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사심을 갖고 드리는 제사(예배)의 결과
호세아 8:13-14
13.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14.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물을 바쳤으나 그 이유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라는 형식을 갖추었을뿐, 그들의 관심은 제사 후에 먹을 고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들의 행위에 대하여 "번제로 드려야 할 고기를 화목제로 변경한 죄"라고 했습니다. 번제라는 것은 제물을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린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동물을 잡아서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이 번제와는 같지만, 번제처럼 완전히 태우는 것이 아니라 소의 경우는 소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과 함께 취하여 제단 위에 드려서 태우고 물론 피는 제단 사면에 뿌리고 잘 구워진 고기는 제사후에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만약 양을 드릴 때에는 소처럼 피를 뿌려서 드리고 *미려골( 尾閭骨: 尾(미)꼬리, 閭(려)이문, 骨(골)뼈=꼬리뼈)에서 빼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거기에 있는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을 콩팥과 함께 제사장에게 주어서 제사장이 그것을 단 위에서 모두 불살라 제사를 드렸습니다.
(*미려골은 꼬리와 연결된 엉덩이 살 내지는 꼬리뼈를 말합니다. 이 부위는 기름과 골수의 중간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및 애굽의 양들은 미려골의 무게가 무려 5-7kg(11-15lb)이나 된다고 합니다. 양고기 중에서 이 부위가 가장 맛있는 부위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번제가 아닌 화목제의 형식으로 제사를 살짝 변형시켜서 온전히 바쳐야하는 제물을 자기들의 배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번제로 완전히 태워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고기부분을 남겨서 자기들이 먹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제사를 수없이 드리며 제물을 수없이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그들의 죄악만 더 쌓아서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들에게 의식법을 세밀하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법대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매우 세밀하게 지시하신 수많은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뭘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우리 기분과 입맛대로 예배를 아무리 드려보아야 우리가 이긴 것 같지만, 그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불순종의 댓가를 반드시 치르어야 한다는 것을 지각이 없는 이들은 알 수도 없고 알고싶어하지도 않습니다. 7절에서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바람을 심는 것이어서 그들의 결국은 그들의 삶의 모든 것을 쓸어가는 "광풍"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광풍"이라는 히브리어 "수파(סוּפָה)"는 "회오리바람" 즉 오늘날의 허리케인이라고 볼 수 있는 거대한 폭풍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시게 되었습니다.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반복해서 드리는 그들의 제사는 그들의 죄를 기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계속해서 기억하시며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지각이 없는 어리석은 자들은 전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쁜 기억이 있는데, 그것을 잊을만 하면 그 사람이 나타나서 그 일을 반복한다면 그것을 잊겠습니까? 사라졌던 기억까지도 다시 되살아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말만 제사일 뿐,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기들 자신이 만족하고 즐기는 그러한 제사였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들의 죄악을 기억해야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벌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벌은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였습니다. 여기에서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들이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해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이상하게 여기며 무시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예배의 형식만 있을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닌 자기들의 만족과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예배를 드리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그때로 다시 되돌아가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강대국들에게 짓밟혀서 다시금 노예생활을 하게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기 전에 광야 2세들에게 경고했던 말입니다. 신명기 28장58절 이하를 보면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리로 팔려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여러분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인들의 취향과 그들의 기분을 맞추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요즘은 말씀은 짧을수록 좋고 찬양은 길수록 좋다는 이상한 논리가 떠돌아다니면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어떻게든 줄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말씀을 짧게 하는 설교자가 지혜로운 자"라고까지 말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 길게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안을 뒤집어 엎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싶으실 것입니다. 찬양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는 물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듣기 싫어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illogical)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이 하는 찬양은 자기들의 감정을 즐겁게 또는 눈물나게 해주는 자기 위주의 감동이 되는 노래일 뿐입니다. 즉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면서 자기 멋대로 하고싶어하는 그런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는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텐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살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래서 전각들을 세우며 견고한 성읍을 많이 건축했습니다. 왕궁을 아무리 튼튼하게 지으면 무엇합니까? 성읍들을 견고하게 지은들 하나님께서 쓸어버리시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왕상 12:25)
"저(오므리)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왕상 16:24)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릇 그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22:39)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잊어버렸다"라는 히브리어 "샤케흐(שָׁכַח)"는 "잊어버리다(forget)", "무시하다(ignore)", "시들다, 말라죽다(wither)"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매우 존경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결코 잊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무시한다는 것은 더욱 말도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하면 그에게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하며 연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관심이 없는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관심이 있는 것은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12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께서 수많은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율법들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댄데 옛날 고리타분한 법을 지금도 적용하라는거야? 말이 되는 말을 해야지? 시대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변해야 되는 것이 지혜야~"라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한 매우 교만한 말을 거리낌없이 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하나님처럼 되고싶은 인간들은 바벨탑을 높이 쌓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바벨탑을 높이 쌓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시므로 함께 한마음이 되어 탑을 쌓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없이 아무리 문명을 발달시켜보았자 그것은 바람을 심어서 광풍을 거둘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14절에서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라고 하시며 앗수르를 통하여 완전히 멸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에 입각한 신앙생활이 주된 원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그분처럼 거룩해야만 합니다. 즉 세상과 결코 타협하면 안되며 세상과 철저히 말씀으로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가치관 등 하나님의 율법보다 세상의 것을 더 추구하며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의지했던 강대국들의 먹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29장25절에서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거룩"에 대한 말씀이 쉬지않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고싶어합니다. 성령님께서 자꾸만 성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 동안 성경말씀이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교회에 와서만 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방식으로 살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며 복음은 전혀 이야기하지도 않고 살아가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예배의 형식을 무시하고 교회에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 또는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며 예배의 형식을 자유롭게 하고있지는 않습니까?
(시간이 정해진 특별한 예배를 제외하고)설교를 짧게 하라고 설교자에게 한 번이라도 말해본 적은 없습니까?
나와 취향이 전혀 다른 설교자에게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설교해 줄 것을 요구한 적은 없습니까?
(즉 나는 죽기 싫고, 희생하고싶지 않고, 설교자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까?)
번제는 완전한 희생을 말하는데, 예배를 드리면서 나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식과 나를 즐겁게해줄 것을 고집하지는 않았습니까?
교회에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을 놓칠까봐 테스트해 보지도 않고 성가대에 임명하는 등 중요한 자리에 앉히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면 다른 교회에 가서라도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어있고, 불택자라면 우리 교회에서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며 중직을 맡길지라도 교회만 어지럽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즉 예배와 기도하는 것보다 선교한다는 명목으로 바자회나 기타 돈이 오가는 일들이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가는 이유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비즈니스 차원에서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하여 또는 사람들을 만나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등 사적인 마음이 있어서입니까?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무시하므로 인해 바람을 심어서 허리케인이 불어와 우리의 삶의 모든 터전을 싹 쓸어가지 않도록 의와 공평을 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가 우리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앞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그러한 예배는 우리에게 매우 지루하여 많은 인내를 요구할 수도 있으며 우리가 좋아하는 취향과 완전히 반대로 가서 많은 절제(감정, 말하고 싶고 행하고 싶은)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인내와 절제는 모두 성령의 열매이므로 성령안에서 예배드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Esther Soo-Gyung Kim, Pastor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