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오붓한 산길을 조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숨길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는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내통(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 <창작과비평> 2003년 여름호 /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창비, 2006)
* 윤성학 : 1971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당랑권 전성시대』(창비, 2006) 『쌍칼이라 불러다오』(문학동네, 2013)가 있다. 현재 농심 홍보팀 근무.
내외라는 건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감추고 싶은 것을 볼 수 있고 지키는 것일까. 시인은 재미있는 정황을 산길에서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이라도 그사이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벌어지면 싫어요. 적당한 거리에 있어 줘요. 네, 그렇게 해요. 가려주고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복이다.
이기호 시인 / 이기호 시인 블로그 ‘이기호의 시시한(詩詩한) 여행’ 2022. 1. 24.
내외는 남녀 사이에 서로 피한다는 뜻도 있지만 부부라는 뜻도 겸하고 있다. 서로 피함으로써 부부로 통하는 게 내외인 셈이다. 여기서 안팎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 둘 사이에 감질 맛 나는,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거리가 있으면 된다. 신경선이 바짝 조여진 이 거리, 온 우주가 내통하기에 적당한 그 1㎝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손택수 시인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관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 흰 색과 검은 색의 중간색. 서늘하면서 뜨거운 관계. 그게 내연(內緣)의 관계일까, 내통(內通)의 관계일까. 눈이 밝은 사람에게는 보인다. “1㎝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이. 푸른 빛 풋고추가 붉은 빛 태양초로 이르기까지는 보랏빛의 단계를 거쳐야 된다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세상에는 푸른 고추와 붉은 고추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그 서툰 젊은 시절에는. 좌와 우, 중간색이 사라지고 있는 이 극단의 세상이 너무 두렵구나. 그런데 가만! “내외”란 저 제목은 '내외하다'란 말의 “내외”인가, '부부'란 말의 “내외”인가. 절묘하구나, 그 말의 “간극”.
장옥관 시인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도 가까이 다가가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이 있다고 하지요.
동물은 물론 사람들도 자기만의 공간이 침해당하면 본능적으로 긴장을 하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 실망하지 않고 새록새록 정을 나눌 수 있는 지혜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흰색과 검은 색의 이분법으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그 중간에 여러 가지 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심리가 깔려있지요.
한국의 커다란 담론 중의 하나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일 것입니다.
글로벌시대인 현대사회에서는 구태의연한 패러다임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 양립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가치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건강한 대립이 존재 할 때 한국사회는 분명 한걸음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표현한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용어를 보면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었으나 서로의 가시가 상대방의 몸을 찔러 결국에는 상대방을 찌르지 않으면서도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슴도치의 학습 결과처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내통하는 물리적 간극이 분명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절제하는, 그러나 시원하게 내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목소리가 여기 있습니다.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 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 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이병룡 시인 / 중소기업중앙회신문 제1937호
일단은 저 예쁜 내외처럼 짝을 잘 만나고 볼 일입니다. 보일락 말락 들릴락 말락 그래서 들킬락 말락 저 말락 내외처럼 절로 벌어지는 거리 안에서 서로에게 자유로워지고 볼 일입니다. 이를테면 초겨울 살얼음판에 살짝 줄 간 순정한 실금 같은 거 있잖아요, 틈 같은 거 있잖아요, 세상에 이보다 더 빛나는 눈금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 옛날 집들이 담을 사이에 뒀듯, 그 옛날 연인들이 담장 아래 발길을 못 돌렸듯, 오늘을 살고 오늘을 사랑해야 할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흙과 벽돌로 단단히 다진 간극이라는 이름의 담벼락일지도요.
김민정 시인
첫댓글 '내외'시가 공감이 가면서
참 재밌네요 남지 보다도
여자가 훨씬 불편하지요
아내 분이 결혼전이라
더 부끄러웠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