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경상도 청년 '박달'과 충청도 처녀 '금봉이'의 사랑 이야기 울고 넘는 박달재 |
- 여강 최재효 作 |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에 얽힌 사연을 중편 소설로 다루었습니다. 본 작품은 제천 신문에 연재되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 경상도 총각 박달(朴達)과 충청도 제천 처녀 금봉이의 이루지 못한 비련(悲戀)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울고 넘는 박달재-35
금봉 낭자와 박달 도령 동상 - 제천 박달재 정상
남녀의 생이별은 그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죽음으로 헤어지는 사별(死別) 보다 더한 애통(哀痛)을 당사자들에게 남기게 되며, 오랜 정한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내내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없게 된다. 사별은 일정 기간 지나면 잊혀 지지만 생이별은 헤어지지 않아도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별은 천재지변(天災地變), 전쟁, 개인의 대의(大意) 혹은 가족사에 기인하여 벌어진다. 조선 시대 통상의 별리라 하면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눈물과 탄식으로 점철된 죽 음보다 혹독한 상태를 말한다. 정(情)으로 대변되는 단군의 자손들 가슴에 간직된 사랑은 애증(愛憎)까지 수용되는 초월적 사랑이다. 一別年多消息稀 塞垣存沒有誰知 今朝始寄寒衣去 泣送歸時在腹兒 헤어지고 몇 해 흘렀나 이제는 그나마도 소식조차 희미합니다 수자리 변방 땅에 살아 계신지 누가 임 소식을 알고 있는지요 오늘 아침 동의(冬衣) 지어 인편에 부치려 합니다 당신을 눈물로 보내드리고 올 때 복중에는 이미 아이가 있었 답니다 위 시는 고려 말 포은 정몽주(鄭夢周)이 지은 정귀원(征歸怨)이라는 시로 신혼 초에 사랑하는 남편과 생이별 한 여인의 입장에서 지은 애가(哀歌)이다. 임신한 부인을 남겨두고 돌아올 기약도 없이 변방으로 병역을 수행하기 위해 떠나가야 하는 낭군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아내가 추운 겨울에 낭군이 입을 옷을 지어 인편에 보내면서 복중 에 있는 아기를 생각할 때 그녀의 암담한 현실과 생이별의 사이에서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금봉은 며칠 전에도 이등령에 올라 한 동안 북녘하늘을 바라보면서 박달의 무사귀환을 빌고 또 빌었었다.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몸피에 그녀는 점점 더해지는 불안감에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잠시도 집안에 갇혀 있기가 싫었다. 그녀는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집을 나섰다. 마침 그녀의 부모는 외출 중이었다. 눈이 꽤 녹기는 했으나 이등령 오르는 길은 꽤 미끄러운 편이었다. ‘집에 있으려니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등령에 가야 해. 고개 마루에 서서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 위안이면서 마음이 편해. 저 멀리서 서방님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실 것도 같고. 서방님이 오늘이라도 이등령을 넘어 오실지도 몰라.’ 금봉은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서 이등령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금봉이구나. 또 이등령에 가는 길인가?’ 겨울이라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갑돌은 수시로 금봉의 집 근처를 배회하며,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이번에도 갑돌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뒤를 밟았다. 금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으로 향했다. 동중에 서낭당이 나타나자 그녀는 돌멩이 세 개를 집어 돌무덤에 살며시 올려놓고 기도를 하더니 다시 이등령으로 향했다. ‘서방님, 언제 오시는 거에요. 지금 어디쯤 오셨어요. 혹시 오늘 이등령을 넘어오시는 거 아니세요. 과거 끝난 지 열흘도 지났잖아요. 하루가 여삼추(如三秋) 에요. 급제하시면 저에게 달려오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혹시 잊으신 것은 아니죠?’ 그녀의 손목에는 하얀 천 조각이 감겨져 있었다. 중턱쯤 오르자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치맛단에 눈이 엉겨 붙었고 미투리도 젖고 버선도 젖어 발이 얼얼하였다. 갑돌은 미끄러운 길을 걷는 금봉의 뒷모습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휘청거리면 갑돌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요 금봉이 가슴엔 수심도 많다 ……. 금봉이 옆사람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며 걷고 있었다. 박달을 만나기 이전에는 그녀는 아리랑 노래를 별로 즐겨부르지 않았다. 박달을 이등령에서 생이별을 하고난 뒤로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리랑이 입에 붙어 버리고 말았다. 단군왕검은 단웅국(檀熊國)을 반란자 요(堯)에게 기습침략으로 빼앗기고, 측근의 무리들을 인솔하여 만주의 아사달(阿斯達)로 향하였다. 수많은 백성들이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서며 따라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요가(堯)가 언제 또 난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체할 수 없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수많은 강과 고개가 있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그들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때 왕검 일행은 따라가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였고, 남은 백성들은 가슴을 치며 아리랑을 불러 한을 달래야 했다. 또한 당나라에게 멸망당한 고구려와 백제의 수십만 명의 백성들은 당군(唐軍)에게 전쟁 포로가 되어 요하(遼河)를 건넜고 또는 대흥안령(大興安嶺)을 넘어 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잡혀 갈 때 남아있던 그들의 부모형제와 처자식들은 가슴을 치면서 눈물로 아리랑을 불렀다.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통째로 받친 신라의 경순왕과 관료들은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때에 사랑하는 낭군과 부모형제를 떠나보내야 했던 서라벌의 여인들 역시 망국의 한을 달래며, 생이별의 쓰라린 속을 아리랑으로 달랬다. 배달겨레 특히, 낭군과 생이별해야 하는 젊은 여인들 가슴에는 한이 전통처럼 남아 있었다. 아리랑은 아리령(阿里嶺)이라는 말에서 나왔으며, 아리령은 큰 고개를 의미한다. 바다나 강은 배를 타고 건널 수 있으나 높은 고개는 쉽게 넘을 수 없다. 아리랑에는 하늘에 닿은 재(嶺)을 넘지 못하는 입장에서 이미 떠나간 임을 원망 또는 그리워하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떠나가는 임이 발병이 나서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여인의 심정이 바로 아리랑에 진하게 녹아있다. 힘들게 이등령 마루에 도착한 금봉은 박달이 굳게 언약한 말을 수백 수천 번도 더 되뇌면서 하염없이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였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갑돌은 숲속에서 그녀를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겨울 해가 빠르게 서쪽을 향해 달음박질 치고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한번 불자 이등령 정상이 눈보라에 휩싸였다. 금봉의 기도에 하늘이 감응한 것인지 아니면 돌풍인지 모르지만 눈보라가 뽀얗게 하늘로 오르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바람에 금봉이 붉은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눈보라 속에 휩싸인 금봉을 숲속에서 바라보던 갑돌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저러다 몸살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하는데, 조금 더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테고…….’ 갑돌은 가슴을 졸이며 금봉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서방님, 오늘은 이만 갈게요. 오늘은 못 오시나 봅니다. 다시올게요. 서방님께서 장원이 아니고 그냥 급제만 하셔서 평동 벌말로 오시면 저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아요. 이제 돌아가 야겠어요. 서방님, 안녕히 계세요. 저 때문에 빨리 오시느라, 식사를 거르시면 안 돼요. 천천히 오세요.” 그러나 금봉은 차마 뒤돌아 서지 못하고 북녘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한 채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련하고 쓸쓸해 보이던지 갑돌은 그만 착잡한 생각에 우울해 졌다. 그녀는 갑돌이 지금까지 봐왔던 청순한 금봉이가 아니었다. 지아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양처(良妻)이며 열녀(烈女)였다. ‘금봉이 집으로 가려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가만히 보니 금봉이 행동이 무척 굼뜨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걸? 정말 아이를 가진걸까? 아니야. 내가 잘못 보았을 거야. 금봉이 절대 그럴 애가 아 니야. 내가 오랜 세월 지켜보았지만 절대로 그럴 애가 아니야. 난 금봉이를 믿어. 그러나, 그러나 만약 그 박도령이 과거에 떡하니 급제해 벌말에 나타나면 난 뭔가? 나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건가? 그리되면 나는 마을에서 바보 천치라는 소리를 듣게 될 텐데. 좋아하는 사 람을 곁에 두고도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정말로 바보로구나. 아아, 답답해.’ 갑돌이 숲 속에서 금봉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고 있을 때 그녀는 이등령을 뒤로하고 마을을 향해 내려가려고 하였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은 미끄러워 걸을 때 때문에 조심해야 했 다. 악-. 금봉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갑돌이 비명소리가 난 곳을 보니 그녀가 눈길에 미끄러져 길가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앗, 저런-. 안 돼. 안 돼.” 갑돌이 숲속에서 뛰어 나오며 금봉에게 달려갔다. “금봉아, 금봉아, 괜찮니?” 갑돌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금봉이 크게 놀랐다. “갑돌아, 여긴 어떻게?” “바보야, 그러게 혼자 여길 왜왔어. 큰일 날 뻔 했잖아. 다리를 삔 것 같은데?” 아야 -. 갑돌이 금봉의 발목을 만지자 비명을 질렀다. 갑돌이 버선을 위로 올리니 금봉의 발목 위 부위가 금방 부풀어 올랐다. “큰일이다. 발목을 삐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금봉은 갑돌의 도움을 받아 눈구덩이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어서, 내 등에 업혀. 빨리 집에 가야해.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거야. 어서 업혀.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로 내려가자.” “아냐, 그냥 걸어볼게.” 금봉이 일어나 한 발짝 떼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안 돼. 벌말까지 삔 발로 어떻게 간다고. 어서 업혀.” 갑돌이 넓적한 등을 금봉에게 들이 밀자, 그녀는 할 수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그런데 갑돌아.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내가 넘어지자마자 네가 달려왔느냐고?”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네가 이등령으로 향하는 걸 보고 아무래도 너 혼자 가는 걸 그냥 두고 갈수 없겠더라고. 그래서 네 뒤를 따라왔었어.” “그랬구나. 고마워. 갑돌아, 너, 아직도 나 좋아하니?” “…….” “나, 안 좋아하지?” 금봉이 다시 물었다. “하늘만큼 땅만큼 너를 좋아해.” “정말이니?” “그럼, 정말이지. 너를 좋아하니까 걱정이 되어서 여기까지 따라왔지. 안 그러면 뭐 하러 왔겠니?” 갑돌의 응답에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난, 여기서 얼어 죽을 뻔 했구나.” “그런데, 금봉아. 여긴 왜 온 거야? 추운데 여기 왜 온 거냐고?” “…….”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금봉이 갑돌의 등에 업혀서 박달이 주고간 옷깃을 입에 물고 우물쭈물 하였다. “갑돌아, 미안해. 박달님 걱정이 되어서. 여기 왔어.” “그 도령하고 장래를 약속했니?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 금봉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금봉아, 우리 어릴 때 여기 자주 왔었지?” 갑돌이 얼른 화재를 돌렸다. “그래, 칡 캐러 오고. 진달래 꽃잎 따러오고. 송편 만들 때 쓰는 솔잎을 따러오고. 자주 왔었지. 이젠 추억이 되었구나.” “금봉아, 그런데 너 어디 아프니?” “아니? 왜?” “아냐, 아무것도. 네가 몸이 많이 불은 것 같아서…….” 갑돌이 참고 있던 것을 물었다. “어머, 남자가 별걸 다 묻네.” 갑돌이 금봉을 업고 내려오면서 이대로 멀리 멀리 도망가 금봉이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상상을 하였다. “나 꽤 무겁지?” “아냐, 괜찮아. 벌말까지 얼마든지 갈 수 있어.” 갑돌이 붉은 치마에 감춰진 처녀의 둔부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와 사이가 가까워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금봉아, 예전부터 너에게 장가드는 꿈을 꾸고 살아왔거늘. 그런데, 그런데 그 꿈이 산산 조각난 것 같아. 억장이 미어져 못 견디겠어. 너, 나랑 부부가 되면 안 되겠니? 요즘 들어서 네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아.” 갑돌이 금봉을 업고 걸으면서도 침통한 얼굴이었다. “미, 미안해…….” “금봉아, 이제라도 마음 돌리고 나한테 오면 안 되겠어?” “미안해. 되돌릴 수 없어. 내가 너무 멀리갔어. 난, 난 우리 박달님에게 마음을 주어 버렸어. 이제는 나도 내 마음을 통제하지 못 하겠어.” 금봉의 말에 갑돌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꺽꺽거렸다. “바보같이. 사내대장부가 울긴……. 갑돌아, 울지 마.” “싫어. 너 말고 그 어떤 여자도 싫다고.” 갑돌의 흐느끼는 소리에 금봉의 가슴이 아려왔다. “미안해. 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내 마음을 박달님이 몽땅 가져가 버렸어.” “다시 되찾아 오면 안되니?” 갑들은 이제 훌쩍거리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울지 마. 남자가 함부로 눈물을 보이는 거 아니랬어.” 그는 금봉을 업고 산길을 내려오면서 계속 흐느꼈다. 어쩌면 지금이 그녀에게 자신의 속내를 고백할 수 있는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갑돌의 가슴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해가 지고서야 금봉은 갑돌의 등에 업혀 간신히 집에 올 수 있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박달이 아무리 소리쳐도 응답이 없었다. “내가 한양의 어느 알 수 없는 골목길에서 동사(凍死)하는가 보다. 어쩌다 내 인생이 불쌍하게 되었을꼬.” 박달이 서러워 큰 소리로 울면서 속의 울분을 토해냈다. 구덩이에 빠져서 넋을 놓고 울다보니 구름 사이로 반달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박달을 측은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은 그에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서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달님, 우리 금봉이, 우리 금봉이 잘 있지요? 나는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되어 한양의 알 수 없는 곳의 눈구덩이에 빠져 있답니다. 제가 이 구덩이에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박달이 큰 소리로 울며, 달에게 애원하였지만 달은 구름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조용히 서천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내가 젊은 나이에 객지에서 강시(殭屍)가 되겠구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가야해. 여기서 잠들면 얼어 죽을 거야.’ 박달이 이리 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등과 다리에 통증이 심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휘이익 -. 박달이 아무리 불러도 차가운 바람소리만 들려 올 뿐 누구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점점 몸이 얼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구덩이 안에서 꼼짝없이 얼어 죽고 말 것 같았다. 박달은 있는 힘을 다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누구 없어요? 사람이 구덩이에 빠졌어요. 사람 살려요.” 그러나 바람소리만 들려 올뿐 인기척은 없었다. ‘아, 천지신명님, 이 가련한 박달이를 살려주세요. 달님, 저 좀 살려 주세요. 경상도 풍산에서 올라온 박달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안 됩니다. 저를 기다리고 어머니와 금봉이를 위해서라도 저는 살아야 합니다.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기진맥진한 박달이 혼자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몸은 이미 꽁꽁 언 상태였고 피곤과 수마(睡魔)가 수시로 달려와 그를 괴롭혔다. 잠이 들면 동사(凍死)하게 되고 날이 밝아 지나가는 행인에게 발견되어 관아에 신고 될 것이다. 박달은 자신이 얼어 죽는다는 생각에 이르자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내면서도 계속해서 ‘사람 살려’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지금 이렇게 처참한 신세가 된 것은 금봉 이를 두고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었기 때문이야. 내가 천지신명님 눈 밖에 나서 천벌을 받는 거라고. 세상에 누가 나의 이런 처지를 알아줄까. 과거에 낙방하고 아지에게도 배신을 당한 이 처참하고 불쌍한 신세를 누가 알랴. 나는 여기서 얼어 죽어도 싸다.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고, 자승자박(自繩自縛)이야. 종두득두(種豆得豆)이기도 하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이전에 장원급제한 응시생들의 시관을 흝어보아도 내가 제출한 시권(試券)이 결코 그들이 낸 시권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낙방이라니. 하늘과 땅이 나를 쓸모없는 놈으로 보고 있음이야. 아니면 아직은 내가 세상에 쓰일 때가 되지 않은 것인지. 차라리 이럴 바에는 여기서 얼어 죽는 게 편할지도 몰라. 여기서 강시가 된다면 나는 현실도피할 수 있어 좋지만, 이 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와 금봉은 어찌되는 것인가. 아아, 죽을 수도 없구나. 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 정신 차려야 해. 그렇지, 노래. 노래야. 잠들지 않으려면 노래라도 불러야 해.’ 아리랑 아리랑 아라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요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 박달은 죽음보다 무서운 수마(睡魔)에 좇기면서도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불렀다. 주먹으로 가슴을 때리거나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동장군(冬將軍)과도 싸워야 했다. 그가 수마나 동장군에게 패하면 바로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아야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 끊어질 듯 하다가 겨우 지속되고 있었다. 박달이 죽을힘을 다해 아리랑을 불렀다. 그때 가까이서 사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요?” 구덩이 위로 두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 살려요. 미끄러져 눈구덩이에 빠졌어요. 저 좀 살려 주세요. 구덩이에 떨어지면서 다쳐서 꼼짝을 할 수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박달을 비몽사몽간에도 사려달라고 소리쳤다. 사내들은 구덩이안을 살폈다. “잠시만 거기 있으슈.” “고맙습니다. 천지신명님, 달님, 고맙습니다.” 박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두 사내가 장대를 내렸다. “자, 그 장대를 꼭 잡으슈.” “고맙습니다.” 박달이 언 손으로 간신히 장대를 잡고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하다 그 구덩이에 빠졌수?” 차림새를 보니 두 사내는 방망이를 들고 오랏줄을 허리 찬 것으로 보아 순라군이 틀림없었다. “저 언덕을 올라가다 그만 미끄러져 눈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우린, 한성부 소속 순라군이오. 어디를 가려던 참이었소?” 순라군 한사람이 박달의 차림새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들은 초췌한 모습의 박달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저는 경상도 풍산에 사는 박달이라 합니다. 주막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이 근처에 주막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우리가 데려다 주지요. 남산골 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주막이 하나 있소. 같이 갑시다.” 박달은 야경꾼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주막에 들어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봉놋방은 서너 명의 사내가 코를 골며 새우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찌나 발고랑 내가 심하게 나는지 코를 틀어막고 잠을 자야 할 판이었다. 박달 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새우잠을 청해야 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