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은 선교를 위해 새로운 도시(지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회당을 찾았습니다. 회당이 없었던 루스드라와 빌립보 두 도시(지방)를 제외하면 모든 지역에서 회당을 찾아 말씀을 전했습니다. 회심을 하였던 다메섹까지 포함하면 바울은 11개 도시에서 회당을 찾습니다.
바울이 찾았던 도시의 회당을 열거하면, 다메섹을 포함하면 11개 도시 회당들입니다. 그런데 회당은 예수님도 활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병자를 고치셨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던 기록이 4복음서에 골고루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 사역을 통해서 칭송(눅4:15)받으시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이 바리새인과 갈등의 원인(마12:9~14)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회당이 56회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회당이 34회 등장합니다. 회당을 빼 놓고는 예수님 사역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총장을 지낸 고세진 박사는 성서 고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예루살렘 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했던 성서 고고학 학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회당 사역을 자세하게 분류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회당사역을 간략하게 간추리면 4가지 사역, 즉 성서해석, 자신증거, 치유사역, 축신사역 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회당이라는 말이 22회 등장합니다. 스데반이 예루살렘에 있었던 헬라파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도 바울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회심이전에도 회당에 출입하였습니다. 아마도 다소에서 이미 회당 교육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돌아와 회당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성인이 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할 때에도 회당을 활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체포해온 기독교인들을 회당에서 때렸다(행22:19)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도시를 가면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며 회당을 지역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규례대로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셨던 것(눅4:19)처럼 바울도 자기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행17:2)합니다. 구약을 알고 구약이 예언하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라고 전하는 것은 훌륭한 선교 전략이었습니다. 아울러 바울은 로마황실이 ‘지배국 문화 존중 정책’을 활용하였습니다. 로마가 인정하는 유대교 회당에서 진리를 전하면 로마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회당을 활용하면 바울은 보호 받을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회당(Synagogue)은 ‘함께 모인다(Synagain)’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회당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모임’을 의미했습니다. 회당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바벨론 포로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은 바벨론 여러 강가에서 기도하며 울었습니다(시137:1~2). 그러다가 회당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구약에 회당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편 74편 8절에 등장하는 회당은 ‘백성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의 회당으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외경인 마카비서에도 회당은 없습니다. 포로기에 미미하게 시작한 회당이 신구약 중간기 말에 활짝 피어났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합니다.
회당은 유대인의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삶의 중심
신약성경에 회당이 56회 등장, 회당을 빼놓고는 예수님 사역 설명할 수 없어…
예수님 시대에 회당은 보편화되었고,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유대에 400여개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1세기 말엽 전 세계에 1000여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회당은 유대인 남자 성인 10명 이상이 있으면 설립이 가능했습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남자 성인 10명이상만 있으면 회당을 지어 신앙을 전수하고 유대인 문화와 전통을 지켰습니다.
회당장이 회당의 운영과 관리를 책임졌습니다. 성경에도 회당장 야이로를 위시해서 몇 사람의 회당장이 등장합니다. 회당마다 세 명의 회당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린도(행18장)에서 회당장(그리스보, 소스데네)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두 회당장이 같은 회당을 섬겼거나 고린도 여러 개의 회당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회당이 포로시절에 시작되었다고 주장을 하는 이유는 회당의 기능 때문입니다. 회당의 기능은 유대인들의 종교, 문화 그리고 생활 중심(herb)이었고 지금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센터의 기능을 유지합니다. 회당이 이방 땅에서 유대인의 신앙과 언어 그리고 문화를 지켰다는 증거입니다. 다양한 회당의 기능은 회당의 다양한 이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회당의 다양한 이름을 열거해보면 베트 하테필라(기도의 집), 베트 하크네세트(집회의 집), 베트 미드라쉬(학습의 집), 베트 세페르(책의 집), 베트 크네셋(만남의 집) 등등입니다. 회당의 다양한 이름들이 이방 땅에서 포로로 살면서 회당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하며, 토라를 읽었던 유대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의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회당은 학교, 기도실, 예배당, 문화학습장 그리고 법원역할을 했습니다. 회당은 1세기 중엽에는 외인을 환대하는 여관역할도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매일 예배를 드렸고, 안식일 예배에는 율법학자가 율법을 가르쳤고, 존경하는 손님이 방문하면 초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 제도를 활용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때부터 총 4명의 백부장을 만납니다. 예수님도 백부장을 만났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서에 두 사람의 백부장이 등장하고, 사도행전에는 5명의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신약성경에는 총 일곱 사람의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모두 로마 군대 백부장(Centurion)들입니다.
7명의 백부장 중에 세 사람은 믿음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히 오심을 만류하며 말씀만 하시면 족하다는 믿음을 고백해서 예수님 칭찬을 받았던 백부장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집행을 책임졌던 백부장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것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고백합니다. 셋째는 백부장 고넬료입니다. 그는 모범을 보인 믿음의 지휘관으로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여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만난 네 백부장은 바울의 체포와 구금 그리고 로마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만나 체포하며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을 천부장에게 보고합니다(행 22:27). 두 사람의 백부장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가이사랴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행 23:23). 이들은 바울을 보호하기도 하고, 바울을 체포해 가이사랴에 주재하는 벨릭스 총독에게 데리고 가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마지막은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합니다.
7명의 백부장 중에 두 사람 이름이 밝혀집니다. 고넬료(Cornelius, 행10:1)와 율리오(Julius, 행27:1)라는 백부장입니다. 이름이 밝혀진 두 백부장은 그들의 소속 부대도 알려줍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대대(Italian Cohort)소속이었고, 율리오는 황제 대대(Augustan Cohort) 소속이었습니다. 두 부대 모두 전통이 있는 로마 군대의 엘리트 부대였습니다.
이런 백부장들은 유대 사회에서 실존했던 로마 세력들입니다. 다수의 백부장들이 유대 지방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 사회와 문화를 수용하고 심지어 신앙마저 수용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권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통제하고 군림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대조직의 가장 큰 단위는 군단입니다. 당시 로마의 1개 군단은 약 6천 명 정도의 사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전성기 시절에는 28개의 군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군단은 천부장(Tribune)이 지휘했던 대대(Cohort)가 10개 정도 있었습니다. 보통 대대(Cohort)는 여섯 개에서 8개의 백인대로 구성되었습니다. 백인대는 명칭 상으론 백 명이지만 실질적으로 적게는 80명에서 많게는 1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백인대를 이끄는 지휘관 백부장(Centurion)은 로마군의 기초가 되는 로마군의 핵심이었습니다. 백부장은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보통 15년 이상이 된 노련하고 용감무쌍한 병사들 중에서 선발되어 임명되었습니다. 백부장은 비록 병졸에서 선발했지만 장교였고 혜택도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병들에겐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 백부장이었습니다.
로마 군대 시스템을 살펴보면 백부장의 역할과 위치의 중요성이 보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백부장(Centurion)이 지휘했던 '백인대'를 기초로 전투부대가 편성되었습니다. 그만큼 백부장이 중요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로마가 치룬 전쟁들에서 백부장들이 세웠던 혁혁한 전과를 기록합니다. 또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는 자신의 ‘역사(Historia)'에서 평시 군대 관리와 부대 훈련에 백부장들의 중요한(Crucial)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백부장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병사들의 군 생활의 질은 전적으로 자신이 속한 백인대의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렸었다고 합니다. 로마 군대에 관한 논문에 백부장의 부대관리에 관한 논문이 많습니다. 평시 부대관리와 전투력 유지는 백부장의 역량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에게는 상당한 재량이 주어졌습니다. 대부분의 백부장은 모범을 보임으로 리더십을 발휘했었습니다. 삶으로 믿음을 보여준 고넬료는 모범적 리더십을 발휘했던 당시 백부장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로마는 효과적 부대관리, 전투력유지 그리고 전쟁 수행을 위해 백부장에게 병사 체벌(Corporal Punishment)권을 주었습니다. 타키투스 ‘연대기’는 백부장 '루실리우스(Lucilius)'의 별명이 ‘다른 것을 갖고 와’라고 소개합니다. 그가 병사들 매질을 시작하면 어김없이 지휘봉(Vitis)이 부러졌고, 그는 ‘다른 지휘봉을 갖고 와’라고 소리쳤답니다. 이런 체벌이 허용되었습니다.
백부장의 역량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전투 현장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전쟁 터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백부장의 역량에 달렸던 것입니다. 로마군의 전쟁은 백부장이 승패를 좌우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의 전쟁은 백부장의 전쟁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나 군단장은 전투에서 백부장의 전술적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백부장에게는 특혜가 있었습니다. 우선 효율적으로 병사를 통솔할 수 있도록 상당한 재량권이 보장된 지휘권을 부여했습니다. 또 군복무를 마치고 나면 국가에서 주는 연금 혜택도 상당했습니다. 로마는 정복지에 퇴역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도시를 조성하였습니다. 면세와 자치권이 보장되는 이런 도시에는 병사 출신의 예비역 군인들이 거주하였고 백부장은 이런 퇴역군인 도시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며 로마의 도로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로마는 사통팔달의 도로망을 자랑합니다. 로마는 도로의 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로마는 촘촘한 도로망으로 지방과 정복지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전성기에는 113개주에 연결된 372개의 고속도로가 400,000Km(250,000 Mil)이었답니다. 잘 발달된 로마의 도로망은 로마 제국의 젖줄이었습니다. 이런 고속도로들은 군인들이 건설하였고, 각 지방정부가 도로 관리와 유지를 책임졌습니다. 로마는 도로의 건설, 유지, 활용에 선진국이었습니다.
로마의 도로망은 다양하게 활용되었습니다. 도로망의 가장 중요한 활용은 군사용이었습니다. 전시에 로마군은 도로망을 활용했습니다. 두 번째는 무역상들이 로마의 도로망을 잘 활용하여 로마 시민의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종교적 활용입니다. 각 지역의 수호신이나 도시의 신들을 경배하기 위한 성지 순례의 여정에 로마 제국의 도로망이 활용되었습니다. 넷째 로마는 도로망을 이용해 우편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편제도의 도입은 획기적이었습니다. 다섯째는 기독교 선교에 활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선교사들이 로마의 도로망을 활용했습니다. 로마 도로망은 복음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로마 도로망을 통한 기독교 선교는 세계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로마의 고속도로 중 가장 먼저 건설된 것은 아피아 가도(Via Appia)입니다. 기원전 312년 로마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건설한 도로입니다. 집정관의 이름을 따서 아피아 가도(Via Appia)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피아 고속도로는 당시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도로입니다.
아피아 고속도로가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많은 도로들이 건설되었는데 아피아 고속도로가 갖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아피아 가도(Via Appia)는 당시 일반도로에 없는 중요한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피아 고속도로 이후에 건설된 로마 도로들은 공유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속도로의 제국 로마의 고속도로들의 특징입니다.
첫째, 포장도로였습니다. 고대 도로는 비가 오면 도로가 진흙탕이 되어 기병들의 이동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무, 자갈 혹은 포석으로 포장했습니다. 두꺼운 포석으로 포장하여 아직도 로마시대 포장도로가 남아 있습니다. 둘째로 인도와 차도의 분리입니다. 일반인과 수송 병력이 뒤섞이지 않도록 너비 1M 이상의 인도가 도로변에 있었습니다. 셋째. 배수입니다. 배수가 잘되도록 도로 중앙이 볼록하게 건설하였고, 도로변 배수시설도 건설했습니다. 넷째는 직선도로입니다. 다리를 놓고 산을 깎아 될 수 있는 대로 직선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다섯째, 정리된 가로수입니다. 지하로 뻗은 수목의 뿌리가 도로를 파괴하거나 가로수가 마차를 방해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요컨대 로마의 도로는 대단히 과학적이었습니다.
로마 도로망의 활용은 복음의 확산 기여, 효과적인 선교 도모
로마 도로는 로마의 확장과 풍요를 견인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패망을 재촉하기도 했습니다. 도로 건설과 유지의 부담으로 야기된 내부 갈등과 부조리가 로마쇠락을 재촉했습니다. 초기 로마 도로는 로마군의 진군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발달된 도로로 적군의 침투가 빠르게 이뤄져 로마는 중요한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바울의 세계 선교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외적 이유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국제어인 헬라어 활용, 속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로마의 문화정책 그리고 발달된 로마의 도로망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여건(Infra)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선교 전략가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에그나티아 (Via Egnatia) 고속도로를 통해 2차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이 도로는 기원전 145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에그나티우스(Egnatius)의 명령으로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로명은 에그나티우스 총독의 이름을 따라 ‘에그나티아’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 도로는 약 25년 동안에 건설되었고 길이가 무려 696마일(1,120km)입니다.
로마에서 비잔티움까지 연결된 이 도로는 시설이 탁월했던 로마의 대표적인 고속도로입니다. 우선 도로 폭이 6m에서 9m로 굉장한 규모였습니다. 특히 중앙 분리대가 있었고 상대방 채찍에 맞지 않기 위해서 좌측통행을 제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 도로에서 이정표(Milestone)가 등장했습니다. 로마는 거리(Miles)를 측정해 거리 표지석(Milestone)을 세워 지나온 거리와 가야 할 길의 거리도 알게 했습니다.
당시 마차를 탄 사람들은 하루에 50마일(80Km)을 이동한 후에는 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50마일 지점마다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들(여관, 식당, 목공실, 대장간, 우마를 위한 동물병원)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여행자를 위한 종합 휴게시설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상당한 수준의 여행시설입니다.
바울은 이 에그나티아 고속도로를 따라 2차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이 도로를 통해 바울이 방문한 도시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등입니다. 이 도시들은 로마 제국에서 중요한 도시들입니다. 이 도시들을 선교한 것은 선교 전략상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주요 도로 선상에 있는 거점 도시에 거점 교회를 세워 효과적인 선교를 도모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 고넬료, 루디아 그리고 고린도의 디도 유스도,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모두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건한 이방인(Pious gentile)’입니다. 사도행전을 연구하는 신약신학자들은 이들을 ‘하나님 경외자(God-fearer)’ 혹은, ‘하나님 경배자(God-worshipper)’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경외자들은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할례를 받고 개종자(Proselyte)가 되면 유대인이 됩니다. 유대인은 혈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개종 절차를 통해 누구나 유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경외자(God-fearer)는 하나님을 섬겼으나 개종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혈통은 이방인이었지만 신앙생활은 유대인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경외자’들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안식일을 지키고, 회당을 출입하였고, 율법을 읽었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경외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었습니다.
유대인 백과사전은 1세기에 경건한 이방인(Pious Gentile), 즉, 하나님 경외자(God-fearer)들이 백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펄러서(David Flusser)나 헹겔(Martin Hengel)과 같은 학자들도 유대인 백과사전의 통계에 동의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와 강제 이주를 통해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삽니다. 그들은 각처에서 이방인 사회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와 유럽 전반에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이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전도를 받고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 개종했습니다. 개종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상당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건한 이방인들이 기독교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이 이방인 선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초대 교회 선교에 크게 기여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백부장 고넬료, 자주장사 루디아 그리고 고린도 회당 옆집에 살았던 디도 유스도입니다. 이들이 1세기 기독교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토마스 핀(Thomas M. Finn)박사는 사도행전에 이방인을 “하나님 경외자(God-fearer) 혹은 하나님 예배자(God-worshipper)라는 표현이 11번 등장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을 전공한 대부분의 신약신학자들은 공감하는 사항입니다. 11번의 경우 모두 이방인으로 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씀을 듣고 참된 신자로 변화됩니다.
사도행전에 11번 등장하는 ‘경외하는’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구절을 정리해 보면 10장 2, 22 그리고 34~35절입니다. 13장 16, 26, 43, 그리고 50절입니다. 16장 14절, 17장 4, 17절입니다. 18장 7절입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활동했던 지역이 광대합니다. 가이사랴, 비시디아 안디옥,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테네 그리고 고린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경외자’ 혹은 ‘하나님 경배자’라는 표현은 없어도 이런 조건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 8장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왔던 이방인이었지만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학자들은 ‘하나님 경외자’는 로마 사회에서 각계각층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낮게는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로부터 로마 황실의 실력자까지 다양했습니다. 문맹자도 있었지만 아테네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혹자는 사도행전의 수신자 데오빌로도 '하나님 경외자(God-fearer)'였다고 주장합니다. 데오빌로는 상당한 지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약신학 학자들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두 백부장도 '하나님 경외자(God-fearer)'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사람은 부하를 위해 예수님께 찾아와 믿음을 고백한 백부장이고,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을 경비하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던 백부장입니다.
‘하나님 경외자’ 그룹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선교학에서는 한동안 하나님 경외자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신약신학계에서도 하나님 경외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비로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하나님 경외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 경외자(God-fearer)를 발견한 사람은 흥미롭게도 유대교 학자였습니다. 1877년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랍비 야곱 버네이즈(Jacob Bernays)박사가 회당 예배자를 분류하며 사도행전에 ‘하나님 경배자(God-worshipper)를 언급했습니다. 유대교 랍비인 그는 1세기 회당 예배자를 연구하였습니다. 버네이즈는 회당 예배자를 정리하다가 하나님 경외자(God-fearer)를 발견하고 주목했습니다.
그 후 신약신학이 사도행전 독자구분(Clarification of the audience)을 하면서 하나님 경외자를 주목했습니다. 사도행전 독자는 이방인(Gentile), 하나님 경외자(God-fearers), 유대인(Jews),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합니다. 그 후 선교학에서도 ‘하나님 경외자’들이 1세기와 2세기에 이방인 선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을 발견합니다. 구약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던 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고, 이방인들을 전도하기에 적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