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엄중한 사명의 위임으로 시작된다(1장). 누가는 베드로(1-5, 9-12장), 스데반(6-7장), 빌립(8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충성을 통해 성령님이 어떻게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셨는지 기록했다(9, 13-28장). 사도의 역할은 끝났지만, 성령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사명을 이어받은 우리의 충성을 통해 성령은 지금도 복음의 역사를 이루신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삶의 목적을 놓치고 산다. 사명을 잊는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내 삶에 두신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오래 기다리고 인내해야 하는 상황에 두실 때, 우리는 그 환경과 상황에 압도되어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사도 바울이 맞은 상황이 그랬다. 그는 성령에 매여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고(20:22-24), 주께서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분명한 뜻을 보여주셨다(23:11). 그런데 현실은 가이사랴 감옥에서 이 년 째 갇혀 있다. 유대인의 호의를 얻고 바울의 뇌물을 기대하며 판결을 계속해서 연기한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되고 이제 베스도가 새 총독이 됐다(24:27). 또 얼마나 긴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할까?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간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신다는 진리와 그 뜻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항상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기 원한다.
1. 하나님이 뜻대로 이루시다(1-12절)
베스도는 벨릭스에 이어 58-62년까지 유대의 총독으로 군림했다. 벨릭스보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1절을 보면 그는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대다수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호의를 얻는 것이 자기 정치 생명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벨릭스, 쿠마누스 모두 유대인들의 반감으로 고발 및 면직을 당했다.
유력한 유대인들(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익숙한 이름 바울이 나왔다(2절). 2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바울을 향한 분노가 그치지 않았다. 바울을 또다시 고소하면서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했다. 왜?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려고(3절). 불법적인 살인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갈망했다.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길 원했지만(9절), 경거망동하진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5절). 바울이 갇힌 곳은 가이사랴고 자신도 곧 그곳으로 돌아가니 함께 가서 정식으로 재판을 하자고 권한 것이다(4절). 베스도는 속전속결로 재판을 열었다. 가이사랴로 내려간 바로 그다음 날(이튿날, 6절).
베스도의 재판 내용은 벨릭스 때와 크게 다를 게 없다. 2년 전에 증인도 증거도 하나 없던 고발자들이 무슨 증거나 증인을 내세울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바울을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였지만, 능히 증거를 대지 못했고(7절), 바울은 더 담대하게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변호했다(8절).
베스도는 바울이 무죄라는 걸 알았다. 후에 그가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을 보라(13-19절). 그는 적어도 바울이 아무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10절,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25절,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하지만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원했다(9절). 그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냐고 물었다(9절).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기를 처음부터 원했다(암살하려고). 그리고 바로 이때 바울의 답변으로 인해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됐다.
바울은 베스도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10-11절).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것은 로마 시민의 특권이다. 오늘날 지방 법원에서 대법원까지 상소할 수 있게 한 것처럼, 로마 제국의 변두리에서 로마 시민이 억울한 재판에 따른 처벌을 받지 않게 하려고 로마에 있는 대법원 앞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했다.
어쩌면 바울은 이전 총독 벨릭스에게도 이 요청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판결을 유보하며 계속 시간을 끌었다. 새 총독 베스도는 어떻게 했을까? 베스도가 배석자들과(법적 전문가들, 고위 관리들)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12절). 길고 긴 2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바울 앞에 로마를 향한 길이 열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신다.
2. 바울이 사명에 충성하다(13-27절)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오랜 법정 공방을 벌였던 바울은 그 긴긴 재판 과정, 오랜 감옥 생활을 어떻게 버텼을까?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혔을까?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 궁시렁댔을까? 아니다. 그는 항상 사명을 잊지 않았다. 상황에 압도되지 않고 주어진 모든 상황 가운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했다.
베스도 앞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 변호를 할 때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만 호소한 게 아니라 복음을 전했다. 베스도가 자신의 부임을 축하하러 문안 온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버니게(13절)에게 한 말을 보라.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19절).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다.
황제의 판결을 요구한 바울은 베스도의 명에 따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잠시 보호받고 있었는데, 그 기간에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만나기 원했다(21-22절). 이튿날 아그립바와 그의 누이 버니게가 위엄찬란하게 등장하는데, 크게 위엄을 갖추고(판타시아스, 화려한 입성, 깃발, 검, 행진, 금으로 된 왕관, 자주색 예복-왕복)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왔다(23절). 반면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초라하게 입장했다(전승: 매부리 코, 짙은 일자 눈썹, 휜 다리).
베스도는 바울이 무죄라고 생각했고,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것엔 변함이 없지만(25절), 황제에게 죄수를 보낼 때 죄목을 밝히지 않고 보내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다(27절). 그래서 유대인 법과 풍습과 문화와 역사를 잘 아는 헤롯 아그립바 2세가(26:3) 바울을 심문하여 상소할 자료를 얻기 원했다(26절).
참고로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 이 무렵 33세의 젊은 왕이었다. 아버지 아그립바 1세는 베드로를 투옥하고 야고보를 처형한 왕이었다. 나중에 교만하여 벌레 먹혀 죽는 심판을 받았다(행 12장).
26장은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의 심문을 받으며 바울이 자기변호를 한 내용이다. 바울은 이때도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베스도와 아그립바 역시 바울의 의도를 분명히 알았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6:28).
바울은 자기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항상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6:29). 그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했다(행 20:26).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을 알았다(고전 4:2).
3. 적용
우리는 사도행전의 결말을 알고 있다. 바울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로마에 이르고 그곳에서도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한다. 계획대로 스페인에 갔을까? 그것이 하나님 뜻이었을까?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바울이 자신의 사명 곧 복음 증거하는 일에 끝까지 충성했다는 것이다(20:24).
바울의 마지막 흔적은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 그가 로마에 두 번째로 투옥됐을 때, 디모데에게 두 번째로 쓴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4:6). 바울은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담대히 고백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상황은 최악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간청하면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딤후 4:16). 초라하고 쓸쓸해 보이는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걸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딤후 4:17).
우리는 바울의 삶을 통해 그리고 본문을 기록하신 성령의 조명하심과 말씀하심을 통해 분명한 진리를 깨닫는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신다는 것이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조금의 실수나 오차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믿는가?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느라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 당신께 위임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사명에 충성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내가 납득할 상황이 될 때, 편안하게 여길 형편이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충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다. 사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광고판이다. 입을 열지 않아도 당신의 삶이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나타내고 있다. 좋은 쪽으로 혹은 나쁜 쪽으로. 당신이 배우자를 대하는 모습, 자녀를 양육하는 모습, 일하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최상위 명령은 바로 주님의 증인이 되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입을 열어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놀라운 일을 선포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어리석도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신뢰하고 맡겨진 사명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이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영적인 눈으로 보고 들은 증인이다. 어떤 환경이, 어떤 상황이 그분을 증거하는 일을 게으르게 만들 수 있는가? 주님의 십자가가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주님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게 하려고 고된 삶을 하지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께서 우릴 만나 “잘했다”는 칭찬을 하실 것을 기대하면서(마 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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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총독 베스도(1-5절)
벨릭스가 물러나고 베스도가 신임 총독이 되었습니다.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들과 시리아인들 사이에 그들의 시민권의 문제로 싸움이 있었을 때, 벨릭스가 그것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 때문에 로마로 소환을 당했으며, 그의 형제 팔라스(Pallas)가 네로 황제에게 간청하지 않았다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해 줍니다.
벨릭스는 자신의 후임자 베스도 총독에게 업무인계를 준비하다가, 단지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울을 2년 동안이나 구금상태로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지만 벨릭스는 바울에게 즉각 무죄를 선고하여,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바울에 대한 판결을 바르게 매듭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에 민원을 내었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출셋길에 걸림돌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임하기 전에 도리어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선심을 쓰기 위해, 바울을 다시 결박하여 투옥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신임 총독 베스도는 전임 총독 벨릭스보다 판단력과 지도력 등에서 훨씬 뛰어났었다고 합니다. 그는 부임하고서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삼 일 후’는 ‘삼 일째’를 가리키는 유대적 어법입니다. 즉 신임 총독이 부임한 날이 첫째 날이고, 이튿날이 둘째 날이며, 그다음 날이 삼 일째가 됩니다. 즉 가이사랴에 도착한 신임 총독 베스도는 이튿날 하루만 쉬고 예루살렘 현지 시찰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벨릭스와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에 총독관청은 가이사랴에 있었지만 예루살렘이 유대의 수도이자 종교적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신의 업무를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 그곳을 파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취임하자 올라갔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는 약 2,240km나 되었습니다. 당시에 비행기나 기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자동차를 타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인데, 지금과 같은 조선술도 없었기에, 배를 타고서 한 번 만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범선은 나무를 요철 형태로 만들고, 그 사이에 아교를 발라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장거리를 갈 수 없었고, 계속 배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그래서 범선을 타고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 가려면, 최소한 열흘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로마에서 황제의 명을 받은 신임 총독 베스도는 최소한 열흘 이상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서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여행길은 고단함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이사랴에 도착한 베스도 총독은 그다음 날 단 하루만 쉬고, 곧바로 가이사랴에서 약 60마일, 약 100km나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그 정도로 참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일단(一團)의 유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 총독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유는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이후의 자신의 통치 행위에 유력한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디딤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람들도 신임 총독과 친분을 두텁게 해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신임 총독을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높은 사람들(70명의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이 신임 총독 베스도를 만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바울을 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은 베스도 총독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시켜 예루살렘에서 재판해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요구했던 것은 그들이 말한 대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사이에 자객들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길에서 바울을 죽여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은 유대 사회의 최상층의 사람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과 개신교 각 교단의 총회장들 합한 것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베스도 총독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바울을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사회 원로로서의 품격도 없었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서의 신앙 인격도 없었습니다.
(4-5)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 신임 총독은 상당히 신중하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유력한 사람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하게 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무사히 감금되어 있고, 자신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가이사랴로 복귀할 것이기 때문에, 혹 바울을 고발하기를 원한다면 자신과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그곳의 법정에서 바울을 정식으로 고발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바울의 변론(6-12절)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베스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여드레에서 열흘 정도 머문 뒤에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가는 시간까지 다 합해서 열흘 정도 소요된 것으로 보입니다. 총독이 새로운 임지에 부임해서 그 지역의 유지(有志)들에게 성대한 잔치를 벌이라고 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권세가 있는 사람인지를 과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 총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100km나 되는 먼 거리를 가서 열흘 동안 시찰하고 왔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배스도 총독이 가이사랴로 돌아갈 때 대제사장들과 유력한 사람들도 그 먼 거리를 동행했습니다. 가이사랴 법정에서 바울을 고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이사랴로 돌아간 베스도 총독은 다음날 재판석에 앉아 바울을 호출하였습니다.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어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목록은 ‘전염병’,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성전을 더럽게 하려는 자’ 등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24장과 25장 사이에는 2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2년 동안 바울을 고발할 목록을 얼마나 열심히 찾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바울을 궁지에 몰아넣고 중형을 선고할 수 있는지 수없이 계략을 꾸미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고발 내용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로마제국의 실정법이나 유대인의 종교법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고발은 거짓 모함이었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본문에 ‘아니하였다’가 한 번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세 번이나 나옵니다. 즉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서 죄를 짓지 않았고, 성전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 대해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도무지’라는 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답변을 아주 간단하게 했지만, 이것이 바울의 네 번째 재판입니다. ①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고 있을 때 소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붙잡혀서 천부장과 군중들 앞에서와 ②유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③벨릭스 총독 앞에서 그리고 ④지금 베스도 총독 앞에서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온 후에 2년 이상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이 참 지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택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런데 2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갇혀 있기만 합니다.
우리의 생도 참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문득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에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누가를 통해서 최장편 성경인 누가-행전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이 기간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기간에 누가는 이 지방, 가이사랴에 살던 빌립 집사를 찾아가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사도행전 1-12장을 기록하였을 것이고, 바울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로마까지 동행함으로 사도행전의 13장에서 마지막 장까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또 여러 사람의 기록과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가장 긴 복음서인 누가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소와 바울의 변호를 통해서, 베스도 총독도 바울이 무죄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를 석방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물었습니다.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입회하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전임 총독 벨릭스처럼 비열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자리에 연연해하는 관리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의 어이없는 제의에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베스도 총독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10-12)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바울은 베스도 총독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카이사르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말했습니다. 황제에게 직접 상소하는 것은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신문고 제도’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만 요청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였습니다.
바울이 황제에게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석방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막다른 골목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남은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종교재판을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로마로 가서 황제의 재판을 받든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사실 황제에게 호소한다고 해서 풀려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때의 황제가 네로(Nero)였습니다. 네로 황제는 치세 초기 5년간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의 도움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폭정과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할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로마행을 택한 것은 2년 전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들었던 주님의 말씀,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로마행을 택한 것은 석방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과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의 높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도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게 나타날까요?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을 잊고 종교적인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사도로 삼아주신 주님의 은총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의 전 총독인 벨릭스가 사도 바울에 대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기에 바울은 감금상태로 2년이라는 시간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앞으로의 결과를 전혀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일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분노한 대적들 앞에서 자신을 향한 그들의 거짓된 고소들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일은 그동안 수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왔던 일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특별한 것도 없었고, 입증할 수도 없는 비난들만 늘 똑같이 되풀이할 뿐입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로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당시 황제에게 상소를 했다고 해서 황제가 직접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니고 황제 직속의 최고 법정에서 상소를 다루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의 요구에 따라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 했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할 바울의 죄가 뚜렷하지 않기에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쓰기가 참 애매한 겁니다. 고민하고 있던 베스도는 며칠 후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베니게의 방문을 받고 명분을 찾기 위해 일종의 청문회를 소집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방문 (13-22절)
(13-15)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팔레스타인의 북동쪽 지역을 다스리는 서른세 살의 젊은 왕인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벨릭스의 뒤를 이어 새로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를 공식적으로 문안하기 위해 방문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를 가리킵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후손으로 주전 40년부터 주후 100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했던 헤롯 왕조의 마지막 왕입니다.
아그립바 2세의 증조부인 헤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아그립바 2세의 큰아버지인 헤롯 안티파스는 실제로 예수님의 재판을 맡아 예수님을 직접 만났지만, 그분이 진짜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에 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에 그 아버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것처럼, 아그립바 왕은 문제가 있는 성격들을 지닌 권력자들의 후손으로 유약하고 실수투성이인 왕입니다. 함께온 버니게는 아그립바 2세의 누이입니다. 버니게는 서른 살 때 그녀의 삼촌인 헤롯 칼키스와 결혼하였다가 나중에 칼키스가 죽었고 여러 남자들과 결혼을 하고 염문을 뿌렸습니다. 지금은 버니게가 그의 동생인 아그립바 2세와 함께 지내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헤롯 가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가문의 조상들은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고 악한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떤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 늘 고민하며 노력해야겠습니다.
헤롯 왕조와 로마 총독은 각자의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대개 총독은 군사력에 대한 권세, 헤롯 왕조는 성전과 제사장 제도에 대한 권세를 쥐고 있습니다. 헤롯왕조는 성전을 다스리는 권세를 갖고 성전의 보물들도 좌지우지했고, 황제에게 권한을 받아 대제사장의 임명과 해임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로마의 권세 아래 있었지만, 총독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의 권세에 더 직접적으로 복종해야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헤롯 왕조와 로마 총독의 관계는 끈끈하게 서로 잘 협력하는 관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헤롯 안티파스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서로 주고 받았던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의 방문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머물게 되었으며, 베스도에게는 바울의 일을 의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후손인 아그립바는 그들의 종교적인 정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바울의 소송을 해결하는 일에 도움을 줄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그 소송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베스도는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였다는 사실, 그들이 바울을 처벌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베스도는 그 소송의 세부적인 내용들까지 아그립바에게 모두 말합니다.
(18-20)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베스도가 처음에는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해 뭔가 대단히 악한 죄에 대한 고소가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자기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들,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것만 있었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별다른 죄에 대한 혐의가 바울에게 없기에 벨릭스 총독때부터 이렇게 오랫동안 문제를 끌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될지 참 난감해 합니다.
베스도는 그 재판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열고자 했던 이유도 꼭 영향력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압력 보다는 예수라 하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그 사건이 갖는 종교적인 특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1-22)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기 때문에 로마로 보낼 수속과 절차를 밟는 동안 감옥에 그대로 갇혀 있다고 바울에 관한 이야기의 결론을 맺습니다.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베스도는 바라던 결과를 얻었습니다. 아그립바가 직접 바울의 말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바울과 아그립바는 다음 날 접견하기로 일정이 잡혔습니다.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법과 관습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기억한 베스도는 가이사 황제에게 보내야 되는 일종의 법적인 서류를 준비해야 했기에 이제는 바울에 대한 특별 청문회를 개최하게 된 겁니다.
청문회의 개최 (23-27절)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그 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신임총독 베스도와 공식적인 방문을 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왕의 신하들, 천부장들, 그 도시의 유지들과 바울입니다. 가이사랴에는 5개의 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천부장은 1,000명의 보병들을 지휘하는 로마의 보병 사령관입니다. 당시 가이사랴에서 힘이 있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거의 다 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들어왔다고 묘사하는 부분은 참 역설적 입니다. ‘위엄’이라는 말은 원어로 ‘판타시아스’인데 ‘외형적인 과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판타지-fantasy(공상, 환상)’라는 단어가 유래한 것으로 볼 때, 이런 ‘외형적인 과시’가 환상적이고 참으로 덧없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화려하게 꾸미고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그 곳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짜 왕족은 사도 바울뿐입니다. 바울이야말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화려한 옷을 입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크게 위엄을 갖추는’ 삶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2년 동안 갖혀 있는 삶을 살아 겉으로는 초췌하고 볼품없지만, 마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겠습니까?
(24-25)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가이사랴의 법정을 책임지고 있던 로마 총독 베스도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베스도는 예루살렘과 여기에 있는 유대의 모든 무리가 바울의 죽음을 요구했지만, 본인이 판단하기에 바울을 죽일만한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선포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하고 투옥시키며 기소하는 무리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황제에게 상소한 상태였기 때문에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26-27)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낼 자신의 보고서에 아뢸 것이 없으므로 몹시 당황스럽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그는 고소내용들을 상세히 적은 보고서를 준비해서 네로황제에게 상소할 때 함께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인 사람들에게 그런 이유를 설명한 뒤 베스도는 바울을 심문해 주기를 바란다고 언급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 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잘 아는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베스도가 바울의 죄목을 보고서로 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전임자인 벨릭스처럼 바울을 면밀하게 조사했으나 그의 삶에서 잘못한 일들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서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법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범한 적이 없었기에 숨거나 두려움에 떨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의 바울을 보면 원수들로부터 정밀조사를 받았지만, 도무지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다니엘 6장의 다니엘이 생각납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을 누군가가 청문회를 통해 다 털어서 본다면,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습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서 다양한 실수들과 불법적인 행위들, 일관성 없는 모습들을 찾아내어 목록을 만든다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라는 ‘코람데오’의 정신을 생각하며 어디서든지 더욱 정직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 쳐야겠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통해 삶 속에서 전해야만 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흠잡히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에 흠잡힐 만한 일들이 없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깨끗한 양심과 정결한 삶 가운데 잘 간직되어 있다가 ‘인격’이라는 통로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먼저 불러 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금도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답답한 상황 속에 처해있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 주신 주님을 기억하고 바르게 순종하며,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증인으로, 흠 없는 성도로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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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네로가 황제로 있던 당시 벨릭스에 이어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먼저, 1-5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서 볼 단어가 있습니다. ‘호의’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카리스’로 24장 27절에서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do the Jews a favor”로 사용되었고, 25장9절에서도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do the jews a favor”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 ‘카리스’의 주격이 하나님일 경우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값없이 주신 선물을 뜻하는 은혜가 되지만, 그 주격이 인간일 경우 이는 ‘호의’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호의는 무엇입니까? 호의는 인간이 제도권 안에서 권력을 행사할 경우 청탁을 통해 주고 또는 받는 것입니다. 반면, 은혜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지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권력을 위임받은 베스도 총독에게 청탁하여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이 무엇입니까? 지난 2년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베스도 총독에게 청탁할 것들, 논의할 것들이 많았을텐데,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먼저 꺼낸 것을 보면, 지난 2년간 그들의 바울을 향한 얼마나 분노와 노여움이 컸는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무사히 감금되어 있으니, 그를 고발하고자 하면 자신과 함께 내려가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더 높고 강한 권력을 가진 유대의 총독 베스도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호의’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카리스’ 즉, 은혜로 여기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아무런 ‘호의’를 더 높고 강한 권력자를 찾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24장26절에 보면,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고 돈을 받을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차례도 ‘호의’를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주격이 되는 삶,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인생을 채워가는 삶을 살아가는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6-12절을 보면,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약 8-10일쯤을 보내고 가이사랴로 내려갑니다. 이튿날 바울을 불러 재판장에 세우자, 예루살렘에서 함께 온 유대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여러 가지 죄목들을 걸어서 고발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23장1절에서 공회앞에서 자신을 변호했던 것처럼 또, 24장16절에서 총독 벨릭스 앞에서 변호했던 것처럼, 동일하게 25장 8절에서도 변호합니다. 8절입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그리고 세상법적으로도 전혀 죄가 없다고 변론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도 유대인들의 마음, ‘호의’, 즉, ‘카리스’를 사람들로부터 얻기 위해 바울에게 묻습니다. 9절입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그러나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도바울은 분명한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값없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로마까지 갈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9장15-1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바울은 3차례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인들의 사도로 많은 교회들을 세웠고, 이제 임금들 앞에 서서 복음을 전했으며 이제 로마황제에게 까지 갈 것을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23장 11절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공회에서 증언할 때 이미 주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이 음성이 바로 사도바울이 담대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마침내 사도바울은 죄목을 찾지 못하고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 앞에서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호의’로 해결하려 했던 베스도 총독 앞에서 단호하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11절 하반적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 하노라”
즉, 로마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 앞에 당당히 서겠다고 단호하고 담대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나는 카리스를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호의‘를 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카리스‘로 인도 받는 사람인가?’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호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가 아니면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 주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를 얻기 위해 ‘호의’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사명’을 위해 ‘상황과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사람들이 지난 주일에 주신 말씀처럼 ‘교회에서 배운대로’ 결정하고 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요 참된 세례교인인 것입니다.
인생은 절대로 짧지 않습니다. 넘어야할 막연하고 분명치 않은 수많은 인생의 고개고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전적으로 값없이 은혜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고, 매순간 순간마다 ‘카리스’로 사명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벨릭스에 이어 신임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는 부임하자마자 매우 골치 아픈 사건 앞에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내용을 접한 베스도 신임총독은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총독의 임무는 물론이거니와 유대 지역의 분위기와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도 내리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자신이 가아사랴로 가야 하니 그곳에서 재심판을 하자고 전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의 말대로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온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중대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했으나 베스도는 바울의 범죄사실을 입증하지는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을 풀어주지 못하는 배경은 신임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바울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 신임총독 베스도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난감한 문제를 상위법정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유대인과 바울 간에 고소와 변론에 대한 상소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유대 종교와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찾아왔습니다. 베스도에게는 지금 자신의 상황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A.D. 48년에 삼촌이 다스리던 레바논과 안틸레바논 사이의 작은 왕국을 이어받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의 대제사장 임명권과 회당의 통치권도 로마로부터 위임을 받아 가지고 있었으며, 53년에는 빌립과 루사니아가 다스리던 지역을 포함하는 더 큰 영토를 받기도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친로마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새로운 로마 통독이 부임할 때마다 본문처럼 예방하여 경의를 표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동석한 버니게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큰 딸이며 남매가 함께 베스도 총독을 찾아온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자연스럽게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 사건에 대해 자문을 구합니다. 부임 후 첫 번째로 맞이한 사건을 잘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고,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에게 자신의 유능함을 알리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내용들은 로마법에 근거한 처벌을 내리기에 충분한 사항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고소하는 내용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이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내용임을 아그립바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18절과 19절입니다.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사실 베스도 총독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상황 상 유대인들의 요청을 로마법과 상관없다하여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부임하자마자 첫 사건에서 유대 지도자들의 의견을 마냥 무시하기에는 그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로마법상 아무런 죄가 보이지 않는 바울을 유대인의 손에 죽게 버려두는 것도 자신의 명예에 금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25장 9절과 20절입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면 죽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을 거절하고 로마로 가서 가이사에게 상소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로마 선교를 꿈꾸고 있던 바울이 로마 군인들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로마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상소하는 방법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습니다. 21절입니다.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지금까지의 재판상황을 베스도총독에게 전해들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말을 직접 듣고 싶어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입장에서도 유대교 안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함으로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바울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접견 장소에서 만나게 됩니다. 23절입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접견장소로 번역된 헬라어 ‘아크로아테리온’은 ‘강당’을 뜻하는 라틴어 ‘아우디토리움(auditorium)’과 동의어인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접견장소는 심문을 위하여 마련된 장소로서 재판장이 아니라 공청회나 청문회장과 같은 곳입니다. ‘아크로아테리온’에는 바울과 바울을 고소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신임총독 베스도, 아그립바 왕과 함께 가이사랴 최고의 권력자들이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베스도 총독이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이 청문회에서 바울 상소문 자료를 얻고자 한다고 고백합니다. 24~27절입니다.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베스도의 고백처럼 바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와 전임 총독 벨릭스가 바울의 죄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신임 총독 베스도도 바울의 어떤 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무죄가 확실하다면 바울이 더 이상 감옥에 갇힐 이유가 없으나, 석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여론이 상당히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상황이 바울에게는 참으로 억울한 상황이지만 이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합니다. 힘 있는 나라와 조직, 권세에 의해 바울은 패배하고 굴욕당하는 것으로만 여겨질지 모르나 바울의 무고한 나날 뒤엔 바울을 로마로 보내셔서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독대한 경험이 있는 바울은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없다고 스스로 밝혔음에도 끝까지 바울을 죄수라고 언급하는 베스도 총독은 진실을 밝히지도 못했고, 자기모순에 빠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무력한 총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명분, 바울을 죄인으로 규정하여 문서로 기록하기 위한 명분, 이 명분들이 베스도 총독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명분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베스도 총독은 복음의 핵심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설교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에 복음의 핵심을 알고 있음에도 복음 앞에 차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로마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믿음의 쓴 잔을 거부하지 않고, 사명의 거친 길도 감당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격리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명분과 융통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를 따르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