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갈 고(Go)가 아니라 쓸 고(苦)야.’ 하기야 누구는 ‘고해’(苦海)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먹을 것 쌓아놓았다고 쉽습니까? 그야 먹을 것 걱정 하나 던 것만도 다행이기는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조건 가지고 허우적거리는 것이 가장 딱한 일이기는 하지요. 아무튼 일단 살고는 봐야 하니까 말입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이 기본 생존조건마저 해결하지 못해 하루벌이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선진국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야기 속의 가상현실도 아닙니다. 그 하루를 살려고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하루 일자리를 얻으려고 줄 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보호종료아동’이란 말이 생소하기도 합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았습니다. 나라에서 보호해주는 기간이 만료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혼자 알아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혼자 살아갈 준비는 되었나요?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 나가야 합니다. 물론 그런 아동들이 임시 거처할 곳을 마련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겠지요.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독립해야 합니다. 준비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선뜻 일자리를 내주는 것도 아니고 때가 가까울수록 불안과 걱정이 커질 것입니다.
보육교육을 받았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아기를 맡아 돌보는 자리를 찾았습니다. 한 6개월 된 아기를 돌봐주는 일입니다. 아직 젊은 엄마는 야간업소에 나가서 일합니다. 엄마가 밤늦게 퇴근하여 오면 그 때 퇴근하는 것입니다. ‘어, 생각보다 어리네.’ 당연하지요. ‘보호종료아동’이니 말입니다. 아직 ‘아동’이란 딱지도 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마당에 그래도 배운 대로 아기를 돌보는 자리가 생겼으니 다행일 수 있습니다. 미심쩍은 엄마는 망설이다 그런대로 쓸 만하다 싶어 맡깁니다. 그렇게 ‘아영’이와 초보 아기 엄마 ‘영채’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시간이 흐름에 아기 ‘혁’이는 엄마보다 아영이가 가깝게 느껴지나 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많은 시간을 아영이와 지내니 말입니다.
손님 접대하는데 자꾸 젖이 나오니 문제입니다. 어서 끊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아기 먹을 모유를 많이 받아둡니다. 아영이에게 시간과 수유 방법을 잘 일러줍니다. 젖은 마음대로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사용해도 쉽지 않습니다. 아기는 밤새 울어대고 피곤한 엄마는 짜증만 늘어가고 벌이는 해야 되고 하루하루가 전쟁터와 같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벅지 못하니 엄마 자신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 젖을 먹는 아기의 영양 상태가 좋을 리 없습니다. 받아둔 모유를 모두 씽크대에 쏟아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분유를 사야 합니다. 부가적 지출이 생깁니다. 보육비 줘야지, 생활비 해야지, 아기 분유 사야지 등, 삶이 쪼그라들 지경입니다.
어느 날 늦게 돌아오니 아영이는 소파에서 자고 있습니다. 아기 침대에 누워있는 혁이를 안아봅니다. 자기보다 아영이를 따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잠시 안아보다 아기침대에 뉩니다. 보호대를 제대로 잠그지 않고는 외출을 합니다. 그 사이 혁이가 낙상을 합니다. 급히 응급실로 갑니다. 머리를 다쳤지만 크게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 때 발견한 것이 아기의 영양부족입니다. 아무튼 모든 것은 아영이가 뒤집어쓰고 해고당합니다. 아영이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돈에 궁해진 영채는 소송까지 해서 역시 궁한 아영이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정신 사나워진 영채는 운전하다 사고를 당해 입원까지 합니다. 영채는 더 견딜 수가 없어 아기를 입양시키려 아는 사람에게 보냅니다.
떠나도 마음이 떠나지를 못합니다. 힘들어하는 초보 엄마 영채가 미덥지도 않습니다. 결국 영채가 혁이를 입양 의뢰하여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쫓아가서 빼앗아 옵니다. 글쎄 아직도 아기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신각신 하지만 영채는 잘 압니다. 혁이가 다친 것이 자기 잘못이라는 것을. 아영이가 미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모자란 것과 직업에 대한 자격지심도 있기에 혁이를 돌볼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영채가 혁이를 안고 흐느낍니다. 혁이가 자기처럼 될까 마음이 아파서 그랬는데 영채의 마음과 처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채 뒤로 와서 기댑니다. 내가 도와줄게요.
업소 사장인 언니가 그래도 영채를 아끼고 있기에 이래저래 돕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 혁이를 맡기로 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족이 아닌가요?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 이제는 보호 종료가 되어 사회에 나왔지만 아직 미숙합니다. 혹 사회적응도 하기 전에 사망하면 너무 쉽게 처리합니다. 무연고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여 처리합니다. 함께 지내며 자란 보육원 친구들이 우리가 가족이라고 우기며 장례식이라도 치르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쳐봐도 소용없습니다. 법이 그렇다네요. 그렇게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음들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죽어도 저 꼴이 되려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영화 ‘아이’(I)를 보았습니다. 아프지만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영어 제목이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생이 쓸 고(苦)이지만 함께 하면 갈 고(Go)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