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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7편은 불의한 세상을 사는 성도에게 주시는 위로와 권면입니다.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롭고, 우리는 그런 일로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일로 불평과 시기를 하지 말라고 여러 번 권면합니다(1). 그들은 풀처럼 베임을 당하고 쇠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 성도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3).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불평이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십니다(4). 성도의 몫은 순종이고 그 결과를 이루심은 하나님의 몫입니다(5).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기 백성의 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6). 그러므로 성도는 불평하지 말고 그날을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7~8). 믿음은 언제나 인내와 함께 일합니다. 불평과 분노는 악을 이룰 뿐입니다(8).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실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9).
2. 악인은 한때 대단히 번성해도, 결국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입니다(10,20,35~36,38). 의인이 오늘 잠깐 힘들어 보이더라도, 궁극적으로 온유한 자, 성도, 의인이 땅을 차지하게 되고 최후에 웃는 자가 될 것입니다(11,18~19,22). 그러니 의인의 작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습니다(16). 이 말씀에 동의하시나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불평이 사라지고 자족을 배울 것입니다. 악인의 날이 곧 다가옴과 함께(13) 온전한 자는 자기 기업의 영원함을 볼 것입니다(18). 모든 것을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23). 의인은 때로 넘어지지만 결코 엎드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손으로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24). 다윗은 노년에 이 시를 썼을 것으로 보이는데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25). 선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말씀은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성도들에 대한 묘사입니다(27).
3. 무엇이 의인, 즉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인된 삶을 살게 된 성도로 하여금 복을 얻게 합니까? 그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31).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있는 자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 순종하여 사십시오(34). 하나님은 성도를 악인에 손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건지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40). 잊지 마세요. 의인의 작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불평과 시기를 그치세요. 만사를 성취하실 하나님을 바라고 그를 기뻐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세요. 자기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의인의 고난, 성도의 고난은 영원하지도 않고, 결코 길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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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을 부러워하면 진다(1-20절)
오늘 본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른 설명이 없기 때문에 어떤 배경에서 지어졌는지,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고 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는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땅의 역사를 신비하게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25절에서 다윗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받거나, 그 후손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시편은 다윗이 인생을 많아 산 후에, 삶을 돌아보고서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신뢰해야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교훈과도 같습니다.
또한 이 시편은 각 절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등장하는 알파벳(답관체) 시편입니다. 알파벳 시편은 전체 8편이 있는데, 9-10편, 25편, 34편에 이은 4번째입니다. 5번째는 111편입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20절은 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즉 악한 사람에게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는 것은 다윗도 그들 때문에 불평할 일이 많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평하다’는 ‘속에서 불이 나다’는 의미입니다. 즉 ‘속에서 천불을 내지 말라’는 의미이자 ‘화병(火病)이 들지 말라’입니다. 또한 ‘시기’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는 감정’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시기한다고 하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그 불의를 행함의 결과로 나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된 것을 부러워하는 것일 것입니다. 악을 행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향해 불평과 시기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은 ‘풀’과 같이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그들이 누리는 것이 생각만큼 길지 않습니다. 순교자기념관에서 섬기는 동안 풀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것이 뽑히거나 잘려서 어떻게 되는지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풀들은 다른 화초보다 훨씬 빨리 자라납니다. 하지만 그래서 빨리 뽑히고 잘립니다. 또한 아무리 파랗고, 아무리 신선하게 보이는 상추나 배추가 며칠만 밖에 두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악인의 끝이 그러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3절부터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개의 명령형 동사가 나옵니다. ‘의뢰하라’, ‘행하라’, ‘머물라’, ‘삼으라’입니다. 다윗이 젊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리에게 가장 먼저 권면하는 말은 ‘여호와를 의뢰하라’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길어질수록 쉽고도 어려운 것이 하나님을 의뢰(신뢰)하는 것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오랠수록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은 너무도 가깝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 내가 가진 것이나 사람을 의지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저 내가 신뢰하는 것들 중에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우리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또한 다윗은 ‘선을 행하라’고 권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바르게 사는 사람,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을 알고 계시고, 그들의 모든 것을 지켜주신다는 것을 중심으로 믿는다면, 그렇게 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땅에 머물고, 성실을 그의 먹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매일 신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은 세상에 살면서 그 의미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은 곧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 4가지 동사를 바르게 행함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자녀다워지게 됩니다.
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속적 가치관이나 자기의 욕망을 기뻐하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또 그 기쁨이 자신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5-6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기억해 주시고, 자신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하나님께 맡기면 빛과 같이 우리를 나타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먼저 우리를 나타내 주시면 맡기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를 자기주인으로 아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악인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명의 길이로도 유한하고, 능력으로도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아무리 많은 것을 쥐고 있을지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놓을 수밖에 없고, 그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1절과 3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34.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는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자,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대표적이 땅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의미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은 ‘영원한 가나안 땅’인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려주심은 의심될 수 없는 진실 중의 진실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것 같고, 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 이유를 13-1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비웃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사람은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은 짓누르고, 의로운 사람은 없애고자 하지만, 우리 속담,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찌르다’는 말처럼 ‘제 칼에 자기가 찔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길게 보면, 바르게 사는 것,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좀 덜 누리고 사는 것이 정말 복입니다. 너무 많이 누리려고 하면, 그 누림이 자신을 찌를 수 있습니다.
의인을 복주심(21-40절)
21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책임져 주시는 지를 말씀하십니다. 23-2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이 두 구절은 30여 년 전에 암송하고서 그 이후로, 생의 여러 순간에 되뇌던 말씀이고, 위로와 격려가 많이 되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걸음을 정하여 주시고, 그 길을 기뻐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때때로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에도 주님께서 나를 붙잡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소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의 결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책임져 주심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25-2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20대였습니다. 그 때에는 의식주(衣食住)가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마온 지방에 사는 ‘나발’이라는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치안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목축한 짐승이나 농사지은 곡식들을 도적들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을 거느린 우두머리가 특정한 지역을 지켜 주고, 양털을 깎는 때에 일정한 보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자기 사람 10명을 보내어서 먹을 것을 받아오게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600명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600명의 가족들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10명이 가져오는 음식은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먹을 최소한의 양식이었습니다. 물론 나발은 음식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다윗을 모욕하는 말을 내뱉고 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처럼 다윗에게는 걸식할 여러 경우들이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 먹을 것으로 인해서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더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행하지 않으셨습니까? 삶에 순간순간에는 부족한 것도 있고,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은 것이 없다는 고백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 폐부 깊은 곳에서 동의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39-4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악한 사람들의 특징은 ‘견고함이 없음’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는 그들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삶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식물에 비하면, 굉장히 뛰어나지만, 유한하고도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삶의 근거를 두는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마음 깊은 곳에 불안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는 의인들은 환난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새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이 영원한 요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의로운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견고한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젊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 있게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 당신들의 길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들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십니다. 당신들이 혹 넘어지나 아주 엎드려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버림을 당하는 것 본 적이 없습니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하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권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의 삶의 목적과 소망이 오직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다윗 자신을 하나님께 묶어 주었고, 자기 뒤에 하나님을 믿을 사람들도 하나님께 묶어주기 위해서 이렇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합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께 매이는 것보다 더 복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뒤에 계속 주님을 믿을, 우리 교회의 다음 세대들도 동일하게 가장 복 있게 사는 것은 그들의 인생의 소망을 주님께 두고, 주님께 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셔서 우리를 우리의 가정과 일터(학교)와 삶의 자리에 심으셨습니다. 그 오늘도 주님을 소망하는 삶을 살며, 주님께 매인 자유인으로 살아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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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앙은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신의 야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내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로다(4절)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참된 신앙은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내 뜻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과는 신앙의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기를 기뻐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죄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5~7절)
나아가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죄를 지으면서도 겉으로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인해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1~2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야욕을 위해 신앙을 빙자하는 자들의 종말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날이 어디까지임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13절의 표현처럼 그들을 향해 ‘비웃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신의 야욕을 위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는”(14절) 자들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11절a)
온유한 자란 9절에 따르면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소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온유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브’는 ‘고통이나 고난을 받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 ‘아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나브’는 고통이나 고난을 받은 결과로 주어지는 성품, 곧 ‘겸손함’ 내지 ‘온유함’을 의미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서 모세가 자신을 가리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표현한 이유는 광야생활을 통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동안 수많은 고난을 거치면서 그의 성품이 다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함을 의미합니다. 즉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릴 줄 아는 것, 이것이 ‘온유함’의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4절)
온유한 사람은 악인이 끊어질 그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무서운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설쳐대는 악인이 제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악인의 날을 계수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악인의 날을 계수하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자신이 사는 날 동안 더욱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 그가 곧 온유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가르쳐주시면서 이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구약의 성도들에게 이 땅은 곧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고, 신약의 성도들에게 이 땅은 하늘에 있는 본향, 천국이었습니다. 온유한 자에게 이 땅이 주어진다는 것은 신앙을 빌미로 자신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진리를 따라 자신의 내적 성숙을 이루어가는 자들에게 천국이 예비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교우님들, 우리의 시선을 우리 주변의 상황이 아닌 우리의 내면으로 옮겨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 때문에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신뢰하며 오늘 하루를 인내하십시다. 환난 때에 우리의 요새가 되어주시는 여호와께서 또한 기꺼이 우리의 구원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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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7편은 노년의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면하는 것 같은 내용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1-2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생기는 불평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땅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 ‘페이퍼컴퍼니’입니다. ‘종이회사’, 즉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회사를 가리킵니다. ‘페이퍼컴퍼니’는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기 때문에 주로 기업들이 세금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운영됩니다. 그런데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 역시 가능한 한 적은 세금을 내면서 그 재산을 양도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연극배우의 남편이나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에 대한 기사는,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한 푼이라도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집안에서도 코트를 껴입고 지내거나, 여름이면 에어컨 사용을 줄이기 위해 입금할 돈도 없는데 은행에 가는 서민들에게 이런 뉴스는 씁쓸함을 넘어 공분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화내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린 왕이어서 이런 말을 권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처절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억울함이 무엇인지, 원통함이 무엇인지, 몸서리쳐지는 분노가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다윗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교훈을 한 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3절)
개역개정역에는 ‘여호와를 의뢰하라’, ‘선을 행하라’,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아라’고 하는 세 개의 명령형이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이 구절은 네 개의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라’,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라’, ‘성실함을 먹을거리로 삼아라.’
1. 여호와를 신뢰하라
다윗이 들려주는 인생교훈 첫 번째는 ‘여호와를 신뢰하라’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 주변에 늘 좋은 일이나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인간들이 다양한 욕망들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다양한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다툼이나 분쟁, 심지어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분쟁은 ‘소유’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14절)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악인’은 복수형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행위가 정직한 자’는 단수형으로 나와 있습니다. 즉 악한 무리들이 힘없는 한 사람을 노략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과거 다윗이 살았던 고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약하면 먹히고 강하면 잡아먹는 ‘힘의 논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논리 속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권면합니다. 다윗 역시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사람이었습니다. 숱한 전투를 치른 다윗은 ‘힘의 논리’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닌 군사력으로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울에게 반역의 칼을 겨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힘의 논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칼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2. 선을 행하라
다윗의 인생교훈 두 번째는 ‘선을 행하라’입니다. 자신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던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18절)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신다’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이 세상을 사는지 하나님께서 모두 기억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오직 사울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사울의 죽음 이후에도 사울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에게 바른 삶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3. 땅에 거하라
세 번째 교훈은 ‘땅에 거하라’입니다. ‘땅’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그가 사는 ‘현실’ 속에서 다듬어졌습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집안의 막내인 그에게 맡겨진 일은 들에 나가 양떼를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양떼를 치며 그는 초원의 풀이 언제 자라고 시드는지 알았습니다. 훗날 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이 풀과 같이 지나감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2절)
악인들이 아무리 번성한다 할지라도 그들 역시 인생에 지나지 않음을, 그래서 결국 풀과 같이 속히 사라져 없어질 것임을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윗은 5절에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라고 권면합니다. ‘맡기라’는 말은 돌을 굴리듯 ‘굴리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에 전쟁을 할 때 적이 오는 계곡에 매복해 있다가 적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계곡 위에서 커다란 돌을 굴리는 것이었습니다. 숱한 전쟁을 치렀던 바로 그 현장에서 다윗은 커다란 돌을 굴려버리듯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윗이 딛고 살았던 그 땅은 자신의 믿음이 세워지는 현장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실험실이나 강의실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믿음이 세워지고 자라게 하십니다.
4. 성실함을 먹을거리로 삼아라
마지막 교훈은 ‘성실함을 먹을거리로 삼아라’입니다. ‘성실함’이란 어쩌다 한 번 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실은 꾸준함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목동이었을 때 다윗은 넓은 광야에 늘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지만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들이 양을 물어갈 때도 그는 목숨을 걸고 그 맹수의 입에서 양을 구해내었습니다. 그러한 성실함이 배어있었던 다윗이었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맡겨주셨습니다.
37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지어진 시입니다. 시를, 알파벳 순서라는 정형화된 틀 안에서 전개하는 이유는 교육을 위함입니다. 시편 37편을 알파벳 순서로 외워가던 아이들이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 '알렢' 부터 마지막 글자인 '타브'까지를 순서대로 읊으며 익혔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의인과 악인의 삶입니다. 시편 37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며, 의인의 길을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본문에 따르면,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 사람입니다.(21절)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 혀는 정의를 말합니다.(30절)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고,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습니다.(31절) 이와 반대로 악인은 꾸었으나 갚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의인 곧 정의를 말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이를 살해하려고 기회를 찾습니다.
어려서부터 시편 37편을 익숙하게 읊조리며 자라온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 한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고, 그 중에 의인의 길을 선택하라고 배워왔는데, 현실 속에서 의인으로 살려하니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청년이 되어 마주한 현실 속에서 악인들은, 35절과 같이 그 세력이 커서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의 무성함과 같았으나, 의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의의 길을 따르면, 한결같은 대로가 펼쳐지고 흔들림 없이 살 줄 알았는데, 의인을 넘어뜨리려는 세력이 무성한 현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일과 정의를 말하는 일과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일은, 세상으로 부터 비난을 받고, 심지어 살해의 위협을 받기까지 합니다. 의인의 길은 고독한 길이었고, 넘어지기도 하는 길이었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시편37편을 익숙하게 읊조리던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이러한 현실을 마주할 때면 한 가지 질문이 생겼던 것입니다. 의인으로 살고자 하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그렇게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시편37편은 그들을 격려하며 다시 의인의 길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걸음을 기뻐하시니, 비록 넘어질지라도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24절입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의인이 넘어질지언정 엎드러지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여호와의 손이 의인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의인과 함께하는 '여호와의 손'을 보라고 말합니다. 악인은 끊임없이 의인을 살해하려고 할 것이고, 의인은 위협을 받을 것이나 본문은 그 때에도 의인을 붙드시는 '여호와의 손'을 보라고 합니다. 33절입니다. 여호와는 그를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37편은 의인과 함께하는 여호와의 손을 보고, 오늘 마주한 어려움을 이겨내라고 합니다. 의인과 함께 하는 여호와의 손을 믿는 자만이 오늘 정의를 말하고, 은혜를 베풀며, 여호와의 법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의인과 함께 하는 여호와의 손을 믿는 자만이, 우리의 눈에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고, 피곤에 내 몸이 지쳐있을 때라도,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길을 선택하며(34절)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우님들, 시편37편은 그 때나 오늘이나 의인의 길을 선택하는 삶을 살라 말합니다. 은혜를 베풀고, 정의를 말하고, 마음으로 부터 삶에 이르도록 여호와의 법 따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의인과 함께 계셔서 넘어진 의인을 일으키시고, 악인의 살해 위협에서 지키시는 '여호와의 손을 보라!'고 합니다. 이 새벽 기도의 시간은, 다름 아닌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손을 보는 시간입니다. 다사다난한 하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는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손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기도하실 때,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손 때문에, 손해를 볼지라도 은혜를 베풀고, 손해를 볼지라도 정의를 말하며, 손해를 볼지라도 여호와의 법을 따르는 의인의 삶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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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악자들이 잘되는 세상의 부조리의 문제로 인하여 의인이 실족하지 말 것을 명하면서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임하여 악인이 멸망당하고 의인이 흥왕하게 될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에 근거하는 것으로 의인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1. 행악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
시인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로운 자가 복을 받아 행복한 삶을 누리고 행악자는 징벌을 받아 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행악자의 번성을 인하여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 것은 그들의 번성함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와 같이 쇠잔할 것입니다. 풀과 푸른 채소는 그 수명이 일 년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a.졸지에 황폐케 됨(시73:19)
b.영원히 멸망당함(시92:7)
2) 여호와께 맡기는 삶
시인은 악인의 번성으로 인해 불평하지 말 것을 권하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고 말합니다. 또한 시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명하면서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며 여호와를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의인의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아내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인하여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는 자신도 악의 올무에 빠져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의지하는 삶(사50:10)
3)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의인이 행악자로 인하여 나는 분을 버리고 노를 버려야 하는 이유는 분노의 결과가 행악에 치우치게 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데 분노의 감정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감정입니다. 의인이 악인으로 인해 분과 노를 발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곧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악인에 관한 심판권을 갖고 계시므로 악인으로 인하여 불평하고 투기함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 행위가 됩니다. 시인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악인의 번성함에도 불평과 투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a.미련한 자를 죽이는 분노(욥5:2)
b.주의 의를 이를 수 없는 분노(약1:19-20)
2. 멸망당할 행악자와 승리할 의인(I)
1) 잠시 후에 없어질 악인들
시인은 악인의 악행에 대하여 기술하였습니다. 그들은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악인의 공격 대상은 가난하고 궁핍하여 힘이 없는 불쌍한 자들과 하나님의 법을 따라 순종하며 선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진다고 시인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악인을 웃으시리니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라는 시인의 진술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할 날이 반드시 있으며 악인의 악행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실 날을 세고 계심을 알려 줍니다.
a.징벌의 때가 임함(렘50:27)
b.죄악의 끝 때가 이름(겔21:25)
c.시대가 마치게 됨(단5:28)
2) 승리하는 의인
시인은 의인이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악인은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만족함이 없으나 의인은 적은 소유라 할지라도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또한 악인의 소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사라지게 되나 의인의 소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지켜 주십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완전한 자는 여호와를 의뢰하여 온전히 그의 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악인의 권세와 부는 결국엔 없어지겠지만 의인의 소유와 생명은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덧입니다.
a.생명을 얻게 됨(시21:4)
b.쇠하지 아니하는 기업(벧전1:4)
c.포식하게 됨(잠13:25)
3. 멸망당할 행악자와 승리할 의인(Ⅱ)
1) 악인과 의인의 길
악인은 여호와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악과는 공존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죄가 있는 악인을 미워하시고 반드시 멸망시키십니다. 악인이 여호와의 원수가 되어 의인을 핍박하나 그들의 결국은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질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준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악인이 재난을 당하여 극심한 가난과 빈곤에 처하게 되는 반면에, 의인은 자신의 필요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악인의 특징은 남의 것을 꾸고도 같지 아니하는 것이고, 의인은 거저 주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기에 저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라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의 앞길을 예비하시고 그 길을 가는 동안 항상 동행하시어 인도하시며 실족하여 넘어질 때에 새 힘과 용기를 주시어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a.멸망의 넓은 길(마7:13)
b.걸음을 인도하시는 주(잠16:9)
2) 의인의 영원한 기업
시인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명하면서 그리하면 영영히 거함의 축복을 받을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악을 떠나 선을 행한 의인이 땅에 영영히 거하는 복을 받음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랑하시어 영영히 버리지 아니 하시고 보호하시나, 악인에게는 징벌을 내리시어 그 자손이 끊어지게 하십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 영영히 거함은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땅을 차지함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상속자 즉 자녀로 삼으시어 천국 기업을 물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의인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땅을?상속함(시25:13)
3) 악인과 의인의 말로
시인은 의인에게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고 명하면서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도 말씀했습니다. 또한 악인이 끊어질 때에 목도하게 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날을 소망하며 현실의 어려움과 부조리를 참고 견디어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과 정직한 자는 화평한 자입니다. 화평한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 때문에 불화가 있지 아니한 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의 결국은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일시적인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영원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만이 맛보는 것으로 신앙의 결과이며 성도가 바라는 궁극적인 소망인 것입니다.
a.소망이 있는 의인(잠14:32)
b.꺾임당할 악인(사10:33)
결론
성도는 악인이 흥왕하고 의인이 핍박을 받는 현실의 부조리로 인하여 믿음의 길에서 실족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인내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키며 영적 싸움을 싸워 나갈 때에 하나님 제서 예비하신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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