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집에 일찍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게가 끊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 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 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도 수고한다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히며 저녁을 먹자
―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 2005)
* 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동해별곡』 『우리는 읍으로 간다』(창비, 1992)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비, 1998)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 2005) 『뿔을 적시며』(창비, 2012) 『달은 아직 그 달이다』(창비, 2016)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창비, 2021),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지만지, 2012), 문학자전 『국수』(강, 2019) 등이 있다. 2020년 제20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선출 되었다.
십 오년 전에 보내온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집 맨 끝에 매달려 있는 ‘시인의 말’ 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시는 재미로 만나거나 어울려 즐겨야 좋은데 그것에다 내 존재와 세계를 다 싣고자 하니 서로 힘들다. 그러나 그 일마저 없었다면 무엇으로 이 썰렁한 세상을 건넜을까 생각하면 시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하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시 마저 없었더라면 무엇으로 ‘썰렁한 세상’을 건너왔을까요? 또 이 시대의 가장으로 사는 아버지들은 술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고달픈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요. 우리의 아버지들도 아버지로서 지키고 싶은 권위와 체면이 저마다 있었을 겁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한 남자로서 세상과 맞서는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지요. 언제 무슨 일이 얼어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고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 한참 동안 가로등 불빛 아래서 서성이다가 막상 대문을 열 때는 고개를 바짝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네 아버지였으니까요.
시인의 시에서는 세상의 모진 바람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한때는 세상에 지는 것 같아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갔을 테지만 이제는 집에 일찍 들어가서,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고 합니다. 어둠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같이 사는 집. 그 곳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사는 곳이니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서 힘을 얻자고 하네요. 우리 모두 같이 소망해 봅니다.
강민숙 시인 / 전북도민일보 2020.10.11
철쭉이 한창이다. 오월이 온다. 그간 여야가 바뀌고 지진이 지구를 흔들어도 일상은 변함없이 반복된다. 하늘을 날던 새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종일 땅을 파헤치던 닭도 꿈을 위하여 횃대에 오른다. 저녁이다. 가로등이 켜지는 골목길로 붕어빵을 사들고 귀가하는 아버지가 있고 직장인들은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시간이다.
저녁이 아름다운 건 뭐니 뭐니 해도 가족이 밥상 앞에 앉아 서로를 보듬는 소소한 행복 때문이다. 무엇을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감싸주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저녁을 빼앗기거나 가족이 거의 해체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게 모두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니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역설일 수밖에 없다.
어느 정치인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민생경제론을 펴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의 수사적 낭만성이나 계급성 때문이었던지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집을 나서면 우리는 상처받기 일쑤다. 갑에게서, 명품에게서, 심지어 국가에까지 우롱당한다. 삶은 너무 노출되어 있고 낱낱이 환하다. 그래서 치유와 휴식의 느슨함이 필요하고 거기가 바로 우리들의 저녁이다. 마치 짐승이 새끼의 상처를 핥아주듯 커다란 어둠에 몸을 맡기고 쉬어야 하는데 그 저녁으로 돌아가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여하튼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이상국 / 이투데이 2016-04-26
지금껏 남아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시는 한동안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과 2호선 역삼역 등 서울시 지하철 곳곳의 스크린도어 투명유리에도 인쇄되어 있었다. 서울시가 <시가 흐르는 서울>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작품사용료 5만원씩을 지불하고서 수많은 시인들의 시들을 지하철 구내 곳곳에 새겨 넣었으나, 이처럼 전철을 기다리는 퇴근길에서 짠하면서도 흐뭇한 울림으로 와 닿고 후딱 읽히는 시는 그리 흔치 않으리라.
이미 알고 있는 시였으나 나도 몇 년 전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래전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가급적 늦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가해야 온전한 직장인이며 대한민국 가장의 참모습인양 비틀거렸다. 숱한 경솔과 착오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 밖으로만 돌았으며,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어둠이 깊어질 때까지 귀가를 유보했다.
지금도 직장인들은 아내에게 듣는 가장 빈번한 군소리가 일찍 들어오라는 말일 것이고, 어린 자녀로부터 습관적으로 듣는 아침인사가 ‘아빠 일찍 와!’일 것이다. 출근할 땐 그러겠노라고 쉽게 대꾸하고서는 퇴근길의 가장들이 가장 지키지 못할 약속 또한 집에 일찍 들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이른 귀가를 주저하고 망설일 때, 이 시를 본다면 훈훈한 정과 따뜻한 밥이 기다리는 집으로 얼른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와락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집에 당도하면 모두가 안녕이고 가화만사성이다.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치면서 모처럼 아빠 노릇도 하는 거다.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수다도 섞어서 오순도순 더운 밥 맛나게 먹고서는 9시 뉴스를 함께 보는 거다. 과일 깎아 먹어가며 드라마를 한 편 보거나 거품이 있는 술을 한 잔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단풍이 절정을 찍고 조락으로 치닫는 가을의 ‘불타는 금요일’이다.
야구를 좋아하거나 편을 들고 싶은 팀이 시리즈에 진출했다면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야구중계를 보는 것도 탁월하진 않지만 괜찮은 선택이다. 손학규 전 의원이 내걸었던 ‘저녁이 있는 삶’이란 바로 이러한 모습들이 아니겠는가. 그러자면 일자리를 더 만들고 개인과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게 전제가 되어야겠지만, 국가가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어 개인의 삶과 일상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곧 일류국가로 향하는 길이자 복지사회의 진면목이리라.
권순진 시인 / 권순진 시인 블로그 ‘詩하늘 통신’ 2014. 11. 7.
여러분도 그러셨는지요?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밖으로만 돌곤 했는지요? 상처나 눈물 자국을 안 보이려고 어둠이 깊어서야 돌아가기도 했는지요? 오늘은 일찍 돌아가시기를,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도 치기를,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을 수 있기를.
도종환 시인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200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