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말한 대로 살아라.
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미래에 행할 것을 약속하시는 26장의 축복과 저주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하신 서원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답할 차례입니다. 이들의 대답, 이들의 서원이 27장에 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 하나님의 뜻을 모두 들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반응할 것인가 결정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서원은 “맹세하다, 다짐하다, 헌신하다”는 뜻으로, 곧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서원을 하였을 경우에는 성실하게 그리고 양심적으로 이행해야 합니다.
3. 서원은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재물이나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다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그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믿음의 행위가 됩니다. 믿음의 본질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4. 서원은 본문에서처럼, 사람이나 동물, 집과 밭, 본인과 가족 그리고 이웃의 장래 상황이 이 약속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며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로 하는 약속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세상 사람들은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얻고자 서원과 맹세를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서라도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른 서원은 실천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일 것이며,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며 성숙한 믿음을 가지려는 자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원하는 것이기에, 과거에 한 서원을 무를 수는 있습니다. 다만 서원 자체를 취소할 수는 없기 때문에 무르는 방법(금전 등으로 대신 지불)을 택할 수 있습니다.
6. 성급하게 서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서원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자는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는 말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서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7. 십일조가 일종의 서원임을 보여줍니다. 레위기를 마치면서, 자신의 밭이나 나무에서 나온 모든 소산물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신 14:22-26). 이것은 “여호와의 성물 즉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혹 십일조를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르게 함으로써, 이 법은 십일조를 대체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억제하고 있습니다.
8. 레위기 전체의 주제인 “거룩”은 마지막 서원으로 마무리하면서, 입술과 형식으로만이 아닌,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다짐합니다. 비록 서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삶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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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예물
레위기 1장에서 26장까지는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규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의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면에 27장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발적인 신앙 고백의 방법으로 사람의 봉헌에 관한 서원 규례와 가축을 바치는 경우에 대한 규례입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서원’이라는 단어는 ‘맹세하다’, ‘다짐하다’, ‘헌신하다’는 뜻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에서 사람이 자발적으로 무엇을 바치거나 헌신할 것을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한편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라는 전도서 5장 말씀과 같이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원을 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서원한 것을 성실히 지키지 못했을 때는 그에 따른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려야 했는데 이러한 서원의 대상은 주로 사람, 가축, 가옥, 토지 등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겠다고 자신을 일평생 드리기로 맹세할 수 있습니다. 또는 부모가 대신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무엘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 한나에 의해 평생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드려졌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 속하기로 맹세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 되어 성막에서 봉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막에는 이미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원한 사람들은 모세가 정해준 가치에 따라 자신이 감당하기로 했던 사역에 상당하는 값을 지불하고 그 일에서 면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예물의 가치를 책정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물의 가치는 세겔로 책정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은이나 금을 달아서 돈의 가치를 대신하여 지불하였는데 성소의 세겔은 화폐의 액면가가 아니라 무게 단위였습니다. 한 세겔의 무게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반 세겔의 무게는 대략 11.4g 정도이며, 성소의 세겔은 이보다 오 분의 일가량 더 무거웠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원 예물로 정해진 값은 나이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습니다. 20세에서 60세까지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30세겔로 정해졌습니다. 5세에서 20세까지 남자는 은 20세겔, 여자는 10세겔로 정해졌습니다. 1개월에서 5세까지 남자는 은 5세겔로, 여자는 3세겔로 정해졌습니다. 60세 이상 남자는 은 15세겔로, 여자는 10세겔로 정해졌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 노동자의 4일 품삯이 일반 세겔로 대략 은 한 세겔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절에서 7절에 나오는 세겔의 값은 일반 사람들이 감당하기에 힘겨운 액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나이를 기준으로 그 사람이 지닌 노동력에 근거하여 결정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책정된 속전금은 성전 유지비와 수리비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문화적으로 남자의 가치가 더 존중되던 사회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여자에 비해 남자의 노동력은 거의 절반 정도 더 대우를 받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노동력을 기준으로 남자와 여자의 가치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원천적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서원 예물이 책정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서원 예물이 책정된 것을 보면서 히브리인들의 문화 속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를 20세에서 60세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연령이든 예외됨 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자 할 때 누구든지 자신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정해진 값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경우도 예외되지 않았습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만약 서원한 사람이 정해진 예물을 드리지 못한다고 해서 서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은 서원한 사람의 형편을 살펴서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값을 정해주어야 했습니다. 돈의 가치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마음보다 앞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마음의 자세와 정성의 문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에게 맡기신 재물이나 재능, 시간 심지어 생명까지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지면, 지금보다 상황이 좋아지면, 지금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지금보다 직급이 올라가면 등등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에 밀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중심으로 드릴 때 중심으로 드리는 예물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9절부터 13절까지는 정해진 예물 대신 가축으로 드리는 경우에 대한 내용입니다.
9절-13절입니다. 사람이 서원하는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가축이면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경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가축이면 그 가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갈 것이요. 제사장은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만일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라
서원 예물 대신 드릴 수 있는 것은 야생 동물이 아니라 정결한 가축인 소나 양, 염소입니다. 가축을 예물로 드리기로 맹세한 사람은 자신이 드릴 특정한 예물의 종류를 미리 말해야 했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절차였습니다. 그리고 한번 드리기로 맹세한 것은 후에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 최상급이 아닌 가축을 드리려고 했다가 후에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은 자기를 과시하는 외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좋은 것으로 드리려고 했다가 나중에 못한 것으로 바꾸어 드리는 것은 헌신의 의미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처음 맹세한 대로 드리도록 규정하셨습니다.
9절 말씀에 ‘여호와께 드릴 때 가축이 거룩하다’고 하신 말씀은 가축을 드리겠다고 서원했다고 해서 그 가축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시점에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다는 말씀입니다. 10절 말씀에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라는 의미는 둘 다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물을 바꾸려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의도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경제적 부담을 더 갖게 되는 상황이지만 서원한 예물은 절대 바꾸지 말라는 명령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가축이 부정하여 예물로 드리기에 적절하지 않은 경우는 제사장에게 가져가야 했습니다. 가축이 부정한 경우는 눈이 멀었거나 상하거나 베임을 당한 것, 또는 종기가 있는 것으로 온전하지 못한 것 역시 하나님께 바칠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부정한 가축을 살펴본 후 가축의 가치를 미리 매겨 놓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축의 우열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권한을 주신 것은 가축의 가격이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약 가축의 소유자가 가축을 무르기를 원한 경우 제사장이 정해 놓은 값에서 오 분의 일을 더한 보상가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원래 오 분의 일을 더하는 것은 남의 소유를 범했을 때 주어지는 벌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온전하게 구별된 것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23장 18절을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말라기 1장 13절~14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발적인 신앙 고백의 방법으로 자신을 봉헌할 경우 정해진 세를 내야 했고, 가축으로 바칠 경우 흠 없는 것, 정결한 것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을 기뻐하시며, 자원하여 드리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분수에 넘치도록 바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형편에 맞게, 나의 능력에 맞게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겉치레보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정성 된 마음으로 봉헌하는지 아십니다.
예전에 종종 들려 오던 이야기 중에, 부흥회 같은 집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헌금하겠다고 기도한 후에 집에 돌아와 후회를 한다던 이야기입니다. 일시적인 기분과 감정에 치우쳐 무분별한 서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분수에 넘치도록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약속을 올려드릴 때는 자신을 잘 살피고, 신중하고 신실하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변심하지 않고 기쁘게 지켜야 합니다. 충동적으로 서원하고 서원한 것을 갚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자신을 잘 살피며 신중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해야겠습니다.
집이나 토지를 드릴 때의 규례(14-25절)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권리는 소유권입니다. 세계사를 돌아봐도 역사를 이끌었던 핵심 주제는 소유권 싸움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지키는 헌법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으며 민법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결국 자기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듯 소유권의 이전의 과정을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고 복잡한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레위기의 마지막 장인 27장은 사람이 하나님께 소유권을 이전할 때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유권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권 이전을 상호교환이 이루어지는 거래에 기반하지만, 하나님께 소유권을 드리는 것은 거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거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무색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강권적인 은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 은혜를 받고 자신이 한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건강하고도 합당한 믿음의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원하여 드리는 봉헌 입니다. 죄인에 머물렀던 시절, 그렇게 손아귀에서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 소유권을, 눈을 들고, 손을 펴서 하나님께 경배의 재료로 올려드리는 그 믿음의 결단이 있을 때, 오늘 본문은 의미있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14, 15)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은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될 것이며 만일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릴 때에 다양한 방법으로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14절부터 25절은 부동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례가 나옵니다. 사람이 헌신의 표현으로 자기 집을 성소에 바칠 경우 제사장은 그것을 처분하여 성소의 재정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때 드릴 수 있는 집은 성 안에 있어서, 매매를 통해 영구히 소유권이전이 가능한 집이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집을 드리기로 했어도 다시 되찾고자 할 때에는 그 집의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이는 서원을 할 때 순간의 감정에 의존하여 하기보다 신중하고 무겁게 생각하고 결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16-21)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마지기 수대로 네가 값을 정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 만일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성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만일 그 밭을 희년 후에 성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한 값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만일 밭을 성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만일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기업된 밭’이란 이스라엘 각 지파대로 하나님께 선물로 나누어 받은 땅을 의미합니다. 본절의 ‘마지기’라는 말은 원어로 표현하자면 ‘씨뿌림’입니다. 단순히 면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정도를 보고 값을 매기라는 것입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는 약 220리터 정도의 부피이며 고대 근동에서 이 정도 양의 평균값은 한 세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보리 한 호멜지기를 파종할 수 있는 땅이면 일년에 일 세겔씩, 희년까지 사용한다고 봤을 때 은 오십세겔로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희년이 지난 몇년 후에 밭의 값을 매길 경우에는 오십 세겔에서 일 년에 일 세겔씩 지난 횃수 만큼 값을 빼서 책정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원한 밭의 값을 책정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밭을 드린다고 해서 제사장이 그 밭을 직접 관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원 후에도 드렸던 사람이 계속 그 밭을 경작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수익금이 나올텐 데 거기서 책정된 밭 값은 성소에 내고 그 차익은 자신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원했던 밭을 다시 무를 때에도 책정된 밭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희년이 오기전에 이런 일들이 이뤄져야 했는데 여기서 시기를 놓쳐 희년이 지나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의 성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하나님께 드린 밭을 타인에게 파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착오에 의한 매매도 있었지만 악의를 갖고 매수자에게 봉헌된 밭임을 속이고 팔았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소유권에 혼란을 일으키는 매매가 발생할 때 그 밭은 영원히 하나님의 성물이 되었습니다.
(22-25) 만일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성별하여 드렸으면 너는 값을 정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네가 값을 정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로 삼을지며 그가 판 밭은 희년에 그 판 사람 곧 그 땅의 원주인에게로 되돌아갈지니라 또 네가 정한 모든 값은 성소의 세겔로 하되 이십 게라를 한 세겔로 할지니라
만일 다른 사람에게 밭을 사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다면 희년까지 계산해서 값을 산정 한 뒤에 하나님께 그 돈을 드려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밭은 영구히 성소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희년이 되면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렇듯 집이나 밭에 대한 규례가 구체적인 이유는 이것들이 사람의 인생에 토대가 되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겠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마음이 담겨 있기에 귀한 것입니다.
가축이나 소출을 드릴 때의 규례(26-43절)
(26-27)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만일 부정한 짐승이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것이요 만일 무르지 아니하려면 네가 정한 값대로 팔지니라
모든 가축의 처음 태어난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것을 서원의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낙타나 나귀처럼 부정한 가축의 첫 새끼도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부정한 짐승 자체는 예물로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의 새끼의 가치에 오분의 일을 더 하여 그에 상당하는 값을 성소에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부정한 짐승이기에 드리는 일종의 보상금이었습니다. 또한 배상할 형편이 안되면 부정한 짐승을 팔아서 그 돈을 성소에 드려야 했습니다. 팔 때에는 이윤을 남겨 파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정해준 정가 대로 팔아야 했으며, 제 사장이 가격을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볼 때에 그 판 돈을 성소에 드려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8-29)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기서 ‘바친 모든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헤렘’은 인간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혀 없이 완전히 바쳐지는 헌물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헤렘으로 바쳐진 것은 팔지도 무르지도 못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지극히 거룩한 성물이 되어 성소에서 사용되어졌습니다.
특별히 헤렘 중에서도 29절에 나오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이 아니라, 전쟁 중의 발생하는 헤렘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 전리품을 헤렘으로 바칠 때는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 혹은 짐승 이든 모두 죽이거나 태워서 없애야 합니다. 사람이 헤렘으로 바쳐진 사례는 사악한 죄를 저지르거나 신성을 모독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리고 성 전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30-34)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아는 십일조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모든 소출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농산물은 정량화시켜 십일조를 추려내는 것이 쉬웠지만 가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나 양이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할 때 열 번째의 것마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습니다. 여기에 사심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열번째 짐승이 실하고 튼튼하다고 하여 다른 짐승과 바꿔치기하면 두 짐승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했고 이것은 무를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레위기는 하나님께 자원하여 드리는 봉헌물에 대한 규례로 마무리 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표현하지만, 그 드리는 것 조차도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며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자녀들이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모아 작은 선물을 부모님께 드립니다. 그 부모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 선물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그 선물에 담긴 자녀의 고백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는 것을 알기에,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 주님. 이것으로라도 우리의 마음을 받아주옵소서.” 그 고백의 몸부림이 봉헌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 하나님을 눈을 들어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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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마지막 장인 오늘 본문은 내용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25절까지는 ‘서원(誓願)’에 관한 내용이고, 26절부터 마지절인 34절까지는 구별해서 드리는 ‘예물(禮物)’에 대한 내용입니다. ‘서원’에 관한 내용은 세부적으로 ‘사람의 서원(2-8절)’과 ‘가축에 대한 서원(9-13절)’, ‘집에 대한 서원(14-15절)’, 그리고 ‘땅에 대한 서원(16-25절)’이며, ‘예물’에 대한 내용은 ‘처음 난 가축(26-27절)’과 ‘무르기 금지(28-29절)’, 그리고 ‘십일조’(30-34절)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전이나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레위인들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겠다고 서원한 사람은 성소에서 일하는 대신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여 성소에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그 값은 본문 2절에서 7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남녀노소(男女老少)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고, 가장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젊은 남성이 가장 높은 금액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당시 남자 성인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은 한 세겔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서원에 따른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였습니다. 쉽게 서원하는 일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인 헌신보다 지속적인 헌신을 원하십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그 때만 반짝하는 단편적인 헌신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속되는 지속적인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점이 아니라 선이 되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 서약한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정한 값을 내지 못할 경우, 제사장은 서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그에게 값을 정하여 주었습니다(8절). 가난한 사람들을 열외 시키기 보다는 그들의 형편에 맞춰 서원에 대한 값을 지불케 하심으로 그들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은 상대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배려한다고 아예 제외시킴으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형편에 맞춰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므로 오히려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이웃 사랑법입니다.
9절부터 13절까지는 ‘가축에 대한 서원’으로 한 번 바치기로 한 짐승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10절), 만일 변경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에는 두 짐승 모두 드려야만 했습니다(10절).
하나님의 사역에 요청되는 자세는 ‘신중함’입니다.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일단 결정한 후에는 변개(變改)해서는 안 됩니다. 설사 환경이 바뀌고 형편이 어려워질 지라도 처음 마음을 유지하며 그 일을 끝까지 감당해 가야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도 이루어 가시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를 다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만일 서원한 짐승이 제물로 사용할 수 없는 짐승이라면 제사장이 정해주는 값을 대신 치루면 되었습니다(12절). 만일 부정한 짐승임에도 서원한 사람이 그 짐승을 가지기를 원하면 제사장이 정한 가격에 오분의 일을 더 하여 지불하기만 하면 소유가 가능했습니다(13절).
하나님은 그 어떤 아량 없이 강요만 하시는 폭군이 아니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수준에 맞게 배려하셨듯이 성급하게 서원하는 사람들의 형편 또한 고려하여 수용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은 상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비록 깊은 생각 없이 속단하여 결정했을지라도 상대의 실수를 용납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을 통해 배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실천법입니다.
관련하여 14절부터 15절에 나오는 ‘집에 대한 서원’, 16절부터 25절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땅에 대한 서원’ 또한 이와 유사한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집을, 자신의 밭을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렸으나 이후 되 물리려 할 때, 그에 따른 세부규례입니다. 모두 성급하게 자신의 집이나 땅에 대해 서원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수용하며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큰 틀에서 두 번째 내용인 ‘성물(聖物)’에 관한 규례가 26절부터 34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26절에서 27절입니다.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만일 부정한 짐승이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것이요 만일 무르지 아니하려면 네가 정한 값대로 팔지니라”
‘가축의 처음 난 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므로 서원 예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의 초태생일 경우에는 제사장이 책정한 가격에 오분의 일을 더한 가격을 지불함으로 그 동물을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었습니다.
28절에서 29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기에서 ‘온전히 바친 것’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헤렘’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바쳐진, 드려진, 헌신된’의 의미이고, 둘째는 ‘저주받은, 파괴된, 죽음이 예정된’이라는 뜻입니다. 28절의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바쳐진 예물’이라는 의미로 예를 들면 성막을 위해 특별히 드려진 예물을 의미합니다. 그 예물의 경우, 절대 무를 수 없었습니다. 29절의 경우는 ‘헤렘’이 지닌 두 번째 뜻으로서 ‘죄로 인해 죽음이 예정된 대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 해당되는 사람은 그 어떤 속전으로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진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나안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신명기 20장 16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가나안 족속들이 ‘헤렘’ 곧 진멸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일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신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가나안 원주민을 향한 ‘헤렘’의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오염되는 것을 막는 예방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죄악을 범하게 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심판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심판하시기 보다는 오래 참아주시는 관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원주민들을 진멸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그 말씀을 하신후 400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400년 동안이나 기다려 주신 후 심판의 칼을 뽑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관용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회개 하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시는 심판 주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30절부터 33절까지는 ‘십일조’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밭이나 나무에서 나온 모든 소산물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습니다(30절). 아울러 소나 양의 십일조 역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32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신앙적으로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 나머지 십분의 구에 해당하는 물질 또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물질의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에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어느 순간 우리는 돈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십일조 생활은 그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주는 영적제동장치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헌금’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물질의 십일조 뿐 만 아니라 정의를 좇고 자비를 베풀며 신의를 지키는 삶의 헌금을 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좇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 예수님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는 삶이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입니다.
거룩함을 강조하는 레위기의 마지막 장이 ‘서원’과 ‘예물’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즉 거룩함은 서원 곧 헌신과 관련이 있으며, 거룩한 사람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잊지 않는 바른 물질관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시며 물질의 청지기로서의 삶 뿐 만 아니라 정의를 좇고 자비를 베풀며 신의를 지키는 삶의 헌금으로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는 그리스도인, 더 나아가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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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으로든지 봉사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집인 성소를 위해 일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성소를 위해 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몸 대신에 속전 예물을 드리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서원규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어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 이제까지는 우리가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받았는데, 이제 우리도 뭔가 좀 성의를 표시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라고 할때 가진 것이 있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형편 것 마음에 정한대로 그 은혜에 감사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은 바치고 싶은데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레 27: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이 구절이 오늘 말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에는 감사하고 싶고, 그런데 아무 것도 바칠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사람을 보고 은 몇 세겔로 그 값을 정하지 말고, 단돈 10원이라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너무 너무 기쁘게 받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미리 정해진 값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남자는 얼마, 여자는 얼마, 어린아이는 얼마, 나이든 사람은 얼마, 이렇게 미리 헌금 액수가 정해져 있는데, 그런데 형편이 어렵거든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많든 적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돈이 아까워서 십원, 백원을 헌금하는 그런 억지로 하는 헌금 말고, 정말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당당하게 감사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헌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진 것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사랑으로 여기시고 다같이 기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물질로 감사하는 모습은, 오늘날처럼 물질에 찌들고 돈에 놀아나는 한국교회에 그야말로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진 자가 대우를 받고, 장로 되고 권사 되는, 그야 말로 하나님 사랑의 정신을 모독하는 교회, 그런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냥 세상의 친목 단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 말고 다른 것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감사한 만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인하여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날마다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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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7장은 서원과 십일조에 대해서 나온다. 26장에서 레위기 전체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고, 27장은 레위기에 대한 일종의 부록이다.
주께 드려진 사람들(1-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 너의 정한 값은 이십세로 육십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세로 이십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개월로 오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 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찌니라”.
서원이란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으로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지키도록 해야 ㅎ나다.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면 사람을 직접 여호와께 드릴 수 없으니까 그 값을 정하여 그 돈을 성소에 바치는데, 그것을 속전이라고 한다. 세겔은 무게, 혹은 화폐의 단위로 보통 세겔, 왕실 세겔, 성소 세겔이 있다. 20-60세의 남자는 은 50세겔이고, 여자는 30세겔을 바친다. 5-20세의 남자는 은 20세겔이며 여자는 3세겔을 바친다. 60세 이상의 남자는 15세겔이며 여자는 10세겔을 바친다. 위의 규정된 값을 지불 할 수 없는 극빈자는 제사장 앞에로 데려가고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해서 서원자의 형편대로 바치도록 했다.
주께 드려진 짐승들(9-13절)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생축이면 그 생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우열간에 정가할찌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대로 될 것이며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라”.
이 단락에서는 생축을 서원물로 드릴 때 다 거룩하다는 것과 변개해서 우열간(좋은 것과 나쁜 것)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 이미 바친 것을 다른 짐승과 바꾸면 본래 것이나 바꾼 것이 모두 거룩하게 바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부정한 짐승일 경우는 예물로 바쳐질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끌고 가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 질을 판정하고 제사장이 부정한 짐승에 해당하는 값을 매겨 그것이 정가가 되도록 하고, 짐승의 소유자가 짐승을 무르고 싶다면 짐승의 값에 오분의 일을 더 보태서 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 드려진 집들(14, 15절)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정가할찌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대로 될 것이며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집을 서원물로 바칠 경우에는 그 집에 적당한 가격을 제사장이 매기고 속전으로 바쳐야 한다. 집을 바쳤다가 집을 무르고자 하면 본래 집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서 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집은 다시 자기의 것이 된다.
주께 드려진 기업으로 받은 땅과 산 땅(16-25절)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두락수대로 정가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찌며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구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년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밭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유산으로 물려받은 밭에서 얼마를 구별해서 거룩하게 바끼려면 서원했을 때 “두락수대로 정가하되”라는 것은 “그 땅의 씨를 따라” 값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리 한 오멜지기는 오십세겔로 계산하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보리 한 오멜을 뿌릴 수 있는 땅에 대해서 50세겔의 금액을 지불하는 비율로 금액을 정하하는 것이다. 경작지를 서원물로 바치고자 한다면 경작지를 직접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해당 소출량을 희년때까지 매년 드리고 희년이 되면 그 경작지는 주인에게 다시 환원된다. 그리고 밭을 바친 사람이 무르고자 할 때는 정가의 오분의 일을 더하고 그의 밭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바친 밭을 다시 사들이지 않아서 그것이 다른 이에게 팔면 그 밭은 다시는 그 주인이 되살 수는 없다.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해약되어도 그것은 주께 바친 밭처럼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제사장의 소유가 된다.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렸으면 너는 정가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너의 정가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을 삼을찌며 그 밭은 희년에 판 사람 곧 그 기업의 본주에게로 돌아 갈찌니라 너의 모든 정가를 성소의 세겔대로 하되 이십 게라를 한 세겔로 할찌니라”.
만약 상속받은 유산이 아니라 자기가 산 밭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주님께 바치려면 제사장이 희년까지 햇수를 계산하여 값을 매기고, 밭을 바칠 사람은 바로 그 날에 값이 매겨있는 그 값을 주님께 거룩한 것으로 바쳐야 한다. 그리고 희년이 되면 그 밭은 그것을 판 사람, 곧 유산으로 받은 그 땅의 본래 소유자에게 환원된다. 그리고 이 모든 값은 성소에서 쓰는 세겔로 써야 한다.
초태생을 드리는 것의 금지(26, 27절)
“오직 생축의 첫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찌니라”.
생축의 초태생은 이미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주님께 바칠 필요가 없다. 만약 부정한 짐승이면 정가에 오분의 일을 더 얹어서 부정한 짐승의 값을 지불하고 무를 수(속 할 수) 있다. 그것을 무르지 않으면 제사장이 매긴 값으로 팔아야 한다.
주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에 대하여(28, 29절)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찌니라”.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소유 가운데 주님께 바쳐서 거룩한 것이 되었을 때는 사람이나 생축, 유산으로 물려받은 밭이든 그것을 팔거나 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께 가장 거룩한 것으로 모두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 바친 사람은 다시 속하지(무르지) 못한다. 그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십일조(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것과 가축으로 드리는 것. 30-34절)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모두 주님께 속한 것으로 주님께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그것이 밭에서 난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동일하다. 만약 십분의 일을 속하려면(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속해야 한다. 십분의 일을 바치는 대상은 소 떼와 양 떼, 그리고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해서 열 번째 것마다 바쳐야 한다(여호와의 거룩한 것). 우열을 바꾸지 못하는데, 이것은 나쁜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내거나 바꿔치기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꾼다면 처음 짐승과 바꾼 짐승이 둘 다 거룩하게 되어서 속할 수 없다(무를 수 없음).
34절에서는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레위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명하신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위해서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레위기 27장에서 서원과 십일조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의 제사와 속죄, 그리고 여호와의 절기와 규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언약의 신실성과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는 것이다. 서원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키도록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주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십일조에 대한 규례는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 북방 침략군들을 물리치고 전정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이요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나고 십일조를 바쳤다(창 14:18-20). 이것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 왔다는 것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신앙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으로 영광돌리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신앙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근본 정신을 도외시 하고, 형식에만 치중한 것을 책망하셨다. 십일조 정신은 비단 물질 뿐만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등 전인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청지기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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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위기의 마지막 장이 서원을 무르는 것에 관한 규례라는 점은 특이하다. 이것은 어리석은 서원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해주시는 하나님의 배려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은 존중되어야 한다. 또 지킬 수 없거나 지켜서는 안 되는 서원과 약속은 피해야 한다. 비록 실수로 서원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신다.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신 23:23).”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시 15:4).”
2.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생명 있는 대상 즉 사람이나 동물의 경우(2b~13), 집이나 토지와 같은 무생물 소유(14~25), 그리고 서원으로 바칠 수 없거나 또는 무를 수 없는 것들(26~33)이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가령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지만(아마 나실인 서원을 가리킬 것이다) 바치지 못하게 될 경우를 위해서 하나님은 은혜로운 규정을 주셨다. 금전을 통해서 대신하는 것이다. 금액의 기준은 일반적으로 노예들의 표준 매매 가격에 상응하는 가격인 은 삼십 세겔이었다(출 21:32). 하지만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 차별을 두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형편에 맞게 조정이 가능했다. 두 번째 경우는 사람이 아닌 소유를 드리겠다고 한 서원의 경우다(9~25). 동물의 경우에는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고, 만일 바꾸려고 시도했다면(대개 이 경우는 바치려고 했던 것보다 열등한 것을 바치려는 잘못된 동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 두 동물 모두가 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다. 그 동물이 제물로 합당치 않은 경우에만, 속건제 배상의 원리에 따라 가격의 1/5을 더하여 무를 수 있었다.
토지를 바치겠다고 서원한 경우라면, 다음 희년까지 남은 기간에 얻을 곡식 가격에 1/5을 더하거나 그 기간에 뿌릴 씨앗을 사는데 필요한 가격을 더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규례가 가르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지정된 것은 바치기로 서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첫 새끼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서원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더러 속이는 일이 된다. 이미 하나님께 봉헌된 것은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8절에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무를 수 없다고 말하는데, 여기 온전히 바쳐졌다고 한 것은 여리고 성이나 가나안 전쟁에서 진멸하도록 바쳐진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번복하거나 일부를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를 일컫는다. 아간의 범죄는 이 점에서 심각한 것이었다(수 7:11). 본문 끝에는 땅과 가축의 십일조 문제가 기록되었다(30~33). 땅의 십일조는 무를 수 있지만 가축의 십일조는 무를 수 없다.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지만, 농부가 다음 추수를 위해 파종할 씨앗이 필요했기에 이 경우에는 추가로 1/5의 금액을 내고 속할(무를) 수 있었다.
3. 왜 하나님께서는 서원을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삶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한다. 신약성경은 서원보다 자신의 말에 대해 신실할 것을 강조한다. 세례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서원과 같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서원도 있다. 결혼도 일종의 서원(서약)이다. 또 헌금을 서원하기도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반드시 행하라고 가르친다. 성도는 자기가 한 말을 지켜야 하고 세상이 성도 안에서 진실함과 신실함을 찾아볼 수 있게 살아야 한다. 주님의 신실하심은 그 백성들의 말 속에서도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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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7장은 서원에 관해 다룹니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서원을 할까요? 보통 절박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입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서원을 하고 난 후에 후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자원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마칠 수 있는 것이 서원입니다. 본문은 서원을 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과 서원을 했다면 꼭 시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2-8절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경우를 다룹니다. 성막과 제사를 섬기는 종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 일은 레위인과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노동력을 계산하여 돈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성인 남자의 경우 50세겔인데, 당시 노동자의 한 달 임금이 한 세겔 정도였다고 하니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서원하기 전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혹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너무 커서 서원을 하고 싶다면, 제사장에게 가서 형편에 맞는 금액으로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서원하는 돈보다 서원자의 진실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9-13절은 가축을 서원한 경우인데,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합니다. 정결한 짐승의 경우 서원한 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 나쁜 것뿐만 아니라 더 좋은 짐승으로도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원의 제물을 나쁜 것으로 바꿀까봐 이런 규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서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한 대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부정한 가축은 환산한 금액으로 드리거나 무를 수 있었는데, 무를 경우 20%의 금액이 추가되기 때문에, 아까워서 무르려고 할 경우 더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14-25절은 집과 토지에 관한 내용인데 전반적인 내용은 비슷하고, 다만 희년을 기준으로 수확량을 계산하여 돈으로 드렸습니다. 26-33절은 처음 난 것, 영원히 바쳐진 것, 십일조와 같이 본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제물을 자신의 것처럼 서원할 수 없다고 가르쳐 줍니다.
서원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고, 자원하여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니만큼 서원하였다면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레위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적 제사로 시작하였는데요. 그 마지막은 하나님을 향한 자유로운 순종, 자발적인 섬김으로 마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도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 함께하고 싶고, 더 드리고 싶고, 더 섬기고 싶어지는 것. 우리도 이런 자유로운 섬김과 순종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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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은 레위기의 마지막 장으로, 앞에서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됨을 보았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된 자들이 하나님께 서원하여 예물을 드리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서원 예물로는 사람의 값, 가축, 집, 토지 등을 드릴 수 있다. 처음 난 가축,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것, 땅의 십 분 일 등 3가지는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
여호와께 사람의 값을 서원 예물로 드리는 경우 (2~8절)
①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포함한 사람을-사람의 값을- 여호와 앞에 드리기로 서원했다면 다음과 같은 금액을 드려야 한다(2절). ‘사람을 드린다’ 라는 의미를, 어떤 사람을 드려 성막 봉사 등 여호와의 일을 감당하게 한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QA성경, 성서원 刊). 그러나 이것보다는 사람을 구별하여 상징적으로 드린다는 의미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사람의 값을 정하여 드리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이라고 하여, 사람을 드리되 가축이나 토지처럼 직접 드릴 수 없기에 일종의 ‘속전’의 형식으로 드리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또한 사람의 모든 연령대에 해당하는 값을 정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드려진 사람이 얼마 동안이나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지 않았고, 20~60세의 남자가 드릴 은(silver) 50세겔은 품꾼의 2백 일 치 품삯에 지나지 않으므로 예를 들어 성막에서 수 년 간 봉사하는 것에 비하면 환산 금액으로는 너무 적다고 하겠다. 또한 6절에서처럼 1개월 밖에 안 된 아이가 성막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기 때문에 직접 봉사를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한나와 사무엘의 예는 아래 28절의 ‘헤렘’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또한 당시 노예의 금액이 30세겔 정도였다는 것도 여기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가 될 것이다.
② 20~60살까지의 남자면 성소의 세겔로 은 50세겔, 여자면 30세겔로 한다(3~4절). 남자 20세는 인구 숫자로 계수되는 나이의 시작이며,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로서, 20~60세는 백성의 중추를 이루는 나이 대이다.
③ 5~20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20세겔, 여자면 10세겔로 한다(5절).
④ 1개월~5살까지는 남자면 5세겔, 여자면 3세겔로 한다(6절).
⑤ 60살 이상의 남자면 15세겔, 여자는 10세겔로 한다(7절).
※ 위에서 나열된 나이 중 겹치는 나이는 5세 20세 60세이다.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개월~5세는 1개월부터 5세가 될 때까지 즉 만4세까지, 5~20세는 5세가 된 때로부터 20세가 될 때까지, 20~60세는 20세가 된 때로부터 60세가 될 때까지, 60세 이상은 60세가 된 때로부터 그 이상의 모든 나이라고 봐야 한다.
⑥ 서원자가 가난하여 그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가게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해야 한다(8절).
가축을 예물로 드리는 경우 (9~13절)
① 여호와께 가축을 서원 예물로 드릴 때는 (그 드린 모든 가축이) 다 거룩하므로(9절), 그것을 변경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하고-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지 못하고- 혹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하게 된다(10절). ‘둘 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둘 다 여호와께 드려져야 한다’는 뜻이다.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제물)을 바꾸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의지나 감정에 따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가볍게 취급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데 있다. 신중하게 서원하고 확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② (서원 예물로 드렸으나)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가축이면 그 가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가야 하고(11절), 제사장은 우열간에 값을 정해야 하는데, 그 값이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된다(12절). 따라서 서원자는 그 부정한 가축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정한 값을 드리게 된다.
③ 만일 서원자가 그 부정한 가축을 무르려면 네가-제사장이- 정한 값에 오 분의 일을 더해야 한다(13절). ※ 정(淨)한 가축은 무를 수 없고, 부정한 가축은 서원 예물로 드렸다가 무를 수 있지만 제사장이 정한 값에다 1/5을 더해 무를 수 있다. 이는 속건제 규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5:16 참조).
집을 예물로 드리는 경우 (14~15절)
①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하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값을 정하는데,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된다(14절). 제사장이 정한 집 값이, 무르는 기준이 된다.
② 만일 그 사람이 (드리기로 한)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제사장이 정한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드리고 자기 소유로 되돌릴 수 있다(15절).
기업된 밭 일부를 드리는 경우 (16~25절)
①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하면 마지기 수대로 값을 정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한다(16절). 마지기 수대로-개역한글은 ‘두락 수대로’ 라고 함-의 의미는 ‘땅에 뿌릴 씨의 양에 따라’(according to the amount of seed required for it/ proportionate to the seed needed for it) 이다. 1호멜(homer)은 약 220리터이다. 따라서 보리 한 호멜지기는 보리 220리터의 씨를 뿌릴 수 있는 크기의 밭을 말한다. 이 크기의 밭이 액수로는 은 50세겔이 된다.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집 값처럼, 이 50세겔도 또한 성별하여 드린 밭을 무르는 기준이 된다.
② 만일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성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정해 주신 대로- 해야 한다(17절). 희년에서 다음 희년까지 50년을 기준으로 한 호멜지기 밭의 값은 50세겔이 된다.
③ 만일 그 밭을 희년 후에 성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한 값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한다(18절). 희년이 돌아오면 여호와께 드렸던 밭도 그 드린 자에게 되돌려지므로, 다가올 희년이 얼마나 남았나에 따라서 값이 조절된다. 기준 금액이 50년에 50세겔이므로 예를 들어 1년마다 1세겔씩 감액될 수 있을 것이다.
④ 밭을 성별하여 드린 자가 무르려면 제사장이 정한 값에 오 분의 일을 더하여 드리고 자기 소유로 돌릴 수 있다(19절).
⑤ “만일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20절). 밑 줄 친 부분을 반드시 ‘무르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팔았으면’ 으로 해야 한다. ※ 밭을 서원 예물로 드린 자가 무르지 않는다면 희년이 되었을 때 그 밭은 서원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개역한글과 개역개정 성경처럼 번역하면 21절과 매치가 되지 않는다. 무르지 않은 자에게 희년에 그 땅은 되돌려지고, 서원자가 무르지 않고 타인에게 팔아버린 경우에만 희년이 되어도 서원자에게 되돌려지지 않고 제사장의 기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20절처럼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으로 하여 마치 서원자가 2가지 선택이 가능한 것처럼 하면 안 된다.
⑥ 희년이 되어 (무르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팔았던) 밭이 돌아오게 될 때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된다(21절). ※ 성별하여 드린 밭을 무르지 않았다면 희년에 드린 자에게 돌려지지만, 무르지 않고 타인에게 팔았다면 희년에 서원자에게 되돌려지지 않고 제사장의 기업이 된다.
⑦ “만일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성별하여 드렸으면”(22절), “너는 값을 정하고-16절의 그것을 말함-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네가 값을 정한 돈을 그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로 삼을지며”(23절), “그가 판 밭은 희년에 그 판 사람 곧 그 땅의 원주인에게로 되돌아갈지니라”(24절). 밭을 드린 자는 ㉠제사장이 계산한 밭 값을 여호와께 드리고 ㉡다음 희년까지 밭을 활용하다가 ㉢희년이 되면 그 밭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 자기 기업인 밭을 드린 경우와 남의 밭을 사서 드린 경우의 차이점은, 전자는 밭을 드린 자가 그 밭을 사용하지 못하나, 후자는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소의 세겔 (25절)
① 처음에 세겔은 금 은 동과 같은 금속의 무게를 재는 단위였다(출38:24 이하 참조). 이는 거래 시에도 사용되어 금이나 은의 중량을 달아서 당사자 간에 물품 대금으로 주고 받았을 것이다. 후대에 와서 이 세겔이 동전의 명칭으로 쓰이게 된다(마17:27). 세겔은 일반인들이 장터(marketplace)에서 쓰는 ‘일반 세겔’, 궁중에서 쓰는 ‘궁중(또는 왕실) 세겔’, 그리고 성소에서만 쓰이던 ‘성소 세겔’로 구분된다. 성소의 세겔이 일반인들이 장터와 같은 데서 사용하던 세겔과 약간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성소의 세겔’ 이라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소의 세겔이 일반 세겔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라는 주장과 가벼웠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답은 알 수 없다 이다
② 이 문제를 단순화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자. 통상적으로 일반 1세겔을 11.5그램으로 보고 있다. 성소의 1세겔은 20게라(gerah) 이다. 1게라는 0.6그램이므로 20게라는 0.6X 20= 12그램이다. 따라서 일반 세겔은 11.5g 이고, 성소 세겔은 12.0g 이 된다. 결론적으로, ㉠20게라가 성소의 1세겔이라는 것과 ㉡일반 세겔과 성소의 세겔은 ‘달랐을 것이다’ 라는 정도로만 정리해 두기로 하자.
처음 난 가축에 대한 규례 (26~27절)
① 가축 중에서 처음 난 것-히브리원어상으로는 암수(male and female)를 포함한다-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다.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한다-드려서는 안 된다-. 가축의 첫 것은 이미 여호와의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성별된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는 말씀이다. 성별하여 예물을 드리려면 처음 난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드려야 한다. 이와는 반대되는 해석을 한 경우도 있는데, 잘못된 번역이라 생각된다. “가축 중 처음 난 것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다른 것으로 바치지 말아야 한다. 소나 양이나 여호와의 것이다.”(26절)(히브리어직역 구약성경, 말씀의집 刊)② 만일 부정한 짐승의 처음 난 것을 드렸다면, 네가-제사장이- 정한 값에 오 분의 일(1/5)을 더하여 무르던지, 무르지 않으려면 제사장이 정한 값대로 팔아야 한다(27절). 제사장이 부정한 짐승의 값을 정하는 것은 11~12절과 같을 것이다. 무른 값이나 판 값이나 여호와께 드려진다.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것 (28~29절)
①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28절). 이에 해당되는 경우가 한나의 서원이다(삼상1:11). 만약 한나가 마음이 변하여 사무엘이 젖 떼는 나이에, 위의 6절에서처럼 은 5세겔만 드리고 무를 수 없다는 뜻이다-물론 6절에서의 5세겔이 무르는 값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때 사무엘이 ‘온전히 바친 것’ 이 된다.② (온전히) 바쳐진 것이라는 뜻의 (히)‘헤렘’ 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그 하나는 ‘거룩한 목적으로-성별되어- 바쳐지는 것’ 이란 뜻으로, ‘set apart’(따로 떼어놓다) 라고 번역된다. 다른 하나는 ‘심판을 위해-저주받을 것을 없애기 위해- 바쳐지는 것’ 이란 뜻으로, ‘put under the ban’(저주 아래 두다) 라고 번역된다.③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29절). 같은 절을 NLT 바이블로 보기로 하자. “A person specially set apart by the LORD for destruction cannot be redeemed. Such a person must be put to death.”(여호와를 위해 멸절시키기로 특별히 구별된 사람은 무를/속량될/구속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것의 대표적 예로는 여리고 성을 들 수 있다. 여리고는 멸절을 위해 여호와께 드려졌다(수6:17~21).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 악한 성읍과 거기 거주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졌고 따라서 저주받을 것이 된 그들을 없애기 위해 멸절되어야 했다(출22:20, 민21:2, 신7:2, 신13:15, 삼상15:3,18,33). 여호와께 불순종한 결과로 헤렘 규정을 어기게 되고 여호와께 버림받은 사람의 예로는 사울 왕을 들 수 있다(삼상 15장). ※ 본 절(29절)에 해당되는 또 다른 예로는 사사 ‘입다’의 서원을 들 수 있다(삿11:35~36).
십 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 (30~33절)
① 땅의 십 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 중 십 분의 일(1/10)은 여호와의 것으로, 여호와의 성물이다(30절).
②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1/5을 더해 드려야 한다(31절). 십일조로 드린 곡식이나 열매를 무를 수 있지만, 동일한 품목의 곡식이나 열매를 먼저 드린 양(量)에 1/5 즉 20%를 가산하여 드려야 한다. 이는 한 마디로 무르지 않는 게 낫다는 말씀이다. ※ 1/5 가산은 곡식과 열매에만 해당되고 가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가축은 다른 것으로 바꾸면 최소 100% 가산된다.
③ 모든 소나 양-염소 포함-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된다(32절). 그 열 번째의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면 안 된다. 바꾸면 둘 다 거룩하게 되어 여호와께 모두 드려져야 한다(33절). 그래서 33절에서 ‘무르지 못한다’ 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 바꾸지 못한다 ㉡돈으로 속하지(redeem) 못한다 ㉢바꾸려다가 두 마리를 드리게 되었다고 없던 일로 되돌리지 못한다 등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33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바꿔서 두 마리 드릴래, 안 바꾸고 한 마리 드릴래? 만일 1/10을 드리는 자가 1/10에 해당된 가축이 아닌 다른 가축으로 두 번 바꾼다면 결과적으로 3마리 모두를 드리게 될 수도 있다고 할 것이다.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지나는 10번째의 것이 튼실하지 못하다고 해서 다른 튼실한 것으로 바꾸지 말아야 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신 이유는, 십 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으로서 성물이므로, 1/10을 드리는 과정에서 만에 하나라도 사람의 생각이나 욕심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 여호와의 것으로 결정된 10번째의 것을 바꾸려고 시도하면 모두가 거룩하게 되어 되돌리지-바꾸려고 시도한 일을 없던 일로 하지- 못한다.
서원하여 드릴 수 없는 것 세 가지
① 짐승의 처음 난 것(26~27절), 온전히 바쳐진 것(28~29절), 땅과 가축의 십 분의 일(30~33절) 등 3가지는 이미 여호와의 것이므로 재차 서원하여 드릴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여호와께 드리는 서원 예물은 이미 여호와의 것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② 따라서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서원하여 드리겠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드리는 자의 작정이나 서원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당연히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것인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행위를 ‘도둑질’ 이라고 말씀하신다(말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