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베스도 총독에게 자신의 무죄를 설명할 때 베스도 총독은 설득을 당했습니다. 베스도는 자신의 판단을 보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아그립바 2세와 그의 아내이자 그의 여동생 베니게에게 묻습니다. 아그립바 2세와 베니게도 바울의 결백을 인정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2세와 베니게의 증조할아버지가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하는 헤롯(대)왕입니다.
신약 성경에 여러 헤롯왕이 등장합니다. 모두 헤롯 대왕
(혹 헤롯1세)의 후손들입니다. 여기서 헤롯 대왕은 동방박사들을 만나는 헤롯 왕입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에 분노하여 베들레헴과 근방의 유아 학살을 주도했던 헤롯입니다. 그의 막강한 권력, 헤롯 왕조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붙인 이름이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입니다. 통상 헤롯 가문을 소개할 때 그를 헤롯 대왕이라고 부릅니다.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헤롯 가문 사람들을 정리해 봅니다. 헤롯 대왕에 이어서 유대지역 분할해서 통치했던 그의 세 아들이 있습니다. 헤롯 가문의 둘째 사람 아켈라오(마 2:22)입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을 가져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으로 이주합니다. 다음 헤롯 가문의 세 번째 인물은 분봉 왕 헤롯(마 14:1, 눅 3:1, 3:19, 눅 9:7, 행 13:1)입니다. 그를 ‘헤롯 왕’(막 6:14)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왕’(마 14:9)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그냥 ‘헤롯’(눅 9:9, 13:31, 23:7, 행 4:27)이라고 부릅니다. 헤롯 가문의 네 번째 사람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인 빌립입니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를 건설한 사람입니다.
헤롯 가문 다섯 번째가 ‘헤롯 왕’의 동생 빌립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첫 남편(마 14:3, 막 6:17)입니다. 헤롯 가문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람은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로디아(마 14:3, 막 6:17, 눅 3:19)와 그녀의 딸(마 14:6, 막 6:22)이고, 헤롯 가문 여덟 번째 인물이 사도 야고보를 죽인 ‘헤롯 왕’(행 12:1~2), 아그립바 1세입니다. 헤롯 가문에 아홉 번째 사람은 벨릭스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행 24:24)이고, 열 번째와 열한 번째는 베스도와 함께 바울을 심문한 아그립바왕(아그립바 2세)과 베니게(행 25:13)입니다.
초대 교회를 이해하려면 헤롯 왕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헤롯 왕조는 로마제국 제2차 삼두 정치를 배경으로 출현합니다. 제2차 삼두정치는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가 연합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합집산에 로마가 휘청거리고 유대 정치도 흔들립니다. 유대 정치의 혼란을 틈타 헤롯 아버지 안티파테르가 유대 지역 패권을 장악합니다.
당시 유대 지역은 하스몬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내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동생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2세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히리카누스 2세는 절치부심하며 권력 되찾기에 골몰하였습니다. 로마 폼페이의 지지에 힘입어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세우면서 자신이 팔레스틴 지역의 실세가 됩니다.
로마와 안티파테르의 지원으로 대제사장의 지위를 얻은 히르카누스 2세는 꼭두각시였고, 안티파테르는 실권을 쥔 총독이 되었습니다. 안티파테르는 B.C 47년에 아들 헤롯을 갈릴리지역 군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헤롯 대왕은 아버지 권력에 힘입어 유대 역사 전면에 등장합니다.
헤롯의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
① 이두메인이기 때문에 유대 왕으로 정통성이 없었다
② 왕위 찬탈과정에서 흘린 피 때문에 배신을 두려워하였다
히르카누스 2세가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누르고 제사장을 차지했지만 하스몬 왕조의 권력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을 잃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이었던 안티고노스는 당시 로마의 숙적이었던 파르티아(Parthia)왕조의 도움을 받아 권력 찬탈을 도모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안티고노스가 이깁니다. 그는 삼촌인 히르카누스가 다시는 대제사장이 되지 못하도록 귀를 자르고 바빌론으로 귀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 안티파테르의 아들들도 히르카누스 2세 편에서 싸웠습니다. 패배하는 과정에서 안티파테르의 아들 파사엘은 체포되어 갈릴리에서 자살하였고, 헤롯은 로마로 도망을 갑니다. 로마로 도망을 갔던 헤롯은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카이사르가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원로원으로부터 유대 지방의 ‘왕’으로 임명됩니다.
헤롯이 유대 왕으로 임명을 받았지만, 안티고노스가 이미 유대지방 왕이었습니다. 이름뿐인 왕이었던 헤롯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정권 탈환을 위한 전쟁을 합니다. 로마는 숙적이었던 파르티아와 눈에 가시였던 안티고노스를 몰아내야 했기에 헤롯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헤롯은 2년간의 전쟁 끝에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 세력을 몰아냅니다. 헤롯은 안티고노스와 다수의 사두개파 귀족들을 처형했습니다. 진정한 유대 왕으로 등극한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하는 해까지 유대 지방을 통치합니다.
헤롯 대왕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세력을 점점 넓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으로 늘 불안에 떨었습니다. 첫째 이두메인이기 때문에 유대 왕으로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둘째 헤롯은 왕위 찬탈과정에서 흘린 피 때문에 배신을 두려워했습니다. 불안한 그는 자신의 아들들, 아내, 장모, 처남 등등을 죽입니다. 이런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를 묻는 동방박사들의 질문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발칵 뒤집혔고, 성경은 이 상황을 ‘예루살렘은 소동한지라(마 2:3)’로 설명합니다.
아그립바 2세와 베니게는 아그립바 1세의 자녀들입니다. 소위 근친상간 부부였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처형한 왕입니다. 아그립바 1세의 할아버지는 세례 요한을 참수한 헤롯 안디바의 손자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아기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베들레헴 지역 아기들을 대량 학살한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지난주에 살폈던 벨릭스 총독의 둘째 아내 드루실라가 아그립바 2세와 베니게의 친남매입니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몇 대에 걸쳐서 유대지역의 실권을 행사했던 헤롯 가문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입니다.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BC. 63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로마 편에 섭니다. 친 로마적 그의 행동에 로마 정부는 권력으로 보상합니다. BC. 47년 율리스 시저(Julius Caesar)는 안티파테르에게 로마 시민권과 유대 지역 총독 자리를 줍니다. 헤롯 가문의 로마 정권과 밀월이 시작됩니다.
그가 유대를 차지한 다음 자신처럼 야심만만한 아들 헤롯을 갈릴리 지역 통치관으로 임명합니다. 영리한 헤롯은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해서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하스몬 왕가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하스몬 왕가에 대한 열등감을 정리하고 로마 실력자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헤롯은 천재성이 번뜩이는 정치 감각과 근성으로 로마 권력을 붙잡았습니다.
헤롯은 자신을 지켜주는 로마 후원자(주군)의 승패와 상관없이 권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헤롯은 주군이 망해도 자신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왕은 처음엔 카시우스를 섬겼고, 카시우스가 안토니에 패하자 안토니를 따릅니다. 안토니가 헤롯을 유대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싸울 때, 헤롯은 안토니를 돕습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깁니다.
이쯤 되면 헤롯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갑니다. 왕이 복장을 해체하고 일반 평민 복장을 하고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 가이사 아우구스도) 앞에 나아가 생명을 걸고 상소합니다. 헤롯 자신을 구한 상소(上訴)는 대략 이렇습니다. “저는 저를 세워준 안토니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저의 은인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패했습니다. 저는 왕관을 벗어 던지고 오직 폐하의 덕만 의지해서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살아온 신실함과 의리를 봐주시고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남은 생명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거칠게 간추린 내용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런 헤롯의 말을 듣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황제답게 대답합니다. “좋다! 그대를 살려 주겠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확고한 왕의 자리를 보장해주겠다. 대신 그대는 안토니를 섬겼듯이 나를 섬기기를 바란다. 변함없는 충성으로 나를 따르도록 하라!” 물론 이것도 거칠게 간추린 내용입니다. 헤롯은 권력에 대한 천부적 감각과 집념으로 유대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로마 황실의 든든한 후원으로 유대 왕이 되었지만 유대인들의 지지는 받지 못합니다. 헤롯은 늘 불안했습니다. 로마 지지를 받기 위해 유대인 지지가 필요했고, 유대인 지지를 받기 위해 로마 지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일평생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습니다. 헤롯 대왕의 모든 치적은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신약신학자 임진수 박사는 헤롯의 통치기간을 3기로 나누며 왕권을 세워가는 헤롯 대왕의 삶을 추적합니다. 임박사의 글을 거칠게 간추립니다. 먼저, 헤롯의 1차시기(BC 37~27년)로 권력 강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헤롯은 권력을 강화를 위해 정적들, 주로 자기 왕권찬탈 반대파를 제거합니다.
둘째, 2차시기(BC 27~13년)로 건축사업 기간입니다. 왕권 강화에 성공한 헤롯은 건축에 몰두합니다. 사마리아를 헬레니즘 도시로 재건하고 아우구스투스를 경외하는 의미로 세바스테(라틴어 Sebaste=Augustus)로 부르며 황제 신전을 세웁니다. 12년간 공사로 건설한 국제 해양도시는 황제에게 헌정하며 ‘가이사랴’로 부릅니다. 헤롯의 대표적 건축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9년간의 공사로 예루살렘성전은 헬레니즘 풍미 가득한 건물로 거듭납니다.
셋째, 3차시기(BC 13~4년) 유혈숙청 기간입니다. 헤롯 왕가의 숙청의 역사는 피비린내 납니다. 헤롯은 장모, 처남, 아내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을 죽입니다. 권력을 빼앗길 것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헤롯은 유언장을 세 번이나 바꿔 씁니다.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 가까운 가족들을 죽인 그는 아들조차도 믿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했던 아내, 친자식들을 죽이면서 왕권을 지키던 헤롯에게 새 왕이 등장했다는 동방박사들 말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소동(마2:3)합니다. 돌아와 새 왕에 대한 보고를 요구했던 헤롯의 뜻을 어기고 동방박사들이 딴 길로 돌아가자 헤롯은 광분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과 근방 지역의 영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합니다(마2:16~18).
헤롯의 가정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 그리고 처형으로 불행과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트리니티 신학교 근동연구소 소장인 배리 벹젤(Barry J. Beitzel) 박사는 ‘헤롯은 10번 결혼했는데 모두 정치적인 결혼이었다.’고 말합니다. 헤롯의 인생은 불행한 권력자의 전형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하던 해에 죽습니다. 그는 온몸이 썩어가는 병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 죽었답니다. 나고야 난잔(南山)대학에서 신약을 강의하는 야누스 크시키 박사는 헤롯이 죽기 5일 전에 아들 안티파터의 사형을 로마 황실로부터 받고 집행했음을 지적하며 헤롯의 잔인성을 강조합니다.
헤롯의 건축물과 초대교회 역사 연구에 몰두하는 아일랜드 학자 바바라 메리(Barbara Mary Denise Bergin)는 건축가 헤롯을 강조합니다. 헤롯은 로마와 유대의 지지를 얻으려고, 자신의 능력 과시용으로 건축에 몰두했습니다. 처남, 장모, 아내 그리고 아들들을 죽이며 지키려 했던 그 권력욕의 끝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슬프고, 가슴 아픈 것은 악하고 저주스러운 헤롯 대왕의 삶이 그의 자손들의 삶에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헤롯 대왕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었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 중에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아들을 사형시키고 자신의 후계에 대한 세 번째 유언장을 남깁니다. 헤롯 대왕은 복잡한 정치적 계산으로 아내 10명을 두었고 후계자 선정도 복잡했습니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헤롯 대왕 10명의 아내와 그 자녀들을 정리합니다.
헤롯 대왕의 첫 아내 도리스는 이두메인인데 안티파터(Antipater)를 낳았습니다. 안티파터는 헤롯 말년에 고모와 아버지 헤롯을 해치려고 로마 황실과 접촉한 것이 발각되어 헤롯 대왕이 최후에 사형시켰습니다. 다음은 마리암네(Mariamne) 1세인데 대제사장 시몬의 딸로서 빌립(Herod Philip)과 헤로디아스(Herodias)를 낳았습니다. 빌립은 이복형제 아리스토불로스의 딸 헤로디아스와 결혼했으나 이복형제 안티파스에게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세 번째는 헤롯 대왕이 가장 사랑했던 마리암네 2세입니다. 그녀는 하스몬 왕족 출신인데 헤롯 대왕과 사이에서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로스, 키프로스 등을 낳았습니다. 미리암네 2세(1세와 다른 미리암네)가 헤롯을 무시했고, 헤롯은 왕족인 하스몬 가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마리암네, 그녀의 어머니, 그의 남동생, 그리고 그녀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로스를 죽입니다. 미리암네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는 고모 살로메의 딸 베르니케(Bernice)와 결혼하여 헤롯 아그립바 1세등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헤롯 왕입니다.
네 번째가 사마리아 출신 말다케(Malthace)입니다. 아켈라오(Herod Archelaus)와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를 낳았습니다. 이들이 헤롯 사후에 왕이 되었습니다. 이 헤롯 안디바가 자신의 전처를 버리고 조카이자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고 세례요한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자마자 아들들이 서로 왕이라 주장
유대 사회도 로마 황실도 갈팡질팡
다섯 번째가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여인입니다. 헤롯과 빌립을 낳았습니다. 이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 왕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헤롯의 아내들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파사엘을 낳은 팔라스, 록사나(Roxana)를 낳았던 페드라, 살로메를 낳았던 엘피스(Elpis), 그리고 사촌 여동생, 조카 등등이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10명의 아내로 약 2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10명의 아내 중에 하스몬 왕가 출신 미리암 2세를 가장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헤롯 대왕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과 그녀의 두 아들들(알렉산더, 아리스토불로스)을 처형합니다. 권력을 탐닉했던 독재자의 불행이 드러난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자마자 아들들이 서로 왕이라는 주장을 하고 유대 사회도 로마 황실도 갈팡질팡합니다. 놀란 로마 황실은 헤롯 대왕의 영토를 그의 세 아들이 분할 통치케 합니다. 그들은 헤롯 아르켈라오(Herod Archelaus),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그리고 헤롯 빌립(Herod Philip)입니다.
헤롯 대왕은 최종적으로 아켈라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그를 사마리아, 유대와 에돔 지방의 분봉 왕(Client King)으로 명합니다. 베들레헴이 아켈라오 통치 영역이었습니다. 헤롯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던 요셉과 마리아는 아켈라오를 피하여 나사렛으로 갑니다(마 2:22).
아켈라오 왕은 아버지처럼 잔인하고 불의했습니다. 그의 악행에 분노한 유대와 사마리아 지도자들이 아켈라오의 악행을 황제 아우구스도에 상소합니다. 이에 로마 황제는 아켈라오를 왕에서 면직시키고 추방시킨 후 이 지역을 로마 총독에게 맡깁니다. 이렇게 파송된 총독이 빌라도입니다.
다음은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과 아우구스투스의 동맹 인질로 로마에서 성장합니다. 그가 통치한 갈릴리 지역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활동무대였고 그의 재임 기간과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활동 시기가 같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가 복음서에 가장 자주 등장합니다.
헤롯 안디바는 나바테아 아레다(Aretas) 왕(고후 11:32)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복동생 빌립 부부와 함께 유숙했습니다. 그때 동생의 빌립의 아내(이복형 아리스토불로스 딸) 헤로디아에게 반합니다. 안디바는 헤로디아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여 결혼합니다. 이 일로 그는 세례 요한의 지적을 받고, 딸을 버린 안디바에 분노한 아레다 왕의 침략을 받습니다.
셋째 헤롯 빌립 왕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클레오파트라 아들로 이두래와 두라고닛 지방 분봉 왕입니다. 헤롯 빌립(눅 3:1)을 빌립 2세라고 부릅니다. 헤로디아 남편 헤롯 빌립1세와 다른 사람입니다. 빌립2세가 가이사랴 빌립보를 건축했습니다. 수도 파네이온을 고치고 확장하여 황제에게 헌정하며 빌립이 건축한 황제의 도시라는 뜻으로 ‘가이사랴 빌립보’라 칭했습니다.
헤롯 빌립은 유대인이 없는 지역 분봉 왕으로 갈등이나 사건이 없었습니다. 빌립의 백성 중심의 통치는 유명합니다. 그는 외출할 때 재판석을 들고 나가 길에서 백성들 상소를 들으면 즉석 재판으로 백성들 마음을 샀습니다. 또 감세 정책도 유명합니다. 아켈라오는 매년 600달란트를 징수했고, 안디바는 매년 200달란트를 징수했는데, 빌립은 100달란트를 징수했답니다. 요세푸스는 빌립을 헤롯 가문에서 가장 선한 왕이라 했습니다. 악한 왕 헤롯이 낳은 20명의 자손의 악행이 1세기 초대교회와 선교 현장에 얽혀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 가문의 왕들을 영토와 권력 서열을 정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첫째는 헤롯 대왕, 둘째 헤롯 아그립바(행12장), 셋째 헤롯 안디바(눅23:8), 헤롯 아켈라오(마2:22) 그리고 헤롯 빌립왕(눅3:1)순입니다. 그들의 칭호, 영토 그리고 로마황실과의 관계를 정리해봅니다.
헤롯 대왕은 집요한 권력욕과 정치 감각으로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 전 지역을 장악한 실제적 왕이었습니다. 헤롯 손자 헤롯 아그립바1세는 아버지 아리스토불로스가 할아버지 헤롯 손에 죽자, 어머니 베르게와 함께 로마로 피신했습니다, 어머니 베르게가 당시 로마 실권자들과 교제하였고, 아그립바는 훗날 로마 황제들이 될 황실 자제들과 함께 성장했고, 그들이 황제가 되자 할아버지 헤롯과 동등한 수준의 영토와 권력을 가졌습니다.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헤롯입니다. 세례요한 참수와 예수님 재판에 개입했고, 안디옥 교회 지도자 중에 하나인 마나엔(행13:1)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빌립과 아켈라오와 함께 분봉왕이 되었지만, 이들이 추방과 사망으로 왕위를 떠나자 헤롯 안디바가 잠시 헤롯 가문의 유일한 왕으로 유대땅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헤롯 안디바를 여우로 비유했습니다. 마가는 세례요한이 헤롯 안디바 비행을 지적하여 사형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헤롯 안디바가 세례요한을 죽인 이유를 정치적으로 해석합니다. 요세푸스는 당시 민중이 세례요한을 대대적으로 지지하자 유대인과 세례요한의 민중 봉기를 두려워해서 그를 제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아버지 헤롯 대왕처럼 건설공사에 몰두했습니다. 그가 건축한 대표적인 건축물이 갈릴리 호수 변 도시 디베랴입니다. 안디바는 갈릴리 지역 수도였던 파네이온을 고치고 확장하여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헌정하려고 디베랴라고 불렀습니다. 이 디베랴에서 예수님께서 두 기적(오병이어/요6, 물고기 153마리 잡는 기적/요21)을 베푸십니다.
헤롯 대왕의 영토를 분할했던 아켈라오는 권력욕과 악정으로 조기 퇴출당합니다. 헤롯 빌립은 선한 왕이었고, 백성과의 관계나 로마 황실과의 관계가 원만했지만, AD 34년에 죽습니다. 헤롯 빌립마저 죽자 그때까지 남은 유일한 분봉왕 헤롯 안디바를 왕으로 칭합니다. 형들의 퇴장으로 분봉왕 안디바가 자연스럽게 팔레스타인 지역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 출신의 말다케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머니 말다케에서 태어난 형은 베들레헴 지역을 관장한 분봉왕 아켈라오(Herod Archelaus)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다른 이복형들처럼 로마에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자기 아들들 즉 안티파터,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로스, 아켈라오, 빌립, 안디바 등을 로마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유대 땅에서 기초교육을 받고, 13세에 로마로 보내서 인질 겸, 유학생으로 로마의 머무르다가 17,8세에 유대로 복귀하게 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어린 시절을 유대 땅에서 마나엔(행13:1헤롯의 젖 동생 마나엔)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아들들을 믿지 못해서 사형을 시킵니다. 사랑했던 아들들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로스, 그리고 안티파터를 사형을 시킵니다. 이렇게 형들이 죽자 헤롯 안디바가 로마에서 돌아와 권력을 승계하여 왕으로 취임합니다. 헤롯 안디바는 로마의 교육 덕분에 아주 친로마적인 정책을 펼쳤고, 유대인들의 종교와 관습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는 교활하고 악한 통치자였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질타를 받았던 왕입니다.
요세푸스는 헤롯 안디바가 세운 몇 개의 도시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세포리와 디베랴입니다. 세포리는 성경에 없지만 안디바 시절 갈릴리의 최고법원인 산헤드린이 위치합니다. 이 세포리는 헤롯 대왕 시절에 군사 도시였고, 디베랴를 건설하기 전까지 안디바 왕궁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갈릴리 바닷가에 디베랴를 건설합니다. 이 디베랴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폴리스 형태의 헬라적인 도시입니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라는 책을 쓴 달라스 신학교 신약학 교수 해롤드 회너(Harrold W. Hoehner)박사는 탈무드를 인용하면서 디베랴가 여호수아 19장 35절에 등장하는 락갓이라고 합니다. 안디바가 건설한 디베랴는 상업과 무역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이 도시를 당시 티베리우스황제 이름으로 디베랴로 부르며 황제의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나비테이아 왕 아레다(Aretas) 왕(고후11:32)의 딸 피샬리스와 결혼했습니다. 무난한 결혼 생활을 하던 그는 이복동생 빌립부부와 함께 묶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자신의 조카이자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합니다. 권력 지향적인 헤로디아와 의기투합해 둘은 결혼합니다. 이에 분노한 아레다 왕이 침략함으로 헤롯 안디바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황제의 든든한 지원으로 ‘왕’이 되어 돌아오자 그의 누나 헤로디아가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녀는 남편 헤롯 안디바에게 로마 황실에서 정식 ‘왕’의 칭호를 받아 오도록 충동질했습니다.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로마 칼리굴라 황제는 안디바를 폐위 시키고 추방시킵니다. 이로서 헤롯 안디바는 형 아켈라오처럼 폐위되고 형이 추방되었던 곳(현재 프랑스의 골(Gaul)지방)으로 추방됩니다.
사도행전 12장은 교회의 위기를 전합니다. 헤롯 아그립바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 몇 사람을 해하려 합니다. 첫 대상자 야고보가 순교합니다. 야고보의 순교를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행 12:3) 힘을 얻는 아그립바1세는 베드로를 체포하여 감옥에 투옥시킵니다. 이 위기 상황에 교회는 더욱 기도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한편 12장 하반부는 교회를 핍박했던 헤롯 아그립바1세의 죽음과 하나님 말씀이 흥왕함을 소개합니다.
성경은 아그립바1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1~23).’ 누가는 헤롯의 죽음의 이유를 헤롯의 교만으로 설명합니다.
한편 요세푸스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아그립바1세가 할아버지 헤롯이 만든 가이사랴 극장에서 자신의 위엄을 과시함을 설명합니다. 로마 황실의 든든한 지원을 받던 헤롯 아그립바1세는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유대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자 그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 극장에 금과 은으로 치장한 화려한 왕복을 입고 백성들의 환호를 유도하다가 급성 복통을 호소하였고 5일 후 사망했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은 그가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사망했다고 진단합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의 아버지는 헤롯대왕이 한때 후계자로 내정했던 아리스토불로스입니다. 헤롯이 아리스토불로스를 처형하자 남편의 죽음을 본 베니게가 아들과 함께 로마로 피신합니다. 베니게(혹 베르니케:Bernice)는 당시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의 아내 소 안토니아(Antonia)와 가까이 교제하며 아들을 로마 황실의 자제들과 함께 성장하게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아그립바1세는 여러 비행으로 인생을 탕진합니다. 어머니 사후에 빚 독촉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어 유대로 귀환하는데 너무 어려워 자살을 결심합니다. 이런 상황에 그의 아내가 그의 누나인 헤로디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헤로디아의 남편 헤롯 안디바는 조카이자 처남인 아그립바1세를 디베랴 재정 장관으로 임명해 놓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아그립바1세는 누나 헤로디아와 매형 안디바의 조롱과 멸시를 견디지 못해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아그립바1세의 혈통을 부러워하였던 매형이자 삼촌이었던 안디바는 헤롯 아그립바1세의 실수를 빌미 삼아 아그립바를 쫓아냅니다. 헤롯 안디바를 떠나 수리아에 잠시 머물었던 아그립바1세는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갚지 않은 빚이 있어 투옥 위기에 처하자 티베리우스 황제 동생의 아내 안토니아가 돈을 갚아 주고 거두어 줍니다. 안토니아는 그의 어머니 베니게 친구이고, 3대 황제 가이오 칼리굴라의 할머니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입니다. 이때 같이 자랐던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와 교분을 쌓았고 이들이 로마 황제가 됩니다.
이렇게 아그립바1세가 로마제국의 3대 황제와 4대 황제와 인맥을 쌓았고 두 황제가 등극할 때 공신이 됩니다. 아그립바1세는 티베리우스 사후에 가이우스 칼리쿨라를 위기에 구하려다 감옥에 6개월간 투옥됩니다. 마침내 칼리쿨라가 로마 황제에 등극하자, 황제로서 첫 결정이 자신을 위해 감옥까지 갔었던 아그립바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3대 황제인 칼리쿨라가 사망했을 때 아그립바1세는 동갑의 친구 클라우디우스와 원로원을 중재합니다. 다리 불구요 말더듬이었던 클라우디우스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원로원을 아그립바1세가 적극적으로 설득합니다. 아그립바1세의 결정적 도움으로 로마 4대 황제에 등극한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1세를 적극적 지원을 하여 헤롯 대왕이 지배했던 땅 전체를 차지하게 함으로 명실상부한 유대 왕으로 자리 세워줍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헤롯 아그립바1세는 헤롯 가문 왕들 중에 가장 스펙이 좋은 왕입니다. 그는 하스몬가의 피를 가진 왕입니다. 그의 할머니가 하스몬 왕족 출신인 마리암네였습니다. 그는 또 로마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나아가 로마 황제들과 좋은 관계를 가진 인맥 부자였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 존중하는 정책을 펴면서 ‘나사렛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 칙령의 피해자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로마에 거주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추방을 당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때 추방되어 고린도로 이주합니다.
아그립바1세는 이런 클라우디우스 황제 정책을 적극 지지합니다. 야고보 순교나 베드로 투옥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나사렛 칙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아그립바1세 행위입니다. 성전 문화와 회당의 전통을 지지하는 아그립바1세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로마 황실의 적극적 후원과 유대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아 한껏 힘을 얻은 아그립바1세는 의 교만이 가이사랴 극장 연설과 신격화로 나타납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12:22~23).’ 유대왕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었던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 시킨 그는 교만의 끝에서 죽고 맙니다.
헤롯 왕 권속 중에 예수를 믿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성경에 언급된 사람들을 찾아봅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자신의 재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깁니다(눅8:3). 헤롯 안디바의 젖동생 마나엔은 안디옥 교회 지도자가 됩니다(행13:1). 헤롯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 집안은 로마 교회 성도(롬16:10)였던 것 같습니다(추후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헤롯 가문의 왕들은 대부분은 반 기독교적인 정책을 펼쳤고, 예수님을 박해하거나 기독교 신자를 박해하는 악역을 맡았습니다. 헤롯 가문의 죄악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 가문은 6대에 걸쳐 90년간 유대 땅을 지배합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 집안이었습니다.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 헤롯 아그립바2세입니다. 신약 성경에 헤롯이라는 이름이 45회 등장합니다. 특별한 설명과 이름에 대한 구분이 없이 사용됨으로 헤롯에 대한 이해가 모호합니다. 성경의 헤롯들과 헤롯 가문을 이해하는 것은 로마와 유대인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됩니다.
헤롯 가문 중에 헤롯 대왕과 방불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는 하스몬의 왕족 마리암네의 아들입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고모 살로메의 딸 베르니게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 즉 헤롯 칼키스, 헤롯 아그립바1세, 아리스토불루스, 헤로디아, 미리암네를 낳았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아리스토불루스가 아리스토불루스 4세로, 로마 16장 10절에 등장하는 아리스도불로입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는 네 남매를 남기고 54세에 죽습니다. 이렇게 남겨진 네 남매는 당시 17세였던 아그립바2세와 16살의 베니게, 마리암네 그리고 드루실라입니다. 당시 정세를 보아 약관 17세의 아그립바2세가 아버지 아그립바1세를 이어 유대를 통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2세는 당분간 로마 황궁에 머물고 파두스에 이어 티베리우스 알렉산더가 유대 총독으로 파견됩니다. 이 알렉산더가 필로의 조카입니다.
아그립바1세 자녀들의 삶이 기구합니다. 베니게는 알렉산더의 동생 마르쿠스 알렉산더와 결혼했는데 그가 요절하였고, 삼촌인 칼키스의 헤롯과 결혼했는데 그도 죽습니다. 오빠인 아그립바2세와 같이 지내다 근친상간의 소문이 돌자 길리기아 왕과 재혼하였다 곧 이혼합니다. 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티토(Titus)장군이 베니게를 사랑합니다. 티토 장군은 베니게를 사랑해서 그녀를 로마까지 데리고 가지만 로마 사람들이 그녀를 용납하지 않자 티토는 독신으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48년에 칼키스의 헤롯이 죽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친구의 아들인 아그립바2세에게 칼키스의 통치권을 주고, 이어 유대지역 왕으로 세워줍니다. 이어서 53년에 헤롯 빌립의 지역도 헤롯 아그립바2세에게 넘겨줍니다. 아그립바 2세는 유대 지방에 왕이 되었습니다.
헤롯 대왕의 증손자요, 비운의 왕자 아리스토불로스의 손자인 아그립바2세가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입니다. 그는 가이사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도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재판 받기를 간청할 때 가이사랴를 찾아가 바울을 만납니다. 아그립바2세는 벨릭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에게 베니게와 함께 인사하러 가이사랴를 방문합니다.
사도행전에는 헤롯 안디바(행4:27), 헤롯 아그립바1세(행12장)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2세(25장)가 등장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기독교 신앙인들을 박해하면서까지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 했고, 그의 야욕과 교만 그리고 죽음을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25장은 아그립바2세가 바울의 무죄를 알고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암시적으로 지적합니다.
사도행전과는 달리 요세푸스는 아그립바1세와 아그립바2세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아그립바2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글을 아그립바2세에게 보여주고, 자료도 제공 받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런 관계를 고려하면 아그립바2세나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1세를 비판하는 기록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푸스는 아그립바1세를 동포인 유대인을 위한 정책을 쓰고, 예루살렘에 즐겨 거하고, 율법 제사를 준수했으며, 유대인의 회당 문화를 보장한 왕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아그립바1세가 뛰어난 정치력과 설득력으로 가이우스 칼리굴라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역사를 남깁니다.
요세푸스와 유사한 관점을 가진 역사가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입니다. 필로는 간략하지만 아그립바1세를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필로의 조카가 아그립바1세 딸 베니게와 결혼했으니 아그립바1세와 사돈이었습니다. 필로는 가이우스 칼리굴라황제의 무도함을 비난하면서, 아그립바1세는 유대 신앙에 독실하지만 유약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이 그리는 아그립바2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답게 철저하게 친 로마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은 로마 황실 인맥도 없고, 시대적 환경도 만만치 않아서 무기력하게 왕좌를 지키다 70년경에 예루살렘 패망 때 로마로 가서 로마 행정관이 되었으며 AD 100년경에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헤롯 가문이 몰락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