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휘이잉...!
암벽 밑에서 회오리친 바람이 귀곡성(鬼哭聲)을 흘리며 옷자락
을 휘날렸다.
'비수당주라... 어서 올라오게 그리고....'
적화단검(績花斷劍) 막여(莫勵)는 즐거운 환상에 젖은 채 암벽
밑을 바라보았다.
살겠다고 발버둥치며 한 뼘씩 기어오르는 모습이 굼뱅이처럼
보여 안쓰러웠다. 조중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밀옥을 탈출한
것부터가 실수였다.
아니다. 밀옥을 깨트린 놈!
지영 스님과 운종 스님은 그가 텁석부리 장한이란 것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놈에게 불사를 맡기다니. 제 발로 스스로
걸어와 시주(施主) 대신 탱화를 그리겠다고 자청했단다. 그림
솜씨도 어느 화공(畵工) 못지않았고.
그놈을 주목해야 한다. 곽가장에서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의
마음조차 답답하게 만든 밀옥을 깨트린 놈. 그러나 천라지망이
펼쳐진 순간, 놈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진배없다.
"순순히 두 손을 내밀 놈이 아니다. 분명 최후의 발악이 있을
터, 멸겁진(滅怯陣)을 펼쳐라. 모두 죽여도 좋다. 단 놈에게
나포된 여인들만은 털끝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존명!"
우렁찬 외침과 함께 재빨리 진형(陣形)을 갖추는 수하들을 보
면서 막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놈에게 나포된 여인은 장주와 동등하게 대접하라는 지시(指
示)요. 만약 여인에게 탈이 생긴다면 문책이 떨어질 터...'
여산으로 달려오던 중 길가에서 받은 전서(傳書)의 내용은 놀
라웠다. 세상에 장주와 버금가는 인물이라면 누가 있을까? 그
런 사람이 왜 밀옥에 갇혔을까?
풀리지 않는, 풀을 수도, 궁금해하여서도 안 되는 의문이었다.
'막다른 궁지. 네가 하늘로 솟구치든가, 땅 속으로 꺼지지 않
는 한 달아날 곳은 없어.'
막여는 여산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았다.
밀옥을 건립하면서 성자, 청산, 여산 분타주는 두 달 가까이
여산에서 장막(帳幕)을 치고 생활했다. 천라지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눈에 확 들어오는 추적로는 오로봉이었다.
산세가 험할 뿐 아니라 키 작은 잡목으로 우거져 추적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만약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는
다면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맥(脈)을 찾는데 한 달을 소모했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놈은 기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상 천라지망 안으로 걸어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쪽으로 도주했다면... 한 달이다.
식량을 얼마나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날짜 차이는 조금 나겠지
만 한달 안에 잡혔으리라.
가장 난해한 추적로는 파양호로 빠지는 수로였다.
여산, 성자 분타 무인들이 육로를 더듬기 때문에 수로는 오로
지 청산분타 혼자 힘으로 막아야 한다.
놈이 절정고수라면...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산분타 무인
들은 자맥질에 능해 반나절 정도는 발목을 붙들 수 있다는 판
단을 내렸다.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
나흘.
수로에서 천라지망의 효험이 발휘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쉬운 추적로가 바로 지금 반여량이 택한 대림봉 쪽이었
다.
이곳은 정말 간단했다.
천험적인 암벽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입구만 봉쇄한다면 쥐새
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는 험지였다. 반여량이 기어오르는
암벽도 몸소 올라와 봤다. 바위는 삭아서 푸석했고, 몸을 쉴
만한 토끼굴 하나 보이지 않았다.
휘이잉...!
막여는 바람이 참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암벽 등반은 매복을 당했을 때 차선책으로 준비한 계획이었다.
여산 분타 무인들이 소로를 더듬어 오든, 길목을 가로막고 있
든 문제될 것이 없었다. 처음 계획을 수립했을 때 온갖 상황을
전부 염두에 두었으니까.
긴장이 풀린 마음, 그것이면 족했다.
그랬다. 확실히 여산 분타 무인들은 긴장이 풀렸다. 그들은 기
다리는 마음이었고, 자신이 암벽을 등반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일비쌍검과 마주친 그들은 당황할 것이고, 급히
주위를 수색하기에 여념 없었다.
이삼재가 모든 일을 망쳤다.
조금, 아주 조금의 흙먼지가...
여명(黎明)을 가로지른 천광탄은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고 말
해준다. 밑에는 여산 분타 무인들이 칼날을 갈고, 위에서는 성
자 분타 무인들이 멸겁진을 펼치고 있으리라.
'분타에 있는 무인들은 본장 무인들보다 무공이 뒤진다는 열등
감을 가지고 있지. 호호호! 그래서 분타주들이 본장 무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것이 멸겁진이야. 다섯 겹의 공격진형, 멸
겁진.'
'분타 무인이 본장 무인을 상대한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 곽가장 문도에게는 적이 없어. 있다면 내부의 적뿐이
지. 멸겁진을 만든 효과는 당장 나타났지. 원래 분타주라는 직
위는 본장 대주와 동급이거든. 호호호! 그런데 멸겁진을 만든
후부터 대주는 물론이고 당주들도 막말을 하지 못해. 그만하면
됐지 않나?'
가심은 자신있게 말했다.
그녀는 욕심이 지나쳤다. 투월채법 삼십이식을 십팔식으로 다
듬고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멸겁진마저 더욱 강하게 만들
고 싶어했다. 그래서 알았다. 멸겁진의 무서움을.
막다른 궁지에 몰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고안된 멸겁진은 가
장 적은 희생자를 내면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이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일단은 올라가야 한다.'
반여량은 등뒤에 축늘어져 있는 여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휘익!
정상 가까이 다다른 반여량은 공력을 운집하고 훌쩍 뛰어올랐
다.
예상대로였다.
성자 분타 무인들이 반여량을 반갑게 맞이했다.
"허허허! 어서 오시게."
'적화단검 막여! 검법의 특징은 환(幻). 빗살처럼 빠르면서도
늘 다섯 가닥의 변화를 내포한다는 고수.'
막여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나이는 육십을 웃돌았지만 각진 턱과 굳건한 몸에서는 범접하
지 못할 무인의 기개가 물씬 풍겨 나왔다.
반여량은 곁눈질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암벽 밑으로 빼곡히 들어선 무인들, 여산 분타 무인들이었다.
멀리 밀옥 고수들과 청산 분타 무인들도 보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오다가 합류하는 중이었다. 조만간, 채 반 각이
못 되어 암벽위로 올라서리라.
"분타주, 무인 대 무인의 겨룸을 청하고 싶은데, 의향이 어떠
신지 궁금하군요?"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조급함이나 당황스러움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막여는 언뜻 기광을 발산시켰다.
"무인 대 무인이라... 상황이 달랐다면 자네의 제안을 수락하
겠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그보다 비무를 청하려면
작호와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
"다르군요."
반여량은 말문을 흐렸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곽가장에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죽
기살기로 덤벼들 게다. 조중 일행은 가둬 두면서도 자신만은
죽이려 했다. 호소봉왕 가심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벌써
차디찬 고혼이 되어 저승을 헤매었을 처지였다.
"희생을 원하지 않네."
"동감입니다."
"포승을 받겠다는 말처럼 들리는... 그리 생각해도 좋은가?"
"길을 열어 달라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렇겠지."
말을 나누는 사이 조중과 학구가 정상으로 올라섰다.
그들은 정상에 올라서자마자 쪽 늘어선 성자분타 무인들을 보
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실, 그들에게는 검을 들 힘조차 남
아있지 않았다. 무공이 폐지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동안 복
용한 갈혈산은 능히 사 할 정도의 내력을 갉아먹었다. 신법을
전개하면서, 벼랑을 타며 여실히 느꼈다.
"날씨가 좋군요. 한낮이 되면 뜨거을 겁니다."
"그래서 오수(午睡)의 즐거움이 커지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자네는 뜨거움을 느낄 수 없을 거야. 그때쯤이면 밀옥에 갇혀
있거나. 죽어 있을 테니까."
"피를 원하지 않습니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순간, 적화단검 막여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피를 원하지 않는다고? 허허허! 내가 자네를 예우해 준 것은
처음으로 밀옥을 깨트렸기 때문일세. 흑백을 떠나 신출귀몰한
자네 행동은 예우를 받을 만하지. 하지만 말일세. 자네가 저지
른 악업은 용서할 수 없네. 어떻게 절에다 볼을 지를 수 있단
말인가? 허허허! 자네는 죽어서도 염화지옥에 떨어질 거야. 장
담하겠네."
아직도 밀옥 쪽에서는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꺼져 가는 불씨
에 생나무가 타는 연기였다. 건조한 날씨 탓에 냄새는 사방 십
리 넘게 풍겨 갔다.
"자네와 이렇게 만난 이상 피를 안 볼 수는 없네. 자!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빨리 끝내세나. 공격하라!"
적화단검 막여의 태도에서는 승자만이 지닐 수 있는 당당함과
여유로움이 풍겨 나왔다.
"존명!"
제일렬(第一列)에 선 무인들이 일제히 기수식(起手式)을 취했
다. 공격이 시작되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여량
의 행동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는 검을 뽑을 생각은 고사하고
오히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
"우우우... 우우우우...!"
반여량의 입이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작게 움츠러든다 싶은 순
간, 듣기에도 섬뜩한 기음이 터져 나왔다. 명부(冥府)의 사자
(使者)가 혼을 빨아들이는 듯, 구천지옥(九天地獄)을 헤매는
원혼이 갈 곳을 몰라 발버둥치는 듯 모골을 쭈뼛 서게 만드는
곡음(哭音)이었다.
"뭐 하는 짓...?"
우우우...! 우우우우...!
여산을 굽이굽이 돌아선 곡음의 회성(回聲)이 들려 왔다.
산꼴짜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위에 부딪힌 다음
되돌아 온 소리도 아니었다. 암벽 아래서, 옆 골짜기에서, 또
는 산너머에서 들려오는 응답 소리들.
"느, 늑대! 늑대와 영감이 통한단 말인가?"
적화단검 막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두 눈을 부릅떴다.
기문(奇聞)이었다. 어려서 늑대에게 물려 가,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늑대소년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원거리에서
교감을 주고받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하지
만 직접 눈으로 보았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격하라!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적화단검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가 염려한 것은 틈이었다. 늑대가 아무리 많다 한들 상대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로 인해서 놈이 탈출할 틈이 벌어진다면
문제는 커진다. 더군다나 조중이 체력을 회복한다면 승리를 장
담할 수 없다. 갈혈산 때문에 내력을 운집할 수 없다고 하지만
조중의 위명은 아직도 많은 무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쉬익! 쉬이익...!
성자 분타 무인들은 앉아 있는 반여량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오랜 수련을 통해 연수합격(連手合擊)을 정
통으로 체득한 일급 무인들이었다.
적화단검도 팔짱만 끼고 구경하진 않았다. 어느새 뽑힌 그의
검은 싸늘한 선율을 흘리며 반여량의 목젖을 베어갔다. 그러
나,
"허억!"
적화단검은 황급히 검세를 거두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반여량을 향해 짓쳐들던 성자 분타 무인들
십여 명도 호랑이와 마주친 강아지처럼 엉거주춤하니 검을 멈
춰 버렸다.
공격할 수 없었다.
곽사연을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이상 보옥(寶玉)을 두부처럼 썰
어내는 간장검(干將劍)을 지녔다 해도 터럭 한 올 벨 수 없었
다. 그러나 그것뿐이면 그리 놀라지 않았으리라.
이글거리는 눈빛.
활화산처럼 열기를 뿜어내는 눈빛을 접하자 전신에 맥이 탁 풀
려버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설
혹 그자의 무공이 가공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들끓는 투지를
어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자는... 공격할 마음을 죽여 버린
다.
'이런!'
막여는 사색(死色)이 된 얼굴로 반여량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피를 원하지 않는다고 지금이라도 늦
지 않았습니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물결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음성, 그러나 속이 뒤집히도
록 얄미운 음성이었다.
"가겠습니다. 만약 제 길을 막는다면 이 여인의 목숨은 보장하
지 못합니다."
반여량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모든 계략은 상대를 얼마나 파악했느냐에 승패가 좌우된다. 성
자분타주는 공명정대한 인물이다. 그는 암수(暗手)를 펼칠 생
각조차 못하리라.
유엽비도를 여인의 목에 바짝들이대고 걸음을 떼어놓았다.
막여에게서 여인을 염려하는 마음이 감응으로 느껴졌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뚜벅! 뚜벅...!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을 일깨웠다.
"헉헉! 응? 이, 이게..."
이제서야 간신히 정상에 올라선 이삼재는 후들거리는 몸을 가
늘 틈도 없이 반여량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졌네. 천라지망을 만들면서 이런 경우는 예측하지 못했어. 허
허허! 무림에서 만난다면... 무인 대 무인으로 겨뤄 보고싶
네."
"그런 날은 없을 겁니다. 언제나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만 만나
게 될 테니까요."
"그렇겠군."
적화단검 막여는 반여량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흘러가는 구름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여량이 서 있던 자리
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공격하지 못했는
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포된 여인 때문이야. 그녀를 방패막이로 사용해서...'
생각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꺼어엉! 끄릉...!
"기분 한번 더럽군. 이놈의 늑대들이 어디서 이렇게 기어 나오
는 거야?"
일비쌍검과 자전야공(紫電夜空) 탁대(卓戴)는 길을 가로막은
늑대들을 베어내기에 정신없었다.
여산에 사는 늑대란 늑대는 모두 모여든 것 같았다. 베고 또
베도 끝없이 나타나는 지루한 소모전(消耗戰).
"에잇!"
쉬익! 케에엑...!
일비쌍검은 막 덮쳐드는 늑대 한 마리를 단칼에 베어 버리고
암울하게 젖은 눈으로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놈... 그놈의 짓... 또 당했어.'
그는 적화단검이 틀림없이 반여량을 잡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
치 않았다. 놈이 아무리 신출귀몰하다 해도 다섯 겹의 멸겁진
을 헤쳐 나올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살포시 젖어드는 불안감
은 무엇이란 말인가. 난데없이 갈기를 곤두세우고 달려드는 늑
대 무리 때문에?
언뜻 일비쌍검의 안색이 희색(喜色)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곧
썩은 돼지간처럼 거무죽죽하게 변해 버렸다.
산정에서 내려오는 성자 분타 무인들... 그리고 축 늘어진 어
깨... 밀옥을 빠져나간 놈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일비쌍검 문허는 천광탄을 쏘아 올렸다.
"밀옥주, 이 밀마는...?"
"신망전(神茫箭)을 사용하라는 밀마요. 여자를 방패막이로 내
세우는 한 놈을 잡을 방법은 이것뿐이오."
일비쌍검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단호했다.
신망전을 터트리면 반경 삼 장이 붉은 운무에 휩싸인다. 그 연
기를 한 모금이라도 마신다면 이지가 망실된다. 제조각에서 제
련했지만 정도문파가 쓰기에는 음악(陰惡)하다는 이유로 사용
치 않는 암기였다.
"아직 놈은 빠져 나가지 못했오. 후후후! 지금쯤 산 중턱이나
벗어났을까? 부지런히 내달리고 있겠지. 살려고..."
"밀옥주, 아무래도 신망전을 사용한다는 게..."
성자 분타주가 내키지 않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밀옥주와 분타주는 지위가 동등했다. 그러면서도 천라지망이
펼쳐질 때, 모든 결정권은 밀옥주에게 주어진다. 마음이 내키
지는 않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흥! 그래서 놈을 눈앞에 두고도 놓치셨구려."
"밀옥주, 말씀이 지나치시오. 정작 이런 일이 누구 때문에 벌
어졌소? 놈을 놓친 것은 밀옥주가 아니오?"
"어허! 아랫것들 앞에서 싸우지 맙시다. 자자, 우선은 놈을 잡
는 것이 급선무니."
청산 분타주의 중재로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힌 무인들은 신속
히 천라지망을 재가동시켰다.
크릉...! 끄르릉...!
호굴(虎窟)에서는 호랑이의 포효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산천이 쩌렁 울리는 포효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
록 소리가 점차 낮아졌고, 종국에는 작은 속삭임 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제길! 범을 잡으려면 호굴로 들어가야 된다는 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게 뭐야? 정말 호랑이라도 잡겠다는 거야?"
"호호호! 그는 늑대를 불렀어요."
"끄응! 누가 뭐라고 했나?"
"조용히 해라!"
서로 으르렁거리던 이삼재와 요와는 입을 다물고 텁석부리 장
한이 들어간 호굴(虎窟)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중은 서서히 옛날의 위엄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묵직한 기
도와 들끓는 투지,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협사(俠士)의 기
질... 그의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거웠다.
그는 뚫어지게 텁석부리 장한을 바라보았다.
늑대와 교감이 통하고, 산세를 손바닥 보듯이 알고... 전에도
이처럼 괴이한 인간과 동행한 적이 있다. 바로 추풍 반여량과.
산귀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동목이 맞받아 끄덕인다. 학구가
싸늘하게 굳어진 입가를 실룩거린다. 곽소연의 봉목(鳳目)이
빛난다. 이들은 전부 한 사람을 생각했다.
옷차림이 제법 번지르하고 용모가 완연히 달랐지만 신발을 신
지 않는 습성하며 놀라운 능력, 무엇보다 풍기는 기도(氣道)가
똑같았다.
그러나 반여량의 심증을 헤아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암벽 위에서 기적적으로 빠져 나왔으면 부지런히 도주하는 것
이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반여량은 도주할 생각이 아예 없는
듯했다.
적화단검의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
며 부지런히 달렸다.
모두들 하산하는 줄로 알 수밖에.
반여량은 대림봉 중턱에서 신법을 거둬 버렸다.
조금만 더 달리면 장강이 지척이고, 나루터에 들어서기만 하면
아무리 이목이 천하에 깔린 곽가장이라 할지라도 쉽게 찾아내
지 못할터였다. 밀옥 주변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조금만 더 가면...."
그는 동목의 물음을 무시해 버리고 늑대를 불렀을 때처럼 땅바
닥에 주저앉아 묵상에 잠겼다. 그러기를 얼마간, 돌연 눈을 뜬
반여량이 찾아온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호굴이었다.
"들어가 볼까?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것 같지는 않은데?"
"으음...!"
조중은 신음을 내뱉으며 호굴로 걸어 들어갔다.
곽가장 무인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일행이 본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사람들이었다 해도 곽가장 일개 분타를 상대할 수 없
다. 또한 밀옥을 빠져 나온 이상, 모든 사실을 알아 버린 이상
또다시 잡혀 갈수는 없다.
한사람, 두 사람... 호굴로 걸었다. 그들에게는 달리 주어진
선택권이 없었다.
"어엇! 이게..."
"어멋!"
끄르릉...!
호랑이가 이빨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마치 한 걸음이라
도 더 떼어 놓으면 목줄을 끊어 놓겠다는 듯이. 호랑이를 만나
면 눈을 보지 말라고 했던가? 어둠 속에서 노란색으로 빛나는
두 줄기 광채는 발걸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 주눅들 일행이 아니었다.
그들이 놀란 점은 호굴에서 벌어진 상황 때문이었다. 한 쪽 벽
면에 곱게 앉혀진 곽사연, 운공 중인 반여량, 그리고 마치 호
법(護法)처럼 충실하게 호굴을 막아선 호랑이.
"으음...! 늑대에 이어서 호랑이... 정말 신비한 인물이군."
"만수(萬獸)를 부릴 수 있다면... 무림의 제왕이에요."
"제왕이라..."
할말을 잃어 버렸다. 만약 텁석부리 장한이 적이라면... 수백
마리의 맹수가 일제히 달려드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천라지망을 펼친 무인들은 바람에 휘어진 풀잎도 세심하게 들
춰보며 거리를 좁혀 왔다.
주비(株榧)도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
그는 유난히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무인들은
주비의 그런 점을 이해해 주었다. 곽가장에 같이 입문했으며,
오늘날까지 늘 붙어 다니던 조룡(趙龍) 이름도 모르는 놈에게
목을 꺾이고 말았다. 밀옥이 깨지면서 놈에게 죽은 제일 첫 번
째 무인이었다.
죽음치고는 잔혹한 죽음이었다.
주비는 혀를 빼어 문 조룡을 끌어안으면서 속으로 눈물을 삼켰
다. 조룡의 애병인 쌍검을 끌어 등뒤에 동여맸다.
"조룡, 네 복수는 내가 해준다."
씹어 뱉듯이 말을 토해 낸 주비는 가장 적극적으로 추적에 동
참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산정에서 내려오는
동료들과 마주칠 거야. 놈은 이 안에 있어."
주비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대신 불타는 눈빛으로 증오
를 표출시켰다. 그때,
"응? 저기 굴이 있는데?"
누군가 조그만 음성으로 속삭여 왔다.
'굴? 놈이 숨을 곳은 굴밖에 없겠지. 조룡, 드디어 복수할 시
간이 왔다.'
쉬익!
번개처럼 신형을 날린 주비는 굴 앞에서 신망전을 꺼내 들었
다. 후일 만인의 지탄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놈의 팔다리를 잘
라 버릴 생각이었다. 워낙 참기름 바른 미꾸라지처럼 약삭빠른
인간이니 정상적으로 승부를 걸 자신은 없었다. 신망전, 신망
전으로 놈의 이지를 망실시킨 후에 팔다리를...
"노옴...! 밀옥에서 네 놈을 업어준 무인. 그는 내 유일한 벗
이었다. 네 놈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으르릉...!
포호소리, 그리고 바늘처럼 쏘아오는 눈빛.
주비는 팽팽하게 긴장시킨 마음이 쭈욱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허탈했다.
'여기도 아냐. 맹수가 사는 굴에 인간이 머무를 수는 없지.'
주비는 발걸음을 돌려 버렸다.
호랑이는 배가 부른지 주비를 공격하지 않았다. 단지 위협적인
태도로 굴 앞을 어슬렁거리다 다시 들어가 버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날마다, 좋을 순 없지만. 날마다, 웃을 순 있어요..^)^
행복한 하루, 좋은 하루 되시길요.~ ^(^
아침엔, 환한 미소로, 낯엔, 활기찬 열정으로,
저녁엔, 편안한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도
행복한 여정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가도,
우리 함께 가는 길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합니다!!감사합니다..)
호랑이 늑대를 부릴줄아는 반여량 어마어마한 인물로 변신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