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칭찬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교회입니다.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도시입니다. 고대 세계의 상업의 중심지입니다. 은행이 있어 금융의 중심지로 그 당시 가장 부유한 도시에 속했습니다. 주후 60년에 대지진이 있어서 도시가 파괴되었는데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도리를 재건할 정도입니다. 검은 양모(부드러움)로 만드는 의류 제조업이 유명했고, 의술 학교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 나오는 눈의 질병을 치료하는 안약이 이름 나 있었습니다. 근처에 온천이 있어서 ‘미지근하다’는 표현이 그들에게는 익숙하였습니다. 데니즐리라는 곳에서부터 10km 길이의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물을 끌어와 도시에 공급을 하는데 물이 도시에 도착할 때쯤이면 미지근해졌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에는 유대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 교회를 세운 사람은 에바브라(골 4장 12절. 16절)일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에서부터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가 있고, 동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골로새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세 가지 내용을 계시하십니다.
첫째, “아멘”이라고 하십니다. 아멘은 ‘참으로, 진실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65장 16절에 “진리(아멘)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거기에서 가져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진실로 진실로”(예. 요 1장 51절. 3장 3절. 5절. 11절 등)라고 하셨습니다. 신적인 권세와 신적인 확증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나타냅니다.(빌 2장 8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아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후 1장 20절)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1장 5절에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신실하게 완전하게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한 사람들을 위한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증인으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증언하셨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 되신 분이십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묻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은 만물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고 하시고, 18절에 “그가 근본”이라고 하십니다.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와 신자들의 행위를 다 아십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판단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코람데오. Coram Deo)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차가움과 뜨거움을 서로 대조하여 차가움은 부정적으로, 뜨거움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둘 다 긍정입니다. 차가움도 긍정이고 뜨거움도 긍정입니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대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차든지’에도 해당되고 ‘뜨겁든지’에도 해당이 됩니다. 라오디게아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물은 뜨거운 광천수이고, 동쪽으로 16km 떨어진 골로새의 물은 차갑고 순수한 물이라고 합니다.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뜨겁든지 차든지 한 것이 아니고 “미지근함”입니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의 대조가 아니라 ‘차가운 것, 뜨거운 것’과 ‘미지근함’의 대조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차고나 뜨거운 것이 아니고 미지근함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수도관을 통해서 히에라볼리로부터 물을 공급 받았는데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때쯤이면 물이 미지근해진다고 합니다. 물은 깨끗하지 않았고 물맛은 너무 좋지 않아서 비위에 거슬리고 그 물을 먹으면 토하기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미지근함은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정체된 신앙의 상태를 의미할 것입니다. 차거나 뜨겁거나 하는 것은 변화되고 발전되어나가는 것인데 미지근함에 머물러 있다면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은 무관심, 방관, 냉담의 상태로 봅니다. 모리스는 “싸늘한 무관심”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바클레이는 무관심은 모든 방벽 중 가장 깨기 힘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도 무관심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변화되지 않는 상태에 그들은 머물러 있었습니다. 14절에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계시된 주님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발전, 영적인 성장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
라오디게아 목회자나 신자들은 뭐라고 서로 말했습니까?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볼 때 부요했던 것 같습니다. 교인 수도 많고 재정도 부족하지 않고. 그들은 물질의 부요를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교회도 재정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 기준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영적으로 볼 때는 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그들의 영적인 실상, 영적인 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는 검은 양모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양모로 만든 옷을 입고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벌거벗음’은 수치(사 20장 4절. 겔 26장 37-39절)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는 수치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는 정 반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는 환난과 궁핍의 상태였으나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2장 9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는 부요했지만 내적으로는, 영적으로는 빈곤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그 영적인 실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영적인 실상, 참된 모습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지만 자신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만심과 안일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임금과 같았습니다. 벌거벗고 있었지만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과제는 주님의 말씀의 눈으로 자신들의 영적인 실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주님께서 권면을 하시는데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전서 1장 7절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요는 믿음의 부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금융 중심지로 은행이 있었습니다. 은행 계좌에 금은 있는데 믿음의 계좌에는 금이 없었습니다. 심각한 영적인 빈곤함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의 금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검은 양모로 만든 옷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옷을 올바로 입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아름다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로마서 13장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옷을 입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자신의 영적인 옷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세계적인 안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안약은 눈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을 치료하여 올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 진리의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자신들의 실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주님께서 고쳐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을 열어주셔서 예수님을 점점 올바르게 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께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하면서 절을 합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맹인 상태였습니다.(요 9장 39절) 영적으로 맹인으로 사는 것, 그것은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인 눈이 열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그들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서 믿음을 부요하게 가지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18절에 “권면”을, 19절에 “책망”과 “징계”를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책망을 합니까? 결핍과 잘못한 것이 있고, 바꾸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94편 12절에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책망은 단지 꾸짖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말씀으로 설득시켜서 그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고 주의 법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행하는 것입니다. 책망은 사랑의 행위입니다.(히 12장 5-6절. 잠 3장 12절) 주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대하면서 바꾸도록 하시는 행위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내버려 두시거나(롬 1장) 바로 심판을 행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열심을 내도록 하는 의미가 있고, 회개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회개는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바꾸는 것,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랜트 오즈번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열심’ 또는 열정을 ‘미지근한’ 영성으로 바꾼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이었다. 그 열심은 ‘회개’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자기 자신의 무감각한 영성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그리스도보다 세속적 풍요에 더 귀를 기울였고, 물질적 성공이 자기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열정은 초점을 자아에서 하나님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하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이 말씀은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22절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목적으로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불어 먹음”은 예배의 정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4-5장은 천상의 예배를 보여주는데 지상의 예배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찬식을 비롯한 예배의 정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예배를 한다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그들만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식사는 메시아 왕국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집니다.(19장 9절. 사 25장 6-8절. 눅 22장 30절) 그런데 메시아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지금 예수님이 문 밖에 서 계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은 단지 교회당 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그들의 존재 중심에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밖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알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중심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왜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가련하고 가난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문 밖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다른 점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사람이 먼저 신을 찾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바클레이의 주석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바론 폰 후겔이 12세기 버나드가 자기 제자들에게 늘 하던 말을 즐겨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한 겨울 추운 새벽이나 혹은 칠흑 같은 밤중에 교회당에서 기도하려고 아무리 일찍 깨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언제나 깨어서 벌써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은 그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얼굴을 찾게 깨운 것은 하나님 그분이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문을 여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격적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주관과 사람의 인격적 반응의 책임이 연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문을 여는 것은 밖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문을 여는데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식탁 교제를 원하십니다. 이 식사는 언약 관계의 식사입니다. 복된 교제의 식사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주님과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가난한 이유입니다. 이 식탁 교제는 급히 잠시 먹는 식사가 아닙니다. 한 날의 가장 중요한 식사이고 오랜 시간 앉아서 이야기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식사입니다. 모리스는 “서둘러 간단히 먹는 식사가 아니라 천천히 즐기며 먹는 정식”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의 의미가 있고 사상의 교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고 기뻐함이 있습니다. 삶을 함께 나눔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능력은 내 마음대로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데 있습니다.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기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막 16장 19절. 시 110편 1절) 승리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아 계십니다. 보좌는 영원한 왕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이긴다”는 것은 끝까지 주님과 교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끝까지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왕적 통치에 동참하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마 19장 28절. 눅 22장 28절. 30절. 롬 8장 17절. 딤후 2장 12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교제하는 삶이 승리의 삶입니다.
특별히 7교회에 대한 편지를 끝내면서 “보좌”를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어서 4-5장에 “보좌”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4-5장의 하늘에 있는 보좌에 연결이 됩니다.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말씀’은 ‘권면, 책망’입니다. 이것도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인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변화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문 안에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 밖에 계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마음과 삶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위보다 굳은 완고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 3절에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지각과 올바른 정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책망의 말씀은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 오실 때까지 모든 교회가 항상 듣고 있어야 하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