 학교는 상업미술로부터 거리를 두는 반면, 순수미술은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또 시각적으로 잘 그리는 작업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기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를 양성하는 상업미술 쪽 학교를 알아보면 된다고 했고, 여기서는 ‘개념 미술’이나 ‘동시대 미술’을 주로 다룬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때까지 ‘동시대 미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상업미술이 무엇인지, 순수미술이 무엇인지, 아니 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조차 잡지 못했다.
디자인, 인테리어, 건축, 일러스트레이션, 광고, 영화 등이 주로 상업미술의 영역에 속한다면 회화, 설치, 영상, 퍼포먼스, 혼합매체, 사운드, 미디어 아트 등은 순수미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학교 수업에 적응하면서 상업미술이 (시각적 기술과 언어로)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야라면, 순수미술은 (시각적인 표현과 언어로) 자신의 문제를 탐구하는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자가 주로 고객(client)을 상대로 작업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주도적인 프로젝트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현실에서 둘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미술의 의미를 알아갈수록 미술에 대한 흥미도 커지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상업미술 활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화실을 운영했고 3D 애니메이션, 웹, 패션 디자인, 광고 제작 등에 참여했으며 영화 스태프 등도 해봤다. 그러면서 간간히 삶과 죽음, 색의 조합, 구상과 추상의 중간 영역을 탐구하는 순수미술 작품도 만들었다. 그러다 2011년부터 “회화의 시간성 해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본격적인 순수미술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수강자 주 : “회화의 시간성 해체”란 정(靜)적인 완성작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최종 작품을 만드는 데까지 펼쳐지는 동(動)적인 과정과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혹은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생각의 변화 등등을 담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내 작업에는 많은 매체가 사용된다. 예컨대 회화 작업 중 노란색 물감 튜브의 뚜껑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노랑 물감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를 의인화(혹은 형상화)하는 작업을 추가했는데, 이 작업에는 비디오는 물론 음악과 사운드, 얼굴을 가린 친구들의 퍼포먼스가 동원되었다. 애니메이션도 내가 좋아하는 표현 방식이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매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 회의가 들었고 한두 가지 표현 방식에 집중하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히려 모든 매체를 다 선택해서 하나로 묶는 것은 어떨까 하는 쪽으로 아예 생각을 바꿨고, “Tag man”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Tag man 프로젝트는 일상적인 풍경을 수집해 드로잉 판화를 제작하고 실크스크린으로 프린트한 뒤 프린트물들을 무수히 많은 Tag로 제작하여 나(man)의 몸에 붙이는 작업이다. 작업 과정은 SNS에 공개되었다. Tag man이 SNS에 공지한 특정장소에 가 있으면 관심 있는 사람들, 혹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찾아와 Tag를 떼어갔다. 원래 Tag man 프로젝트는 SNS를 비판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었다. 내게는 많은 사람들이 SNS에 자신의 이미지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또 SNS에 얽매이는 삶도 비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작업을 좋아했고, 작업 중에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따라서 Tag man 프로젝트도 원래 기획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다. 반응이 좋아 중국, 대만에서까지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그러다 코로나로 중단되었다.
한국의 순수미술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정체성 고민에서 출발한 “모발라이즈”라는 프로젝트도 수행해 봤다. 무엇이 뛰어난 미술이고 무엇이 열등한 미술일까? 큐레이터의 눈에 드는 것은 고급미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저급 미술일까? 큐레이터는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도대체 예술은 누가 어떻게 정의하고, “고급”과 “저급” 예술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이상한” 권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어린 시절 입시미술을 하던 나는, 미술 선생님들이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수준 낮은 그림이라며 폄하할 때 “그런 건 이발소에나 걸리는 그림”이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천에 있는 이발소를 빌려 서양화와 전통 민화가 뒤섞인 그림, 또는 유명한 그림을 한국의 현실과 결합해 패러디한 그림들을 전시했다.
(그밖에 재밌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작품 설명들 생략)
그 동안 심각한 주제를 나름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많이 다뤄왔다. 아직까지 나의 생각을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은 만들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소비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이미지들과 차별화 될 수 있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을까? 있다면 뭘까? 아름다운 숲 속에서 그리는, 숲과 무관한 아름다운 그림은 숲이라는 장소와 어떤 관계가 있나? 이런 생각과 고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계속 노력 중이다. 다만 너무 집착하지 않으려 하고 있고, 내가 지향하는 미술과 다른 순수한(?) 취미 미술도 하고 있다. 미술가도 취미가 필요하고, 그 취미가 미술이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추신)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을 완벽히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지치지 않기 위해 취미(미술)생활도 하면서, (나 자신을 위한, 내 생각의 완전한 구현을 위한) 순수미술을 오랫동안 하겠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므로) 무리하게 집착하지도 않겠다, 는 등등의 강의 내용이 참 좋았습니다. 미술계에서는 “너는, 혹은 나는 틀렸다” 같은 자기비판적인 말들을 좋아한다는 말도 좋았습니다. 비판은 무시나 부정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원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허경 서양철학 수업시간에 주워들은 말 중에 니체가 “우리는 왜 예술작품을 좋아하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는가?”라고 했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림을 꼭 잘 그리지 않아도, 물감을 다룰 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많이 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되 그에 대한 비판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아주 흐믓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가 끝나는 시점까지(만).
첫댓글 - Tag = 꼬리표, 딱지
- Tag man = 딱지 붙이는 사람, 규정 폭력자 (과거의 경험이나 법칙, 지식 등으로 미래를 얽매는 자)
- 파묘에 나오는 ‘정령’이 Tag man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Tag man을 보는 순간 파묘의 정령이 떠오름)
- 제 얄팍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