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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일차/포르투갈5> 2012년 4월 13일(금) 포르투-->마드리드, ‘대항해 시대’의 흔적을 찾아
리스본 벨렝 지구에 있는 발견의 탑.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항해왕자를 필두로,
바스코 다 가마 등 모험가들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7시에 일어나 샤워를 한 다음 글을 쓰러 1층의 공용실(Common Room)로 갔으나, 젊은 남녀가 찰싹 붙은 상태로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새벽에 도착해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여행자인 것 같았다. 이들이 일어날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가 산책한 다음 돌아왔으나 여전히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깨우기도 미안해 숙소 옆의 카페로 가 커피와 빵을 주문해 먹으면서 여행기를 정리했다. 여행기를 조금 정리하다 8시30분 정도 돼서 숙소로 돌아오니 그들이 사라져 있었다. 커먼룸에 자리를 잡고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9시가 조금 넘어 동희가 내려왔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서 10시30분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포르투갈 북부 도시 포르투(Porto)에서 리스본(Lisbon)을 거쳐 야간열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날이다. 포르투에서 리스본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고, 리스본에서 밤 10시38분에 마드리드로 가는 야간 침대열차를 탈 예정이기 때문에 시간이 충분했다. 오후에 리스본에 도착해 지난 번에 돌아보지 못한 곳을 둘러본 다음 야간열차를 탈 계획이었다.
숙소에서 나와 상 벤투(Sao Bento) 역으로 간 다음 11시 20분 상 벤투 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포르투 깜빠냐(Companha) 역으로 이동했다. 깜빠냐 역에서 11시48분 리스본 아뽈로니아(Appolonia)역으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이틀 전 리스본에서 코임브라를 거쳐 포르투로 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기차는 대서양을 오른쪽에 두고 남으로, 남으로 신나게 달려 3시간도 걸리지 않은 오후 2시30분 아뽈로니아 역에 도착했다.
리스본 벨렝 지구에 있는 제로니모스 수도원.
멀리서 보아도 웅장하기 그지없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섬세한 조각이 감탄을 자아냅니다.
먼저 아뽈로니아 역의 코인 로커(Coin Locker)에 1.5유로를 넣고 나와 동희의 짐을 함께 보관한 다음, 교통카드를 충전(3유로씩 총 6유로)해 버스를 타고 5일전 돌아보지 못한 제로니모 수도원(Jeronimos Monastry)이 있는 벨렝(Belem) 지구로 향했다. 수도원 입구에 내려 먼저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아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음료를 각각 6유로와 6.5유로를 주고 주문했다. 식사를 막 하려는데 동희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이제 여행을 계속하는 건 나한테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여행은 그만해도 될 것 같아. 그래서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려고 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여행하면서 미국 어학연수 비자를 받는 게 어렵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대학은 인문계로 갈 생각이야...”
동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요 며칠 동안 자신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많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이틀 전 신트라로 향하는 기차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니, 생각이 좀 더 구체화된 것이다. 나는 “그래? 동희가 많은 생각을 했구나. 근데, 동희는 동유럽과 북유럽, 남미의 우유니 소금사막도 여행하고 싶었잖아?”하고 물었다. 동희는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 가고 싶은 곳 1순위로 칠레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우유니 소금사막을 1순위로 꼽았고, 북유럽과 동유럽도 여행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일주일 후 아내와 창희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동희와 함께 북유럽과 동유럽을 여행한 다음 미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러자 동희는 “지금 동유럽이나 북유럽을 여행하는 건 나한테 큰 의미가 없어. 물론 북유럽은 가고 싶었지만, 지금 그곳을 여행하는 게 꼭 필요한 것 같지 않아. 우유니 소금사막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나중에 가봐도 돼.”라고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다. 동희는 지금까지 여행만 약 7개월, 필리핀 어학연수를 포함하면 9개월 동안의 해외 ‘유랑’을 중단하고, 이제 ‘본업’으로 복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토록 집착하던 게임과 판타지 소설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되어 있었고, 공부와 진학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여행은 유럽을 끝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해졌다. 나는 동희의 생각과 결심에 찬사와 지지를 보냈다. “동희가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했구나. 아빠는 동희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잘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동희의 결심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동희는 지금 학교 다니고 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독서도 많이 하고, 여행으로 많은 경험도 쌓았고,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잖아? 그런 다음에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의 수준이 다를 거라고 생각해. 너한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면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려 애를 썼다. 사실 그것은 솔직한 나의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가 여전히 고민이었다. 귀국하느냐,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 영어연수를 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동희가 미국 어학연수에 관심을 보여 동희에게 그 방법을 인터넷으로 알아보도록 했는데, 비자 문제 등이 계속 걸렸던 것이었다. 나도 인터넷으로 연수 기관과 비자 등을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방안을 찾기 어려웠다. 물론 여행자 신분으로 미국에 입국한 다음 연수 기관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런 불확실하고 약간의 불법을 감행해야 하는 방안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조기유학 바람에 편승해 상업적 이익에 몰두하고 있는 기관에 ‘넘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여행하다가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미국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낼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으나, 마땅한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동희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빠도 미국 영어연수 방법을 찾아봤는데, 여기서 연수할만한 곳을 찾거나 비자를 받는 게 쉽지 않은 거 같아. 어쨌든 유럽을 끝으로 동희는 여행을 마치기로 하고, 그 이후 일정은 엄마하고 같이 상의해보기로 하자. 넌 잘할 거야.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알았지?”하고 동희를 안심시키고, 힘을 불어넣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통해 꿈을 키우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는데, 결국 그것이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희는 지금까지 9개월째 해외 생활과 여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간, 문제의 절반 이상은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아이들 문제를 당사자인 아이는 고민하지 않고 부모가 고민하는 것, 그래서 부모가 아이의 관심이나 상태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이 아이들의 창의성과 독립심을 약화시키고, 정체성의 갈등을 유발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며칠 전부터 동희에게 자신의 여행 일정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동희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하려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었다.
동희의 얼굴엔 진지함과 긴장감이 흐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만족감과 후련함 같은 게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아빠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 아닌가. 그만큼 우리 사이에 신뢰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나의 가슴도 뛰는 것 같았다. 식당을 나오면서 그런 아빠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 퍼특 들었다. “동희야, 아빠는 지금 무척 기쁘단다. 동희가 자신의 문제를 아빠한테 얘기한 것, 동희가 그 얘기를 하려고 용기를 낸 것, 그게 아빠를 무척 기쁘게 하고 있어.” 동희 입가에도 쑥스러운 듯하면서도 아빠와의 어떤 교감을 표시하는 듯한 희미한 미소가 흘러갔다.
식당에서 나와 제로니모스 수도원으로 향했다. 포르투갈이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 대서양과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2일전 포르투에 도착했을 때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어제는 말끔하게 갠 날씨를 보이더니, 다시 리스본으로 오니 비가 오다가, 해가 나다가, 맑다가, 흐리다가, 바람이 불다가 변덕이 죽끓듯한다. 후두둑 비가 뿌리다가 금방 맑아지고 조금 지나면 다시 비가 뿌리기 때문에 하늘을 쳐다보면서 움직여야 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의 남쪽 출입구에 있는 조각상.
성서에 나오는 성인들과 포르투갈의 유명한 성직자 등
40명의 섬세한 조각이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은 멀리서 보면 그저그런 건축물 같았지만, 가까이 가서보니 매우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특히 수도원엔 밋밋하게 만들어진 벽이나 기둥이 없었다. 가장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수도원 남쪽 입구의 모든 기둥과 벽에 예수와 12사도를 포함해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의 외관도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나 제로니모스 수도원도 그에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인 엔리케 왕자를 기념하기 위해 1501년 마누엘 1세의 지시에 의해 착공돼 100년 이상이 걸려 완공됐다. 당시는 아프리카와 인도, 아메리카 등의 새로운 뱃길을 개척해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를 열어가고 있던 때로, 아프리카 및 동양과의 무역에 부과한 세금으로 건축비를 충당했다. 화려하면서 복합적인 디자인으로, 나중에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따서 ‘마누엘라인(Manueline)’이라는 새로운 건축 스타일이 탄생할 정도였다.
조각이 너무 섬세해 보면 볼수록 사람을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오후 5시가 가까이 되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관람 시간은 오후 5시까지였다. 관람이 막 끝나가고 있었다. 서둘러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 내부의 높은 기둥에도 각종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가운데 벽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내부.
기둥도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해 실제 안으로 들어가 보면 화려함이 극치를 이룹니다.
양 옆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들어온 빛이
벽화와 조각들을 비추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들른 수도원의 부속 성당인 산타 마리아 성당(Church of Santa Maria) 입구 한쪽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8/9~1524)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에는 “1497~1498년 포르투갈과 인도 사이의 해상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항해사로, 그가 개척한 새로운 통상로가 약 100여년 동안 인도양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가져다 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단순히 포르투갈의 패권을 강화한 인물을 넘어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 점에 비추어 묘비에 새겨진 내용은 지나치게 국가적인 이익에 매몰된 느낌이었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그의 무덤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뿌듯한 감동이 몰려왔다.
포르투갈의 모험가 바스코 다 가마의 무덤입니다.
포르투갈에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했지요.
바스코 다 가마의 묘비명입니다.
문학적이라기보다는 포르투갈의 영웅임을 강조하는 설명이, 왠지 좀 허전합니다.
성당 입구의 다른 쪽에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서사시인인 루이스 바스 데 까몽이스(Luis Vas de Camoes, 1524/5~1580)의 무덤이 있었다. 그만큼 바스코 다 가마와 까몽이스가 포르투갈의 국민적 영웅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동희는 “왕보다 바스코 다 가마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네”라면서 의미를 부여했다. 동희의 그 말을 듣자 ‘앗,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동희의 남다른 역사적 안목,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말 같았다.
포르투갈의 대서사시인 까몽이스의 묘지입니다.
수도원과 성당을 짤막하게 돌아본 다음 ‘발견의 탑’으로 향했다. 대서양을 향해 항해에 나서는 엔리케 왕자와 바스코 다 가마 등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를 연 인물들의 조각이 역동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바다로 나가려는 범선에 몸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과거 포르투갈의 모험과 도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터키와 중동지역이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어 아시아와의 육로 교역이 봉쇄돼 있던 15세기. 지중해와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들어오는 이슬람과 아시아의 앞선 문명에 대한 호기심에 거친 바다를 통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인류 역사의 새 장을 연 주인공들이 아닐 수 없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조각이었다.
발견의 탑.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그 역동적이고 모험에 찬 모습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유라시아의 서쪽 끝, 이곳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지만, 새로운 세계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모험과 도전의 돛을 올린 사람들, 그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열었던 것이었다. 동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마치게 되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 그때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변화돼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라고 대화를 하면서 걸었다.
그렇게 걷는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하지만 동희와 삶과 여행, 한국 정치 등에 대해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거친 바다를 건너 신대륙으로 건너갔듯이 지금 몰아치고 있는 거센 비바람도 우리의 항해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하루, 하루, 한걸음, 한걸음’ 정신으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조금씩 진전할 경우 무엇이든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 정신을 배우고 몸에 익히는 것이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는 것 아닌가.
발견의 탑이 마치 대서양으로 항해를 할 것 같습니다.
도전과 모험에 나서지 않으면, 인생도 재미가 없겠지요.
여행은 그 도전과 모험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학교' 같습니다.
‘발견의 탑’을 돌아보고 나니 살짝 개었던 날씨가 다시 비바람이 불면서 궂어지고 있다. 시간도 늦어 어둠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초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함께 보려던 벨렝 궁전은 포기하고, 수도원 앞의 유명한 제과점 안티가 콘페이타리아 데 벨렝(Antiga Confeitaria de Belem)을 찾았다. 1837년부터 지금까지 175년 동안 카스타드 타르트를 만들어온 제과점이었다. 아까 제로니모스 수도원에 도착할 때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빵을 샀는데 우리가 수도원과 발견의 탑을 돌아보고 다시 왔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리 큰 가게 같지가 않았지만, 안에 들어가서 보니 홀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빵은 작았지만 빵집은 엄청 컸다. 나와 동희도 1.05유로씩 하는 타르트를 하나씩 사서 맛있게 먹었다. 달착지근하고 호박 냄새도 나는 것이 간식으로 일품이었다. 나중에 설명을 보니 섭씨 400도에서 순간적으로 굽기 때문에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에는 부드러운 크림이 들어 있어 서로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그러고 나서 28번 버스를 타고 아뽈로니아역으로 향했다.
벨렝의 명물 제과정.
안으로 들어가면 홀이 엄청 넓습니다. 손님도 바글바글합니다.
7시에 코인 로커에 넣어 놓았던 가방을 찾았다. 처음 가방을 넣을 때 1.5유로를 넣었는데, 찾을 때 추가로 1.5유로를 넣어야 했다. 추가요금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데 2~4시간의 경우 1.5유로를 지불해야 했다. 기차 시간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아 대합실에서 좀 기다리다 저녁 8시가 넘어 역 근처의 식당에서 돼지고기와 대구 생선요리, 감자튀김 등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요리가 각각 5.5~6.5유로로, 물을 포함해 모두 13.4유로(약 2만100원)를 지불했는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비해 양이 매우 푸짐했다. 양이 너무 많아서 조금 남겨야 했다.
이후 역의 대합실에서 카페를 한 잔 하면서 기차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포르투갈에 와서 카페를 많이 마셨다. 역 대합실에서 파는 카페(에스프레소)는 한 잔에 0.65유로(약 1000원)였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저렴한 것이었다. 인도의 역에서 파는 짜이 한잔이 5루피(약 135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말할 수 없이 비싼 것이지만... 포르투갈에서 카페 한잔 가격은 대체로 0.6~0.9유로, 밀크 카페는 1~1.3유로 수준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파리 퐁피두센터 앞에서 마신 카푸치노 한잔이 5유로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 싸다. 어쨌든 카페나 카푸치노 가격이 지역별, 가게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포르투갈에서는 0.6유로짜리 카페를 하루에 2~3잔 마시며 여행을 했다. 진한 커피에 설탕을 넣어 쓰면서도 달착지근한 커피의 맛이 일품이었다.
아폴로니아 역 건너편의 항구.
배를 이용해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10시 가까이 돼서 기차에 올라 침대칸을 찾아갔다. 콜롬비아와 러시아 여행자가 우리와 같은 침대칸을 쓰게 됐는데, 콜롬비아 여행자는 친구가 있는 쿠셋(침대칸)으로 간다며 나가버리고, 결국 나와 동희, 러시아인, 이렇게 셋이서 4인용 침대칸을 쓰게 됐다. 사업을 한다는 그 러시아 중년 남성은 러시아를 여행하려면 숙소 때문에 애를 먹는다면서, 러시아에는 4성급 호텔이 대부분이고, 자신도 이번 여행을 하면서 4성급 호텔에서 묵는다고 했다. 18, 19세가 된 딸 2명이 있다는 이 러시아 중년신사는 부인과 함께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며 계속 독서를 하는 활달한 러시아인이었다. 우리는 2~3성 호텔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스트하우스와 호스텔을 전전하면서 여행하고 있는데 이 러시아인은 4성급 호텔을 이용한다니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러시아가 그렇게 부유한 나라였던가,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거기까진 물어보지 못했다.
우리를 실은 기차는 예정대로 밤 10시 40분이 가까이 되자 예정대로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했다. 포르투에서부터 리스본까지, 리스본에서 변덕스런 날씨를 뚫고 벨렝 지구를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침대칸에 설치된 간이 세면대에서 간단히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덜컹거리는 열차의 침대에 누워 일찌감치 “굿 나잇!” 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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