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는 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자신이 메시아로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시는지 말씀합니다.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 잘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을 생각할 때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자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2절)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4장 1-1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자신의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불의한 짓을 행한 것에 대해서 요한이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결국 요한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9-20절에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고 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원래 나바테야의 왕 아레다(Aretas) 4세의 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복형제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혼을 했습니다. 요한은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마 14장 3-4절)고 선지자적 발언을 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투옥합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사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카이루스(Machaerus) 성내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요한을 헤롯이 자신의 생일 때 처형 시킵니다.(막 6장 14-28절)
세례 요한에게 이때에도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세례 요한의 제자로 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자신들이 딱 기준을 정해 놓고, 나는 이만큼입니다, 더 이상 요구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2절에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요한에게 알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을 합니다. 3절이 그 질문 내용입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질문의 내용을 보면 당신의 약속된 메시아가 맞습니까? 자신이 선포했던 그 메시아가 맞습니까?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복음 7장 19절에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보내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때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가르쳐줍니다.
세례 요한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자신이 친히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을 했는데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존 라일 같은 분은 요한이 자신의 생이 끝나는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로, 세례자 요한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해석입니다. 세례 요한은 3장 7-12절에 “임박한 진노”에 대해서 선포를 했습니다. 타작마당을 정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진다고 선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심판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상황을 생각해도 세례자 요한을 옥에 가두는 일은 불법을 행한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고 그대로 두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그대로 갇혀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나온 질문이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주님이 메시아이심을 의심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이 얼마나 진행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는 해석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12절에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보다 크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령님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다, 심판을 행하실 분이시라고 증언을 합니다. 마태복음 3장 14절에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요. 요한복음에도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1장 29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인식
1장 30절. 그는 자신 뒤에 오시지만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창조주)으로 인식
1장 33절. 성령님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인식
1장 44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식하고 증언함
3장 30절. 예수님은 흥하고 자신을 쇠해야 한다고 함. 그는 사람들에게 주님께로 가야 한다고 함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인식한 요한이 의심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질문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하고 있는 질문은 의심을 하는 질문이 아니고 동의를 구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지요?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이처럼 동의를 구하는 질문으로 봅니다. “오실 그이(메시아)가 당신(주님)”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동의를 구하는 질문으로 봅니다. 꼭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동의를 구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 엄마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맞지? 엄마” 하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물었습니까? 요한의 질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요한은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일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주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에 대해 여러 가지를 제자들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이 충분히 듣지는 못하였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직접 주님을 만나보고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 그 계획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메시아로 소개했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의 계획이 어떻게 얼마나 진행이 되었는지 궁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인 진행이 바르게 되어가고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질문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김홍전 박사) 그래서 예수님께서 5절과 같이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대로 전하라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얘기해도 알아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세례 요한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와 주님의 사역의 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은 마태복음 3장 11-12절에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할 때 알곡과 쭉정이를 나눈 심판주로 증언을 합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사역을 행하실 때 공의의 심판을 행하실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당연히 궁금했을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자신이 선포한 대로 공의의 심판을 행하지 않고 계시는지. 헤롯 안디바와 같은 사람을 왜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이런 요한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일부 고쳐주시는 답변을 하십니다. 요한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날, 주님의 오심을 말할 때 구원과 심판을 함께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이미”와 “아직”으로 구분해 말씀해주십니다. 구원의 사역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심판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답변
예수님의 답변은 4-5절입니다. 5절에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들입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요한으로 하여금 더 명확한 확신을 갖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35장 5절과 이사야 61장 1절(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에게 안심해도 좋다고 하십니다. 많은 핍박과 비난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모든 일을 진행하고 계심을 확인 및 확신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 역사를 계속 진행시켜 나가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35장 5-6절. 이사야 61장 1절과 복음서를 비교해봅시다.
맹인의 눈이 밝아짐(사 29장 18절) - 마 9장 27-31절. 두 맹인을 치료하심
귀머거리가 열림(사 29장 18절)
못 걷는 사람이 걸음. 앉은뱅이가 걸음. 마 9장 1-8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가 일어남
나병환자가 나음. 마 8장 1-4절
죽은 자가 살아남(사 26장 19절). 마 9장 18-26절. 회당장 야이로의 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됨(사 61장 1절). 눅 4장 18-19절.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응했다고 함
이 모든 것은 메시아의 사역입니다. 맹인, 귀머거리, 못 걷는 사람, 나병, 죽음 등, 이 모든 것들이 왜 인간에게 왔습니까? 근본적으로는 “죄”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것이 메시아의 사역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처음부터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함”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를 베푸신 것은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져온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심을 계시합니다. 마태복음 9장 6절에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2절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시고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함”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은혜가 베풀어집니다.
6절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맞지 않아 실족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시각으로 자신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현실적인 상황(정치적 경제적 현실.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음)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사역을 보면 자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심을 알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실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5절에 말씀한 주님의 사역 내용을 가지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기 인식해야 합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유일하고도 참된 구원자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병 고침을 추구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고 믿고 섬기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심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가 어떤 보좌입니까? 은혜의 보좌입니다. 긍휼하심이 흘러나오고 은혜가 흘러나오는 보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보좌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말씀합니다.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죄 사함입니다. 이것이 12절에 “그의 영광의 찬송”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찬송 드려야 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 사함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그런 심각한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도로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에게 수질 검사를 의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하는 얘기가 40ppm 정도의 물이 좋은 물입니다.(전문가가 아니라 나는 잘 모름) 요즘은 하도 물이 오염이 많이 되어서 이런 물은 찾기가 어렵고 100ppm 이하만 되어도 좋다고 합니다. 보통 300ppm 정도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택의 것을 검사해 봤어요. 140ppm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 물이 얼마나 오염이 되었는지를 컵 두 개에 물을 떠놓고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깨끗해 보이는 물이었습니다. 2-3분 정도 지나니까 물 색깔이 달라지는데 푸른색을 띠는 것도 있고 녹물 색을 띠는 것도 나옵니다. 푸른색이 농약 성분이고 녹물 색이 철분이랍니다. 이것을 먹어 보라고 하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냄새도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깨끗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죄를 세밀하게 검사하실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의 색이 드러날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32편 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도다.”
무엇이 복입니까? 죄가 가려진 것이 복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가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고 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나님께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주님의 심판은 아직 행사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심판의 역사가 크게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은 열려 있는 시대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 말씀을 봅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아직은 초청이 있습니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때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2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열어 놓으시고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4절에 바울은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고난도 겪었습니다.(4-5절)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일꾼으로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열어 놓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날마다 나아가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에 대한 주님의 평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하여”(7절)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적으로 진행되어 가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일꾼이었는가? 주님으로부터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평가인데, 주님께서는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어떤 역사적인 위치의 역할을 감당했느냐를 중요하게 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7절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묻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묻습니다. 사람을 갈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쉽게 흔들려서 견고함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조도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을 보려고 간 것이냐?
8절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부드러운 옷’은 왕족이 입는 옷입니다. 화려함과 사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다고 하지요. 그 당시에 ‘옷’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어느 계층에 속한 사람이냐를 나타내었습니다. 이런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갔다면 왕궁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주의를 환기시키신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을 시키십니다. 9절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선지자를 보기 위해 광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보기 원했던 세례자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 선지자 그 이상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10-14절에 말씀합니다.
먼저 10절에 세례자 요한은 말라기 3장 1절에서 예언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0장 3-4절에도 예언하였습니다. 13-14절에도 구체적으로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을 말씀합니다. 13절에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즉 구약 전체가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합니다. 구약 전체가 예언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제 성취의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4절에 말라기에서 ‘오리라’고 한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즐겨 받으면” 즉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예언된 사람이요 왕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 11절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속의 큰 역사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런 역사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선지자들 가운데 메시아를 가장 가까이에서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오심을 알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는 직접 ‘저 분이 바로 그 분, 그 메시아다’고 알릴 수 있는 특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부여되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시대의 서막을 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다른 선지자들보다 복되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에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절)고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에서 예언된 그 분이 바로 저 분이다.’고 소개할 수 있는 귀한 복을 받았지만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메시지만 보더라도 심판의 이미지가 강했지 ‘하나님 나라의 잔치’와 같은 풍성한 복음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약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기 이전에 이 지상에서의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친히 경험했고 그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교회를 이루는 기반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단계가 있습니다. 마치 나무가 커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씨의 단계가 있으면 싹이 나는 단계가 있고 줄기의 단계가 있고 커다란 나무가 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계시는 유기적 점진적 발전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욱 완성된 계시 단계에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완성된 계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쳐준 풍성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떠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위치에서 역사의 한 가운데서 그만한 계시를 가지고도 자신의 생을 주님께 충성스럽게 드렸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더욱 주님께 신실한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 만큼 더욱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